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고전(古典)

유양잡조 발문(酉陽雜俎 發文)

야촌(1) 2021. 8. 18. 20:37

유양잡조 발문(酉陽雜俎 發文) - 용재 이종준(慵齋 李宗準)

 

 

소장처:  성균관대학교  존경각(1492년 간행 유일본)

 

성종 285권, 24년( 1493 계축 / 명 홍치(弘治) 6년) 12월 28일 무자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 김심(金諶) 등이 차자(箚子)를 올리기를

“삼가 듣건대, 지난번 이극돈(李克墩)이 경상 감사(慶尙監司)가 되고, 이종준(李宗準) 이 도사(都事) 가 되었을 때 《유양잡조(酉陽雜俎)》·《당송시화(唐宋詩話)》·《유산악부(遺山樂府)》 및 《파한집(破閑集)》·《보한집(補閑集)》·《태평통제(太平通載)》 등의 책을 간행(刊行)하여 바치니 이미 내부(內府)에 간직하도록 명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酉陽雜俎 發文(유양잡조 발문)

 

月城 李宗準 謹識.

 

嘗讀宋朝蘇黃諸公詩, 多用事嶮僻, 有可喜可愕可驚可怪者, 而不知其所自來也. 如行深山大澤, 卒遇龍蛇鬼物, 而莫之較, 甚則令人或似唉咍而爲病者矣. 予之南來也, 永嘉權侯叔强, 以酉陽雜俎一帙見■曰: “此編吾東方無版本, 子其圖之.” 僕謹受以來. 適吾使相國, 咨詢宣化, 簿領簡少. 予在幕下, 優游多暇, 而披目之, 其敭美威惡, 所以明戒也; 窮物詳理, 所以廣知也; 曼衍自適, 所以窮年也, 而曏之喜愕驚怪者, 皆在此一部矣. 於是, 予之前日唉咍病惑者, 釋然以愈, 恍若覩禹鼎, 而神姦怪物, 無所遁其形者矣. 予迺辴然咲曰: “此予刮膜之金篦也. 其該括萬象, 補摭史傳, 賢於筆談, 遠矣, 實翰苑所不可無者也. 若曰怪力亂神, 夫子所不語而浸淫於異端, 吾傳之罪人, 則此書亦當使之, 獨行於天地之間, 可也. 其自謂不曰雜俎也邪 顧此本多缺文誤字, 今承相國指敎, 攷校而塗改者, 不啻十七八, 而疑則闕之. 然愚管鹵莽, 無子夏三豕之辨, 有阿昶金根之竄, 博雅君子幸覽而正之. 時弘治五年玄默困敦臈月有日,

 

일찍이 송(宋)나라의 문인 소식(蘇軾, 소동파)과 황정견(黃庭堅) 등의 여러 공들의 시를 읽어보니, 용사(用事, 전고를 끌어옴)가 대부분 난해하여, 기쁘면서도 놀랍고, 놀랍고 기괴하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이런 용사들의 유래를 알 수 없었다.

 

이를테면 깊은 산과 큰 습지를 가다가 난데없이 용이나 뱀, 귀물 등을 만나 이를 감당할 수 없을 지경이며, 심지어는 사람들로 하여금 간혹 너무 놀란 나머지 병이 들게 하는 경우도 있는 것 같았다.

 

내가(이종준) 남쪽에 갔을 때 안동 권공(權公) 강숙(叔强)께서 유양잡조(酉陽雜俎)? 한 질을 보여주시면서, “이 책은 우리 조선에는 없는 판본이니, 자네가 이를 간행하기를 도모해보게.”라고 하였다. 나는 삼가 이 책을 받아서 왔다.

 

마침 나는 재상의 휘하에 있으면서 의견을 물어 군명을 선포하는 일을 맡고 있었는데 문서를 처리하는 일이 간소하였다. 그 막하에 있다보니 나는 편안하여 여유가 많았다.

 

그 틈에 이 책을 펼쳐보니, 그 미덕을 드러내고 악행을 누름은 징계을 밝히는 것이었고, 사물을 궁구하고 이치를 밝힘은 지식을 넓히는 것이었고, 유유자적함은 천수를 다하는 것이었으니, 저번에(소동파와 황정견의 시를 봤을 때) 기쁘고 놀라우면서 기괴하였던 것들이 죄다 이 책 안에 있었다.

 

이에 나는 전날에 잔뜩 놀라 병이 들 정도가 된 이유를 눈 녹듯 이해할 수 있었고, 그 황홀함이 우정(禹鼎, 우임금의 솥으로 이 전설적인 솥엔 귀물들이 그려져 있어 이를 경계로 삼았음)을 본 듯 한데, 여기 신의 간악이나 귀물들은 그 형체를 숨기지 못한 것들이었다.

 

나는 이에 비식 웃었다. “이 책은 나의 두피를 긁어주는 금빗이다.(나의 가려움을 긁어주는) 사물의 온갖 상을 다 갖추어 놓았으며, 사전(史傳)의 보조 자료를 모왔으니, 필담(筆談)보다 훨씬 나으니 실로 한림원에서 없어서는 안 될 책인 것이다.

 

‘괴력난신(怪力亂神)’이란 말은 공자께서도 말하지 않은 것이라 이는 이단에 빠지는 것으로, 내가 이를 전하는 죄인이라 하지라도 이 책은 응당 이를 맡아 천지 사이에 홀로 유통되더라도 괜찮을 터,(유가에서 금기시 하는 괴력난신류에 해당하는 내용이 ?유양잡조?에 많기 때문에 자신이 이를 간행하면 죄인이 될 것이라는 의미) 저 스스로 ‘잡조(雜俎)’라 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이 본은 잘못된 문장과 오자가 많았다.

 

지금 재상의 지도와 가르침을 받들어 교감하여 정정한 것이 열에 칠팔 정도가 아니었다.(그 이상이었다는 말) 그래도 의심나는 곳은 공백으로 두었다. 그러나 나의 식견이 일천하여, 자하(子夏, 공자의 제자)의 삼시지변(三豕之辨, ‘己亥’를 글자가 유사한 관계로 ‘三豕’로 잘못 읽은 데서 온 말로, 글자를 잘못 읽거나 그릇되게 사용한다는 고사. 즉 글자를 잘못 알아보는 실수를 구별하는 능력)도 없거니와, 아창(阿昶, 미상)의 김근지찬(金根之竄, 옛날 ‘金根車’(황제가 타는 수레)를 ‘金銀車’(금과 은으로 장식한 수레)로 고쳤다가 망신을 당한 고사에서 유래한 말로 잘못된 지식으로 사실을 왜곡한 경우를 말함)만 있을 뿐이다.

 

박아한 군자께서 보시고 질정해주신다면 다행이겠다.

때는 홍치(弘治) 5년(1492년) 임자 납월(섣달) 일 월성(月城) 이종준(李宗準) 근식(謹識).

* 玄默 (현묵) = 임자

 

번역 : 정환국

학력 :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한문학 박사

경력 : 동국대학교 국문학과 교수

소속 : 동국대학교(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