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화(朴昌和) 그의 유고(遺稿)집에 대한 진실(眞實)
2015.09.13. 15:04
요즘 역사를 재조명 하고자 하는데 있어 한 가지 혼란을 일으키는 사료가 있는데 그것은 남당 박창화(朴昌和,1889~1962)의 유고 작품이다. 박창화(朴昌和)의 유고집을 연구하거나, 이를 따르는 학자들은 유고집을 진정한 역사서로 가치를 인정하고 있다.
따라서 박창화(朴昌和) 유고집이 정말로 역사서로서 가치가 있는 것인지, 아니면 개인의 주관적 역사관인지에 대해 명확한 정의를 내릴 필요성을 가진다. 박창화(朴昌和)는 충북 청원군 강외면 연제리에서 출생하여 1900년 초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그 학교에서 교관을 지냈다.
그는 그 뒤 충북 영동(永同) 소학교, 배재고보에서 교사로 근무했다.
이렇듯 일제강점기에 평범한 교사이자 재야 역사가인 박창화(朴昌和)가 1962년 사망한 후 한국 역사학계를 뒤흔드는 일대 사건이 벌어진다.
1989년 박창화(朴昌和)로부터 한학을 배웠던 김종진의 아내 김경자가 화랑세기(花郞世紀) 필사본을 언론에 공개한다. 화랑세기(花郞世紀) 필사본의 소장자인 김경자는 남편 김종진이 남긴 유품이라고 하였다.
필사본의 표지는 유실된 상태였고, 성수학명이라 쓰여 진 지금 표지는 소장자의 남편이 만든 것이라 한다. 한지에 쓰여 진 필사본은 모두 16장이며 화랑의 우두머리인 풍월주, 즉 대표화랑들의 이야기이다. 화랑의 기원은 물론 화랑의 계보. 그리고 그들의 출생과 활동등 사생활까지 구체적으로 담겨 있다.
첫 번째 대표화랑을 역임했던 위화랑에서 15번째 김유신까지, 총 15명의 화랑의 역사를 기록한 화랑의 족보인 것이다. 김경자에 의하면 “화랑세기가 어떤 책인지 알아보니 신라 때, 김대문이 쓴 것인데 없어진 것으로 더 소중하게 생각을 하고 만약 진본으로 밝혀진다면 신라사 연구에 많은 도움이 안 되겠나 싶어 공개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제목만 전하던 김대문의 화랑세기(花郞世紀)가 1300년 만에 필사본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필사본을 가장 먼저 검토한 이태길(광복회 부산지부장) 문화재 위원이 그대로 번역을 해서 언론에 공개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7년 뒤인 1995년 또 하나의 화랑세기(花郞世紀) 필사본이 나타났다.
두 번째 필사본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청주에 사는 박인규씨. 첫 번째 필사본을 만든 박창화(朴昌和)의 손자였다.
필사본은 한지에 싸여 소중하게 보관돼 있었다. 하지만 책은 많이 헐어 있었고 군데군데 떨어져 나간 곳이 많았다. 두 번째 필사본은 총 162장. 4번째 대표화랑부터 32번째까지, 총 28명의 대표화랑들의 이야기다.
전체적인 구성은 앞서 발견된 것과 큰 차이가 없다. 다만 기록된 대표화랑들의 숫자가 많고 그 내용이 훨씬 풍부하고 상세하다. 첫 번째 발견된 필사본은 두 번째 것을 발췌한 요약본으로 추정된다. 그러므로 필사한 시기도 늦다.
서문부터 15번째 대표화랑에 관한 기록이 남아있고, 뒷부분이 훼손된 상태다.
필사한 시기도 빠르고 내용이 자세해 모본으로 추정되는 두 번째 필사본은 서문과 앞부분이 없다. 대신 4번째 대표화랑부터 32번째 대표화랑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다.
따라서 앞부분이 있는 첫 번째 필사본과 뒷부분이 있는 두 번째 필사본이 합쳐져야 한권의 완전한 화랑세기(花郞世紀) 필사본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김대문이 찬했다는 화랑세기(花郞世紀)를 박창화(朴昌和)는 어떻게 필사 하게 된 것인가?
사단법인 한 배달에서 발행한 계간지 《한 배달》40호(1998년 겨울호)에 의하면 일제강점기 때 일본 궁내청 소료부(書陵部=일명 왕실도서관)에서 1933년부터 12년 동안 조선전고(朝鮮典故) 조사사무 촉탁으로 근무했던 박창화(朴昌和)가 이곳에서 일제가 한국에서 약탈해 간 「단군」관련 사서 등을 보았고 그 뒤 청주사범학교 교장이었던 최기철(崔基哲,1910년 대전生~2002년) 서울대 명예교수(담수생물학연구소장)에게 이를 '증언'했다고 한다.
최기철 박사는 1945년 청주사범학교 교장으로 재직하며 처음 박창화(朴昌和)를 만났다고 한다.
