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적]화랑세기 필사본본의 미스터리 ②
화랑세기 필사본에 등장하는 향가와 화랑들의 자유분방한 남녀관계에 대한 기록은 진위논쟁에 핵심이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필사본의 정체는 쉽게 드러나지 않고 있습니다.
모본인 첫 번째 화랑세기 필사본.
이 책의 매듭 부분을 보면, 일반적으로 우리나라 고서들은 대개 매듭이 5개라고 하는데, 이 책의 매듭은 네 갭니다. 이처럼 매듭이 네 개인 것은 일본에서 흔히 사용된다고 합니다.
화랑세기가 필사된 종이 또한 한지가 아닙니다.
빨간색으로 금이 그어진 이런 인쇄용지는 1930, 40년대 일본 정부에서 사용했던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왜 하필 화랑세기를 베낀 책이 일본식 장정에다 일본식 종이에 쓰여진 걸까요?
이것이 진위를 밝힐 수 있는 어떤 단서는 아닐까요?
우선 이 책을 필사한 박창화에 대해서 알아야 하는데요.
박 창화는 1889년 충남 청원에서 태어났습니다. 한학과 역사에도 밝았고 한때 교사를 역임하기도 했는데요.
그 당시로선 상당한 인텔리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박 창화는 어떻게 이 책을 필사할 수 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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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화의 고향인 충북 청원군.
그는 1889년 이곳 박 씨 집성촌의 한 유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한학을 익힌 그는 유달리 똑똑했다고 한다.
이곳 사람들은 아직도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
박창화는 1902년부터 16년까지 자신이 겪은 일들을 이력서 형식으로 남겨 놓았다.
여기에 따르면 그는 1900년에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했다.
소설가 김팔봉의 회고에 따르면 그 후 박 씨는 영동 소학교의 교사를 역임했는데 조선어, 일본어, 체조를 가르쳤다. 배재고보, 청주사범학교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임량재(청주사범학교 박창화 제자, 前 중앙대 교수)
화랑에 대해서 계곡에 다니면서 수련하고 그 시작도 얘길 했다.
화랑제도가 쇠퇴하는 과정도 말했다.
그때 저희들은 바람둥이들처럼 생각하던 때인데 그 선생님을 통해 화랑의 원 본질은 고귀한 것이라는 걸 배웠다. 해방 후 청주사범학교에서 함께 근무했다는 최기철 선생도 만날 수 있었다.
당시 최기철 선생은 36살의 교장이었고 박창화는 역사를 가르쳤다고 한다.
최기철 선생은 주목할 만한 얘기를 들었다고 한다.
최 기철 박사(현 90세,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중국을 갔는데 국경 넘어서 안동이라는 곳에 갔데요.
그런데 일본 관헌한테 붙잡혔다. 독립운동을 한다면 야단이 나는데 정중히 모시더래요.
소원이 뭡니까 그러니 역사공부라고 그러면 좋은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역사공부를 할 수 있는 장소를 안내할 테니 오십시오. 해서 간 곳이 왕실도서관이라고 해요.
박 창화와 일본 왕실도서관은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구체적인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충북교육청을 찾았다.
1950년 퇴임자 이력서 철.
1950년 퇴임 자 명단에 박창화의 이름이 있었다.
최종적으로 괴산 국립여중고에서 단기 4283년 의원면직했는데, 서기로는 1950년이다.
그런데, 여기서도 박창화가 왕실 도서관의 사서로 근무했다는 기록이 있었다.
박창화가 1933년부터 12년 동안 일본 궁내성 즉, 왕실도서관에 있었다는 것이 확인된 것이다.
일본 왕실도서관에서 박 창화의 이력과 김대문의 화랑세기를 찾아보기로 했다.
그러나 왕실도서관측에서는 박 창화에 대한 기록은 보여줄 수 없다고 했다.
겨우 볼 수 있었던 것은 조선 서적 목록이었다.
우선 목록에서 김대문의 화랑세기가 있는지 확인해 보았다.
하지만 화랑세기나 화랑에 관련된 책은 찾을 수 없었다.
왕실도서관에서 박창화의 근무 사실을 확인할 수 없었던 취재팀은 일본 국립 국회도서관에서 1930년대에서 40년대 사이에 일본 궁내성에서 근무한 직원의 명단을 발견했다. 그중 1935년 직원 명부. 박 창화의 이름이 보인다.
