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묘지명(墓誌銘)

정약현 묘지명(丁若鉉 墓誌銘) - 다산 정약용선생 맏형

야촌(1) 2010. 2. 20. 02:14

[생졸년] 정약현『丁若鉉, 1751년(영조 27) ~ 1821년(순조 21)』

 

■ 선 백씨 진사공 묘지명

   (先 伯氏 進士公 墓誌銘)

 

정약용 찬(丁若鏞 撰)

 

공은, 휘(諱)는 약현(若鉉)이고 자는 태현(太玄)이다. 우리 정씨(丁氏)의 본관은 압해(押海)이니 지금 나주(羅州)에 예속되었다. 고려 때에 무관(武官)이 연달아 9세(世)를 이어 내려왔다.

 

시조 윤종(允宗)은 종3품 대장군이니 당시의 부장(副將)이다. 아조(我朝)에 들어와서 문직(文職)이 연달아 9세를 이어 내려왔다. 그 사이에 은사(隱士) 연(衍)이 있으니 우리 태조가 혁명하던 초기에 은둔(隱遯)하여 벼슬하지 않고 위로 조상을 잇고 아래로 후손을 열어줌으로써 우리 정씨의 복을 돈독히 하였다.

 

이로부터 이후로 승문원 교리(承文院校理) 자급(子伋), 부제학(副提學) 수강(壽崗), 병조 판서 옥형(玉亨), 좌찬성 응두(應斗), 대사헌 윤복(胤福) 강원 관찰사 호선(好善), 홍문관 교리 언벽(彦璧), 병조 참의 시윤(時潤), 우부승지 도복(道復)이 모두 옥당(玉堂)에 들어가서 서로 이어 9세를 전하였다.

 

승지공의 맏형에 휘 도태(道泰)란 분이 있는데, 음보(蔭補)로 통덕랑(通德郞)을 지냈으니 공에게 고조(高祖)이다. 증조부의 휘는 항신(恒愼)이니 진사이고, 조부의 휘는 지해(志諧)이니 음보(蔭補) 통덕랑이다.


아버지의 휘는 재원(載遠)이다. 영종(英宗) 임오년(1762, 영조 38)에 신방진사(新榜進士)로서 연석(筵席)에 올라가 제의(祭義)를 강론하였더니 특지(特旨)로 관직을 제수받았는데 벼슬이 오래되면서 치적(治績)이 있었고, 진주 목사에 이르러 임지에서 죽었다.

 

어머니 숙인(淑人)은 의령 남씨(宜寧南氏) 처사(處士) 하덕(夏德)의 딸이니. 개국원훈(開國元勳) 남재(南在)의 후예이다. 영종(英宗) 신미년(1751, 영조 27) 5월 초6일에 공을 광주(廣州)의 마현(馬峴) 집에서 낳았다. 그 이듬해 10월에 어머니가 세상을 버리니, 유모(乳母)를 따라 수년간 외가에서 자랐다.


점차 장성하여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배우고 약관(弱冠)에 감시(監試)에 합격하였다. 계묘년(1783, 정조 7) 봄에 감시(監試) 양장(兩場)에 합격하였으나 회시(會試)에 모두 합격하지 못하였다. 을묘년(1795, 정조 19) 봄에 이르러서야 진사시(進士試) 3등 제34인에 합격하였으니, 이때 나이 45세였다. 아, 늦었도다.


공은 염담 간정(恬澹簡靜)하여 분경(紛更 어지러이 변경함)을 좋아하지 않았다. 독서를 좋아하였는데 그 글읽는 소리가 낭랑하였다. 아직도 내가 어릴 때 일이 기억난다. 공이 바야흐로 《장자(莊者)》 소요유편(逍遙遊篇)과 제물편(齊物篇)을 읽고 있는데, 내가 그 글 읽는 소리를 즐겨 듣느라 책상 옆에 모시고 있으면서 돌아와 내 글읽는 것을 잊어버린 적이 있었다.


