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신라사(新羅史)

나릉진안설(羅陵眞贋說 - 경주의 왕릉은 진짜일까?

야촌(1) 2019. 2. 24. 07:20

나릉진안설(羅陵眞贋說/경주의 왕릉은 진짜일까?)

 

신라(新羅)는 천년의 왕국이었으며, 공식적인 임금의 숫자만 하더라도 56명에 달한다

기이한 것은 그 수많은 임금의 사후에 존재하여야 할 무덤들은 이 땅에서 거의 확인된 바 없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금의 경주에 이들의 무덤들이 존재한다고 믿지만, 그 하나하나를 살펴보면 대부분의 고분들

이 추정된 왕릉들일 뿐이다.

 

No  위치 근거 판단
1 혁거세 오릉 담암사 담암사(曇巖寺)의 위치가 추정된 것이니 이를 기준으로 왕릉을 특정 지을 수 없으며, 또한 매장자에 대한 정리도 되어있지 않음.
2 남해 오릉 담암사 상동
3 유리 오릉 담암사 상동
4 탈해 동천동 양정 [양정]의 위치가 확인되지 않았으니, 이를 기준으로 왕릉을 특정 지을 수 없으며, 현재의 능은 20세기 초에 석씨 일족이 비정한 것이라 함.
5 파사 오릉 담암사 혁거세의 경우와 같음
6 지마 배동 X 17세기 말부터 경주박씨의 족보 간행사업을 거쳐 이곳으로 비정된 것이라고 함.
7 일성 탑동 X 1370(영조 6)에 박씨 일족이 비정한 것이라 함.
8 아달라 배리삼릉 X 17세기 말부터 경주박씨의 족보 간행사업을 거쳐 이곳으로 비정된 것이라고 함. 신덕왕릉 발굴결과에 따라 신덕왕릉과 아달라왕릉이 잘못된 비정이라는 주장이 등장하기도 하였다.
9 벌휴 소재불명    
10 내해 소재불명    
11 조분 소재불명    
12 첨해 소재불명    
13 미추 대릉 흥륜사 흥륜사의 터는 추정된 것임
14 유례 소재불명    
15 기림 소재불명    
16 흘해 소재불명    
17 내물 교동   내물왕릉은 추정된 왕릉이며, [삼국유사]에서 점성대(占星臺) 서남쪽이라 하였으나, [삼국사기]에는 그 위치에 대한 언급이 없다. 밑지름 2.2m, 높이 5.3m의 규모는 왕릉에 걸맞지 않고, 황남대총(98호분)을 내물왕릉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18 실성 소재불명    
19 눌지 소재불명    
20 자비 소재불명    
21 소지 소재불명    
22 지증 소재불명    
23 법흥왕 충효동 애공사 영조 6년(1730)에 김씨 일족이 지정한 것이며, 기준이 되는 애공사(哀公寺)도추정된 절터이다.
24 진흥왕 서악동 애공사 상동
25 진지왕 서악동 영경사 영경사(永敬寺)는 추정된 절터임
26 진평왕 보문동 한지 한지(漢只)는 추정된 장소임
27 선덕여왕 보문동 낭산 낭산(狼山)은 [삼국사기]에서도 알 수없는 장소(三國有名未詳地分)라 하였으니, 지금의 경주 낭산으로 볼 수 없음.
28 진덕여왕 현곡면 사량부 사량부(沙梁部) 위치도 확실치 않으며, 현재의 능은 조선 영조 6년(1730) 김씨 일족에 의해 비정된 것이라 한다.
29 태종 서악동 능비 “태종무열왕지비(太宗武烈王之碑)”라는 비문이 무덤 주인을 가리킨다고 하지만, 발굴을 통한 유물로서 증명되는 것은 없으며, 또한 [삼국사기]에서 영경사 북쪽에 묻었다고 하는데, 영경사(永敬寺)는 추정된 절터일 뿐이니 무열왕릉으로 단정 지을 수는 없다.
30 문무왕 양북면 대왕석 2001년 KBS 조사결과, 대왕암 내부 또는 아래에서 유골이나 부장품을 찾지 못하였다. 또한 “葬東海中大石上”의 [동해]는 바다가 아니라 [동해]라는 지명을 가리키는 것이다.