왕실도서관에서 조선의 고서적들을 다루는 일을 했던 박창화는 당시 촉탁 즉, 특별 계약직으로 월수입은 85엔이었다. 1941년도 직원 명부에선 박창화가 소원 창화(小原昌和)로 창씨개명을 했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었다.
10여 년간 일본 왕실도서관에서 근무했던 남당 박창화는 해방 직전 귀국했다. 해방 후 그는 정부 관계자에게 왕실도서관에 중요한 책이 있는 곳을 알고 있으니 자신이 직접 찾아오겠다는 말을 자주 했다.
하지만 번 번히 무시되거나 정부에서 알아서 갈 테니 목록을 적어 보내라는 답변만 들었을 뿐이었다.
박창화를 가정교사로 모셨던 제자 김준웅 씨는 그때 상황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김준웅
왕실도서관이 아무나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22년 동안 여러 제약을 받으면서 있었는데 그것은 한국에서 훔처간 것인데 자기네 나름대로 책을 잘랐다. 그런 식으로 자기들 책이라고 하고 있는데, 아 리 켜 주겠느냐. 자기는 거기 근무하면서 어느 구석 몇 층에 뭐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간다고 주겠느냐.
일본 왕실도서관엔 천황의 족보는 물론 수많은 고서적들이 보관돼 있다.
일본이 가져간 조선의 중요한 고서적들도 이곳에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김대문의 화랑세기도 미공개 도서로 이곳에 있을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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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로선 김대문이 쓴 화랑세기가 실제로 존재하는지, 그리고 그 책이 왕실도서관 미공개 도서 중에 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박창화가 왕실도서관 사서였다는 것은 필사본의 진위를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왜냐하면 그동안 일본이 빼앗아간 조선의 많은 고서적들이 왕실도서관에 남아 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화랑세기가 왕실도서관에 공개되지 않은 서적으로 보관돼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왕실도서관에서 조선의 고서적들을 연구했던 박 창화는 한학은 물론 역사학에도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소장했던 책들도 많고, 직접 저술한 책들도 상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박 창화의 소장 책과 그의 저서들이 화랑세기 필사본의 진위를 밝혀줄 또 다른 단서가 될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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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화의 소장도서와 저서들은 그의 손자가 가지고 있다.
우선 책의 내용을 하나하나 확인해 보기로 했다.
박 창화가 직접 쓴 한문소설들이 눈에 띄었다. 어우동기, 홍수 동기, 도홍기 등 모두 남녀의 성을 주제로 한 것이었다. 역사학자인 그가 이런 소설을 썼다는 것이 의외였다.
박창화의 소설 창작 능력은 그의 제자 김팔봉이 쓴 신문 칼럼에서도 찾을 수 있다.
1910년대 박창화는 학생들에게 막 동이라는 역경을 이기고 사는 한 소년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런데 3년 동안 계속해도 끝나지 않았다고 한다.
노태돈
조사한 바에 의하면 대단한 독서를 했고 저작을 남겼다.
그의 제자였던 소설가 김팔봉이 남긴 기록에 의하면, 1910년대 이미 한글소설 막동 이전을 4권이나 썼고, 남아 있는 유작들도 운문 투의 시들이 남아있다. 여타 저술도 비록 방향은 잘못됐지만, 대단히 노력하고 상당한 문 필력과 창작력을 지닌 것으로 파악된다.
박 창화는 역사에도 관심이 많았다. 특히 강역 고, 영토연구에 애정을 쏟았다.
고려 때까지 만주가 우리나라 영토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자필이력서에도 강역 연구를 20년 동안이나 했다고 나온다.
소장도서들의 대부분은 고구려에 관한 것이었다. 여기에 어떤 단서가 있는 것일까?
전문가와 함께 분석해 보았다. 그중 한 책(고구려 사략)엔 광개토대왕을 영락 대제라고 표현해 놓았다.
그런데 또 다른 책인 왕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용어 사용에 일관성이 없어 보인다.
따라서 각각 다른 책을 보고 그대로 베꼈을 가능성이 높다.
김용만(고구려 발견 저자)
고구려 책들을 여러 개 보고 쓴 게 보인다.
일치하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은 의도적으로 편집하기보다는 단지 자신이 본 것을 필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소장도서 중에 주목되는 문서가 있다.
만력(임진왜란) 이전 고간 본 사료. 일본정부에서 사용하던 용지에 초서로 흘려 쓴 것이었다.
어떤 내용이 담겨 있는 것일까? 전문가를 만나 확인해 봤다.
임진왜란 전에 일본이 가져간 조선의 책을 기록한 목록이었다.
