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신도비명

이순신 어제 신도비명(李舜臣神道碑銘) - 정조(正祖)

야촌(1) 2009. 4. 25. 23:10

■상충정무지비(尙忠旌武之碑=忠을 숭상하고 武를 기리는 비)

  *덕수이씨 12世

 

◈ 시대 : 조선

◈ 연대 : 1794년

◈ 유형/재질 : 비문/돌

◈ 문화재지정 : 비지정

◈ 크기 : 높이 233Cm, 너비 106Cm, 두께 47Cm

◈ 소재지 : 충청남도 아산시 음봉면 삼거리

◈ 서체 : 해서(楷書)

◈ 찬자/서자/각자 : 정조(正祖) / 미상 /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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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관

이 비는 1794년(정조 18년) 충청남도 아산에 건립된 이순신신도비(李舜臣神道碑)로, 정조(正祖)가 비문을 지었다, 충무공 이순신(1545~1598년)의 자는 여해(汝諧), 본관은 덕수이다.

 

1576년 무과에 급제하여 변견의 권관, 만호를 지내고, 정읍 현감으로 재직중 유성룡의 천거를 받아 승진하여 1591년에 전라좌조수군절도사가 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옥포해전, 한산대첩을 통해 해군의 우위를 유지하여 전세를 유리하게 하고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정유재란시 원균의 모함과 왜군의 모략으로 실각하여 백의종군하였으나 원균이 전투에서 패배하여 전사한 후 다시 통제사가 되고 명량해전 등에서 승리를 거두어 수군을 재건하였다.

 

풍신수길이 죽고 왜군이 퇴각하는 시점에 왜군을 추격하다가 노량해전에서 유탄을 맞고 전사하였다.

아산 현충사, 충부 충렬사, 순천의 충민사 등에 제향 되었다.

 

묘는 아산시 음봉면 어라산(於羅山)에 있으며 정조대왕이 1793년에 영의정을 증직하고, 직접 신도비문을 지어 1794년에 세웠다. 현재 탁본은 성균관대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탁본된 연대는 1970년대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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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충정무지비(尙忠旌武之碑)

 

정조 임금 찬(正祖 撰)

 

유명수군도독 조선국 증(贈)효충장의적의협력선무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덕풍부원군 행 정헌대부 전라좌도수군절도사 겸 삼도통제사 시(諡)충무공 이순신 신도비명 병서.



살아서는 수레와 옷을 하사하여 신하를 사랑하며 잔치를 베풀어 공로를 치하하며 음악을 연주하여 공적을 덮어주었고 죽은 뒤에는 오정(五鼎)을 차려 제사지내며 대대로 녹을 주어 후손을 길러 주며 깃발에 명(銘)을 그려서 그 빛나고 훌륭한 절의를 상하에 밝게 하고 산천(山川)에 비기게 하여 음직(陰職 : 죽은 다음의 직책)을 맡아 백성들에게 아름다운 복을 도와주도록 했던 것이 옛날 선왕(先王)들이 공신을 대우한 것이었는데 주나라이후로 그 법이 점점 없어졌다.

 

그러나 비석에 명을 하는 것은 깃발에 명을 하던 옛 뜻을 아직도 전하고 있으니 그 특별한 것은 임금이 명을 하는 일이다. 왕조(王朝)의 전수(篆首 : 비석 머리글)를 지덕원로(至德元老 : 덕이 지극한 원로)라 하였고 서달(徐達 : 명나라의 건국 공신)의 전수를 충지무자(忠志無疵 : 충성스러운 뜻은 흠잡을 것이 없다)라고 하였지만 몇 천 년을 내려오며 몇 사람이나 되겠는가.


아아! 우리 조선의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같은 경우는 그 공적이 명법(銘法)에 해당되어 내가 명을 하고자 하니 혹시라도 부끄러운 말이 되지 않을 것인가.


충무공의 자는 여해(汝諧)요, 본관은 덕수(德水)이다. 태어날 때 어머니 변씨가 꿈을 꾸니 시아버지가 어린애가 태어나면 반드시 귀할 것이니 순신(舜臣)으로 이름을 지으라고 하였다.

 

아버지 정(貞)은 그 말을 듣고 이상하게 여겨 점을 쳤는데 점괘가 길하게 나왔다.

나이 50세에 큰 도끼를 짚고(군대를 통솔) 명장이 되었으니 충무공은 이미 이러한 기이함을 지녔던 것이다.

 

어려서부터 기개가 뛰어나고 또 뜻이 컸으며 자라서는 활 솜씨가 뛰어났다.

