■ 윤언이(尹彦頤)
[생졸년] : 1090(선종 7)∼1149(의종 3).
[진사시] 1114년(예종 9) 진사시 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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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중기의 문신.본관은 파평(坡平)이며, 호는 금강거사(金剛居士)이다.
문하시중을 지낸 윤관(尹瓘)의 다섯째[막내] 아들이다. 17세에 부음(父蔭)으로 벼슬에 나갔다가, 25세 되는 예종 9년(1114년)에 진사시에 제1등으로 급제하였다.
인종 때 기거랑(起居郎)이 되어 좌사간(左司諫) 정지상(鄭知常)·우정언(右正言) 권적(權適) 등과 정치의 득실을 논해 왕으로 하여금 실시하도록 하였다. 1128년(인종 6)에 예부시랑으로 송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국교 수립을 청하고 돌아왔다.
1132년에 국자사업(國子司業)으로 정항(鄭沆)·정지상 등과 경연(經筵)에 나아가 경의(經義)를 강론하고 상으로 화서대(華犀帶)를 받았다. 1133년 왕이 김부식에게 『주역(周易)』을 강론하고, 김부식에게 이를 묻고 논란하게 하였다.
『주역』에 매우 정통했던 윤언이는 정연한 논리로 반박해 김부식의 대답을 궁하게 하였다.
김부식과는 이전부터 감정이 있었다. 예종 때 아버지 윤관이 왕명으로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의 비문을 지은 일이 있었다.
그런데 문도(門徒)들이 보기에 글이 좋지 않았는지, 왕에게 말해 김부식(金富軾)을 시켜 다시 짓게 하였다. 김부식은 사양하지 않고 다시 지었고, 그 때문에 원한을 품고 있었다.
1135년 서경에서 묘청(妙淸)의 반란이 일어나자, 원수(元帥) 김부식의 막료로 출정해 서경을 함락시키는 데 많은 공을 세웠다. 그러나 정지상과 내통했다는 김부식의 보고로 양주방어사(梁州防禦使)로 좌천되었다가 뒤에 광주목사(廣州牧使)가 되었다.
이 때 왕의 은혜에 감사한다는 것과 지난날의 자신을 해명하는 글을 올렸다.
1148년(의종 2) 정당문학(政堂文學)·판형부사(判刑部事)가 되었다. 예종·인종 양조에 걸쳐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고, 특히 『주역』에 밝았다. 말년에 불교를 매우 좋아했고, 은퇴해서는 파평(坡平: 지금의 경기도 파주)에서 살았으며, 중 관승(貫乘)과 친교가 있었다.
그는 60세 되던 해에 중군 병마판사 겸 동북면행영병마판사(中軍兵馬判事兼東北面行營兵馬判事)가되어 삼군(三軍)을 조직하던 중 병으로 별세하였고 아들 3형제가 모두 과거에 급제해 그 처에게는 나라에서 상을 내려 매년 녹(祿)을 주었다. 저서로는 『역해(易解)』가 있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묘지명은한림학사(翰林學士)인김자의(金子儀)가지었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금남집(錦南集)』
「윤언이 묘지명(尹彦頤墓誌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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