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대한제국. 근대사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신한혁명당

야촌(1) 2015. 9. 30. 17:29

■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신한혁명당

 

1. 제1차 세계대전 전후 국내외 독립운동의 양상

 

제1차 세계대전으로 전쟁에 휩싸이게 된 러시아와 그 영향권에 있는 중국은 유화적인 대한인(對韓人) 정책을 철회하고 당시까지 합법적 한국독립운동단체조차도 해산시키는 방향으로 선회하였다. 

 

그 결과 1차 세계대전이전까지 러시아령·서북간도 등 각지의 독립운동기지에서 독자적으로 한인자치 및 독립운동을 주도하던 단체인 권업회(勸業會),·대한광복군정부(大韓光復軍政府), 북간도의간민회(墾民會등이 이 시기를 전후해 해산 당했다.

 

또한 서간도의 부민단(扶民團)과 신흥학교(新興學校)도 백두산서편으로 이동해 백서농장(白西農場)으로 위장한 채 유지될 정도로 운영이 어려워졌다.

 

1910년을 전후해 애국지사들이 이들 지역에 망명해서 심혈을 기울여온 국외독립운동기지화 및 독립군 양성계획은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당시 독립운동계에는 독일의 전승(戰勝)을 확신하고 이후의 정국이 우리 측에 유리하게 전개될 것이란 관측이지배적이었다.

 

바로 이 시기 결성된 신한혁명당은 이 정국을 독립전쟁론 실현을 위한 절호의 기회로 포착하였다. 각지에서 해체된 기존단체의 운동역량을 결집·재정비하여 독립운동의 새로운 비젼을 제시하려던 점에서 신한혁명당 결성이 1910년대의 독립운동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자못 크다.

 

1910년 한국이 식민지로전락하자 이전의 국권회복운동을 지속시켜 민족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국외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는 과제는 중요문제로 대두되었다. 이러한 움직임 속에서 계몽운동계열과 의병의 무장 투쟁적 운동노선을 합일·발전시킬 이념과 방향이 모색되었다. 

 

그 결과 동일한 노선의 항일투쟁론 제기와 아울러 구체적 방안은 바로 독립전쟁론의 구현이었다. 註12)

독립전쟁론이란 신민회(新民會)에서 채택한 최고전략이며, 이후 독립운동계의 중요한 전략으로 대두된 것으로, 독립군을 양성하고 군자금을 모아 군비를 갖춘 뒤, 최적의 기회를 포착하여 대일독립전쟁을 감행해서 독립을 쟁취하자는 운동방략이다.

 

최적의 기회란 일본제국주의가 강력해지고 침략야욕이 더욱 팽배해 만주·태평양지역으로 팽창하려 할 경우 불가피하게 중일전쟁·러일전쟁·미일전쟁이 발발할 때를 의미하며 바로 이 시기가 한국독립전쟁을 결행할 호기라는 논리였다. 註13)

 

따라서 이 시기를 정확하게 포착하여 독립 쟁취의 기회로 활용하려면 독립군을 양성하는 한편 제반군비를 비축해 두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러한 중차대한 일을 수행하기 위해 국외독립운동세력과 국내비밀결사가 연결되어 해외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는 방안이 채택되었다. 

 

1910년대 독립운동은 독립운동체제의 정비독립전쟁론의 본격적 구현이란 차원에서 전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국외독립운동의 기본적인 방략은 독립전쟁론에 토대를 두었다. 국외독립운동은 일찍부터 한인이 이주하여 수십만의 한인사회가 이루어진 서·북간도를 중심으로 한 남북만주와 초기단계 최대의중심지인 러시아의 시베리아지방이 중심이었다. 

 

그 외 하와이·미주본토와 상해·북경 등 중국관내에서도 독립운동이 전개되었다.

우선 러시아령연해주지역에서는 1910년 8월 성명회(聲明會)의 병합반대운동을 시작으로 1911년 중일교섭 전의대세를 아래와 같이 파악하고 있었다. 

 

일본은 한국을 강점한 후 중국 동삼성에 근거지를 설치하고 러시아를 유인하여 동아시아의 유지를 위해 러일 간 협조체제가 필요하다는 논리를 폈다. 이어 만주·몽고로 진출야심을 품고 몽고의 독립을 획책코자 제3차 러일협약을 체결하였다. 이후 러시아령의 한인을 밀약국인(密約國人)이라 규정하고 이들의 표면적활동을 저지시켰다. 

 

특히 1913년 8월에는 이상설(李相卨)· 이위종(李瑋鍾)을 러시아 수도에 억류하였던 사실을 지적하면서 이제는 무형적 활동조직인 비밀결사조직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

 

다음으로 중일교섭후의대세는 중국인민의배일행동, 배화열(排和熱)이 더욱 거세짐에 따라 신한혁명당은 “1차 세계대전은 독일의 승리로 귀착됨이 명백하므로 제1차 세계대전의 승리 후 그 ()’이 동양으로 향할 것이고 일본을 공격함이 필연적이며 이에 중국도 연합할 것”이라고 예상하였다. 

