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고려와조선관직

우리나라 무과(武科)시초 - 1390년

야촌(1) 2010. 8. 9. 22:07

■ 우리나라 무과(武科) 시초.

   경오년 공양왕 2년(명 태조 홍무 23, 13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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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정월 적경원(積慶園)을 창건하였다.
  예조가 헌의(獻議)하여, 한 광무(漢光武)와 송 영종(宋英宗)의 고사(故事)에 따라 4대의 고비(考妣)를 추봉(追封)하고, 원(園)을 세워 사관(祠官)을 두도록 청하자, 이에 적경원을 세우고 4대를 추봉하였다.

 

정원군(定原君)을 삼한국 대공(三韓國大公)으로, 순화후(淳化侯)를 마한국공(馬韓國公)으로, 익양후(益陽侯)를 진한국공(辰韓國公)으로, 서원후(西原侯)를 변한국공(卞韓國公)으로, 처(妻)는 모두 국비(國妃)로 삼고, 동모제(同母弟) 우(瑀)에게 제사를 주관하여 초하루ㆍ보름과 4맹월(孟月 음력 1월ㆍ4월ㆍ7월ㆍ10월을 말한다)에 제사하도록 하였다.

 

●처음으로 경연(經筵)을 열었다.

   왕(王)인 경우를 경연(經筵), 세자인 경우를 서연(書筵)으로 부르게 된 것이 이때 처음 시작되었다.

심덕부(沈德符)와 우리 태조를 영경연사(領經筵事)로 정몽주(鄭夢周)ㆍ정도전(鄭道傳)을 지경연사(知經筵專)로 삼고, 조준ㆍ서균형(徐均衡)ㆍ지(李至)ㆍ강회백(姜淮伯)을 세자사부(世子師傅)로, 삼아 서연을 열었다. 유신(儒臣)을 네 번(番)으로 나누어 진강(進講)하게 하였다.

 

지경연 정몽주가 아뢰기를, “유자(儒者)의 도(道)는 모두 일상생활 속에 있으니, 음식이나 남녀 관계는 사람이 다 같이 하는바 지극한 이치가 여기에 있습니다. 요순(堯舜)의 도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아 언동(言動)이 그 정도(正道)를 얻는다면 곧 요순의 도요, 애초부터 매우 고원(高遠)하여 실천하기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불씨(佛氏)와 가르침은 그렇지 못하니, 친척을 버리고 남녀관계도 끊고 암혈(巖穴)에 홀로 앉아 초목(草木)으로 의식(衣食)을 삼으며, 관공(觀空)ㆍ적멸(寂滅)을 종지(宗旨)로 받드니 어찌 이것이 평범한 도(道)이겠습니까?”하였다.

 

이때에 중 찬영(粲英)이 우왕(禑王)ㆍ창왕(昌王) 때부터 왕사(王師)로 있었는데, 왕이 또 그를 왕사로 삼으려 하였으므로 정몽주의 말이 이와 같았다.

 

하루는 왕이 시강관(侍講官)에게 이르기를,

“내 이미 늙었으니 비록 성인의 경전을 읽더라도 무슨 유익됨이 있을지 의심스럽다.” 하자,

 

밀직(密直) 박의중(朴宜中)이 아뢰기를, “옛날 진 평공(晉平公)이 사광(師曠)에게 이르기를 ‘내가 77세나 되었으니 학문을 하고자 해도 나이가 너무 많아 걱정이다.’ 하자, 사광이 말하기를 ‘어려서 학문을 좋아함은 막 떠오르는 태양같이 찬란하고, 장년이 되어 학문을 좋아함은 중천의 태양처럼 빛나고, 늙어서 학문을 좋아함은 한 자루의 촛불같이 밝으니 어찌 캄캄한 밤에 다니는 것과 같겠습니까?’ 하고 대답하자 공이 그렇게 여겼습니다.

 

지금 전하의 춘추(春秋)는 바야흐로 한창때이시니 학문하기에 늦은 것이 아닙니다.”하니, 왕이 기꺼이 받아들였다.

 

●우리 태조에게 8도의 군마(軍馬)를 거느리게 하고, 군영을 설치하였다.
   번(番)을 나누어 교대로 숙직(宿直)하게 하고, 군자(軍資)로 늠료(廩料)를 지급하였다.

 

●원천부원군(原川府院君) 변안열(邊安烈)을 유배지에서 죽였다.
   앞서 우(禑)가 강릉(江陵)으로 귀양갈 때에 어떤 사람에게 말하기를,

“나를 그르친 자는 변안열이다.” 하였는데, 김저(金佇)의 옥사가 발생하게 되어서 저(佇)에게 그 사실을 물었으나 불복(不服)하므로 칼로 발바닥을 두어 촌(寸)쯤 째고 불로 지지자 묻는 대로 다 자복하여 드디어 옥사(獄詞)가 이루어졌다.