박창화(朴昌和)는 왕실문고에서 우리 상고사 관련 사서를 분류하고 내용을 파악하는 일을 직접 담당하였고, 일본 왕실문고에서 일하던 중 자전거를 타다가 둑에서 넘어져 크게 다쳐 요양 차 잠시 고향에 돌아왔다가 광복을 맞아 고향에 머물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이 원래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던 교사였으며, 나라가 어려워지자 학교에서 아이들만 가르칠 수 없다는 생각에 만주로 떠나 독립항쟁을 하다 중국 안동에서 일본관헌에게 잡히게 되었고, 거기서 독립항쟁에 대한 자신의 솔직한 신념을 밝히자 그 관헌이 박창화(朴昌和)의 뜻을 좋게 여겨 일본 왕실문고에서 일하도록 해 주었다고 한다.
박창화(朴昌和)는 왕실문고 내 소장된 사료 대부분이 조선총독부가 조선에서 수탈해간 우리 사서임을 직접 확인했고, 한국에서 수탈해간 중요한 고대사 관련 사서들은 모두 거기에 있다고 할 만큼 많은 분량이었다고 증언했다고 한다.
수탈된 사료들을 분류하고 내용을 검토하다 보니 중요한 사료들을 모두 읽을 수밖에 없었는데 사료의 대부분이 「단군(檀君)」 관련 사료였다. 소화「昭和 : 일본 히로히토(1926년~1989년) 시대의 연호」란 연호를 내각총리의 의뢰로 박창화(朴昌和)가 지어주기도 했다고 한다.
최기철(崔基哲) 교수가 박창화(朴昌和)와의 만남을 통해 수탈된 사료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으로 짐작하면 그가 화랑세기(花郞世紀) 진본을 그곳에서 보았고, 이를 필사 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박창화(朴昌和)는 최기철(崔基哲) 교수와의 만남에서 화랑세기(花郞世紀)에 관한 이야기를 왜 하지 않았던 것일까? 또한 사망 하기전 화랑세기(花郞世紀) 실체에 대해 공개하지 않은 이유가 궁금하다.
만약 박창화(朴昌和)의 화랑세기(花郞世紀) 필사본이 진본으로 판단 된다면 박창화유고(朴昌和遺稿)에 수록된 모든 것이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 필자는 이와 관련 조심스럽게 주관적인 관점에서 정의하기로 한다.
《남당 박창화 유고(南堂 朴昌和 先生遺稿)》에 수록된 그의 「직계존보(直系 尊譜)」를 보면 “남당(南堂)은 섭래(燮來)인데 또한 창화(昌和)라고 한다. 자(字)는 염조(念祖)이다. 高宗 己丑(1889년) 5월 9일에 태어났다.
己酉年(1909년) 봄에 교관(敎官)에 임명되어 사범학교(師範學校)를 나와 옥천(沃川)․ 영동(永同)․ 청주(淸州) 학교 등의 교사를 역임하였다. 배재(培材)에 들어가 중국(中國)을 돌아보고, 江戶로 나아가 운각(芸閣)에 근무한 지 20여 년 동안 강역(疆域 : 한 국가의 영토)을 연구하고 「이위이역설(李衛異域說)」 및 「평양변(平壤辨)」 등 제변(諸辨)을 주창하여 발표하였다. 라고 한다.
그가 중국을 여행하고 1924년 무렵 일본에 건너간 이유가 강역연구를 지속하기 위함 이었던 것 같다.
특히 그는 스스로 기술 하였듯이 강역(疆域) 관련 연구는 그의 학문에 있어서 가장 중심이 되는 테마였다.다
박창화(朴昌和)는 강역학의 유래를 한백겸(韓百謙, 1552년 ~ 1615년)과 안정복(安鼎福, 1712년 ~ 1791년)에서 비롯한다 하고, 안정복(安鼎福)의 논조는 은근(穏謹)하여 요동졸본설(遼東卒本說)과 왕평이역설(王平異域說)이 유명하지만 그 밖의 것은 특서할만한 것이 별로 없고, 정약용「丁若鏞,1762년(영조 38)∼1836년)」은 논조가 심히 날카로우나 재기(才氣)가 있고 근거 없는 억설(抑說)을 많이 하여서 안정복 보다도 착실(着實)하지 못한 점이 있다고 평한 바 있다.
그는 강역 문제를 야기하는 원인을 장소에 대한 오류로부터 비롯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이 오류를 수정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을 강역학의 임무라고 하였다. 박창화(朴昌和)의 강역론은 고대 우리나라 지명을 모두 한반도 밖에서 구하였다는 점을 특징으로 한다.
이러한 관점은 「이위이역설(李衛異域說)」에서 비롯한다. 「李衛異域說」이란 “이씨조선과 위만조선의 강역이 다르다는 것’으로서,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을 우리 역사의 정통에서 제외시키고 우리의 강역을 만주일원에서 구하는 것으로 요약된다.”