 

아울러 영·미·러 등도 이에 합세함에 일본은 고립됨이 분명하니 이를 독립회복의 적기로 활용하려 한 것이 당의 주된 결성배경이었다. 물론 신한혁명당의 정세판단과는 반대로 제1차 세계대전은 독일의 패배로 끝났으며, 러시아·미국·영국 등도 일본과 적대 관계적 대응을 한 것은 아니었다.

 

2. 신한혁명당의 결성과 조직구성

 

신한혁명당의 조직은 본부와지부로 구성되었다. 본부는 북경 서단패루에 설치하였으며, 본부에는 재정부·교통부·외교부를 두었다. 지부에는 지부장을 두고 각기 당원을 파견해 중국과 국내의 중요지역에 재정·통신·연락·당원모집 등 주된 업무를 담당케 하였다.

 

신한혁명당의 결성은 대체로 상해지역을 중심으로 진행되었음에도 본부를 북경에 설치한 것이 특징적이다. 이는 당시국제정세 속에서 독일과 중국의 지원을 중시한 점과 관련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당시 북경은 원세개정권의 중심지인데 반해, 상해는 중국혁명세력의 근거지였다. 또한 원세개가 대총통이 된 후 유럽 열강들은 그를 지지하였다. 이에 따라 원세개정권의 지원을 얻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본부를 그곳에 설치한 것이라 추측된다.

 

지부설치지역은 독립전쟁발발에 대비해 세워둔 군사작전상의 주요지역과 일치되는 곳이 많음을 알 수 있다. 즉 중국 내 지부설치 지역인 안동·봉천·장춘은 일본의 안봉철도와 관련된 곳이고, 국내의 나남·회령도 진격작전의 주요 목표지였다.

 

보다 중요한 것은 당수(黨首)를 결정하는 일이었다. 혁명당의 주도세력들은 동맹국이 될 중국과 독일이 모두 군주정치이므로 종래와 같이 공화정치를 주장함은 불리할 뿐 아니라 이 명의(名義) 때문에 목적달성에 어려움이 초래되리라 판단하고 구황실의 일인, 즉 광무황제를 당수로 추대할 것을 결의하였다.

 

조직구성은 본부장이상설재정부장이춘일교통부장유동렬감독박은식외교부장성낙형 등이었다. 지부는 해외에 상해 신규식, 한구(漢口) 김위원, 장춘(長春) 이동휘, 연길현 이동춘, 봉천·안동부 등이었다.

 

국내는 경성 난회(蘭會)조직-김사준(金思濬)·김승현(金勝鉉)·변석붕, 평양 정항준(鄭恒俊), 원산, 회령 박정래(朴定來), 나남 강재후(姜載厚)등으로 구성하였다. 혁명당의 자금은 중화혁명당의 예에 따라 기부나 모집으로 충당하는 방식을 기본원칙으로 정했다. 

 

부득이한 경우에는 해적이나 강탈을 허용한 것에서 군자금 모집의 시급한 사정을 알 수 있다. 혁명당의 규칙과 취지서는 박은식이 기초하였다. 신한혁명당 결성의중심인물들은 중국관내·만주·시베리아 등지에서 초창기부터 독립운동에 투신해 활동하던 지도급인물이었다. 

 

이상설은 1907년 헤이그특사로 만국평화회의에 참가한 이후 해외독립운동의 중심인물로 활동하였다특히 1909년 이후 블라디보스톡에서 해외기지건설에 힘을 기울여 성명회·권업회 등의 조직을 주도하였고이동휘와 함께 1914년 대한광복군정부를 조직했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권업회가 해산되자 상해로이동하여 새로운 활로를 찾던 중 신한혁명당을 결성하게 되었다. 그는 구학문을 수학한 왕조관인(王朝官人)이었으나 누구보다 근대사상과 구미의 정치·경제·문화를 풍부하게 습득한 인물이었다.

 

박은식은 1911년 5월 서간도로 망명한 후 1912년 상해에서 신규식과 함께 동제사·신아동제사를 조직·활동하다가 1914년 5월 홍콩에서 잡지 『향강잡지(香江雜誌)』의 편집을 맡았다. 이때 그는 『향강잡지』 4호에 원세개를 비판할 정도로 반제적 입장이었다.

 

유동렬은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제15기로 졸업한 후 1904년 귀국하여 육군참령(參領)으로 육군무관학교학도대 겸 교관을 지냈다. 이후 신민회회원으로 국내·만주등지에서 활동하던 중 105인 사건에 연루 구속되었다. 1심에서 10년형을 언도받았다가 1913년 3월 2심에서 무죄판결로 석방되자 만주로 망명하여 활동했다. 註14)

 

1914년 7월 이후 성낙형과 함께 활동하다가 신한혁명당 결성에 참여하였다. 그는 공화정치주장자로 정평이 난 인물 중 하나였으나 당시의형세가 불리하여 방략상 제정(帝政)동조로 방향을 전환하였다. 지부장으로 선출된 이동휘는 강화도진위대장으로 근무하다가 1904년 무관직을 사임하였다. 

 

강화도유지들과 더불어 보창학교(普昌學校) 설립과 도내의무교육을 실시하는 등 학회와 교육을 통한 계몽운동에 헌신하던 중 1907년 신민회에 참여했다. 서북지방을 중심으로 100여 개교에 달하는 보창학교 지교설립은 그의 활발한 교육활동에서 비롯되었다. 