 

낭사(郞舍) 윤소종(尹紹宗)ㆍ이첨(李詹)ㆍ오사충(吳思忠) 등이 상소하여 변안열이 신우(辛禑)를 영립(迎立)하려 했다는 죄로 논박하고 전형(典刑)을 바로잡을 것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고 관작만 삭탈하여 한양(漢陽)으로 유배하였었다.

 

이때에 강도가 도성(都城) 밖에서 어떤 사람을 겁탈한 사건이 발생하자, 소종 등 오원제(吳元濟)가 사람을 보내어 무원형(武元衡)을 죽인 사건을 인용하여, 강도의 겁탈 사건은 사실상 변안열의 무리들이 일으킨 것이라고 왕의 면전에서 아뢰고, 물러가 또 상소하여 극언(極言)으로 안열을 주살(誅殺)하도록 청하자 왕은 그 소(疏)를 헌사(憲司)에 내려, 유배지에 가서 더는 국문하지 말고 죽이라고 하였다.

 

헌사가 이를 한양부윤(漢陽府尹) 김백흥(金伯興)에게 이첩하여 안열을 죽였는데, 안열이 처형될 때에 탄식하기를, “신우(辛禑)를 영립하려고 모의한 것이 어찌 나 한 사람뿐이겠느냐? 하고 싶은 말이 있다.”하였으나, 백흥은 캐묻지도 않고 목을 베었다.

 

이에 윤소종 등은 또 백흥이 캐묻지 않고 죽인 사실을 논박하고, 악인과 당여(黨與)가 되어 덮어 준 죄를 징계해야 된다고 청하였다. 이에 대관(臺官)을 나누어 보내 안열의 당여인 이을진(李乙珍)ㆍ이림(李琳) 및 그 아들 귀생(貴生), 이경도(李庚道)ㆍ정지(鄭地)ㆍ원상(元庠) 등을 경외(京外)에서 국문하였는데, 고문이 매우 혹독하여 백흥은 옥중에서 죽었다.

 

소종 등은 또 홍영통(洪永通)ㆍ우현보(禹玄寶)ㆍ왕안덕(王安德)ㆍ우인열(禹仁烈)ㆍ정희계(鄭熙啓) 등이 안열과 더불어 역모를 꾀했다고 아뢰고 극형에 처할 것을 청하였으나 답하지 않았다.

 

●첨설직(添設職)을 혁파하고 궁성숙위소(宮城宿衛所)를 설치하였다.
   국가가 다사(多事)한 이래 첨설직으로 군공(軍功)을 포상하니, 우(禑)와 창(昌) 때에 이르러서는 쓸데없는 관직이 지나

  치게 많았다.

 

왕이 정도전에게 이르기를, “첨설직을 혁파하려 하는데 그 방법이 무엇인가?”하니, 아뢰기를, “옛날의 사람 쓰는 법에는 네 가지가 있으니 문학(文學)ㆍ무과(武科)ㆍ이과(吏科)ㆍ문음(門蔭 문벌이나 조상의 덕으로 벼슬하는것)입니다.

 

이 4과(科)로써 등용한다면 그 누가 원망하겠습니까?”하였다.

또 묻기를, “관질(官秩)이 높은 자는 어떻게 처우하면 좋겠는가?하니, 아뢰기를, “옛날 송(宋) 때에는 산관(散官)을 위하여 여러 궁관(宮觀)의 제조(提調)ㆍ제거(提擧)를 두었으니, 이를 본따서 궁성숙위부(宮城宿衛府)를 설치하고 위계(位階)가 밀직(密直)이나 봉익(奉翊)인 자는 제조로 삼고 3~4품인 자는 제거로 삼는다면 정사가 마땅함을 얻어 체통이 엄해질 것입니다.”하였다.

 

●인왕불(仁王佛)을 내전(內殿)에 안치하였다.
   행신(幸臣) 신원필(申元弼)의 말에 따른 것이다. 왕이 불교를 숭봉하여 아침저녁으로 예배하였다.

 

●판삼사(判三司) 이색(李穡)의 관직을 삭탈하고 장단(長湍)에서 국문(鞫問)하였다.
   규정(紏正) 전시(田時)를 창녕(昌寧)에 보내어 조민수(趙敏修)를 국문하게 했는데, 조민수의 창(昌)을 세운 모계가 이

   색에게서 나왔다는 공사(供辭)를 받고자 하여 핍박하니 결국 자복하였다.