이세민(李世民 : 당 태종)이 우리의 강역을 중국의 강역으로 편입하기 위해 기자조선(箕子朝鮮)과 위만조선(衛滿朝鮮)을 위조한 것으로 여겼다. 특히 단군을 국조로 하여 부여(扶餘)-고구려(高句麗)-신라(新羅)․발해(渤海)-고려(高麗)-이조(李朝)으로 이어지는 정통론을 내세웠다.
이러한 관점은 17~18세기 무렵의 역사 서술 방식을 승계한 것으로서, 이민족과의 관계에서 우리 역사를 자주적으로 서술하고, 중국계 정복왕조인 위만(衛滿)과 사군이부(四郡二府)가 조선 전체를 지배한 것처럼 서술한 종래의 인식체계를 비판한 것과 흐름을 같이 한다.
따라서 박창화(朴昌和)의 이러한 논지는 조선의 개국 이후 대대적인 역사 위조가 있었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그는 우리의 모든 역사를 다시 써야 한다는 관점을 견지하였던 것이다.
박창화(朴昌和)가 일본 예각(芸閣) 곧 서릉부(書陵部=왕릉도서관) 촉탁으로 어떻게 입사한 것인지는 자세한 자료가 없다. 그리고 일본에서 그가 어떠한 활동을 했는지도 자세하지 않다.
다만 일본 근현대사가인 박환무(朴煥珷~) 숭실대 강사가 1920년 5월에 창간돼 1928년 6월에 100호를 마지막으로 폐간한 저명한 일본 역사잡지 「중앙사단(中央史壇)」에 실린 박창화의 한국사 관련 논문 3편을 발굴 공개함으로써 드러났다.
이에 따르면 박창화(朴昌和)는 「중앙사단(中央史壇)」의 제13권 제12호 통권 94호(1927년 12월)와 제14권 제2호 통권 96호(1928년 2월)에 각각 「신라사에 대하여'(新羅史について)」라는 일련의 미완성 논문을 게재했다.
박창화(朴昌和)가 일본 궁내청 도서관인 도서료(圖書寮)에 근무하기 전 이미 신라사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여지며, 1942년 귀국하기까지 상당한 연구가 진척된 것으로 판단된다. 그는 귀국해서도 활발한 역사연구를 진행하다가 1962년 자신의 연구 업적을 공인받지 못한채 사망한다.
박창화(朴昌和)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그의 작고 28년만의 일이었다.
김대문의 《화랑세기(花郞世記)》로 추정되는《화랑세기(花郞世記)》 가 박창화의 유고로서 전하고 있어, 《花郞世紀》의 진위 문제를 풀 수 있는 인물로 주목되었던 때문이다.
《화랑세기(花郞世記)》는 1989년 2월 16일자 부산 《국제신문》과 2월 17일자 《서울신문》에 처음으로 보도되었고, 그 소장자 김경자(경남 김해시 거주)씨는 화랑세기를 김종진(金鍾鎭)씨의 가정교사 朴昌和로부터 증여받은 것으로 밝혔다.
화랑세기(花郞世記)의 편찬자인 김대문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삼국사기열전》에 의하면
"김대문(金大問,?~?)은 본래 신라의 귀족가문 자제로서 성덕왕 3년(704)에 한산주 도독이 되었으며 전기 몇 권을 지었다. 그가 쓴 고승전(高僧傳),화랑세기(花郞世記),악본(樂本),한산기(漢山記)가 아직도 남아 있다." 라고 하였다.
김대문(金大問)은 서기 704년 고구려로부터 빼앗은 한산주 도독(都督 : 신라 때의 州장관/오늘날의 도지사)으로 임명된 후 화랑세기(花郞世記)를 지었다는 것이 입증되었고, 김부식(金富軾, 1075~1151)이 《삼국사기(三國史記)》를 편찬할 당시 화랑세기(花郞世記) 완본이 있었다는 것이 확실하다.
또한 《삼국유사(三國遺事)》를 찬한 일연 또한 화랑세기(花郞世記)의 존재를 모르지 않았을 것이며 《삼국유사(三國遺事)》 내용중 화랑(花郞)에 관한 사항도 김대문의 화랑세기(花郞世記)를 참고한 것으로 짐작된다.
김대문의 화랑세기(花郞世記) 존재를 알았던 김부식은 왜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에 화랑(花郞)에 대한 구체적인 활동 사항을 포함시키지 않았을까? 그것은 유교적 사상에 심취한 김부식이 정사에 포함시킬수 없는 괴이한 이야기로 치부하였기 때문이다. 김부식의 이러한 정서를 표현한 대목이 《삼국사기신라본기(三國史記 新羅本紀)》에 보인다.
서기 528년 이차돈「異次頓=居次頓, 506(지증왕 7)~528법흥왕 15)」의 순교사건
목을 베자 잘린 곳에서 피가 솟구쳤는데 그 색이 우유 빛처럼 희었다.