 

1911년 봄 일경에 체포되어 대무의도(大舞衣島)에 1년간 유배당했다가 풀려난 후 1913년 초 북간도로 망명하여 간민회에 관여하다가 뜻을 품고 9월 시베리아로 이동하였다. 거기서 권업회의 단합과 조직 강화에 노력하던 중 1914년 러일개전설에 대비해 의병조직을 정비하는 한편 대한광복군정부를 조직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발발과 권업회해산으로 휘하의 세력을 이끌고 북간도로 이동하여 새로운 기지 확충을 기도하고 있었다. 이동휘는 간민회와 권업회에 모두 관여한 인물로 특히 간민회에서는 윤해·김립·김하식·계봉우·오영선·장기영 등 그를 따르는 청년회원들이 이동휘와 연계를 맺으면서 주된 활동을 전개하였다. 註15)

 

이동춘은 1894년 청일전쟁 시기 청국주재 조선공사관朝鮮公使館의 통역관으로 활동하다가 일찍이 연길로 망명·귀화하였다. 그는 연길에서 동남로관찰사공서東南路觀察使公署의 고급관원이 되어 한인사회의 민족교육· 독립운동을 지원해 주었다. 

 

1909년 간민교육회를 설립·경영하였고, 1912년 12월에는 간민회 결성에 관여해 식산흥업 과장직을 맡는 등 북간도지역을 중심으로 활약하였다. 그 외 이춘일은 1910년 성명회선언서에 그 이름이 보일뿐이며, 註16)

 

유홍렬은 신한혁명당의 국내전략실행에 기여한바가 크다. 즉 그와 연락이 오고가던 변석붕을 국내활동의 중심인물로 하였던 까닭에 국내에서 계획추진이 신속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이외의 행적은 알 수 없고, 다만 1914년 음력 5월경에 상해에 체류하여 신한혁명당 결성에 참여하였다가 1915년 6월 병사하였다. 註17)

 

성낙형은 신한혁명당의 결성과 활동에서 가장 눈부신 활약을 하였다. 또한 ‘신한혁명당 주화총기관부장(駐華總機關部長)’이란 칭호를 쓴 것 등은 그가 당내에서 중심적 인물이었음을 시사해 준다.

 

이상 살펴본 당원들의 구성상 특징을 보면, 우선 연령은 대부분 30대후반에서 40대전반이며 육군무관출신자가 유동렬참령·신규식부위·이동휘참령 등 3명으로 나타난다. 종교면으로 이상설·신규식·박은식은 대종교(大倧敎)인이며이동휘·이동춘은 기독교인이다. 이들 대부분은 계몽운동단체에서 활동하였다. 註18)

 

이들은 한말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다가 국권이 상실되는 시기를 전후로 러시아령이나 만주 등지로 망명해 구국투쟁에 투신했던 동지적 인사들이다. 간도·시베리아·상해의 한인사회를 기반으로 문무겸비 교육을 실시하는 한편 간민회·권업회·동제사 등 단체를 조직하여 한인사회의 결속과 자치 및 내연으로 독립운동을 추진한 중심인물들이었다.

 

이처럼 신한혁명당은 제1차 세계대전을계기로 기존활동의 저지 및 운동기반의 상실이란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들은 국제정세를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흩어진 운동단체들의 역량을 재결집할 비밀무형의 결사단체 필요성을 통감하였다. 

 

그 결과 운동노선·이념의 차이를 극복하고 광무황제란 상징적 존재를 당수로 추대하여 민족독립 쟁취란 공동목표하에 공화주의를 잠시 양보하고 제정을 표방하는 전략을 세울 수 있었다.

 

3. 신한혁명당의 활동

 

1) 독립전쟁 준비

신한혁명당의 주요활동은 독립전쟁이 발발할 경우 그 수행에 필요한 군비정비 등이었다. 외교적 측면에서는 독일의 보증 하에 중국과 군사원조동맹인 중한의방조약(中韓誼防條約)을 체결하는 것이었다.

 

신한혁명당이 독립전쟁에 대비한 준비작전에 착수한 것은 1914년 12월경이었다.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곧바로 독일에 선전포고한 뒤 독일 조차지인 중국의 청도를 공격하여 점령하고 중국 점령을 획책하였다. 

 

1914년 12월 1일경 성낙형이 국내 동지 변석붕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독일의 구전(歐戰) 유럽에서 전쟁의 득리(得利)는 세계와 더불어 인정되는 일인 것이다. 그리하여 구전의 종결은 명년1915년 3~4월이 될 것이며, 전쟁종결에서 미·독의 협약은 반드시 세계의 이목을 놀라게 할 것이다.

 

가주(加州)문제, 독의 청도문제가 일시에 일어나 전쟁은 극동으로 번질 것이니~~~이때에 우리는 실력을 사용할 기회가 아니냐. 각하(변석붕)는 동지동포의 단결에 힘써야 하고 ….”라고 당시 정세를 밝히고 있다. 이는 지금은 비록 청도가 점령당하였지만, 유럽전에서 독일이 승리한 뒤 일본에게 빼앗긴 청도를 회복키 위해 극동으로 진출할 것은 자명하다는 상황인식이다. 