31 신문왕 배반동 낭산 낭산(狼山)은 [삼국사기]에서도 알 수없는 장소(三國有名未詳地分)라 하였으니, 지금의 경주 낭산으로 볼 수 없으며, 현재의 기준으로도 낭산의 남쪽에 능이 위치하는 바, 이는 낭산의 동쪽에 묻혔다는 [삼국사기]의 기록과도 맞지 않는다.
32 효소왕 조양동 망덕사 1730년(영조 6), 김씨 일족이 성덕왕릉의 형제 능이라 하여 효소왕릉을 이곳으로 비정하였다 하며, [삼국사기]는 망덕사의 동쪽에 효소왕이 묻혔다고 하나, 현재 망덕사지는 동쪽이 아니라 동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망덕사(望德寺)의 위치 또한 확실치 않다.
33 성덕왕 조양동 이거사 이거사(移車寺)는 추정된 절터
34 효성왕 소재불명    
35 경덕왕 내남면 모지사 1730년(영조 6), 김씨 일족이 경덕왕릉을 이곳으로 비정한 것이라 하며, 또한 모지사(毛祇寺)의 위치도 확인되지 않은 장소임.
36 혜공왕 소재불명    
37 선덕왕 소재불명    
38 원성왕 외동읍 봉덕사 봉덕사의 위치확인 불가
39 소성왕 소재불명    
40 애장왕 소재불명    
41 헌덕왕 동천동 천림사 천림사(泉林寺)의 위치확인 불가
42 흥덕왕 안강읍 비석 비석파편 만으로는 판단 불가
43 희강왕 내남면 소산 소산의 위치는 확인불가
44 민애왕 내남면 골호 주변에서 발견된 뼈단지(骨壺) 뚜껑의 “元和十年”은 815년을 가리키는 것이니, 839년에 죽은 민애왕릉이 될 수 없다.
45 신무왕 동방동 제형산 1730년(영조 6), 김씨 일족이 신무왕릉을 이곳으로 비정한 것이라 한다.
46 문성왕 서악동 공작지 공작지(孔雀趾)의 위치확인은 불가하며, 1730년경에 이곳으로 비정된 것이라고 함.
47 헌안왕 서악동 공작지 상동
48 경문왕 소재불명    
49 헌강왕 남산동 보리사 1993년 조사결과 석실구조와 출토된 토기는 8세기 이후로는 내려오지 않는 형식이기에 헌강왕의 재위기간 9세기와는 차이가 있다. 조선 영조 6년(1730), 경주김씨 일족이 헌강왕릉으로 비정한 것이라고 함.
50 정강왕 남산동 보리사 조선 영조 6년(1730), 경주김씨 일족이 정강왕릉으로 비정한 것이라고 함.
51 진성왕 소재불명    
52 효공왕 배반동 사자사 사자사(獅子寺)의 터가 추정된 것이고, 그 추정된 사자사를 기준으로 효공왕릉을 비정한 것으로 비논리적인 방법으로 정해진 것임. 조선 영조 6년(1730), 김씨 일족이 효공왕릉으로 비정한 것이라고 함.
53 신덕왕 배리삼릉 죽성 죽성(竹城)의 위치는 확인되지 않으며, 1730년 박씨 일족이 비정한 능묘로서 능표석은 1871년에 세워진 것이다.
54 경명왕 배리삼릉 황복사 황복사(黃福寺)의 위치는추정된 것이며, 1730년 박씨 일족이 비정한 능묘라고 함.
55 경애왕 배동 해목령 해목령(蟹目嶺)과 경애왕릉은 떨어져있으므로 판단불가하며, 1730년 박씨 일족이 비정한 능묘라고 함.
56 경순왕 연천군 묘비 “新羅敬順王之陵”라는 묘비가 존재하지만, 이는 조선후기 양식이라 하며, 경순왕릉임을 증명할 흔적은 없다.

 

위에서 확인되는 바와 같이 현존하는 대부분의 신라 왕릉은 추정된 것에 불과 합니다.

그나마 태종 무열왕 지 비(太宗武烈王之碑)”라는 명문이 존재하는 무열왕릉이 실재하는 신라 왕릉일 수도 있으

, 그 위치의 기준이 되는 영경사(永敬寺)는 추정된 장소일 뿐이고, 비문 역시 그 제작연도의 확인이 필요 합니다.

 

정리하자면, 현재까지 한반도에서 확신할 수 있는 신라 왕릉은 없다는 것이고, 신라는 중국대륙의 동쪽에서 시작되

어 그 어느 시점에 그 후손들이 대거 한반도로 이동하였다는 것입니다.

 

출처 : 역사퍼즐 l 여산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