뭇 사람들이 괴이하게 여겨 다시는 불교를 헐뜯지 않았다. 「이는 김대문(金大問)의 계림잡전(鷄林雜傳) 기록에 의거하여 쓴 것인데, 한나마(韓奈麻) 김용행(金用行)이 지은 아도화상비(我道和尙碑)의 기록과는 자못 다르다.」
「유리이사금 조(儒理尼師今朝)」
김대문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사금(尼師今)은 방언으로 임금을 일컫는 말이다.
옛날에 남해(南解)가 장차 죽을 즈음에 아들 유리(儒理)와 사위 탈해(脫解)에게 일러 말하기를 '내가 죽은 후에 너희 박(朴), 석(昔) 두 성(姓) 가운데 나이가 많은 사람이 왕위를 이어라.'고 하였다.
그 후에 김씨 성이 또한 일어나 3성(三姓)에서 나이가 많은 사람이 서로 왕위를 이었던 까닭에 이사금이라 불렀다. 김부식(金富軾, 1075~1151)은 신라본기를 기술하면서 김대문(金大問)의 계림잡전(鷄林雜傳) 및 화랑세기(花郞世記)를 인용 할 수밖에 없었다.
정확한 사료 고증을 통해 완성된 정사라기보다는 세간에 떠도는 풍문을 모은 그야말로 잡전(雜傳)의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한 계림잡전(鷄林雜傳) 등을 인용하게 된것은 그만큼 자료 부족에 기인한 결과이다. 따라서 정사로서 공인받지 못한 김대문의 화랑세기(花郞世記)는 고려중기 이후 사라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던 것이다.
김대문의 화랑세기(花郞世記)가 종적을 감춘 이후 700여년 만에 박창화(朴昌和)의 필사본으로 나타난 것이다. 물론 고려 이후 증 판을 거쳐 남겨져 있을 가능성도 배제하지는 못하지만 문헌기록에 증.보판의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볼때 김대문의 화랑세기(花郞世記) 완본은 종적을 감춘 것으로 생각된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김대문의 화랑세기(花郞世記)가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박창화(朴昌和)의 필사본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 학계에서는 박창화(朴昌和)의 화랑세기(花郞世記) 필사본에 대해 발견 당시부터 진위에 대한 찬반양론의 논쟁이 있었다.
1995년 4월 22일 역사학회 제325회 월례연구발표회에서 이종욱 교수는 발췌본 ?화랑세기?(이하 ‘제1본’이라 함)를 신라인이 아니면 저술할 수 없는 책으로 규정한 반면, 노태돈 교수는 이른바 모본 ?화랑세기?(이하 ‘제2본’이라 함)을 새로이 확인하였음을 공식적으로 언급하고 발췌본과 모본 ?화랑세기?를 박창화(朴昌和)의 위서로서 평가하였다.
그렇다면 결국 박창화(朴昌和)의 화랑세기(花郞世記) 필사본의 내용을 분석하여 진위를 판별하는 방법 밖에 없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 조)
(서기 576년) 봄에 처음으로 원화(源花)를 받들었다. 일찍이 임금과 신하들이 인물을 알아볼 방법이 없어 걱정하다가, 무리들이 함께 모여 놀게 하고 그 행동을 살펴본 다음에 발탁해 쓰고자 하여 마침내 미녀 두 사람 즉 남모(南毛)와 준정(俊貞)을 뽑고 무리 300여 명을 모았다.
두 여인이 아름다움을 다투어 서로 질투하여, 준정이 남모를 자기 집에 유인하여 억지로 술을 권하여 취하게 되자 끌고 가 강물에 던져 죽였다. 준정이 사형에 처해지자 무리들은 화목을 잃고 흩어지고 말았다.
미모의 남자를 택하여 곱게 꾸며 화랑(花郞)이라 이름하고 그를 받드니, 무리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혹 도의(道義)로써 서로 연마하고 혹은 노래와 음악으로 서로 즐겼는데, 산과 물을 찾아 노닐고 즐기니 멀리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로 인하여 사람의 사악함과 정직함을 알게 되어, 착한 사람을 택하여 조정에 천거하였다. 그러므로 김대문(金大問)은 화랑세기(花郞世記)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어진 보필자와 충신은 이로부터 나왔고, 훌륭한 장수와 용감한 병졸은 이로부터 생겼다.』
당나라 영호징(令狐澄)의 신라국기(新羅國記)에 말하였다. “귀족의 자제 중 아름다운 이를 택하여 분을 바르고 곱게 꾸며서 이름을 화랑(花郞)이라 하였는데, 나라 사람들이 모두 그를 높이 받들어 섬겼다.”
박창화(朴昌和)의 화랑세기(花郞世記) 필사본 (이종욱 교수 번역문)
화랑은 선도이다. 우리나라에서 신궁을 받들고 하늘에 대제를 행하는 것은 마치 연의 동산, 노의 태산에서 하는 것과 같다. 옛날 연 부인이 선도를 좋아하여 미인을 많이 모아 이름 하기를 국화라 하였다.
그 풍습이 동쪽으로 흘러들어 우리나라에서도 여자로써 원화를 삼게 되었는데, 지소태후가 원화를 폐지하고 화랑을 설치하여 국인으로 하여금 받들게 하였다.
