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신도비명

권율장군 신도비 명(權慄 將軍 神道碑 銘)

야촌(1) 2009. 1. 11. 09:10

권율장군 신도비명(權慄 將軍神道碑銘)

 

◈ 시대 : 조선

◈ 연대 : 1861년(철종12년)

◈ 유형/재질 : 비문/돌

◈ 문화재지정 : 기타문화재 - 경기도 기념물 제2호

◈ 크기 : 높이 186Cm, 너비 82cm, 두께 40cm

◈ 소재지 :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석현리 산 168-1번지(양주시 장흥면 권율로 223)

◈ 서체 : 해서(楷書)

◈ 찬자/서자/각자 : 신흠(申欽) / 이유원(李裕元) /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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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율 신도비(權慄 神道碑)

 

조선국 팔도도원수 증 영의정(朝鮮國 八道都元帥 贈 領義政)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 시(謚) 충장(忠莊) 권공(權公) 신도비명(神道碑銘) 병서(并序)

대광보국 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영의정 겸 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세자사(議政府領議政兼領經筳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 신흠(申欽)이 글을 짓고,

 

정헌대부(正憲大夫) 예조판서 겸 지경연 춘추관 의금부사 홍문관제학 동지성균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 원임 규장각 직제학(禮曹判書兼知經筳春秋館義禁府事弘文館提學同知成均館事 五衛都摠府都摠管原任奎章閣直提學) 이유원(李裕元)이 쓰고 아울러 전서하다.


증 효충 장의 적의 협력 선무공신 대광보국 숭록대부(效忠仗義廸毅協力宣武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영의정 겸 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세자사(議政府領議政兼領經筳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 영가부원군 행 자헌대부(永嘉府院君行資憲大夫) 의정부 우참찬 팔도 도원수(議政府右參賛八道都元帥) 권공의 묘에 비문이 이미 갖추어져 있다.

 

우의정 신흠(申欽)이 말을 다듬어 새기기를, 『공이 쳐 없앤 공적은 간이(簡易 : 최립의 호) 최립(崔岦)이 행주(幸州 : 지명)의 비석에 이를 기록하였고, 공의 일과 행위의 아름다움은 공의 사위 오성(鰲城) 재상 이항복(李恒福)이 유수(幽隧 : 묘지(墓誌)에 기록하였다.

 

마땅히 덧붙일 것은 없으나 먼 옛날 제도와 문물을 돌아보니, 공의 뛰어나고 빛나는 행적에 대해서 응당 명(銘)을 새기고 대로변에 세워 후세에 알리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공의 이름은 율이고 자는 언신(彥愼)이다. 원조(遠祖 : 고조 이상의 먼 조상)는 행(幸)이니 신라의 종성(宗姓)이다. 견훤(甄萱)을 토벌한 공이 있어, 고려 태조에게 권(權)씨 성을 하사받고 안동(安東)에 봉해지니 그대로 본적으로 삼았다.

 

13대인 부(溥) 정승으로 장수와 복을 누렸으며, 군(君)에 봉해진 분이 아홉 분이셨다.

3대를 지나 찬성을 지낸 양촌(陽邨) 근(近)은 공의 6대조이다.

 

증조할아버지, 교(僑)는 양근군수(楊根郡守)를 지냈고, 할아버지 적(勣)은 강화부사(江華府使)를 지냈다.

아버지 철(轍)은 의정부 영의정으로 네 분 임금을 모신 태평시대의 재상이다.

 

어머니는 조씨(曺氏)로 적순부위(廸順副尉) 승현(承睍)의 딸이며, 하성부원군(夏城府院君) 익청(益淸)의 후손이다. 가정(嘉靖) 정유년(중종 32, 1537년)에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는 놀이를 좋아하지 않았고, 커서는 화려한 의복이나 사치스러운 습성이 없었다.

의정공(議政公)이 기특하게 여겨, 『우리 가문에 인재가 있구나!』하였다. 경학 연구에 매우 부지런하였으나 젊어 불운하여 과거에 급제하지 못 하였다.

 

만력(萬曆) 임오년(선조 15, 1582년)에 식년 문과에 합격하였으니 이때 나이 46세였다.

식견이 있는자 중 더러 공이 장상(將相)이 될 그릇임을 알았다. 승문원 정자(正字). 저작(著作). 박사(博士)를 거쳐 성균관 전적(典籍)으로 승직하였고, 다시 사헌부 감찰, 예조좌랑, 호조정랑, 전라도사(全羅都事), 경성판관(鏡城判官)을 지냈다.

 

신묘년(선조 24, 1591년)에 호조정랑에 제수되었다가 의주목사(義州牧使)로 등급을 뛰어넘어 제수되었으나 임진년(선조 25, 1592년) 봄, 사건에 연좌되어 파직되었다. 여름에 일본국의 우두머리 수길(秀吉)이 오만스럽게 명나라를 정복한다고 수가(秀嘉). 행장(行長) 등 무리 60만 명으로 쳐들어오니 온 나라가 위급하였다.

 

선조 임금이 하교하시기를, 『내가 권율(權慄)의 재주가 쓸 만하다고 들었다.』하시며, 광주목사(光州牧使)로 삼으니 공이 그날로 임금을 뵙고 하직인사를 드렸다. 적이 조령(鳥嶺)을 넘어 충주(忠州)를 함락했고, 순변사 신립(申砬)은 전사했다.

