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고려와조선관직 51

역대 성균관 대사성 역임자 - 조선시대

■ 역대 성균관 대사성 역임자 (歷代成均館大司成歷任者) ◇집필자 : 이재훈(2010. 08. 20) ◇Update : 2021. 01. 09(토) ◇성균관 대사성 : 총950명 ◇성균관 관장(대한제국)/총10명 ◇경주이씨 대사성 배출 수 : 13명 /성균관장 1명 1.태조 이성계 太祖 (李成桂)/7명 유 창(劉 敞) 김약항(金榑恒) 정 탁(鄭 擢) 함부림(咸傅霖) 변중량(卞仲良) 박 신(朴 信) 유 관(柳 寬) 2.정종 이방과 定宗(李芳果)/1명 조 용(趙 庸) 3.태종 이방원 太宗(李芳遠)/7명 장덕량(張德良) 권 근(權 近) 정이오(鄭以吾) 유백순(柳伯淳) 최 함(崔 咸) 권 우(權 遇) 윤회종(尹會宗) 4.세종 이도 世宗(李祹)/13명 강석덕(姜碩德) 황 현(黃 鉉) 박서생(朴瑞生) 이맹균(李孟畇)..

우리나라 부자가 재상(宰相)이 된 사람

■ 우리나라 부자(父子)가 재상이 된 사람 [1]우리나라에 부자(父子)가 재상(宰相)이 된 자(者)로는 1.익성공(翼成公) 황희(黃喜)와 그 아들 남원부원군(南原府院君) 수신(守身)이 모두 영의정이 되었고, 2.이인손(李仁孫)이 우의정이고, 그 아들 광릉부원군(廣陵府院君) 이극배(李克培)가 영의정이 되었으며, 3.봉원부원군(蓬原府院君) 정창손(鄭昌孫) 공이 영의정이고, 그 아들 정괄(鄭佸)이 우의정이었다. [2]할아버지와 손자가 재상이 된 자는 1.상락(上洛) 김사형(金士衡)과 그 증손 김질(金礩), 2.서원(西原) 한상경(韓尙敬)과 그 손자 한명회(韓明澮), 3.좌상 노한(盧閈)과 그 손자 영의정 노사신(盧思愼)이다. [3]장원 급제하여 재상이 된 사람은 좌상 맹사성(孟思誠), 문성(文城) 유량(柳亮)..

우리나라 무과(武科)시초 - 1390년

■ 우리나라 무과(武科) 시초. 경오년 공양왕 2년(명 태조 홍무 23, 1390) --------------------------------------------------------------------------------------------------------------------------- ●춘정월 적경원(積慶園)을 창건하였다. 예조가 헌의(獻議)하여, 한 광무(漢光武)와 송 영종(宋英宗)의 고사(故事)에 따라 4대의 고비(考妣)를 추봉(追封)하고, 원(園)을 세워 사관(祠官)을 두도록 청하자, 이에 적경원을 세우고 4대를 추봉하였다. 정원군(定原君)을 삼한국 대공(三韓國大公)으로, 순화후(淳化侯)를 마한국공(馬韓國公)으로, 익양후(益陽侯)를 진한국공(辰韓國公)으로, 서원후(西原侯)를 변한..

조선의 가문별 급제자 수

문중명 인원수 문중명 인원수 안동김씨 좌의정 김상헌 조부 김생해 136 광주이씨 공조판서 이하원 선조 영의정 이준경 31 반남박씨 좌의정 박세체 고조 문간공 박소 127 경주이씨 영의정 이광좌 고조 영의정 이항복 31 대구서씨 영의정 서종태 고조 형조판서 서성 105 임천조씨 의정대신 조병호 선조 조응공 30 남양홍씨 영의정 홍서봉조부 관찰사 홍춘경 97 진주강씨 우의정 강사상 부친 강온 28 풍산홍씨 영의정 홍봉한 선조 홍수 89 진주강씨 정민공 강흡 증조 강억 28 해평윤씨 영의정 윤두수 부친 윤변 86 강릉김씨 영의정 김상철 선조 예조판서 김첨경 28 여흥민씨 좌의정 민정중 고조 민사용 83 연일정씨 영의정 정호 고조 좌의정 정철 28 청송심씨 영의정 심열 조부 명종국구 심열 73 동복오씨 우의정 ..

서얼금고법(庶孽禁錮法)을 폐지하고 조용(調用)을 청하는 상소

■ 서얼(庶孽)의 험난한 벼슬길 나라에서 서얼의 벼슬길을 막은 것은 태종(太宗) 을미년(1415, 태종 15)부터 시작되었는데, 실은 미천한 서얼 출신인 정도전(鄭道傳) 때문이었지만 정도전의 손자인 문형(文炯)은 그래도 판중추사(判中樞事)를 지냈다. 관습이 점차 고질이 되어 인조(仁祖) 즉위 초에 처음으로 병조와 형조, 공조에 한하여, 허통(許通)을 허락하였으나 역시 이를 적용받은 서얼은 얼마 없었고, 영조(英祖) 임진년에 처음으로 서얼도 청직(淸職)에 진출할 수 있게 하였으나, 조정의 논의가 이를 달가워 하지 않아 시행한지 5년 만에 다시 막히게 되었다. 또 금상(今上)께서는 이를 절목(節目)으로 정하여 반포하셨으나 인사를 담당하는 전조(銓曹)에서 여전히 묻어 두고 시행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서얼금고..