이에 앞서 법흥대왕이 위 화랑을 사랑하여 이름을 화랑이라 불렀다. 화랑이라는 이름은 여기서 비롯하였다. 옛날에 선도는 단지 신 받드는 일을 주로 하였는데, 국공들이 봉신을 베풀어 행한 후, 선도는 도의를 서로 힘썻다. 이에 어진 재상과 충성스러운 신하가 이로부터 빼어낫고 훌륭한 장군과 용감한 병졸이 이로부터 나왔다. 화랑의 역사를 알지 않으면 안 된다.
화랑(花郞)의 기원에 대해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박창화(朴昌和)의 화랑세기(花郞世記) 필사본는 원화(源花)제도에서 비롯되었음을 주장한다. 원화(源花)에 대해 필사본은 옛날 燕나라 국화풍습이 신라로 전해져 여자로써 원화(源花)를 삼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 각 나라의 거주민들은 전쟁이나 다른 사건으로 인해 다른 나라에 정착하는 일이 비일비재 하였기에 燕나라 도래설도 가능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삼국사기> 전왕조 어디에도 원화(源花)의 풍습이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진흥왕대에 이르러 나타난 것인가?
법흥왕(514-539)이 불교를 공인한 계기가 되었던 이차돈 순교사건은 <삼국유사>에는 좀더 자세히 언급되어 있는 바, 흥륜사의 창안운동은 왕과 이차돈이 함께 일으킨 것이지만 하도 군신의 반발이 강하였으므로 왕의 입장은 곤란하게 되었고 이 난관에서 벗어나고자 왕과 함께 의논한 이차돈이 모든 책임을 자기 혼자 지려고 했던 것이다.
또한 법흥왕과 이차돈이 흥륜사를 창시하려했던 장소는 아직도 고대신앙이 남아 있는 신성지역으로 삼한시대에 소도로 불리던 곳이다. 따라서 이차돈의 직접적인 순교를 가져온 계기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왕실을 중심으로 한 귀족들은 불교로 하여금 무격신앙이 차지하고 있던 종교적 지위를 차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은 법흥왕이 정치적으로 고대국가의 체제를 정비하는 과정속에서 당시 신라인들을 이상사회에 대한 이념아래 통일하기위해 불교 전통 속의 이상적 고대사회의 종교적 이념인 미륵사상을 받아들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법흥왕은 불법을 일으켜 절을 세우고 이후 임금의 자리에서 물러나 출가하였으며 왕궁의 친척을 내놓아 절의 종으로 삼는다.
이것은 인도의 아쇼카왕이 인도 통일 후 자신이 법왕임을 내세우고 이후 출가한 것과 비교할만한 얘기가 된다. 즉, 법흥왕은 아쇼카왕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전륜성왕임을 표방하고자 한 것이다. 이러한 상징을 적극적으로 이용한 것은 진흥왕 이었다.
진흥왕(539-575)은 무력에 의한 정복팽창을 통해 신장된 국력을 바탕으로 왕족의식의 강화를 촉구했다. 그 과정에서 불교의 眞種思想을 도입하여 아들의 이름을 金輪과 銅輪으로 짓고 스스로를 전륜성왕이라 자처하며 왕실의 권위를 높인다.
진흥왕이 아들 이름을 금륜과 동륜으로 지은 것은 전륜성왕사상을 드러낸 것으로, 전륜성왕에게 금륜, 은륜, 동륜, 철륜등의 아들이 있다는 신화를 현실 속에서 그대로 실현해 본 것이다. 또한 신라의 왕이 석가와 같이 刹利種에 속한다는 眞種思想도 발전하였는데, 이는 북방종교의 왕즉불 사상이 보다 구체적인 형태로 드러난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진흥왕은 화랑제를 미륵불교와 연관시켜 미륵불교를 좀더 구체적으로 실현해 보이고자 했던 것이다. 결국 진흥왕이 화랑(花郞)제를 도입한 것은 왕권강화 정책의 일환 이었다는 것이며, 김대문(金大問)의 화랑세기(花郞世記)에서 『어진 보필자와 충신은 이로부터 나왔고, 훌륭한 장수와 용감한 병졸은 이로부터 생겼다.』 라는 기록으로 화랑(花郞)제 도입 이유가 설명되어진다.
또한 《삼국유사》에 “진흥왕이 즉위하여 신선(神仙)을 많이 숭상하였다. 용모가 아름다운 민가의 낭자(娘子)를 택하여 원화로 받들고 무리를 모으고 선비를 뽑아 효제충신(孝悌忠信)을 가르치게 하였다.” 라고 하였듯이 비슷한 정서를 나타내고 있다.
그런데 화랑세기(花郞世記) 필사본의 화랑(花郞)들 모습은 사랑, 사통, 마복자 등 온통 남녀간의 상열지사 이야기뿐이다. 물론 당시 신라왕실과 귀족들의 근친혼 풍습이 있었다는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선도로서 도의를 말하고, 충효를 배우는 화랑(花郞)을 국가적으로 배출하려는 도입 취지에 어긋나는 모습들을 정말로 김대문(金大問)이 화랑세기(花郞世記)에 수록 했는지가 의심스럽다.