 

적이 기세를 몰아 한양에 육박하니 임금께서 서쪽으로 피난하셨다. 전라도관찰사 이광(李洸)과 충청도관찰사 윤국형(尹國馨), 경상도관찰사 김수(金睟)가 병사 10만 명을 이끌고 진위(振威 : 경기도 평택)에 도착하였다. 이광(李洸)이 부하 장수들에게 방책을 물으니 공께서 『주공께서 나라 안의 군사를 쓸어 오셨으니, 나라의 존망이 이 싸움에 달렸습니다.

 

지금 마땅히 대군을 이끌고 곧 바로 수원(水原)으로 가 통진(通津)을 거쳐 조강(祖江)을 건너 임진(臨津)을 가로 막은 다음, 행재소(行在所 : 임금의 궁 밖 임시 거처)에서 명을 받든다면, 우리는 기세를 얻어 가히 도모함이 클 것입니다』하였다. 이광(李洸)이 공의 말을 따르지 않더니, 적을 보기도 전에 궤멸되었다.

 

공은 광주(光州)로 돌아와 분개하며 말하기를, 『종묘사직은 폐허가 되고, 주상께선 피난하셨다.

신하된 자가 어찌 나라가 망하는 것을 앉아 기다릴 것인가?』하며, 인근 군(郡)에 격문을 돌려 병사 1천 5백을 얻었다.

 

이치(梨峙)에 나아가 주둔하며 영남(嶺南)과 호남(湖南)의 길목을 죄니, 영남(嶺南)의 적과 금산(錦山)의 적이 힘을 합쳐 공격하여 왔다. 공께서 칼을 빼어들고 적의 시퍼런 칼날을 무릅쓰고 앞장서니, 여러 장수들이 서로 말하기를, 『선비가 어찌 이와 같은가?』하고, 사기가 백배하여 적을 고개 아래에서 패퇴시켰다.

 

조정에서 공에게 거진(巨鎭)을 맡기고자 가을에 나주(羅州)로 옮겨 지키도록 하였다.

그러나 관소로 가기도 전에 전라관찰사 겸 순찰사로 제수되니 공께서 통곡하며 명을 받들었다.

 

전주에서 병사를 많이 선발하여 정병 1만을 직접 이끌고 서쪽으로 올라가 수원(水原) 독성(禿城)에 주둔하며 굳게 지킬 것을 계획하였다가 서울의 적을 위협하고자 바로 서로(西路 : 황해도와 평안도 지역)로 이동하였다.

 

수가(秀嘉)는 허를 찔릴 것을 우려하였고, 행장(行長)은 배후를 염려하여 의논하였다.

마치 제방이 물을 막는 것처럼 관서(關西)의 인심을 앉아서 결집시켰다.

 

선조는 상방검(尙方劍)을 풀어 급히 하사하시며,『장수들 가운데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는 이걸로 처결하라』하였다. 또 여러 진의 의병들 모두를 공이 통솔하도록 하였다. 서울의 적은 공이 그들의 예봉을 꺾을 것을 걱정하고, 수만의 군사를 세 개의 진영으로 나누어 싸움을 걸어왔다.

 

그러나 공은 성벽을 견고하게 지키며 응하지 않다가 간혹 기병을 내어 적을 격파하였다.

5일이 지나자 적은 진영을 불사르며 퇴각하였고 경기의 적들도 역시 군사를 거두어 서울로 들어갔다.

 

계사년(선조 26, 1593년)에 독성(禿城)으로부터 양천(陽川)으로 방어선을 옮겨 병사를 나누어 지원하면서 곧바로 양천강(陽川江)을 건너 보루의 서쪽 안현(鞍峴 : 경기도 시흥)으로 나아가고자 하였으나 여러 장수들이 극력 저지하여, 고양(高陽)의 행주산(幸州山)에 진을 쳤다.

 

서울의 적은 세력이 한참 불었는데, 공의 군대가 홀로 떨어져 깊이 들어온 것을 보고 2월 12일 적은 그 정예를 모두 모아 두 길로 나누어 밤에 행주(幸州) 목책에 들이닥쳤다. 공이 일어나 살펴보니 날카로운 무기가 들을 덮고, 목책을 둘러싼 적들이 여러 겹이었다.

 

공은 즉시 사졸들에게 음식을 전하고, 활 잘 쏘는 자들을 택하여 성 위에 쌓은 낮은 담 밑에 배치하여 화살을 빗발처럼 쏘게 했다. 또한 힘센 자를 골라 큰 돌이나 바위를 집어 던지게 하고 이어 거자화(車子火)를 쏘게 했다.

 

아침부터 불 뿜기 시작한 공방전은 저녁까지 계속하여 적은 아홉 번 진격하였으나 아홉 번 모두 격퇴되었다. 그러자 적은 불붙은 풀단을 가지고 함성을 지르며 목책에 오르기 시작했다. 공은 상방검(尙方劔)을 들고 서서 여러 장수를 독려하니, 장수들이 앞을 다투어 나서서 싸워 적은 마침내 물러갔다.

 

적의 장수와 병졸 중에 사상자는 그 수를 다 기록할 수 없으며 무기를 버리고 달아나는 적을 130여 급이나 베었다. 이겼다는 소식을 듣고 임금께서는 공을 특별히 자헌대부(資憲大夫)로 품계를 올리고, 장수와 사졸들은 각각 차등 있게 상을 내렸다.

 

명나라 유격(遊擊) 사대수(査大受)가 찾아와 공을 보고 찬탄하며, 『외국에도 또한 진정한 장수가 있었도다!』하였다. 경략 송응창(宋應昌)도 자문(咨文)을 보내어 공을 칭찬하기를,『권(權) 포정사(布政司)는 가히 어지러운 나라를 바로 잡은 충신이요, 중흥의 명장이라 할 수 있다』하면서 비단과 백금 등으로 포상하였다.