대부분이 국내에 있는 책들이었다. 화랑세기나 화랑에 관련된 것들도 찾아봤지만 특별한 것은 없었다.
허호구 전문위원(단국대 동양학연구소)
이전에 일본에서 우리나라에서 가져간 책 목록 같다. 보니까 유가의 경전도 있고 문학가들의 소사, 대부분이 유가경전 불경도 있는데, 화랑세기에 관한 서적은 보이지 않는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이 화랑세기에 나오는 인물들을 정리해 놓은 계보도. 역시 일본 정부에서 사용하던 종이에 쓰여진 것으로 박 창화가 왕실도서관에 근무할 당시 만든 것이었다. 위작하기 위해 만든 자료가 아닐까?
이종욱
화랑세기의 400여 명의 인명이 모두 들어있는 것도 아니고, 예를 들어 20세 예원의 경우 그 아버지는 12세 보리 공이다. 그런데 보리 공의 형인 원광의 아들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니까 계보도만을 가지고는 화랑세기를 위작할 수 없는 것이 분명하다.
소장도서 중에 가장 유력한 단서였던 계보도. 하지만 그 또한 필사본의 정체를 밝혀주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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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왕실도서관도 확인하고 박창화와 그 주변까지 추적해 봤지만 필사본의 정체를 밝혀 줄 확실한 단서들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진위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은 없는 걸까요?
필사본의 출처를 확인해도 진위가 밝혀지지 않는다면, 남은 것은 책의 내용을 하나씩 분석하는 길입니다.
돌이나 비석에 새긴 글자들을 금석문이라고 합니다. 현재로선 필사본의 내용을 금석문과 비교하는 것이 가장 객관적입니다.
왜냐하면 금석문은 다른 사서들과는 달리 당시 사람들이 직접 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화랑세기 필사본에만 나오는 인물들이 금석문에서 나타난다면 그것은 이 책이 김대문의 화랑세기를 그대로 베낀 진서라는 중요한 증거가 됩니다.
울주 천전리 암각화
여기엔 수많은 글자들이 새겨져 있습니다. 법흥왕 때 쓰인 것을 보면, '지몰시 혜 비'라는 글자가 나옵니다. 법흥왕의 동생 입종의 부인을 말합니다. 그리고 '애자 사기'. 스스로 사랑하고 스스로 생각한다입니다. 전체를 풀이하면 부인이 남편 입종이 먼저 죽어 그를 그리워한다는 내용입니다.
여기에 보면 법흥왕보다 동생 입 종이 먼저 죽었다는 것 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법흥왕이 살아있을 때 기록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내용은 지금까지 이곳 외엔 어느 문헌에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화랑세기 필사본에 비슷한 기록이 있습니다.
5대 대표 화랑을 역임했던 사다함 전인데요. 여기에 '법 흥붕이 입종 역 훙'. 법흥왕도 죽었고 그의 동생 입 종도 역시 죽었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법흥왕보다 동생 입종이 먼저 죽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천전 리 금석문과 일치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필사본이 진본이라고 단정할 순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천전 리 암각화를 좀 더 추적해 보기로 했습니다. 이곳은 화랑들의 이야기가 가장 풍부하게 기록돼 있는 곳이고 아직 해독되지 않은 글자도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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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발견된 울 주 천전 리 암각화는 신라사의 비밀을 간직한 곳이다.
우선 이곳에 기록된 화랑의 이름이 화랑세기 필사본에 나오는지 확인해 보았다.
영랑이라는 화랑의 이름이 보였다. 그러나 화랑세기 필사본에는 없었다.
충 양 량이라는 이름도 있었다. 하지만 필사본엔 나타나지 않는 것이었다.
화랑들의 이름은 곳곳에서 발견됐다. 문첨 랑. 이 또한 화랑세기엔 없었다.
그런데 화랑세기 필사본에 있는 화랑의 이름과 비슷한 것이 발견됐다.
필사본에 무관 랑이라는 화랑이 나온다. 그러나 동일 인물로 단정할 수 없다.
천전 리 암각화엔 성강 랑, 정광 랑, 성림 랑, 천랑 등 수많은 화랑들의 이름이 기록돼 있다.
하지만 화랑세기 필사본과 일치하는 것은 발견되지 않았다.
박 홍국 박사(포항공대 강사)
몇 명정도? 글씨는 아주 큰 것부터 작은 것까지 있는데 탁본하지 않고 10명 정도 찾을 수 있다.
그중에서 화랑세기와 비교해서 일치하는 것은? 애는 많이 썼는데 현재로선 동일인물을 찾아보지 못했다.