 

더구나 주위 강대국의 대일정책은 일본의 고립화란 양상을 띠게 될 것이니 일본의 패배는 당연한 결과라고 판단하였다. 러시아는 시베리아철도 복선이 이미 완성되어 제반 운송이 편리하게 되자 중국의 내몽고를 독립시켜 지리상 점령하고자 했다. 이것이 극동정책의 주요골자이다.

 

한편 이 시기 영국에 대해서는 비록 일본과 동맹국이라도 필시 중립을 엄수하여 이를 묵인하는 입장에서 수수방관할 것이라 예측하였다. 결국 각국의 연합체제가 구축되어 일본은 고립화되므로 일본이 승리하지 못할 것은 분명하다고 본 것이다.

 

따라서 신한혁명당은 이 기회에 우리의 독립군도 각국과 연합하여 독립쟁취의 길을 모색하고자 계획하였다. 이러한 상황판단을 전제로 독립전쟁 준비계획이 추진되었다. 신한혁명당의 독립전쟁 수행을 위한 군비정비는 기존 독립군과 무기 등을 기반으로 할 수 있었으므로 보다 신속하게 조성될 수 있었다. 

 

즉 시베리아지방의 중심단체인 권업회가 강제 해산당하기 직전에 조직했던 대한광복군정부가 비밀리에 구성한 군대조직이 그 모태가 되었다고 추측된다. 註19)

 

대한광복군정부는 러일전쟁 10주년인 1914년을 맞아 러시아 전역에 대일(對日) 복수열이 절정에 달하여 대일 개전의 조짐이 보이자, 이상설·이동휘·이동녕·이종호·정재관 등이 중심이 되어 러·중 지역에 산재한 동지를 망라하였다. 이어 정도령(正都領)을 선거하여 군무(軍務)를 통할케 하였는데초대는 이상설다음은 이동휘가 되었다

 

군대를 비밀리에 편성하고 중국 왕청현王靑縣 나자구羅子溝에 사관학교인 대전학교大甸學校·동림학교東林學校도 설립하였다. 대한광복군정부는 만주·시베리아를 비롯한 국외 모든 독립운동 무장세력을 규합해 광복군光復軍으로 총괄하려는 군사령부적 성격의 단체였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 후 권업회 해산과 동시에 대한광복군정부 계획도 무산되고 말았다. 비록 성공적인 결실을 거두지 못했지만, 이에 관여한 인사들이 신한혁명당에 동참하면서 군사적 기반이 신한혁명당의 군비로 전환될 수 있었다. 신한혁명당은 이를 토대를 독립전쟁을 대비해 국내 국경지역 진공계획을 수립하였다.

 

신한혁명당 당원인 유홍렬이 변석붕에게 보낸 서신중에 “노령, 지나령 재류동지수 및 총기탄약수”에 관한 정보 및 군사암호와 유사한 부호가 첨부되어 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서신 작성시기가 정확하지 않지만 그 정보상에 명기된 인물과 신한혁명당의 인물이 일치되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신한혁명당의 군비정보로 볼 수 있다. 

 

이 정보에 따라 국외에서 편성된 각 지역 독립군 가용인원과 주무자주무기관·무장내역을 정리해 보면 아래와 같다.

 

◇동삼성 내 길림의 주무기관 : 성우선(성낙형)

   *재류동지수 : 260만여 명

   *총기 탄약수 : 창탄소유

 

◇무송현

    *5,300인- 강계 엽군(攛軍) 4,607명, 나머지 해산병 693명

   *신식 쾌창(快槍) 6,500전, 탄자(彈子) 9,700과, 쾌창 금일 러조성

 

◇왕청현

    *19,507명- 산찬군 19,000명, 해산병 320명, 학생

     신식 창탄자 소유

 

◇통화·회인·집안현 3군

    *25세~30세 이내 39,073명

     집대교련군식 신식창탄을 병본.

 

◇합이빈 주무기관 : 김철성(金喆聲) 연락책

 

◇시베리아 주무기관 : 이상설

     *29,365인

      총기탄약 : 창탄 13,000병, 러호조탄자 50만과, 러시아 사범학교 공지서 군식교련

 

◇미국지방에 있는 주무기관 : 박용만

    학생무관교련 850명, 군함 5척 목하 있음

 

이 정보의 인원수는 각지의 재류 동포 수, 즉 전시에 동원가능한 모든 인원을 포함시켰다고 추측되지만 전체적으로 과장되었다. 이중 시베리아지역에서 제1차 세계대전 개시 후 북만주로 이동한 이동휘·이종호 등과 함께 이동하여 동녕현 삼함구에서 무장행동을 전개할 때 인원이 2만이었다는 사실 註20)과 관련지어 보면 시베리아지역의 인원수에는 별 문제가 없다고 하겠다.

 

신한혁명당은 지역적으로 만주·시베리아·미주지방을 모두 통할하여 단일군대를 편성코자 하였다. 각 지역에 주무기관, 즉 주무자를 선정해 지역별 독립예비병력을 관장케 하였는데, 그 주무자들이 각기 그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인물들이었다. 

 

시베리아의 경우 1914년 러시아 당국 내에 대일복수전 분위기가 고조되자 이동휘가 이범윤·홍범도 등과 함께 독립전쟁을 위해 예비해 둔 무장력과 관련성을 상정할 수 있다. 다만 주무자가 실제 무장력을 주도하던 이동휘가 아니라 그 지역 독립운동의 이념적·정신적 지도자인 이상설로 되어 있는 것이 특이하다.