박창화(朴昌和)의 화랑세기(花郞世記) 필사본 (14대 호림(풍월주)
호림은 복승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송화공주로 지소태후의 딸이다. 공은 공주의 사생아이기 때문에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고 하 기도하고 혹은 비보랑의 아들이라고 하 기도 한다. 공은 용력이 많아 격검을 좋아하였는데 일찍이 문노의 문하에 들어가 소탈하고 검소하게 처신하고 골품이라 하여 높은 체 하지 않았다.
공의 적형인 마야부인이 당시 황후로서 총애를 받았으므로 용춘공이 공을 발탁하여 부제로 삼았다.
14대 풍월주 호림공의 적형을 마야부인으로 기록 하였다. 진평왕(579-631)은 석가의 아버지인 백정과 이름이 같고, 그 비는 석가의 어머니인 마야부인과 그 이름이 같다.
그리고 진평왕의 두 왕제의 伯飯과 國飯이라는 이름은 석가의 숙부의 이름과 같다. 이는 진종사상의 영향을 반영한 것으로 화랑세기(花郞世記) 필사본에 수록된 마야부인은 14대 풍월주의 적형으로 묘사하고 있다.
화랑세기(花郞世記) 필사본에서는 김흠돌(金欽突)의 난을 평정한 주인공이 김대문의 아버지인 오기공으로 수록되어 있다. (678년) 북원소경(北原小京)을 설치하고 대아찬 오기(吳起)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다. 3월에 대아찬 춘장(春長)을 중시로 삼았다. 여름 4월에 아찬 천훈(天訓)을 무진주(武珍州) 도독으로 삼았다. 5월에 북원(北原)에서 이상한 새를 바쳤는데, 깃에 무늬가 있고 다리에 털이 나 있었다.
(681년) 8월에 서불한 진복(眞福)을 상대등으로 삼았다. 8일에 소판 김흠돌(金欽突)·파진찬 흥원(興元)·대아찬 진공(眞功) 등이 반란을 꾀하다가 죽임을 당하였다.
(683년) 봄 2월에 순지(順知)를 중시로 삼았다. 일길찬 김흠운(金欽運)의 작은 딸을 맞아들여 부인으로 삼았다. 먼저 이찬 문영(文穎)과 파진찬 삼광(三光)을 보내 기일을 정하고, 대아찬 지상(智常)을 보내 납채(納采)하게 하였는데, 예물로 보내는 비단이 15수레이고 쌀, 술, 기름, 꿀, 간장, 된장, 포, 젓갈이 135수레였으며, 조(租)가 150수레였다.
여름 4월에 평지에 눈이 한 자나 내렸다. 5월 7일에 이찬 문영(文穎)과 개원(愷元)을 그 집에 보내 책봉하여 부인(夫人)으로 삼았다. 그날 묘시(卯時)에 파진찬 대상(大常), 손문(孫文), 아찬 좌야(坐耶), 길숙(吉叔) 등을 보내 각각 그들의 아내와 양부(梁部) 및 사량부(沙梁部) 두 부의 여자 각 30명과 함께 부인을 맞아오게 하였다.
부인이 탄 수레의 좌우에 시종하는 관원들과 부녀자들이 매우 많았는데, 왕궁의 북문에 이르러 수레에서 내려 대궐로 들어갔다.
<삼국사기>
화랑세기(花郞世記) 필사본에서는 김흠돌(金欽突)의 난을 평정한 주인공이 김대문(金大問)의 아버지인 오기공으로 수록되어 있다. <삼국사기> 기록에 대아찬 오기(吳起)가 보이는데, 이 사람을 만약 김대문(金大問)의 아버지인 오기공으로 추정해 본다면 김흠돌(金欽突)의 난이 발생하기 3년 전에 고구려 인접지역인 북원소경(北原小京)에 배치되었다.
이후 오기(吳起)의 행보는 보이질 않는다. 서기 681년 김흠돌(金欽突)의 반란을 진압한 신문왕은 왕비인 흠돌의 딸을 쫒아내고 서기 655년 전장에서 죽은 김흠운(金欽運)의 작은딸을 왕비로 맞이한다. 이상한 것은 역적인 김흠돌(金欽突)의 형제로 보이는 김흠운(金欽運)의 딸을 왕비로 맞이한다.
이는 왕족간의 반란으로 규정하여 사건을 확대시키지 않은 것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김대문(金大問)의 아버지로 추정되는 오기(吳起)가 반란을 주도적으로 진압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또한 반란 이후 진압군에 대한 어떠한 포상도 없었던 것과 오기(吳起)에 대한 행보 기록이 없는 것으로 판단하면 김대문(金大問)의 아버지로 볼 수가 없다.