 

병부 상서 석성(石星)이 상주하기를,『배신(陪臣 : 제후의 신하가 천자에게 자신을 지칭하는 말) 권율(權慄)이 홀로 고성을 지킴으로써 강적에 대항하였다.』고 하였다. 명의 황제는 이를 가상히 여겨, 『전라도관찰사가 죽인 적이 매우 많아 그 나라 백성들이 사기가 진작되었도다』고 하였다.

 

공은 행주의 적들을 무찌른 뒤에 진영을 파주로 옮겼다. 파주는 서쪽으로 뻗은 큰 길이 있어 적들이 꺼려했다. 또한 행주의 패전을 설욕하기 위하여 피로써 하늘에 제사하고 공을 침범하고자 했으나 끝내 감히 엿보지 못하였다. 4월 서울의 적들이 퇴거하였다.

 

공이 장차 날쌘 병사로 이를 추격하려 할 때, 명의 제독 이여송(李如松)이 마침 계책을 써서 적을 물리치려 한다고 하여, 공은 남쪽으로 내려가지 못하였다. 6월, 제도 도원수가 되어 영남(嶺南)에 주둔하였다.

 

겨울에 형조판서가 되었다가 의정부 우참찬으로 전임되었다.

갑오년(선조 27, 1594년) 봄에 병으로 사직하니 선조가 이를 가슴 아파하여 어의를 보내 여러 번 문병하였다.


어떤 무사가 진영을 이탈하여 전주(全州)에 숨은것을 공이 찾아내 그를 참하였다. 체찰사가 그 가족의 소청을 듣고 공의 죄를 청하였다. 공이 파직되자 웃으며『장수가 된 지 수년인데 군법에 따라 군졸 한 명을 참할 수 없단 말인가?』하며, 사직하고 고향인 강화(江華)로 돌아갔다.

 

얼마 후 한성 판윤, 호조판서, 지의금부사에 제수되고 비변사 당상관을 겸직하였다. 입시한 자리에서 선조 임금은 교를 내려,『경이 아니면 국가가 어찌 지금에 이를 수 있었겠는가!』하시며, 내구마(內廐馬 : 임금의 거동 때 쓰는 말로 내사복시에서 기름)를 하사하였다. 병신년(선조 29, 1596년)에 충청도관찰사에 제수되었다.


선조 임금께서 도원수(都元帥)로 임명하시며,『경의 충성된 노고와 빼어난 용략은 시대를 뛰어넘고 천하에 이름을 떨쳤으니 적국도 경의 위엄을 두려워하는 도다. 원수의 직책은 경이 아니면 그 누가 이에 미치겠는가?』하셨다.

 

부임지로 떠나기 전 하직 인사를 드리러 임금을 뵐 때, 임금께서 술을 내려주며 노고를 위로하고, 다시 내구마(內廐馬)를 하사하였다. 7월 호서(湖西 : 충청도)의 선비 이몽학(李夢鶴)이 반란을 일으켜 연달아 다섯 읍을 함락시켰다.

 

조정에서 공에게 명하여 이를 토벌하도록 하였다. 공이 군사를 이끌고 급히 적을 향해 나아가니, 이미 홍주(洪州)에서 섬멸되었다. 그 남은 무리를 다스리되 범죄 사실을 자세히 밝혀, 호서 지방은 평안을 되찾았다.


겨울에 일본으로부터 우리나라 사람이 말을 전하되,『청정(淸正)이 다시 침략하고자 한다』고 하자 조야가 흉흉하였다. 공이 말하기를,『설령 청정(淸正)이 다시 쳐들어온다할지라도 이를 대비할 방책을 세워야지, 머리를 맞댄 채 근심하고 걱정만 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하며, 목책을 재정비하고 적을 제압할 수 있는 방책을 아뢰었다.

 

정유년(선조 30, 1597년) 가을에 과연 다시 침입하여 진주(晋州)와 남원(南原)을 함락하고 곧바로 경기(京畿)를 향하여 진격하여 왔다. 공이 싸우기도 하고 행군하기도 하며 적의 목을 베어 조정에 보고했다.

 

임금의 명령을 받들어 조정에 나아가니 공에게 한강 방어를 맡기셨다. 조정에서 돌아온 다음날 서둘러 명나라 장관(將官) 팽우덕(彭友德)과 함께 강을 건너 직산(稷山 : 충청남도 천안)에서 싸워 적을 대파하였다.

 

겨울에 명나라에서 크게 군사를 일으켜 제독(提督) 마귀(麻貴)와 경리(經理) 양호(楊鎬)를 파견하여 울산(蔚山)의 적을 공격하였다. 공은 군사를 이끌고 돌격대로서 앞장서서 돌진하며, 뒤에 처진 자는 베어 돌리자, 군사들이 외성에 뛰어 올라 개미떼처럼 달라붙어 기어 올라가 함락시켰다. 제독과 경리는 입을 모아 칭찬하였다.


무술년(선조 31, 1598년) 봄에 병으로 면직을 청하자 선조 임금이 위로하는 유서(諭書)를 내려 간곡히 만류하였다. 명나라에서 병부상서 형개(邢玠)를 파견하여 세 제독을 독려하며 길을 나누어 적을 토벌하도록 하였다.

 

공은 유정(劉綎)을 따라서 순천(順天)의 적을 공격하였으나 유정(劉綎)은 본래 싸울 마음이 없어 신중하게 대치할 뿐 나아가지 않았고, 공이 여러 번 작전을 건의했으나 끝내 듣지 않았다. 오래지 않아 적은 수군 도독 진린(陳璘)에게 대패하였고, 또 일본국 추장 수길(秀吉)이 죽자 각 도의 적들이 군사를 거두어 돌아갔다.