 

길림지역의 주무자인 성낙형은 서·북간도지역에서 활동했다고는 하나, 혁명당 이전의 활동은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그의 편지·경각서의 내용으로 추측해 본다면 북경·동삼성지역에서 무력·재력을 어느 정도까지는 동원할 수 있는 실력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미주지역은 1914년 6월 박용만이 하와이에 국민군단을 설립하여 군인양성을 목적으로 완전한 군대를 조직한 사실과 연관지어 볼 수 있다. 註21)

 

독립전쟁에 대비해 군대를 조직하고 신식무기를 구입·전력강화를 시도한 점과 야간에 훈련을 실시한 점은 이해할 수 있다. 다만 그 총기 탄약수의 과다와 독립군 혹은 그 예비 병력의 수에서 과장된 표현이 있어 납득키 어려운 점이 있다. 

 

이런 과장된 수치는 아마도 국내동포에게 단결을 촉구하여 기의起義할 수 있는 자신감을 제공하며 아울러 이 정보가 발각당할 때를 의식, 일본에게 위력을 과시하려는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상술한 바대로 지역별로 어느 정도 무장·훈련된 군대가 편성되었다. 신한혁명당은 이 무력으로 국내로 진공계획을 수립하였다.

 

◇군병 출구시 통화·회인·집안현 3군의 군병은 합동해 초산군 전구를 건너 습격해 신의주에 유진할 것.

 

◇왕청현 군병은 계현 등의 지역에 출몰해 일병을 유인하여 장마촌의 후구를 습격할 것.

 

◇무송현 군병은 연락해 연길부·시베리아 구원병을 합해 두만강을 거슬러 회령과 나남면에 유진해서 돌격할 것.

 

◇여순 대련의 원조병과 봉천군대를 합쳐 영구의 기차를 급속히 차단할 것.

 

이러한 군사계획을 세운 것은 중국과 독일이 연합하여 일본을 공격할 경우 미국·영국·러시아도 모두 이를 원조할 것이며, 이때 우리 군대는 일군(日軍) 운반(運搬)의 요새지를 방어하면 일본군은 상하 분열되어 전승하리라는 확신에서였다. 그리하여 일본이 산동지역의 전쟁에서 패배한다면 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고 믿었다.

 

당시 일본은 신의주-안동-봉천의 철도를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이를 파괴하여 후방의 군수품 지원을 차단하고자 계획하였다. 또한 여순·대련이 일본의 조차지였던 연유로 그들 세력하의 항구인 영구를 방비함으로 해상을 통한 수송 역시 신속히 차단하고자 했다. 

 

정보에 나타난 군사작전 계획은 성낙형이 1914년 12월 변석붕에게 보낸 편지에서 제시했던 계획과 거의 일치하며, 또한 1915년 7월 국내에 잠입한 뒤 작성한 경각서 내의 작전과도 일치되는 것이 많다. 이로 미루어 세 기록간의 연관성은 확실하게 나타나며, 신한혁명당이 도모한 일련의 계획임을 알 수 있다. 

 

유홍렬의 편지 중의 작전계획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통화·회인·집안 3현이 합동하여 초산을 건너 신의주에 진치고, 무송현군에서는 연길부·회령을 거쳐 나남에 유진하면 이곳에 시베리아군 및 (러)구원병이 집결할 것이다. 

 

또한 여순·대련의 원조병과 봉천군 연합은 영구營口의 기차를 차단을 하거나 혹은 러시아군이 연길·회령으로 진격하는 계획이었다. 다음으로 중국군은 영구방비를 맡아 산해관 지선·봉천철도 차단에 전력을 쏟아놓고 독연합군은 해면으로 진입하는 계획이다.

 

성낙형은 변석붕에게 이러한 계획을 미리 알려 국내의 동지들을 규합·조직하여 국내에서 이러한 독립전쟁 발발시 내응할 수 있는 운동을 일으켜 주도록 당부하여 외원내응外授內應의 방책을 세우는 치밀한 작전을 계획하였다.

 

2) 중한의방조약 체결을 위한 국내활동

 

신한혁명당은 전쟁수행을 위한 군비조달을 보다 확고히 하는 한편 각국의 원조를 취하기 위한 외교적 수단으로 중국과 ‘중한의방조약’을 체결하고자 계획하였다. 이 조약은 한국에 혁명전쟁, 즉 독립전쟁이 발발할 경우, 중국측이 군자금 및 병기를 공급한다는 취지의 밀약密約이다. 

 

그 실행상 국제적 효력을 보증키 위한 수단으로 독일 보증하에 한국과 중국이 조약을 체결하는 방법을 선택하였다. 조약안은 전문 21개조로 구성되었는데, 註22)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조약체결 당사자는 양국의 원수로 정하되, 한국혁명 착수 전에는 비밀을 보장해야 하므로 중국·한국·독일의

          중요인물 간에 사결私結하고 혁명성공 후에 각 정부가 이를 계승해 정식으로 세계에 공포하도록 한다.