절충장군(折衝將軍)과 어모장군(禦侮將軍)의 품계(品階) 차이

절충장군(折衝將軍)과 어모장군(禦侮將軍)의 품계(品階) 차이 절충장군(折衝將軍)은 서반(西班)의 정삼품(正三品)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이기 대문에 당상관(堂上官)에 속한다. 따라서 부인에게는 숙부인(淑夫人)의 작호를 내린다. 그러나 어모장군(禦侮將軍)은 정삼품(正三品) 품계이지만 통훈대부(通訓大夫)의 품계이기 때문에 당하관(堂下官)에 속한다. 따라서 부인에게는 숙인(淑人)의 작호를 내린다.

허통(許通)에 대하여---

■ 허통(許通)에 대하여..... 허통(許通)이란? 조선시대 서얼(庶孼)들에게 금고법(禁錮法)을 풀어 과거에 응시하도록 허락한 제도를 말한다. 서얼은 응시하되「허통(許通)」으로 녹명(錄名 : 이름을 기록함)하게 하기 도 했다. 조선 전기에는 양반의 자손이라도 첩의 소생은 관직에 나갈 수 없게 하였다. 서얼은 법에 의해 사회적 차별 대우가 규정되고 또 그 차별 대우가 자손에게 세습되었다. 1543년(중종 38)에 편찬된 《대전후속록(大典後續錄)》 에는 잡과에 한해, 2품 이상 관원의 첩의 증 현손(曾玄孫)의 응시가 허용되었다. 문무과 및 사마시는 1553년(명종 8) 양첩자(良妾子)의 손대(孫代) 부터 허용되었으나 바로 폐지되었다. 그 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서얼 허통 책은 확대 실..

조선시대 한성판윤 역임자/총1133명

주간한국>ARTS ㅣ 박종진 기자 jjpark@hk.co.kr '한성판윤' 현대와 대화하다. 서울시장직 조선시대 1133명, 도덕성 갖춰야 하는 요직 현실에 반면교사.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의 선조 중에 반석평(潘碩枰)이란 인물이 있다. 조선중기의 문신인 반석평은 본래 어떤 재상의 종이었으나 그의 재주와 성품을 아낀 재상의 선처로 부잣집 아들로 보내져 공부에 힘쓴 결과 과거에 합격하고 한성판윤을 거쳐 형조판서까지 지냈다. 그는 청렴하고 겸공해 훗날 재상의 자손이 변변치 못한 신세가 되었어도 예의를 갖췄고 글을 올려 사실을 고백하고 자기의 벼슬을 주인집 아들에게 돌려달라 했다. 이에 나라에서는 기특히 여겨 주인집 아들에게 사옹원 별좌(司饔院別坐>正‧從五品의 雜職)라는 관직을 주고, 그의 관직도 그대로 두었다...

호장(戶長)과 성씨연원(性氏淵源)

■ 호장(戶長)과 성씨 연원(性氏淵源) ●호장(戶長) 고려와 조선시대 향리직의 우두머리를호장이라고 했다. 그리고 향리 직을 지방행정단위에 따라 주리(州吏). 부리(府吏). 군 리(郡吏). 현리(縣吏) 등으로 불렀는데, 조선시대에는 인리(人吏), 또는 지방 수령의 관아 앞에서 근무했기 때문에 외 아전(外衙前) 등으로 불렸다. ◇주리(州吏) : 지방의 큰 행정 단위인 도(道)에 속하여 일하던 아전. ●성씨 연원(性氏淵源) 역사상 우리나라 성씨가 수용되고 보급되는 과정을 시기별로 살펴보면, 첫째 왕실과 중앙귀족층에게 수용되는 시기는 삼국 말기부터 신라 하대까지이고, 둘째 지배층과 일반에게 성씨가 보급되어 성과 본관 체계가 확립된 시기는 고려 초기이며, 셋째 양민 층에게 확대된 시기는 고려전반에 걸쳐 진행되었습..

왕의 묘호 종과 조의 차이점.

■ 왕의 묘호(廟號) 종(宗)과 조(祖)의 차이점. 왕의 호칭에 조(祖)와 종(宗)을 붙인 것을 묘호(廟號)라고 하는데, 이는 임금이 죽은후에 종묘의 사당에 신주를 모시기 위해 붙혀진 이름이다. 또한 묘호(廟號)는 왕이 죽은 후, 신주를 종묘에 모실 때 그 묘실(廟室)을 지칭 하기 위하여 조정에서 의논하여 정하였는데, 연산군이나 광해군처럼 폐위되어 종묘에 들어가지 못한 왕들은 물론 묘호가 없다. 왕의 호칭에는 묘호(廟號)외에도 사후에 중국 황제가 지어 보내주는 시호(諡號)와 신하들이 그 왕의 덕을 칭송하기 위해 지어 올리는 휘호(徽號), 혹은 존호(尊號) 등이 있다. 예를 들면 태조(太祖)의 정식 호칭은 태조강헌지인계운성문신무대왕(太祖 康獻至仁啓運聖文神武 大王)으로 太祖는 묘호, 강헌(康獻)은 시호, 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