기해년(선조 32, 1599년) 여름에 공이 병으로 사직을 고하자 선조 임금이 체직을 허락하였다.

7월 6일 끝내 일어나지 못하니 향년 63세였다. 선조 임금은 몹시 슬퍼하시며 조회를 거두시고 부의를 많이 내렸다. 그리고 따로 관원을 보내 제사를 지내도록 하고 공에게는 찬성을 증직하였다.

 

7월에 양주 홍복산(洪福山) 북서쪽을 등진 곳에 하관하니 이곳은 선영이 있는 곳이다. 7년 후 을사년(선조 38, 1605년) 논공할 때 선무공신(宣武功臣) 일등에 책록되었으며 영의정부원군(領議政府院君)에 추증되었다.

 

공의 전부인은 창녕(昌寧) 조씨(曺氏)로 첨정 휘원(輝遠)의 따님이시다.

온화하고 예의범절이 엄정하며 화목하고 온후하니 부녀의 모범됨이 있었다. 24세에 돌아가셨고 정경부인(貞敬夫人)에 추증되었다.

 

오직 딸 하나만 두었는데 오성(鰲城 : 이항복)공에게 출가하여 2남 1녀를 낳았다. 장남은 성남(星男)이요,

차남은 정남(井男)이니, 모두 음사(蔭仕)로 군수를 지냈다. 딸은 윤인옥(尹仁沃)에게 출가했다.

 

성남(星男)의 전처는 판서 권징(權徵)의 딸로 1남 1녀를 낳았고, 후처는 주부(主簿) 김계남(金繼男)의 딸로 2남 4녀를 낳았다. 정남(井男)은 승지 윤의(尹顗)의 딸을 맞아들여 1남 1녀를 낳았다. 윤인옥(尹仁沃)은 1남 1녀를 낳았다.


후부인은 박씨(朴氏)로 죽산(竹山)의 명망이 있는 집안의 현령 세형(世炯)의 딸이다.

사리에 밝고 지혜로우며 법도가 있어 시어머니를 봉양하고 공을 받드는데 있어 일체 순종하여 거슬림이 없었다.

 

공이 세상을 떠나자 미망이라 자처하며 절제와 시제를 지내는데 있어 예법에 맞지 않음이 없었으며, 때로 손수 의복을 지어 올리고 나서 이를 불살랐다. 공보다 10년 후인 무신년(선조 41, 1608년) 2월에 돌아가시니 62세였다.

 

정경부인(貞敬夫人)에 봉해졌고, 4월 공의 묘지에 합장되었다. 아들이 없어 공은 둘째 형의 아들 익경(益慶)을 후사로 삼았으니, 익경(益慶)은 음직으로 현감이 되었다. 전처는 이광륜(李光輪)의 딸로 3남을 두었으니, 음직으로 현감을 지낸 집(㠎)과 립(岦), 업(嶫)이다.

 

이정(李淨)의 딸을 후처로 맞아 1남 3녀를 두니, 아들은 헌(巘)이고, 큰 딸은 이도기(李道基)에게 출가하였고, 나머지는 아직 어리다. 집(㠎)은 2남 1녀를 두었고, 업(嶫)은 1남을 두었으며, 도기(道基)는 1남을 두었으나 모두 어리다.


공은 신장이 8척으로 체격이 크고 용모가 훌륭하며 엄중한 풍채를 지녔다. 행실은 바르고 성실하고 검소하였으며, 부모형제에 대해서는 기쁜 마음으로 화목하게 지냈고, 상제에는 애도와 성심을 다하였다.

 

진실하며 소박하였고 종족을 대우함에 기꺼이 극진함을 다하였고, 천성이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해 집에는 물건이 오래 남아 있지 않았다. 일처리는 치밀하고 신중하였고, 거행하는 데는 필히 만전을 기하였다.

 

적을 맞아 진을 치고 대치하면서도 말은 가지런하면서 한가한 듯이 하였고, 몸을 일으켜 장군이 되어서 다시 군영을 거느리되 몸소 사졸보다 앞에 섰다. 호령은 엄하고 분명하게 하되 병사들을 가까이 하였고, 공을 세울 수 있도록 도모하곤 하였다.

 

많은 수의 적을 무찌르는데 적은 수로써 상대하였으니 비록 옛 명장이라도 미치지 못할 것이 있었다.

명나라 상서 석성(石尙)이 우리나라 사신을 만나서 공의 문안을 물으며 말하기를,『귀국에 만약 권(權)공 같은 사람이 여럿 있다면 무엇을 걱정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왜인 역시 우리나라 사람을 보면 반드시 권(權) 원수는 어디 계신가를 물었으니, 중국과 오랑캐가 다 같이 탄복함이 이와 같았다. 군중에 있으실 때도 성지(聖旨) 및 명나라에서 온 자문(咨文)을 걸어 붙이면서,『내가 죽으면 이의정(李議政 : 이항복)이 반드시 내 묘지를 쓸 것인데 이것이면 족할 것이다』하였다.

 

의정의 자리에서 물러난 뒤에 고향인 강화(江華)에 집 한 칸을 짓고 살며 호를 만취당이라 한 것은 그 뜻이 깃든 것이다. 오호라! 부럽도다. 공이 원수로 계실 때 나는 막좌(幕佐)로 있으면서 우경(虞卿)이 백벽(白壁)을 받은 만큼의 사랑을 받았지만 중랑 황견(黃絹)같은 문장 실력이 없었다.