우리 선비(先妣) 윤 숙인(尹淑人)이 공을 자기 소생처럼 다독거리고, 공은 뜻을 받들어 잘 섬겼다. 아직도 내가 어릴 때의 일이 기억난다. 연천현(漣川縣) 관서에 있을 적에 윤 숙인이 공 및 형수 이씨(李氏)를 불러 당신 앞에서 쌍륙(雙陸)놀이를 하게 하였으니, 그 즐거움이 융융(融融)하였던 것이다


신유년(1801, 순조 1)의 화에 우리 형제 3인이 모두 기괴한 화(禍)에 걸려서 하나는 죽고 둘은 귀양갔다.그런데 공은 조용하게 물의(物議) 가운데 들어가지 않음으로써 우리 문호를 보전하고 우리 제사를 받드니, 어려운 일이라고 한 세상이 칭송하였다. 그러나 초임의 벼슬도 임명받지 못하고 마침내 초췌하게 죽었다. 아, 애석하도다.


공은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건륭(乾隆) 임자년(1792, 정조 16) 여름에 공이 약전(若銓)ㆍ약용(若鏞)과 함께 아버지의 위독한 급보를 듣고 운봉현(雲峯縣)에 이르러 부음(訃音)을 받고 밤낮없이 진주(晉州)로 달려가서 반구(反柩)하여 충주의 무덤에 장사지내고, 또 돌아와서 열수(洌水)의 여막에서 곡하였다.

 

공이 곡할 적마다 사람들이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하루는 적삼 소매가 불그스름한 것을 보고 살펴보았더니 혈루(血淚)였다. 복을 마치고도 사모하는 마음이 해이해지지 않아 그 집의 편액을 망하정(望荷亭)이라 하였다. 하담(荷潭)이 동남면에 있는데, 이 정자의 방향이 선영(先塋)을 바라볼 수 있으므로 이른 것이다.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최장방(最長房)이 신주를 옮겨간다."는 문구가 있다. 이것은 주자(朱子)가 초년에 기록한 것이고, 만년에 이요경(李堯卿)ㆍ호백량(胡伯量)ㆍ심한(沈僩)에게 답한 여러 편지에 모두, 조천(祧遷)해버리는 것을 정례(正禮)로 삼았다. 성호 선생(星湖先生= 호는 이익(李瀷)의 호) 및 안순암(安順菴=순암은 안정복(安鼎福)의 호)도 모두 만년의 뜻을 따랐다.

 

그리고 또 종족이 쇠체(衰替)하여 제사를 받들 수 없는 것을 염려한 나머지 드디어 중부(仲父) 옥천공(沃川公), 계부(季父) 가곡공(稼谷公)과 의논하여 장방(長房)이 신를 모셔가는 예법을 없애고 드디어 전승하여 가법(家法)으로 삼았다.

 

중년에 자호(自號)를「보연(鬴淵)」이라 하였다. 저서로는 시고(詩稿) 3권이 있다. 도광(道光 청 선종(淸宣宗)의 연호) 신사년(1821, 순조 21) 가을에 돌림 역질(疫疾)이 갑자기 유행하여 9월 초4일에 옛집에서 죽으니 향년이 71이다.


초취(初娶 : 李檗의 누님)는 경주 이씨(慶州李氏)이니 아버지는 보만(溥萬)인데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이고, 할아버지는 달(鐽)인데 호남 병마사(湖南兵馬使)이며 부제학 정형(廷馨)의 후예이다. 1남 3녀를 낳았다.

 

아들 진흥(震興)은 젖먹이 때 죽었다. 딸로 맏은 황시복(黃時福)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홍영관(洪永觀)에게 출가하였으니 지금 정언(正言)이며, 다음은 홍재영(洪梓榮)에게 출가하였다.

 

재취(再娶)는 의성 김씨(義成金氏)이니, 아버지는 주의(柱義)이고 할아버지는 응렴(應濂)인데 사헌부 장령이며, 학봉(鶴峯) 성일(誠一)의 후예이다. 3남 4녀를 낳았다. 아들은 학수(學樹)인데 사람됨이 상서롭고 착하며 문예가 일찍 성취되었으나 장가들고 나서 요사하였다.