화랑세기 필사본에는 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금석문에서는 전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권덕영 교수(부산외대 사학과)
필사본 화랑세기에만 보이는 백수십 명의 인물 가운데, 단 한 명도 금석문에서 확인되지 않는다. 필사본 화랑세기가 진본임을 입증받기 위해서는 이 책에서만 나오는 인물이 적어도 한 두 명 정도는 확인돼야 하는데, 전혀 확인되지 않고 있다는 것은, 이들이 모두 가공의 인물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의심이 된다.
그러나, 화랑세기 필사본과 그 내용이 일치하는 금석문은 나타나고 있다.
지난 89년 4월, 포항에서 발견된 영일 냉수리비. 화랑세기 필사본이 공개된 이후에 발견된 것이다.
여기엔 "지도로 갈문왕"이라는 글씨가 나온다.
갈문왕은 즉위 전 왕의 남편이나 아버지에게 주는 호칭이다.
따라서 지도로 갈문왕은 지증왕이 즉위 전에 불렸던 이름인 것이다.
그런데 화랑세기 필사본에 이것과 비슷한 내용이 나온다.
화랑세기 필사본엔 지증왕 때 부군이라는 용어가 사용된 것을 볼 수 있다.
부군은 금석문의 갈문왕과 비슷한 호칭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화랑세기 필사본과 금석문의 내용이 어느 정도 일치한다고 볼 수 있는 증거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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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금석문과 일치되는 부분이 몇몇 확인되긴 했지만 화랑세기 필사본의 진위는 가려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금석문과 비교하는 작업은 아직도 많은 가능성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포석정(鮑石亭)
포석정은 신라왕과 귀족들이 술 마시며 놀던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화랑세기 필사본엔 포석정과 관련된 글자가 나오고 있습니다.
행 길 우 포사(行吉于鮑祠)
화랑세기 필사본에는 김춘추가 포석사에서 길례, 즉 결혼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신라왕과 귀족들의 놀이터에서 결혼식을 올렸다니 좀 이상하죠. 또 포석정을 포석사라고 쓰고 있습니다.
화상 우포 석사(畵像于石祠)
화랑세기 필사본의 문 노 전에서도 비슷한 내용이 나옵니다.
여기에는 포석사에 문 노의 화상을 모셨다 라고 기록돼 있습니다.
역시 포석정을 포석사라고 해놓고 이곳에서 뭔가 성스러운 일이 행해졌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들은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는 포석정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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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4년 5월 13일, 포석정의 비밀을 밝혀 줄 획기적인 유물이 발굴됐다.
포석정 근처에서 포석(砲石)이란 글자가 새겨진 기와조각이 발견된 것이다.
명문기와는 가로 5.5cm, 세로 8cm. 포석이라는 글자가 세로로 쓰여 있었다.
탁본을 해보면 원래 글자의 모양이 쉽게 나타난다.
'포'자가 포석정의 '포'와 다르게 새겨진 것은 기와 제작자들의 편의를 위한 관행이었다.
포석정(鮑石亭)은 9세기쯤 창건돼 100여년이상 존재한 것으로 추정돼 왔다.
그러나 포석정 명문기와는 7세기 유물들과 함께 출토됐다. 이는 포석정이 7세기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화랑세기가 쓰여질 당시 포석정은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김성범 실장(경주 문화재 연구소)
당시 함께 출토된 유물 중에 삼국시대까지 올라갈 수 있는 유물들과 혼재돼서 나왔기 때문에 이 포석정의 조성연대를 지금의 8,9세기보다 올라갈 수 있는 증빙자료가 나온 것이다.
그렇다면 포석정의 기능은 과연 무엇일까?
지금까지 포석정은 신라의 왕과 귀족들의 놀이공간으로 알려져 왔다.
삼국유사에 견훤(진훤)이 음력 11월 쳐들어왔는데 경애왕은 포석정에서 놀이를 하고 있었다 라는 기록이 그 근거였다. 그렇다면, 경애왕은 정말 견훤이 침입해 오는 위기 속에서, 그것도 한 겨울에 포석정에서 놀았던 것일까?
강돈구 박사(정신문화연구원, 종교학)
견훤이 처 들어온 때가 음력 11월, 영천까지는 한 25km 떨어지는데 먼 거리가 아니다. 거기까지 쳐 들어와서 바로 코앞에 있는데 논다는 게 상식으로 안 맞고. 음력 11월이고 11월에 술잔을 띄우고 뭘 한다는 것이 상식적이지 않다. 아무리 남쪽이라도 11월이면 추울 때인데..