 

일찍이 공에 대해 평하기를『높은 산과 깊은 숲속의 호랑이와 용과 같이 변화무쌍하다』하였다.

분양(汾陽 : 당 현종 때의 명장 곽자의)의 공을 이루었으면서도 벼슬은 중서(中書)에 이르지 못하였고, 진공(晋公 : 당 헌종 때의 재상 배도의 봉호)의 덕을 지녔으나 녹야(綠野 : 배도의 별장 녹야당)의 즐거움은 누리지 못하였으니, 이는 탄식할 만한 것이다.

 

그러나 공은 절의를 위해 자신의 몸과 안위를 돌보지 않고 진력하여 공신록에 영구히 보존되었으니, 그 점에 있어서는 저 두 공(곽자의와 배도)과 더불어 짝을 이룰 만하다. 명에,

지난 임진년에, 저 생물들이 준동하여, 탐악한 마음 지니고 이리 뛰고 저리 뛰니
무찌를 자 누구인가 널린 것이 적들인데. 우리 임금께서 하문하시길,

『누가 군사를 지휘할꼬? 공에게 달렸구나』

 

공이 중임을 맡고 조선 팔도 지휘하니 꺼진 재에 불붙었네.
행주에서 크게 무찔러 큰 근심을 없애고 직산(稷山) 울산(蔚山) 누비고

육지와 물을 거침없이 내달리며, 목을 잡고 등을 치니 감히 넘볼 수가 없도다.


북두 다시 회복되고 황도 다시 열림은 공의 공적이요.
사람의 꾀 다 모으고 귀신도 함께 함은, 공의 계책이라.
밝고 밝은 신령함이여! 높고 높은 명성이여! 모두 공의 경사로다.


까마득히 솟은 산과 우뚝이 서있는 비석, 바로 공의 무덤이네.
공의 막좌(幕佐)로 공의 업적 드날리려 묘 앞에 새기네.



추기(追記)


임진왜란 때에 공께서 여러 번 뛰어난 공을 세우니, 명의 황제가 조서를 내리며,『지금 전라도 관찰사가 적을 많이 죽여 그 나라 백성들이 이를 존경하니 사기가 진작할 만 하도다』하시며 홍려시(鴻臚寺 : 중국의 관명, 외국에 관한 사무와 조공의 일을 담당함.) 관원을 보내 선유하였다.

 

명나라에서 출병한 장군과 사병들이 서로『권(權)가의 군사는 다른 군영과는 구별된다』말하였다.

총독군문 경략 송응창(宋應昌)은 본국에 자문(咨文)을 보내 따로 포상하였다. 대략에,『조선 삼도(三道)의 모든 군현들이 모두 소문만 듣고도 싸우지 않은 채 달아나 궤멸되었다.

 

일찍이 영웅 걸사로서 의병을 일으켜 큰 변란을 막아 강토를 지키고 회복을 도모하는 자가 한 사람도 없었으니 조선에는 사람이 없다고 하겠다. 그러나 권(權)아무개가 홀로 고립된 고을을 지키고 뭇 사람을 모아서 여러 번 기묘한 계책으로 많은 적들에 대항하였다.

 

근래에는 다시 모래주머니를 식량으로 꾸며 왜적을 유인하여 격파하였으니 이는 바로 어지러운 나라를 바로잡은 충신이요, 중흥의 명장이다』하였다. 병부상서 석성(石星)이 상주하기를,『배신(陪臣) 권(權)모가 홀로 고립된 성을 지켜 강적에 대항하였다.』하였다.

 

선조대왕께서 그 무렵에 유지를 내려 장려하기를,『충성된 노고와 빼어난 용략은 당대에 뛰어나고 천하에 명성을 떨쳤으니 적국도 경의 위엄을 두려워하는 도다』하셨으며, 또『경이 아니면 국가가 어찌 오늘에 이를 수 있었으리요』하셨다.

 

이 몇 가지는 모두 백사(白沙 : 이항복)가 지은 행장, 묘지 및 전첩비의 뒷면에 실려 있으며, 마지막으로 상촌(象邨) 신(申)공이 이 비석의 뒷면에 다시 밝혔다. 몇 년 후에 나도 특별히 그 뒷면에 덧붙이니, 이 몇 가지는 마땅히 거듭 써야 하는데도 한 번도 쓰지 않았다.

 

누가 중복된(疊床架屋) 것이라 말하겠는가? 자손 중에서 원 비석에 싣지 않은 사람은 평시령(平市令 : 권율)의 두 번째, 세 번째 사위인 참판 조수익(趙壽益)과 강원지(姜元祉)이다. 현감은 1남을 두었으니 혁으로 판관을 지냈고, 업(嶫)은 2남을 두었으니 숙(俶)과 휴(休)이며, 헌(巘)은 2남을 두었으니 임(任)과 인(仁)이다.

 

판관은 2남을 두었으니 상형(尙珩)과 상규(尙珪)이고, 장재랑 숙(俶)은 4남을 두었으니, 상중(尙中). 상정(尙正). 상경(尙經). 상칭(尙稱)이며, 임(任)은 3남을 두었으니 상충(尙忠). 상문(尙文). 상질(尙質)이다.