김대문(金大問) 열전에도 보이질 않는다. 참고로 <삼국유사>에는 진지왕의 왕비인 지도부인이 기오공의 딸로 수록 되어 있다. 한국학 연구자 맥브라이드 리처드(38)는 “박창화(朴昌和)의 화랑세기(花郞世記) 필사본이 근대 한문학사상 중요한 위상을 누릴 수 있는 창작물이나 역사적 사실을 담은 사서는 아니다”라고 주장 하였다.
그는 필사본 저자인 박창화가 일제시대 일본 왕실도서관에서 일하며 김대문의 <화랑세기>원문을 발견하고 필사본을 썼다면, 해방 이후까지 왜 발표를 하지 않았느냐”며 “기존 논문 중 어느 것도 이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또한 원본이 있다는 일본 지역 학자들도 논쟁에 명확한 의견을 내지않고 관망만 해왔다는 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는 설명이다. 맥브라이드는 필사본을 일제시대 쓴 미완의 한문소설로 보는 결정적 증거로 시대착오적 단어들을 꼽았다. 화랑의 우두머리 풍월주와 화랑 집단 및 귀족층의 권력 계보를 표기한 풍월정통(風月正統), 진골정통(眞骨正統) 등의 용어들이 그것이다.
풍월주의 경우 고려, 조선시대 기존 문헌들을 뒤진 결과 15세기 조선 성종 때 서거정과 노사신이 편집한 <동국여지승람> 등의 문헌에서 이 단어가 처음 나온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1445~81년에 편집한 <동국여지승람>의 경주풍속조에 “법흥왕 원년(514)에 뛰어난 외모에 행실 올바른 남자들을 선택해 풍월주라고 했다”고 나오는 구절 등이 그런 예다.
이 용어는 비슷한 시기 출간된 <삼국사절요> <동국통감>에 이어 후대인 18세기에 화랑의 기원을 다룬 실학자 이익의 <성호사설>, 안정복의 <동사강목> 등에 연속해 나타난다. 이런 조선시대 문헌들이 필사본 저자인 박창화가 풍월주 개념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저자가 필사본에서 조선시대 문헌의 문맥처럼 풍월주란 말을 쓰고 있다는 것이다.
동국대 겸임교수인 박남수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에 의하면 박창화(朴昌和) 자신이 그의 「李衛異域說」에서 ?화랑세기?를 본 적이 없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고 하였다.
“우리나라 歷史는 三國史記 高麗史 李朝實錄이다. 三國史記 이전은 若干의 傳說뿐이다. 新羅의 蘿井 仙都聖母 脫解의 鵲 閼智의 鷄것과 高句麗의 檀君 柳花 金蛙等의 傳說과 百濟의 召西奴 같은 것이다. 이 傳記을 記한 古記가 今에는 하나도 남어있지 않이 함으로 三國遺事 같은 虛荒한記錄이라도 唯一한史料로 參酌하는 것이나 이것도 또한 改竄된 痕迹이 있다.”
위의 ?李衛異域說?은 南堂의 ?疆域槪論?에 포함된 내용이다. 이는 純漢文으로 草하였던 것을 광복 이후 어느 때인가 抄出한 것으로서 200자 갱지 원고에 쓰여 있는데, 동일한 용지에 국한문으로 抄한 「遼東論」에는 “오늘날 다시 三八線을 作하니 이와 가치 하다가 우리民族은 將且 어대로 가려하느냐”라는 문구가 있다.
이로 볼 때에 「李衛異域說」의 국한문 초본은 광복 이후에 쓰인 것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가 초한 고구려, 백제, 신라 왕기에 대한 저작은 秘傳의 史書를 보고 정리 하였다기보다는 근세의 불확실한 중국측 자료와 민간 전설, 그리고 그의 역사적 사실의 추론에 의한 것임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박창화(朴昌和)의 손자 박인규 선생이 1962년에 작성한 목록에는 86권의 책이 있다. 이는 1958년 남당이 괴산에서 청원군 오창면 박인규 선생 댁으로 거처를 옮길 때 가지고 갔던 책들과 청원에서 새로이 저술한 책을 목록으로 작성한 것이다. 괴산을 떠날 때 박창화(朴昌和)는 그가 저술한 책을 모두 가지고 갔다.
박창화(朴昌和) 자신이 저술하지 않은 책들은 괴산에 남겨둔 몇 권의 책이 있다. 그 중 '다이쇼(大正) 11년(1922) 1월 교토제국대학 문학부 기증'이라는 표시가 있는 '삼국유사'는 박창화(朴昌和)가 일본에서 가지고 온 책이 분명하다.
따라서 괴산에 남겨 두었던 '삼국유사'와 '화랑세기'는 1945년 이전 박창화(朴昌和)가 일본에서 가지고 온 책들이고, 박창화(朴昌和)가 괴산에서 박인규 선생댁으로 가지고 간 책들은 1945년 이후 자신이 저술한 책들로 보여진다.