삼국유사에 나오는 유포 석정.
'유'자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시도되고 있다. "놀다"가 아니라 "갔다"라는 뜻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강돈구
삼국유사나 사기를 쓴 사람들이 신라가 왜 멸망을 했고 고려가 개국할 수밖에 없는지를 말하기 위해서는 좋지 않은 의미로 놀다가 경애왕이 죽었다. 적이 쳐들어오는데 그랬으니 신라가 멸망하고 다음 왕이 가져왔다 이렇게 얘기 할 수 있다.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는데 유자를 놀러 갔다고 생각하고 기록한 것일 수 있고,
또 하나 놀러 간 것이 아니라 그저 갔다 그런 의미로 해석을 할 수 있지 않나.
또 다른 근거는 신 증 동국여지승람의 유상곡수.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워 놓고 마신다는 뜻이다.
그러나 원래 유상곡수는 시를 짓고 즐기는 것이었다. 하지만 포석정에서 지어진 시는 한편도 발견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포석정은 무엇을 하던 곳일까?
삼국유사에 헌강왕이 포석정에서 남산 신을 만났다는 기록은 이곳에 신과 관련된 곳이라는 것을 짐작케 한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포석정이 있는 남산은 청송 산, 피전, 금강산, 우지 산의 4 영지에 둘러싸인 곳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남산은 최고로 신성한 곳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므로 남산자락에 위치한 포석정(鮑石亭)은 제사를 지내는 사당(祠堂)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종욱
화랑세기를 보면 포석사 안에 삼국통일이 문 노로부터 시작됐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문 노의 화상을 그 안에 모셨다. 경애왕과 일족들이 포석 사에 가서 견훤을 물리치고 신라를 지킬 수 있도록 빈 것이 아닌가.
그래서 포석정은 하나의 사당으로 그 안에 신라의 왕 또는 공을 세운 또는 화랑 중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인물들의 화상을 모신 사당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필사본의 포석사에 대한 기록은 포석정이 사당이었다는 것을 처음으로 밝혀주고 있는 것이다.
지난 1984년부터 1994년까지 10여 년간 경주 월성 발굴 작업이 이뤄졌다. 이를 통해 새로운 사실이 확인됐다.
방어를 위해 성 주변에 인위적으로 만든 물길인 해자가 발견된 것이다.
그런데 필사본에 해자와 비슷한 단어가 나온다. 여기엔 사다함의 어머니 금진이 색을 밝혀 무관 랑과 살았는데 화랑들이 흉을 보았다. 그러자 무관 랑이 성벽을 넘어 도망치다 굳이에 빠졌다는 기록이 있다. 도랑과 못이 이어진 구지가 바로 해자와 유사하다.
이종욱
사다함의 친구인 무관랑이 금진과 같이 산 곳이 어디냐가 문제다. 그런데 사다함의 어머니인 금진은 진흥왕에 의해 궁중에 끌려들어 가 조화 방부인. 이러한 명칭을 받고 궁에 산 것이 틀림없다. 그러면 그 궁이 어느 궁이냐가 문제인데 진흥왕이 살던 현재 월성인 대궁에 살았던 것으로 생각이 된다.
화랑세기 필사본은 월성 해자가 신라시대 굳이였다는 새로운 사실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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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관 랑이 사다함의 어머니와 살았다는 경주 월성.
그리고 무관 랑이 도망치다 빠졌다는 월성해자.
이곳이 정말 화랑세기 필사본에 나오는 굳이라면 우리는 새로운 신라어를 하나 갖게 됩니다. 당시 신라인들은 방어를 위해 성벽 근처에 인위적으로 만든 물길인 이 해자를 굳이라고 불렀기 때문이죠. 이처럼 화랑세기 필사본은 화랑은 물론 신라 사회 전체에 대한 새로운 사실들이 담겨 있습니다.
신라인들이 말하는 신라의 역사책인 셈이죠.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에 제작팀은 그동안 필사본의 진위를 밝히기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책이 진짜 김대문의 화랑세기를 필사한 것인지 아닌지를 가릴 확실한 단서를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1300여 년 만에 나타난 화랑세기 필사본. 그 진실은 과연 무엇일까요? 하지만 분명한 것은 화랑세기 필사본은 들여다보면 들여다볼수록 앞서 본 김춘추의 얘기라든지 포석 사라든지, 굳이처럼 뭔가 새로운 사실이 계속 나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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