 

식(寔)은 상형(尙珩)과 상규(尙珪)의 직계자손이라고 한다. 외손들은 많아서 다 기록할 수가 없다.오호라! 예부터 중흥의 군주는 인재를 얻어서 맡기지 않음이 없었다. 주(周)나라의 방숙(方叔)과 소호(召虎) 두 분이 그러하며, 한(漢)나라의 운대(雲臺 : 후한의 명제가 공신들을 추념하여 등우(鄧禹) 등 28명의 초상화를 그려 걸어 놓은 대)의 여러 장수나, 당(唐)나라의 곽자의(郭子儀)와 이광필(李光弼) 같은 인재들이 모두 충의와 정성으로 임금의 각별한 신임을 얻어 공을 세운 것 마치 물동이의 물을 쏟는 것 같이 쉬웠다.

 

그러나 송(宋)나라의 이약곡(李若谷)과 장관(張觀) 같은 사람은, 군신 사이를 이간질하는 말에 현혹된 군주로 인해, 끝내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공의 지혜와 용기가 옛날 인물들보다 뛰어났다고 해도 선조의 인재를 알아보는 명철함과 전권을 위임할 정도의 신임이 없었다면 어찌 성취함이 있었으리요.

 

그러나 당시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 같은 분은, 오히려 관리들의 적대함을 면하지 못하여 거의 죽을 뻔했다. 그러므로 공의 충성과 선도(善道)가 절로 왕과 결합한 것임을 알 수 있으며, 성군과 훌륭한 신하의 만남은 천재일우라고 이를 만한 것이다.


숭정(崇禎) 계해년(숙종 9, 1683년) 중춘(仲春 : 음력 2월) 일에 은진(恩津) 송시열(宋時烈)이 쓰다.

삼가 생각하건대 선조대왕이 우리나라를 중흥할 때 원수(元帥) 권공(權公)은 여러 번 왜적을 평정함으로써 큰 공훈을 세웠다. 후에 상촌(象邨) 신문정공(申文貞公)이 신도비를 짓고, 우암(尤菴) 송문정공(宋文正公)이 추기를 썼다.

 

수백 년이 지나 비문이 오래되어 글자가 명확하지 않으므로 공의 9대 손 용이 비로소 정민(貞珉 : 비석)을 세우고자 하여 유원(裕元)에게 글을 써주기를 부탁하였고, 또 뒤이어 새겨 기록하였다. 유원(裕元)은 다음과 같이 글을 썼다.


공의 뛰어난 공적과 아름다운 덕행은 이미 두 분 선생의 문장이 있으니 지금 보충할 만 한 것은 오히려 한두 가지에 불과하다. 공의 처음 시호는 장렬(莊烈)이었으나 나라에서 시호를 충장(忠莊)으로 고치고, 행주(幸州)에 사당을 세우고 ‘기공(紀功)’이라는 현판을 내려주었다.

 

공의 아들 익경(益慶)은 현감으로 강도(江都 : 강화도)에서 순국하니 관직을 추증하고 정려(旌閭 : 충신, 열녀, 효자를 표창하기 위해 세우는 정문)를 세웠다. 이는 모두 기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친인척의 자손들은 모두 다 기록할 수 없으니, 오직 직계자손 몇 사람만 여기에 기록한다.

 

익경(益慶)은 4남을 두었으니 장남은 집(㠎)으로 현감을 지냈고, 집(㠎)은 3남을 두었으니 장남은 혁으로 판관을 지냈으며, 혁은 3남을 두었으니 장남은 상형(尙珩)으로 현감을 지냈다. 상형(尙珩)은 1남을 두었으니 현감을 지낸 식(寔)이다.

 

식(寔)의 양자 수린(壽麟)은 현감을 지냈고, 수린(壽麟)은 2남을 두었다.

장남은 종(綜)으로 현감을 지냈으며, 종(綜)의 양자 성호(聖祜)는 부사로서 참판에 추증되었다. 성호(聖祜)는 1남을 두었으니 안창군(安昌君) 용이며, 용의 양자는 최조(最朝)이다.

 

공의 사위 백사(白沙 : 이항복)공은 유원(裕元)의 9대조이니 예전에 백사(白沙 : 이항복)공이 공의 묘지(墓誌)를 썼고, 지금 용이 선조를 추모하고 이를 세상에 밝히기 위하여, 유원(裕元)에게 글을 부탁해서, 비석에 새긴다. 유원(裕元)이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그 사실을 모아 좌측에 쓴다.

신유년(철종 12, 1861년) 중하(仲夏 : 음력 5월) 외가 10대 손 월성(月城) 이유원(李裕元)이 삼가 적고, 숭정기원후 234년 신유년 겨울에 세우다.

 

국역(國譯) : 박경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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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原文)


朝鮮國八道都元帥贈」
朝鮮國八道都元帥 贈領義政永嘉府院君謚忠莊權公神道碑銘并序」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 經筳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 世子師申 欽撰」
正憲大夫禮曹判書兼知 經筳春秋館義禁府事弘文館提學同知成均館事五衛都摠府都摠管原任 奎章閣直提學李裕元 書 并篆」