박창화(朴昌和)가 저술한 다른 책들의 성격도 진위를 판별하는 논거가 될 수 있다. 그가 지은 것 중 '도홍기', '홍수동기', '어울우동기' 같은 것은 성(性)을 모티브한 것이다. 또한 그가 남긴 유고에 '유기추모경'이 있다. 유기는 고구려 초기에 편찬된 사서의 이름이고 추모는 주몽의 다른 표기이다.
박창화(朴昌和) 자신이 썼으면서도 고려 시대의 인물인 황주량이 왕명을 받아 쓴 것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유기추모경”과 동일한 내용을 담고 있는 박창화(朴昌和)의 다른 유고인 '추모경'은 한지에 쓰여 있고 황주량에 대한 기록이 없다. 이는 위서를 만들려 시도한 것이다.
박창화(朴昌和)의 필사본을 검토한 임창순 문화재위원장, 이기백 한림대 교수, 이기동 동국대 교수 등 고대사 권위자들은 한결같이 위작 가능성을 제기했다. 발견 당시 필사본을 검토한 정중환씨도 “왕족과 귀족들의 난혼과 성행위가 일본의 난혼과 흡사해 의혹이 있다”고 하였다.
결론적으로 박창화(朴昌和)는 강역 론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사실로 보아, 17~18세기 유학자들의 역사서술방식을 계승하여 부여정통론의 관점에서 단군-부여-고구려-신라․발해-고려-이조로 이어지는 정통론을 세우고자 하였고, 나아가 우리나라 고대의 강역을 모두 만주 일원에서 구하고자 하였다.
박창화(朴昌和)가 화랑세기(花郞世記)에서 화랑의 원류인 仙徒가 燕나라로부터 파생 되었다고 한 것도 이러한 관점에서 비롯한 것으로 여겨진다. 화랑을 도가적으로 서술한 것은 그의 유고에 보이는 도가서인 魏華眞經? 등과 관련될 것이다.
또한 화랑의 무가적인 속성이나 동성애적 표현, 문란한 통정관계 등은 조선 후기 화랑을 무속적인 것으로 본 사회 일반의 습속과 일본 관학자들의 관점과도 많이 닮아 있다.
다양한 그의 저작과 유고에도 불구하고 당시 학계의 주목을 받지 못했던 것은, 그가 전거로서 제시한 서책이 中國地名辭書를 비롯하여 元一統志?, ?東輿圖? 등 근세의 것으로서, 엄정한 사료비판을 간과하고 이들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였으며, 고지명의 비정에 있어서 언어학적 체계보다는 근거 없는 음운으로써 자의적으로 풀이한 데 있다고 할 것이다.
특히 그는 우리나라 고대의 강역이 한반도 안으로 위축된 것이 이세민과 주원장에 의해 비롯되었으며, 조선 초기 중국의 책봉을 원하던 이성계에 의해 조장된 것이라는 관점을 보였다.
박창화(朴昌和)는 새로운 내용을 서술하면서도 어떠한 전거나 논증을 제시하지 않음으로써 그의 유고에 대한 신빙성을 의심케 하였다. 그러나 박창화(朴昌和)의 화랑세기(花郞世記) 및 그 외 유고작품이 일종의 faction으로 평가된다고 하더라도 그의 주장한 강역론은 역사학도들이 참고할 만한 논거로 재평가 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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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당유고의 저본이 일본에 원본이 있는지가 우리나라의 고기인지를 판별하는 근거로 사용할 수 없는 한계가 있습니다.
만약 일본에 저본이 있다고 한들 우리에게서 가져간 증거를 찾아야 하는데 그 작업이 쉽지 않습니다.
즉 임진조일전쟁(1592) 이전에 우리나라에 남당유고의 저본이 있었다는 증거를 찾아야 하는데 대동운부군옥(권문해 저)에 의하면 신라수이전(최치원 저)을 참조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그 저본이 지금 남아있지 않습니다. 여러가지 방법으로 물증을 찾으려고 하지만 쉽지가 않습니다.
지금까지 고려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傳미추왕릉의 발굴인데, 지금까지 내물왕 이전에 전칭왕릉 중에서 그 위치가 가장 확실하다 할 것입니다. 남북국시대(신라, 발해)와 고려시대에까지 그 제사가 이어져 왔다는 사실이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잘 남아 있습니다.
물론 미추왕릉 발굴을 위해서는 현실적인 문제가 아직은 산재해 있습니다. 문화재를 발굴하여 보존하는 것은 학계에서는 현재 묻혀있는 것만 못하다는 주장이 있고, 경주지역에 미추왕릉을 발굴하여 보존할 수장고가 없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신라의 상고사 400년의 역사가 묻혀져 있는데, 미추왕릉을 발굴하지 않고서는 그 실마리를 풀 수 없으니 학술발굴을 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만약 고고학계에서 주장하는데로 4세기 중후반에 조성된 무덤이라면 남당유고의 내용은 진짜일 것이고, 삼국사기의 기록대로 3세기 후반이 맞다면 남당유고는 말그대로 위서가 된다. 남당유고가 비록 일본의 모본을 전제로 하였을 경우도 마찬가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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