만력(萬曆) 병자 1576년(선조 9,) 무과에 합격하고 처음에는 변방에서 근무를 했는데, 여러 번 뛰어난 공을 세우리나라 사람들이 장수의 재주가 있다고 칭찬하였다.

 

문충공(文忠公) 유성룡(柳成龍)이 강력하게 추천하여 마침내 전라좌도수군절도사(全羅左道水軍節度使)에 발탁되었다. 이때 왜인들은 우리나라를 공격하겠다고 소리를 치니 전쟁의 조짐은 이미 무르익어가고 있었다.

 

충무공은 깊이 걱정하며 밤낮으로 군졸을 훈련시키고 병장기를 가다듬으며 공격과 수비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별도로 선제를 만들었는데 엎드린 거북의 형상으로 만들어 거북선이라 이르니 수전(水戰)을 연습하는 사람들이 몽충(蒙衝)에다 비유하였다.

 

임진년(선조 25, 1592년)에 왜구가 대거 침입하여 부산(釜山)과 동래(東萊)를 함락하고 길을 나누어 서쪽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충무공은 즉시 군대를 이끌고 옥포(玉浦)로 가서 적선 20여 척을 공격하여 불태우고 경상수군절도사(慶尙水軍節度使) 원균(元均)과 노량(露梁)에서 만나 양쪽에서 적을 공격하고 다시 사천(泗川)에 이르러 10여 척을 불태우고, 당포(唐浦)로 진군하여 적선 20여 척과 마주쳤는데, 그 우두머리를 죽이고 적군을 섬멸하였다.

 

전라우도수군절도사 이억기(李億祺)와 당항포(唐項浦)에서 합세하여 적의 우두머리가 탄 3층의 누선(樓船)을 격파하고는 적을 유인하여 한산도(閑山島)에 이르자 크고 작은 전함 70여 척을 또 격파하였다.

 

북으로 추격하여 안골포(安骨浦)에 이르러 또 40여 척의 적선을 불태우니 군대의 명성이 크게 떨쳤으며 적군들은 두려워하였다. 승리의 보고 될 때마다 곧 품계를 더하여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이르렀다.


계사년(선조 26, 1593년)에 조정에서 처음으로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를 두면서 공에게 본직을 가지고 겸임하도록 명하였고 공은 진(鎭)을 한산도로 옮겼다. 이에 원균은 지휘 받는 것을 수치로 여겨 자주 유언비어를 언관(言官)에게 퍼뜨려 충무공은 마침내 적을 보고도 지체한다고 탄핵을 받아 투옥되었고 원균이 그 자리를 대신하였다.

 

몇 달 지나자 우리 군대가 패배를 당하고 원균은 도망치다가 죽으니 조정은 다시 충무공을 통제사로 삼았다. 충무공은 수십기(騎)를 거느리고 순천부(順天府)에 달려 들어가 10여 척의 병선(兵船)을 얻고 도망간 병졸을 다시 모아 난도(蘭島)에서 적을 쳐부수고, 또 적을 벽파정(碧波亭) 아래로 끌어들여 30여 척을 격파하고 적장 마다시(馬多時)의 목을 베니, 적은 버티지 못하고 군대를 이끌고 도망쳤다.


무술년(선조 31, 1598년)에 명나라 장수 진린(陳璘)은 광병(廣兵)을, 유정(劉綎)은 천병(川兵)을, 등자룡(鄧子龍)은 절직병(浙直兵)을 거느리고 연이어 도착하였다. 충무공은 고금도(古今島)를 점거하고 진린과 함께 진을 치고 있었는데, 진린은 충무공의 재략과 기량에 대해 마음으로부터 탄복하여 군중의 모든 기밀에 대해 자문을 받아서 결정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우리 선조(宣祖)에게 말하기를 “이순신은 경천위지(經天緯地)의 재주가 있고, 보천욕일(補天浴日 : 하늘을 깁고 해를 목욕시킴)의 공로가 있습니다.”라 하였고, 또 현황제(顯皇帝)에게도 아뢰어 충무공에게 도독(都督)의 인수(印綬)를 내리게 하였다.


얼마 후 일본의 관백(關白 : 풍신수길)이 죽자 행장(行長 : 소서행장)이 철병을 하고자 하며 곤양(昆陽)과 사천(泗川)에 주둔한 적들과 약속하여 날짜를 정하여 노량(露梁)에 함께 진격하기로 하였다.

 

충무공이 명나라 장수들과 함께 전함을 정비하여 함께 적을 소탕할 계획을 세우고 곧 배 위에 올라 축원하기를 “오늘은 진정 죽음을 각오할 것이니 하늘이여! 저로 하여금 이 적들을 섬멸하도록 허락하소서."라고 하였다.