 

다음은 만수(萬壽)이니 이를 갈기도 전에 요사하였다. 다음은 학순(學淳)이니 지금은 섭제(攝祭= 사를 대신 지내는 일)하게 하고 있다. 딸로 맏은 정협(鄭浹)에게 출가하고 다음은 권진(權袗)에게 출가하고, 다음은 김성추(金性秋)에게 출가하고, 다음은 목인표(睦仁表)에게 출가하였다. 홍영관(洪永觀)은 2남 1녀를 두었고, 나머지도 자녀를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이씨(李氏)는 경자년(1780, 정조 4)에 예천(醴泉)에서 죽으니 무덤은 충주 하담(荷潭) 선고(先考) 진주공(晋州公)의 무덤 동쪽에 있다. 공이 죽던 때에는 하담이 멀어서 가지 못하고, 의논하여 집 동산의 기슭에 묘를 쓸 만한 혈(穴)이 있으므로 유월(踰月 달을 넘김)하여 장사지내되 간좌 곤향(艮坐坤向)으로 무덤을 만드니, 뒷날 김씨(金氏)를 부장(祔葬)하려 하는 것이다. 명은 다음과 같다.

 

치고 상함이 없은 뒤에야 그 온전함을 알겠고 / 無毁無傷而後知其全
재앙도 없고 해도 없은 뒤에야 그 어짊을 알겠네 / 無菑無害而後知其賢


뭇사람은 허물어지되 홀로 확립하니 그 꿋꿋함을 알겠고 / 衆圮而獨立知其堅

뭇사람은 잃어버리되 홀로 지키니 그 연면(連緜)함을 알겠도다 / 衆喪而獨守知其緜

 

여기는 우리 백씨의 의관 간직한 곳 / 是惟我伯氏衣冠之藏

지나가는 향당과 종족으로 경의를 표하지 않는 이 없도다 / 鄕黨宗族過之者無不式焉

 

자료 : 다산시문집 제16권 >묘지명(墓誌銘)

묘의 소재지 : 경기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산 78-4(네비 : 능내리 97-2)

 

[각주]

 

[주01]신유년 …… 귀양갔다: 신유박해(辛酉迫害) 때 다산의 숙형(叔兄) 약종(若鍾)은 옥사(獄死)하고, 중형(仲

           兄) 약전(若銓)은 흑산도(黑山島)로 귀양가고, 다산은 장기(長鬐)로 귀양갔다가 다시 강진(康津)으로 이

           배(移配)되었다.


[주02]간좌 곤향(艮坐坤向) : 간방(艮方)을 등지고 곤방(坤方)을 향한 좌향. 정남과 정서 사이의 한가운데 15도 각

           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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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先伯氏進士公墓誌銘 - 丁若鏞

 