 

둘째, 중국은 한국혁명이 일어날 때 군기(軍機)·재력(財力)을 방조(幫助)하고 중급군관(中級軍官)을 파견해 전력

          (戰力)을 원조해야 한다. 만약 재정·군기가 부족하여 이를 독일국에 청구할 경우, 중국은 독일에 권고·담보

          를 제공하도록 정하였다. 이후 한국혁명이 성공하면, 독일이 원조규모를 계산하여 국채로 30년 무이자 상

          환이란 조건을 설정해 두고 있다.

 

셋째, 한국혁명 성공 후 중국·독일이 원조에 대한 대가로 내정을 간섭하려 하거나 영토를 점령하려는 의도를 사전

          에 저키 위한 금지조항을 마련해 두었다. 대신 독일에 대해서는 동서東西의 우등권을 양도하고, 중국에게

          는 세관·철도 등 사업상 이권을 주도록 규정하였다.

 

넷째, 만약 혁명이 실패한 경우에 대비해 중국측에게 신한혁명당의 혁명 주도 인물들에 대한 신분보장을 요구하는

          조항도 마련하고 있다.

 

       이상 살펴본 조약내용 중 주목할 것은 ‘한국혁명’이란 표현이다. 이 용어의 의미는 확실치 않지만 추측컨대 한국

       독전쟁 혹은 그에 비견하는 활동을 뜻하는 것 같다. 굳이 혁명이라 한 것은 당시 중국혁명의 영향과 연관지어

       볼 수 다. 

 

이 점은 신한혁명당의 명칭과 자금동원방침을 중화혁명당의 예를 빌린 것에서도 잘 드러난다.

신한혁명당은 “중한의방조약”이란 밀약체결의 임무를 전술한 대로 성낙형에게 부여하였다. 

 

그는 중국 원세개측 뿐 아니라 청도 주둔 독일군 제독과도 절친한 사이로 밀약체결 계획에 적절한 인물이었다. 

성낙형은 신한혁명당의 당수이자 미래에 세워질 한국정부의 원수로 추대될 광무황제와 접촉하여 조약체결의 밀지를 위임받고자 조약안을 가지고 국내로 잠입하기로 결정하였다. 

 

변석붕에게 미리 통신을 보내 거사를 도모할 동지를 규합해 두도록 지시했다. 변석붕은 각 동지를 포섭해 사전준비를 갖추는 등 신속한 임무수행을 도왔다. 성낙형은 1915년 3월 북경에서 이상설·유동렬과 상의하고 혁명당 본부를 설치하여 본격적 활동에 착수하였다. 

 

이때 북경은 일본의 21개조 요구문제로 시국이 불안하고, 전쟁의 조짐도 나타난 상황이어서 신한혁명당은 북경정부의 대일(對日) 교섭방안의 추이를 보면서 대응책을 강구했다. 성낙형과 유동렬은 4월경에 봉천으로 이동하여 임시통신기관을 설치하고 서·북간도 각지를 편력하는 등 중일中日전쟁 발발시 독립전쟁의 호기로 활용하기 위한 동지규합에 노력하였다.

 

예상한 바와는 달리 5월 9일 중국측의 21개조 요구안 수락에 따라 중일교섭의 문제가 평화적으로 해결되었다. 이에 따라 중일 교전의 위급한 상황은 사라지고 일본이 유리한 입장에서 교섭이 타결됨에 실제 전쟁발발의 기회는 없어졌다. 하지만 신한혁명당의 중일교섭에 대한 예상이 빗나간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성낙형 등이 중국정부의 전능훈(錢能訓)·양사기(楊士奇) 측근에 접근하여 중국정부의 형세를 엿본 결과 중국측은 전의(戰意)는 없고 다만 유리한 정국으로 결과를 맺으려는 입장에 있었다는 것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전쟁을 준비한 것은 혹시라도 결렬될 경우를 예상한 대응책과 독일이 승리 후에 산동에서 대일개전을 예상한 대응책이었다. 이와 같이 중일간의 정국이 변화하자, 신한혁명당은 이제 독일이 유럽전쟁에서 승리하리라는 확신하에 전승 후의 독·중의 대일공동전선을 기대하고 중한의방조약 체결을 위한 본격적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에 따라 성낙형은 봉천에서 함께 활동하던 유동렬과 헤어져 7월초 한구지부장 김위원을 동반 국내로 잠입했다.

1915년 7월 2일경 성낙형과 김위원은 국내로 잠입한 직후 평북 철산군의 정항준(鄭恒俊)을 방문해 그에게 혁명당의 독립운동계획을 설명하고 동지로 포섭하였다. 이어 그와 함께 평양을 거쳐 7월 7일에 경성에 도착했다. 

 

성낙형은 김위원의 동생집에 머물면서 변석붕과 비밀리에 접촉하였다. 이어 변석붕은 기존 조직인 난회(蘭會)의 회원을 중심으로 활동을 전개하기로 사전 협의한 동지들을 소개하고 아울러 이들에게 신한혁명당의 계획을 설명하고 국내 동지의 동의를 얻었다.