贈效忠仗義廸毅協力宣武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 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 世子師永嘉府院君行資憲大夫議」政府右參贊八道都元帥權公之墓麗牲之石旣具右議政申欽修辭而勒之曰公之攻討之績簡易崔公岦紀之於幸州公之事行之懿公之壻鰲城相國」李公恒福誌之於幽隧宜無以加諸顧稽古昔典章如公茂烈行應銘法法當表之大達以詔来者公諱慄字彥愼遠祖幸新羅宗姓討甄萱有功麗祖賜姓」權封之安東仍籍焉十三世而溥政丞以壽福終一家封君者九歷三世而近官贊成號陽邨即公六代祖也曾祖曰僑楊根郡守祖曰勣江華府使考曰轍」議政府領議政歷事 四朝爲太平宰相妣曰曹氏廸順副尉承睍女夏城府院君益淸之後也嘉靖丁酉生公弱不好弄長而無紈綺華靡之習議政公奇」之曰吾門有人攻經學甚勤而少踸踔滯於公車萬曆壬午中式年文科時年四十六識者或知爲將相器也由承文院正字著作博士陞成均館典籍更司」憲府監察禮曹佐郎戶曹正郎全羅都事鏡城判官辛卯復除戶曹正郎超拜義州牧使壬辰春坐事罷夏日本酋秀吉逞射天計遣秀嘉行長等衆號六十」萬入寇擧國劻勷 宣廟下敎曰予聞權慄才可試之拜光州牧使公即日陞辭賊踰鳥嶺陷忠州巡邊使申砬死之賊長驅薄京城 大駕西狩全羅道觀」察使李洸與忠淸道觀察使尹國馨慶尙道觀察使金睟領兵十萬到振威洸問榮於將佐公曰主公掃境內以來國之存兦在此一擧今宜獎率大軍直指」水原由通津涉祖江遮遏臨津禀命行在則我得其勢可以圖大洸不從未見賊而潰公還光州奮曰 廟社丘墟 主上播越爲臣子者豈可坐待國兦傳」檄旁郡得兵一千五百進屯梨峙扼兩南吭嶺南賊與錦山賊合力来攻公挺劔而出先冒白刃諸將相謂曰儒者亦如是耶士氣百倍敗之於嶺下朝廷欲」試之巨鎭秋遷守羅州未之官躋授全羅觀察使兼巡察使公拜命痛哭大選全州自領精兵一萬爲西上計據水原禿城爲固危動京師直搖西路秀嘉懼」乘其虛行長慮識其後若防制水坐牢關西心 宣廟解尙方劍馳賜之曰諸將不如令者以此從事又令義兵諸陣悉統於公京城賊患公落其角距出數」萬衆作三陣往来挑戰公堅壁不應間出奇兵摧之居五日賊燒營遁畿輔之賊亦捲入京城癸巳自禿城移柵於陽川分兵列援欲直渡陽川江進壘城西」鞍峴諸將力止之軍於高陽之幸州山京城賊方盛見公孤軍深入二月十二日賊盡其精勇分二路夜逼幸州寨公起視之則兇鋒蔽野圍寨數重矣公即」令士卒傳餐擇善射者列於睥睨間下矢如雨且揀力士投石擊之繼放車子火自朝至暮賊九進九却己而賊持束草縱火大喝登寨公提尙方劔立督諸」將諸將爭先薄戰賊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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賊之將卒死者不紀其數委其軍實而走收斬一百三十餘級捷聞特加資憲大夫將士賞賚有差 皇朝遊擊査大受來見公歎」曰外國亦有眞將矣宋經略應昌移咨獎之曰權布政可謂板蕩忠臣中興名將賞以綵幣白金等物兵部尙書石星奏曰陪臣權慄獨守孤城以抗强勁」天子嘉之曰全羅斬獲數多該國人民尙可振作公旣蹂幸冦徒營坡州坡乃迤西孔道賊憚之又歚報幸州之敗刺血祭天謀犯公而竟不敢窺足而右四」月京城賊遁去公將以輕兵躡之會李提督如松方用計退賊阻公使不得南六月拜諸道都元帥駐嶺南冬拜刑曹判書轉議政府右參贊甲午春以疾辭」宣廟軫之醫問交道有武士避戍匿於全州公斬之體臣聽其家人訴請公罪公罷笑曰爲將數歲不得以軍法斬一卒耶謝事歸江華故里未幾敍拜漢城」判尹戶曹判書知義禁府事兼管備邊司入侍前席 宣廟敎曰非卿國家何以得至今日輟內廐馬賜之丙申拜忠淸道觀察使 宣廟命爲都元帥曰卿」忠勞茂著勇略超世名聞天下威慴敵國元帥之任捨卿伊誰及辭朝召見賜酒以勞之復賜內廐馬七月湖西士人李夢鶴反連陷五邑朝廷命公討之公」提兵急趨賊已就殱於洪州治其黨與上讞甚晢湖路獲安冬我國人自日本來者傳言淸正欲再入寇朝野洶洶公曰設令淸正復來自有待之之道聚首」憂畏何益奏陳列柵制賊之策丁酉秋果再肆陷晉州南原直指畿甸公且戰且行斬級以聞承召赴朝倚公防截漢津還朝翌日旋與 天朝將官彭友德」渡江戰於稷山大破之冬 天朝大發兵遣提督麻貴經理楊鎬攻蔚山賊公領衆先攻突騎徑前斬後進者以徇諸軍距躍蟻附以登陷其外城提督經理」交口稱之戊戌春以疾乞免 宣朝慰諭勉留之 天朝遣兵部尙書邢玠督三提督分路討之公隨劉綎攻順天賊綎素無戰心持重不進公累畫策而縱」不聽未久賊大衂於水軍都督陳璘且其酋秀吉死諸路賊倂捲還己亥夏公病控辭 宣廟許遞七月六日竟不起享年六十三 宣廟震悼輟朝賻賵有」加遣官致祭命 贈贊成九月窆于楊州洪福山乾坐之原先兆也越七年乙巳論功錄宣武功臣一等 贈領議政府院君公前夫人曰昌寧曺氏僉正輝」遠之女溫莊和厚有壼範年二十四而卒 贈貞敬夫人有一女乃鰲城公也生二男一女男長星男次井男皆蔭仕爲郡守女曰尹仁沃星男初娶判書權」徵女生一男一女後娶主簿金繼男女生二男四女井男娶承旨尹顗女生一男一女尹仁沃生一男一女後夫人曰朴氏竹山望族縣令世炯之女也明惠」持法度奉姑承公一順無違公沒以未亡自處節祭時祀無不式禮時製衣服設奠焚之後公十年卒戊申二月也年六十二封貞敬夫人四月祔葬於公墓」之兆無子公取仲氏子益慶爲後益慶補蔭職爲縣監初娶李光輪女生三男曰㠎補蔭縣監曰曰嶫後娶李淨女生一男三女男曰巘女曰李道基餘幼」㠎有二男一女嶫有一男道基有一男幷幼公身頎八尺容貌魁偉符彩嚴重制行忠朴處父母兄弟愉惋和厚喪哀祭誠一出眞素待遇宗族咸盡其歡性」好施與家無長物處事周愼擧必萬全臨賊對壘言爲整暇建身開府再領儲胥身先士卒號令嚴明將士親附謀行功從剗削大敵以寡敵衆雖古名將有」不及者 皇朝石尙書星遇我國使者詢公起居曰爾國若有權公數人何憂焉倭人亦見我國人必問權元帥何在其爲華夷所共服如此在戎行手錄」聖旨及 天朝咨揭曰我死李議政必能誌我墓此足矣洎釋負搆一室於江鄕號晚翠堂寓其志也嗚呼欽是公元帥時幕佐也有虞卿白壁之知無中郎」黃絹之辭竊嘗評之曰高山深林龍虎變化者公其人也汾陽之勳而不得致中書之考晋公之德而不得享綠野之樂玆爲可嘅而若其仗節盡瘁身佩安」危丹書鐵券永保始終足與二公媲云銘曰」若昔壬辰蠢彼介鱗鞠頑衰兇犇突跳躑孰稱孰剔遍我箕封惟 上曰咨疇董我師繄爾其才公膺其重八路是總再燃于灰熸之于幸大鋤其梗于稷于」蔚左水右陸扼項批脊莫我敢越斗極重恢黃道褰開伊公之烈人謀畢凝鬼神與能伊公之籌赫赫厥靈巍巍其名伊公之休有山嶻峛有碑嵽嵲伊公之」藏公有幕佐載揚載播銘于墓陽」