 

빌기를 마치자 하괴성(河魁星)이 떨어지니 군대 전체가 불길하게 여겼다.

그날 밤 새벽 두시 무렵 적을 맞아 격렬한 전투가 벌어져 적선 2백여 척을 불태우고 계속하여 추격했는데 남해(南海)에 이르자 적들이 명나라 군대를 몇 겹으로 포위하였다.

 

충무공은 포탄과 화살을 직접 선두에 나가서 포위망으로 돌진하다가 전투가 한창 무르익을 무렵에 유탄에 맞아 죽고 말았으니 태어난 을사년(1545년)으로부터 나이가 54세였다. 이듬해에 아들 회(薈) 등이 아산(牙山)으로 반장하였다.


갑진 1604년((선조 37)에 공신을 책봉하며 호를 내렸으니 의정부좌의정(議政府左議政) 덕풍부원군(德豐府院君)을 증직하고 시호를 충무로 했으며, 전투를 치른 유적지에 사당을 세워서 지금까지 제사가 그치지 않고 있으니 그것으로 그 공로에 충분히 보답했다고 하겠는가?

 

슬프구나!

우리나라에 인재가 배출된 것이 목릉(穆陵 : 선조)시절이 최고였다고 이르고 중국에서 용맹하다고 뽑혀 도우러 온 장수들도 모두 한때의 인물들이었지만 물고기와 새우가 튀어 오르고 바닷물이 난리를 치게 되면 90리쯤 퇴각하여 이럴까 저럴까 망설이지 않은 자가 없었다.

 

그런데도 8년 동안을 싸우면 반드시 이기고, 지키면 반드시 보전하여서 나라의 형세가 그 강하고 약함에 따랐고 적의 예봉은 그에 의해 좌절되어 온 국토에 굴을 판 교활한 오랑캐들로 하여금 그 뜻을 피지 못하게 하여서 우리 열조의 중흥의 공로에 기틀을 만든 것은 오직 충무공 한 사람의 힘에 힘입은 것이니 충무공에게 특별히 명(銘)을 하지 않고 누구에게 할 것인가?


또 내가 들으니 증민시(烝民詩 : 시경 대아의 편명)는 번후(樊侯 : 주나라 선왕의 신하인 중산보)의 공적을 기술한 것인데 선왕(宣王)의 아름다움이 그 안에 있으니 신하가 성공을 할 수 있는 것은 임금이 현명해서인 것이다.

 

임금의 명을 받아 능히 그 일을 마쳐 공을 세우되 그 공을 임금의 아름다움에 실어서 후세에 전하는 것이 옛날의 도였다. 지금 이 명도 그러한 시의 뜻이 들어 있는 것이니 내 어찌 이 명을 그만 둘 수 있겠는가?

 

이에 의정부 영의정(議政府領議政)을 추가로 증직하고, 그 시호에 따라 비석의 위에 상충정무지비(尙忠旌武之碑)라고 전액하고 또 서(序)를 쓰고 명을 써서 사씨(史氏)에게 고한다.


옛날 사훈씨(司勳氏 : 공로에 따라 등급을 정하여 토지를 상으로 주는 일을 맡은 관리)가 사책에 명한 것을 상고하니 훈(勳), 공(功), 다(多), 용(庸), 노(勞), 력(力)이라 하였다. 충무공 같은 사람은 일에서나 전쟁에서나 임금에게나 나라에 대해 누가 그렇지 않다고 하겠는가?



한 번 싸워 한산섬이 평정되고
두 번 싸워 벽파진이 편안해지고
세 번 싸워 노량에 왜구가 없어졌으니
이것이 또한 다(多)가 아니겠는가?


모사는 혀를 놀리고
용맹한 무신(武臣)은 목을 움츠릴 때
천자의 명으로 너희 속국의 외로운 군대라 했으니
이것이 또한 훈(勳)이 아니겠는가?


천자의 군대는 중국으로 돌아가고
백성들은 그 자리에 안정되었으며
이 나라 억만년 대계를 다시 회복시켰으니
이것이 또한 공(功)이 아니겠는가?


아아!
홍살문이 마을에 있고 비석이 묘소에 있는데
끝내는 비석의 머리에 전액을 하는 은총까지 받았구나.
강한(江漢) 이 그 영령을 빛내어 해와 달처럼 빛나리라.

황명 숭정기원후 세 번째 갑인 1794년(정조 18) 월 일에 세움.