公諱若鉉字太玄。吾丁氏本貫押海。今隷羅州。在高麗時。武官連九世不絶。始祖允宗從三品大將軍。當時之副將也。入我朝文職連九世不絶。以其間有隱士衍。當我太祖定鼎之初。遯而不仕。上承而下啓。以篤我丁氏之祜。自玆以降。承文校理子伋,副提學壽崗,兵曹判書玉享,左贊成應斗,大司憲胤福,江原觀察使好善,弘文校理彦璧,兵曹參議時潤,右副承旨道復皆入玉堂。相承爲九世。承旨公長兄有諱道泰。蔭補通德郞。於公高祖也。曾祖父諱恒愼進士。祖父諱志諧蔭補通德郞。父諱載遠。英宗壬午以新榜進士登筵講祭義。以特旨授官。積仕有治行。至晉州牧使卒於官。母淑人宜寧南氏。處士夏德之女。開國元勳南在之裔也。英宗辛未五月初六日。生公于廣州之馬峴第。厥明年十月。母夫人捐背。從乳母鞠于外家者數年。稍長學書史。弱冠中監試。癸卯春中監試兩場。皆不利於會試。至乙卯春。始克中進士試三等第三十四人。時年四十五。嗟乎晚矣。公恬澹簡靜。不喜紛更。好讀書。其聲瀏亮。尙記鏞幼時。公方讀莊子逍遙齊物之篇。鏞樂聽其讀書聲。嘗侍几案之側。忘歸而讀吾書也。吾先妣尹淑人撫公如己出。公承意善事。尙記鏞幼時在漣川縣署。尹淑人召公及嫂李氏。使於膝下賭雙陸。其樂融融然也。辛酉之禍。吾昆弟三人竝離奇禍。一死二謫。公寥然不入於物議之中。以保我門戶。承我祭祀。一世之所公誦爲難矣。而一命不及。卒憔悴以歿。嗚呼惜哉。公性至孝。乾隆壬子之夏。公與銓鏞聞急至雲峯縣。星而赴晉州。反而葬乎忠州之兆。又歸而哭于洌水之廬。公每哭。人無不感激流淚者。一日見衫袖微紅。視之血淚也。服旣闋猶思慕不懈。扁其室曰望荷亭。謂荷潭在東南。而斯亭向之。可以望先隴也。朱子家禮有最長房遷主之文。此是初年所記。其晚年答李堯卿胡伯量沈僩諸書。竝以祧去爲正。星湖李先生及安順菴皆從晩年之義。且念宗族衰替。無可以奉祭祀者。遂與仲父沃川公。季父稼谷公。議去長房之禮。遂傳爲家法。中年自號曰鬴淵。所著詩稿有三卷。道光辛巳之秋。時沴猝行。九月初四日。臯復于舊廬。壽七十一。前娶慶州李氏。父溥萬同知中樞府事。祖父鐽湖南兵馬使。副提學廷馨之後也。擧一男三女。男曰震興。夭於乳下。女長適黃時福。次適洪永觀。今正言。次適洪梓榮。再娶義城金氏。父柱義。祖父應濂司憲府掌令。鶴峰誠一之後也。擧三男四女。男曰學樹。爲人祥善。文藝夙成。旣娶而夭。次曰萬壽。未齔而夭。次曰學淳。今使之攝祭。女長適鄭浹。次適權袗。次適金性秋。次適睦仁表。洪永觀有二男一女。餘有子女竝幼。李氏以庚子歲卒於醴泉。墓在忠州荷潭。先考晉州公之墓東。公歿之日。遠莫之赴。議於家園之麓有穴可封。踰月而葬。封以艮坐。他日擬以金氏祔焉。銘曰

無毀無傷而後知其全。無菑無害而後知其賢。衆圮而獨立知其堅。衆喪而獨守知其緜。是唯我伯氏衣冠之藏。鄕黨宗族過之者。無不式焉。

[주01] 載 : 戴

 

여유당전서 > 第一集詩文集第十六卷○文集 / 墓誌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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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若鉉 妻 李氏

 

[생졸년] 1750년(영조 26)~ 1780년(정조 4)

[본관] 경주(慶州)

 

丘嫂恭人李氏墓誌銘 - 丁若鏞 撰

 

鏞孩提時。隨父母往漣縣。尙憶先妣淑人於酒漿之暇。與丘嫂爲樗蒲戲。呼三喚六。其樂融融。後數年先淑人棄背。鏞時纔九歲。頭多蟣蝨。塵垢被面。丘嫂日勞苦梳洗。而鏞又掉脫不肯就丘嫂。丘嫂持梳箄盥柈。追所到挼摩乞憐。走或執之。啼或嘲之。訕誚諧謔。雜然喧呶。滿室爲之一笑。皆以鏞爲可憎也。丘嫂姿性軒昂。洒然若偉男子。不碌碌爲細璅。而先淑人旣沒。先君又解官家居。產益落。粢盛雞黍之供。無以取。丘嫂獨自庀治。釧釵佩服之具。皆歸變賣。甚則無綿之袴以經冬。而家人且莫知也。今家力稍振。饘粥可繼。而丘嫂不及享。可悲也。丘嫂姓李氏。系出慶州。始祖高麗名臣諱 謁平。後有諱 廷馨 吏曹參判。以文學名。後五代有諱 鐽。力扼虎。投筆爲武科。至全羅兵馬節度使。是生諱 溥萬。娶淸州韓氏 宗海 女。以乾隆庚午三月二十四日生丘嫂。纔踰笄。歸于伯氏。歲庚子隨先君往醴泉郡。患疫而歿。四月十五日也。返葬于忠州荷潭負辛之原。是維吾祖父母與父母之兆也。銘曰

事姑未易。姑而繼母則難。事舅未易。舅而無妻則難。遇叔未易。叔而無母則難。能於是無憾。是惟丘嫂之寬。

[주01] 辨 : 辦

[주02] 高麗 : 新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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