追記」


壬▨▨▨公累立奇功 皇帝詔曰今觀全羅道斬獲甚多該國人民尙可振作因差鴻臚寺官宣諭 天朝東征將士相謂曰權家軍與他鎭自別總督軍」門▨▨宋應昌移咨本國另行獎賞略曰王國三都諸郡悉皆望風奔潰曾無一英雄傑士倡義師排大亂守封疆以圖恢復者王國可謂無人獨權某扼守」孤縣▨集衆庶屢出奇謀時抗大敵近復囊沙爲糧誘倭來搶而劫殺此正王國板蕩忠臣興名將兵部尙書石星奏本以爲陪臣權某獨守孤危以抗强」勁 宣祖大王前後獎諭備至至曰忠勞茂著勇略超世名聞天下威慴敵國又日非卿國家何以得至今日此數者具載於白沙所撰行狀及墓誌及戰捷」碑陰記最後象邨申公又表章于此碑之面後幾年余又特揭于其陰曰此數者宜屢書而不一書也夫誰曰疊床而架屋也其子孫之不載於原碑者平市」今第二第三女壻參判趙壽益姜元祉也縣監一男判官嶫二男俶休巘二男任仁也判官二男尙珩尙珪長齋郎俶四男尙中尙正尙經尙稱任三男尙」忠尙文尙質也曰寔聖輔尙珩尙珪出也外裔多不能盡錄嗚呼自古中興之君無不得人而任之周之方召二甫尙矣漢之雲臺諸將唐之郭李諸人皆以」忠義誠懿蒙被委任成功如建瓴然宋之李張讒間搖惑卒無以成然則公雖智勇邁古而徵我 宣朝知人之哲而委任之專則焉而有濟㢤然當時如李」忠武舜臣猶不免於對吏幾死則公之以忠信善道自結於 君上者可知也 主聖臣良可謂千載一時也時 崇禎癸亥仲春日恩津宋時烈記」洪惟 宣祖大王中興我家邦時則元帥權公屢平倭奴建大勳後象邨申文貞公撰神道碑尤菴宋文正公述追記訖數百年尙闕顯刻公之九世孫」始謀樹貞珉屬裕元書之又爲追刻之記裕元曰公之茂烈懿德已有兩先生文而今可補者猶有一二矣公初謚莊烈因 國諡改以忠莊建祠幸」州賜額紀功公之子益慶官縣監殉江都 贈職旌閭此皆不可不書者而至若內外雲仍不能盡記惟嫡傳若干人錄之益慶四男長曰㠎縣監㠎三」男長曰仁判官仁三男長曰尙珩縣監尙珩一男曰寔縣監寔系子壽麟縣監壽麟二男長曰綜縣監綜系子聖祜府使 贈參判聖祜一男曰安昌」君系子最朝公之壻白沙公即裕元九世祖也昔白沙公誌公之隧今追先講世使裕元操觚而述臨石而寫裕元之所不敢辭乃摭」其實而書之」于左辛酉仲夏外十世孫月城李裕元謹識」


崇禎紀元後二百三十四年辛酉冬立」

 

판독자 : 유동욱

 

↑앞이 권율장군 묘/중앙이 권율장군의 형 권순(1536~1606)묘/제일 위쪽이 영의정을 지낸 아버지 권철(1503~1578)묘 입니다.

 

권율장군 묘갈

 

↑권율장군 신도비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