 

국역 : 전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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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문(原文)

 

尙忠旌武之碑」


御製有明水軍都督朝鮮國 贈効忠仗義廸毅協力宣武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 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德豐府院君行正憲大夫全羅左道水軍節度使兼三道統制使諡忠武公李舜臣神道碑銘幷序」

 

生而車服以寵之讌饗以勞之管絃以被之沒也祀之五鼎養以世祿銘乎旂常俾其耿光姱節昭于上下配于山川以主其陰職而庇休福」於民昔先王之敉功臣也成周以還其法浸泯焉然碑率之有銘猶傳旂常之遺義抑其特者君之銘之也王朝之篆首曰至德元老徐達之」篆首曰忠志無疵歷千載幾人哉嗚呼若我朝之忠武公李舜臣功惟應銘法予之銘之尙亦無媿辭哉忠武字汝諧世爲德水人其生母卞」夢其舅言兒生必貴其命名舜臣父貞聞而異之占之曰吉年五十當仗鉞爲名將忠武旣負此異幼倜儻且有大志及長射藝絶倫中萬曆」丙子武科初仕邊屢立奇功國人以將才稱文忠公柳成龍力薦于朝遂擢爲全羅左道水軍節度使時倭人聲言寇我敵釁已成忠武深憂」之日夜訓卒利兵治戰守備別創船制爲伏龜形名曰龜船習水戰者比之蒙衝壬辰倭大擧入拔釜山東萊分道西上忠武卽引兵赴玉浦」攻焚賊船二十餘艘會慶尙水軍節度使元均于露梁夾擊賊轉至泗川焚十餘艘進軍唐浦遇賊二十餘艘殪其酋殲其衆與全羅右水軍」節度使李億祺合軍于唐項浦破賊酋三層樓船誘至閑山島又破大小七十餘艘逐北至安骨浦又燒破四十餘艘軍聲大振賊讋恐捷聞」輙加階至正憲癸巳朝廷剏置三道水軍統制使命以本職兼之移鎭閑山島於是元均耻受節制數蜚語風言官而忠武竟以逗遛劾下吏」均則代之居數月我師敗績元均走死朝廷復以忠武爲統制使忠武將數十騎馳入順天府得兵船十餘行收亡卒破賊于蘭島已又迎賊」于碧波亭下破三十餘艘斬其將馬多時賊不能支擧軍而遁戊戌 天將陳璘以廣兵劉綎以川兵鄧子龍以浙直兵先後至忠武進據古」今島與陳璘合陣璘心折其才策器幹凡軍中機密無不咨決之言于我 宣廟曰李舜臣有經天緯地之才補天浴日之功又具奏于 顯」皇帝賜忠武都督印綬旣而關白死行長欲撤兵約昆陽泗川屯剋日竝進于露梁忠武與 天將整舟 謀協勦卽船上祝曰今日固決死」天其許我殲此賊乎祝己河魁隕一軍惡之夜四鼓邀賊鏖戰焚二百餘艘尾擊不舍至南海賊圍 天兵數重忠武親冐矢石直前突圍戰」方酣中流丸死之距其生乙巳年五十四明年子薈等返葬于牙山甲辰策勳 賜號贈議政府左議政德豐府院君諡忠武立祠于戰伐遺」墟至今爼豆不輟斯足以敉厥功乎悲夫我國家人才之輩出最稱 穆陵盛際 皇朝命帥之簡勁赴援者亦皆一時之雋然當其魚跳鰕」擲海水羣飛未有不退三舍持兩端而八年之間戰必勝守必保國勢視以强弱賊鋒爲之挫頓使環土營窟之狡奴狼顧不得逞而以基我」烈祖中興之功者維忠武一人之力是賴不於忠武特銘之而誰銘且予聞之烝民之詩所以述樊侯之績而宣王之美於是乎在臣之能有」成功君之明也夫受君之命克終其事以有功而以其功載君之美於無窮古之道也今之銘詩之義存焉予烏可已於銘乃加贈議政府領」
議政因其諡篆其首曰尙忠旌武之碑又序而銘之以詔諸史氏銘曰」

 

稽古司勳氏之銘于策也曰勳曰功曰多曰庸曰勞曰力 若忠武者孰不曰功于戰于王于國 一戰而閑山盪再戰而碧波晏三戰而露」

梁無倭斯不亦多乎 謀士掉其舌虎臣蹙其頸而用 天子命惟汝屬國之孤軍斯不亦勳乎 翠華反於土中赤子奠於席上重恢我萬」 億年大東斯不亦功乎 於虖噫嚱鳥頭在閭牲石在隧 以卒受寵于篆首之章江漢濯其靈而日月齊其光」


皇明崇禎紀元後三甲寅 月 日立」

 

판독 : 박연희

 

▲정조가 충무공을 흠모하여 직접 써내려간 "어제신도비"

 

↑이순신장군 신도비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