 

혁명당 본부에서 파견된 성낙형·김위원과 국내의 변석붕·심인택(沈仁澤)·정일영(鄭日永)·박봉래(朴鳳來) 등이 합의해 신속·완벽한 임무완수를 위해 세가지 방향으로 추진하게 되었다. 즉 광무황제에게 직접 접근하는 방안, 이강(李堈)공에게 접근하는 방안, 구(舊) 양반 간에 동지규합방안 등으로 각각 심인택·정일영·박봉래가 주무자로 선정되었다. 

 

먼저 광무황제에게 접근하는 방안이 추진되어 7월 17일 심인택은 정일영과 상의한 후 덕수궁과 연고가 있던 김승현(金勝鉉)과 접촉하여 광무황제에게 접근할 묘책을 상의하여 덕수궁 내승(內丞)으로 믿을만한 인물인 염덕신(廉德臣)을 통해 광무황제에게 전하기로 결정하였다. 

 

성낙형은 “중·독·영·러가 일본을 연합해 공격하리라는 대세(大勢)”란 표제로 혁명당의 독립운동계획을 간명하게 기재한 문서를 작성하여 7월 26일 광무황제에게 신서(信書)를 전달하였다. 광무황제는 이 계획을 보고 만족해하면서 성낙형에게 제2의 신서인 조약안을 가지고 직접 알현하도록 명함과 아울러 승락의 징표로 인영(印影)을 당지(唐紙)에 압날(押捺)하여 주었다. 註23)

 

광무황제에게 계획이 전달되고 성낙형이 조약안을 가지고 알현하여 조약체결의 위임을 위한 밀지를 받는 일만 남게 되었다. 그러나 성낙형이 ‘중한의방조약안’을 가지고 광무황제에게 알현하기 직전 일제측에 계획이 발각되어 본부에서 파견된 당원과 국내활동원 모두가 체포되었다. 

 

일제는 이들을 ‘보안법 위반사건’으로 묶어 재판에 회부하였다. 당원의 체포로 계획이 무산되었으나 신한혁명당 외교부장인 성낙형과 김위원이 국내에 잠입해 그 활동을 신속하게 전개하였던 것과 단시일 내에 광무황제에게 계획이 전달되어 1차 접촉이 성공한 것은 국외의 당 본부가 사전에 국내조직과 상호연계를 맺어 이를 활동기반으로 활용한 때문이었다. 

 

국내의 기존조직인 난회회원들의 역할이 적지 않았다. 국내조직의 특성은 우선 활동인물의 연령이 매우 높은 것이 특이하며 모두 시회(詩會)인 난회의 회원이면서 구 황실 측근의 인물로 이루어진 것을 알 수 있다.

 

변석붕은 대원군파로서 1897년 모반사건으로 15년 유형流刑을 받은 후 1907년 사면되었다. 김사홍도 같은 사건으로 15년 유형을 받은 것으로 미루어 변석붕과 관련된 인물로 보인다. 김사준은 이강공의 장인으로 구 황실과는 사돈지간이며, 김승현 또한 그의 딸이 명성황후가 죽은 후 왕비간택의 약속을 받은 바 있던 인물이었다. 

 

박봉래·정일영은 왕실사무 담당관청인 궁내부 출신이며, 염덕신은 내승內丞으로 광무황제의 시중을 드는 측근이었다. 국내조직의 이러한 이점을 기반으로 신한혁명당의 계획은 비밀리에 신속하게 광무황제에게 전달될 수 있었다.

 

위와 같은 활동에도 성낙형이 황제를 알현하기 직전에 계획이 발각되고 활동원 전원이 체포당하였다. 그 결과 신한혁명당의 독립운동 계획은 실패하였고, 이후에는 활동이 중지된 것으로 미루어 당 조직 자체도 무산된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4. 독립운동방략과 역사적 의의

 

신한혁명당은 1915년 이상설·성낙형 등이 제1차 세계대전 발발에 따른 국제정세 변화를 독립만회의 시기로 포착해 국외 각 지역 독립운동세력의 조직기반과 무장력을 통합하여 독립전쟁을 결행하기 위해 조직한 비밀결사단체였다.

 

조직구성상의 특징은 권업회 중심의 시베리아지역 운동세력, 간민회를 비롯한 북간도지역의 세력, 북경·상해지역의 세력, 그리고 박용만 중심의 미주지역 세력 등을 연합한 점이다. 

 

본부의 조직원은 국내에서 한말 계몽운동단체에서 활동하면서 국권회복운동에 일익을 담당하던 인물들로 이후 국외로 망명하여 각 지역에서 독립운동기지 건설과 독립운동을 주도하던 중심적 지도자들이었다. 

 

반면에 국내조직은 ‘난회’란 시회조직의 회원들로 구 황실, 특히 광무황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던 측근인물이었다. 성공은 거두지 못했지만 이런 이점 때문에 광무황제와 신속·정확하게 접촉할 수 있었다.

 

신한혁명당의 활동은 독립전쟁에 대비한 무장병력, 즉 독립군의 편성과 군사작전을 수립했던 독립전쟁 준비책과 ‘중한의방조약’ 체결전략이었다. 중한의방조약은 독일 보증하에 중국과 군사동맹을 맺어 혁명전쟁, 즉 독립전쟁 발발시 중국으로부터 군비와 중급군관의 원조를 받는다는 내용의 밀약이었다. 

 

비록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더라도 독립운동단체로서 중국·독일과 대등하게 군사동맹을 맺어 합법적 군사원조를 확보하고자 한 것은 높게 평가할만한 전략이라고 생각된다. 독립운동방략상 신한혁명당은 민족독립이란 공동목표를 위해 실리적인 면을 중시한 까닭에 공화주의를 포기하고 보황주의적 노선을 채택했다. 

 

즉 동맹국이 될 독일과 중국이 모두 제정帝政이므로 우리도 이를 따라야 유리하다는 판단하에서 제정을 표방하고 광무황제를 당수로 추대하였다. 제정은 복벽적復辟的이라기보다는 입헌군주적 제정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신한혁명당 계획의 실패 이후 복벽주의나 보황주의적 방략은 자체의 한계성으로 인해 더 이상 독립운동방략상 주된 노선이 될 수 없었다. 1917년 「대동단결선언」 단계에 이르면 공화주의노선이 독립운동의 이론으로 정립하게 되는 발전을 가져왔다.

 

끝으로 신한혁명당이 예견한 바와는 달리 제1차 세계대전이 독일의 패배로 종결되어 그들의 국제정세에 대한 상황판단에 한계성이 있었다는 것을 지적해 둔다. 물론 1915년 신한혁명당의 창당 시기에는 독일이 승승장구하는 등 독일이 승리하리라는 예상도 가능했다. 

 

그러나 이후의 정세는 1916년 교착상태를 거쳐 1917년 4월 미국의 참전으로 독일이 패전국이 되는 정반대의 결과를 초래하였다. 또한 신한혁명당이 예정해 본 각국과 일본간의 관계도 정확한 파악이 아니었다. 

 

중국 원세개정권은 연합국측에 가담하고, 러시아는 1916년 일본과 4차 밀약을 체결하였으며, 영국도 일본에 적대적 입장을 취한 것이 아니었다. 신한혁명당의 국제정세에 대한 어긋난 분석과 방략상 보황주의적 노선을 채택한 점은 한계로 지적된다. 

 

그렇기는 하나 제1차 세계대전으로 국외 독립운동조직의 활동이 봉쇄당하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 각지의 운동역량을 재정비하여 독립전쟁을 결행할 전략을 세워 새로운 활로를 개척하려는 활동은 새롭게 평가되어야 한다. 

 

신한혁명당의 활동은 이후 국외독립운동계에서 공화주의적 노선이 이념으로 정립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독립운동의 중추기관으로서 국내의 민중적 기반 위에서 정부가 조직되어야 한다는 방향 제시는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참고문헌]

[註 12] 윤병석, 「1910년대의 한국독립운동시론」, 『사학연구』 27, 한국사학회, 1977, 70쪽.☞

 

[註 13] 신용하, 「신민회의 독립군기지창건운동」, 『한국근대민족운동사연구』, 일조각, 1988, 151~152쪽.☞

 

[註 14] 박종연, 「춘교 유동렬의 독립운동과 군사활동」, 『한국민족운동사연구』 52,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07, 115~133쪽.☞

 

[註 15] 반병률, 「이동휘」, 『역사문제연구소회보』 8, 역사비평사, 13~18쪽.☞

 

[註 16] 윤병석, 『이상설전』, 일조각, 1984, 224쪽.☞

 

[註 17] 일제는 신한혁명당사건을 “朝鮮保安法違反事件”으로 처리하였고 그 재판기록은 金正柱, 『朝鮮統治

              史資料』 Ⅴ,국학자료원, 1994, 629~671쪽과 金正明, 『鮮獨立運動』 Ⅰ, 원서방, 1967, 278~297

              쪽에 수록되어 있다.  본고에서는 전자를 기본자료로 하였다(金正柱, 『朝鮮統治史資料』 Ⅴ, 645쪽).

              ☞

 

[註 18] 독립협회는 박은식·신규식, 대한협동회는 이동휘·이상철, 西友학회는 박은식·이동휘·유동렬, 漢北興學

              會는 이동, 西北학회는 박은식·이동휘·유동렬, 신민회는 박은식·이동휘·유동렬 등이었다.☞

 

[註 19] 뒤바보, 「俄領實記(社會)」, 『독립신문』 1920년 3월 25·30일자 ; 윤병석, 「아령실기」, 『한국근대

              사료론』, 조각,  1979 참조.☞

 

[註 20] 劉孝鐘, 「極東ロシアにおける朝鮮民族運動-「韓國倂合」から第一次世界大戰の勃發まで-」,

           『論文集』 22, 朝鮮硏究會, 159쪽.☞

 

[註 21] 김원룡, 『재미한인오십년사』, 혜안, 2004, 345~347쪽. 이에 의하면 국민군당은 6월 10일에 설립되

              어, 군단학도 103명으로 시작되었으나 311명에 달하였으며 설비는 적으나 완전한 군대였다. 군단의 단

              장은 박용만이었으며, 신한혁명당의 지부 설정시 상호 연락이 된 것 같다(『新韓民報』 1917년 12월

              18일자).☞

 

[註 22] 「中韓誼邦條約(案)」, 『判決書』, 657~659쪽.☞

 

[註 23] 이때 사용한 印影은 과거 正宗이 사용했던 篆字로 “溫如其玉”이라 새겨진 것이었다.☞

 

출처 : 독립기념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