 

이에 대간(臺諫)에서 국문을 가하고 극형에 처할 것을 청하여 논란이 거듭되니, 왕이 오사충(吳思忠)ㆍ전시를 장단에 보내어 이색을 국문하게 하였다. 오사충은 고문을 가하여 심문할 것을 청하고, 옥졸로 하여금 곤장(棍杖)을 쥐고 좌우에 늘어서게 한 뒤 온종일 밤새도록 다그치며, 또 조민수의 창녕 옥사(獄詞)를 보였는데, 이색의 공사(供辭)는,

 

“회군(回軍)하여 임금 세우는 문제를 의론할 때에 조민수가 주장(主將)이었으므로 색(穡)은 감히 그 뜻을 어길 수가 없었고, 우(禑)가 선 지 이미 오래었으므로 그 아들 창(昌)을 세우는 것이 당연하다고 대답하였을 뿐이지 앞장서서 권하거나 독단으로 세우자고 한 말은 없었습니다.

 

지난해 경사(京師)에 조회하러 갔다가 예부(禮部)에 들어가니, 상서(尙書) 이원명(李原明)이 이르기를 ‘너희 나라에서는 아비를 내쫓고 그 아들을 세웠는데, 천하에 어찌 이러한 이치가 있으며, 왕과 최영(崔瑩)이 모두 구금을 당했다고 하니 이는 어떠한 의리(義理)인가?’ 하기에, 내가 답하기를 ‘최영이 왕을 교사(敎唆)하여 요양(遼陽)을 범하려 하므로 장군 조민수와 이(李) 태조의 구휘(舊諱) 가 불가하다고 하여 군대를 돌려 최영을 옥에 가두었습니다.

 

이에 왕이 노하여 여러 장수들을 해하려 하므로 태후(太后)가 폐하여 구도(舊都) 강화(江華)에 안치하고 성정(性情)을 이양(怡養)하게 하며 모시고 받들기를 전일과 다름없이 하고 있는데 어떻게 방축(放逐)이란 말이 있을 수 있습니까?’ 하고 돌아와서 이시중(李侍中 이 성계를 말한다)에게 말하기를 ‘이원명의 말은 귀로는 들을 수 있으나 차마 입으로는 말할 수 없습니다.

 

여흥(驪興 이때에 우왕이 여흥에 방축되어 있었다)은 지역이 머니 맞이하여 가까운 곳에 안치하면 임금을 방축하였다는 비난은 면할 수 있을 것입기다.’ 하였습니다. 단지 이 말뿐이며 진실로 영립하자는 의론은 없었습니다.”하였다.

 

●오사충 등이 이 공사를 가지고 돌아왔다.

   이색이 일찍이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옛날 진 원제(晋元帝)가 대통(大統)을 이었는데 치당(致堂 호인(胡寅)의 호) 호씨(胡氏)가 ‘원제의 성은 우씨(牛氏)인데 외람되이 〈사마씨(司馬氏)인〉 진의 종실(宗室)에 붙었으니 동진(東晋)의 군신들이 어떻게 이를 그대로 두고 개혁시키지 않았는가 하면 이는 필시 호갈(胡羯)이 번갈아 침입하여 강좌(江左 양자강(揚子江) 남쪽을 말한다)가 미약하므로 만약 구래(舊來)의 왕업에 의지하지 않으면 인심을 안정시킬 수 없었으므로 그대로 두었으니 어렵고 쉬운 것도 없다.

 

이 또한 형세를 따라 일을 성취할 적에 부득이해서 한 것이다.’ 하였는데, 색(穡)이 신씨(辛氏)를 세울 때에 감히 다른 의견을 내지 않은 것도 이러한 뜻에서이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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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호사설(星湖僿說)》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국초(國初)의 신우(辛禑) 일은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의심나는 점이 있다.

 

목은(牧隱)의 말이 비록 비중이 크다 하더라도 만약에 신씨(辛氏)라고 해서 폐했다면 어찌 목은(牧隱)의 뜻에 따라 그 아들을 다시 세웠을 것이며 우(禑)를 폐할 때도 조민수가 참여하고 창(昌)을 세울 때도 민수가 참여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내 생각으로는 폐한 것은 북벌(北伐) 때문이다. 그때에 비록 신씨(辛氏)라는 설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모두가 사사로이 주고받을 정도의 말이지 공명정대한 의론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참을 세웠으나 모두 조용했던 것임을 역사에 의거해서 증명할 수 있다.

 

사세(事勢)가 한번 기울어지자 구설(口舌)이 더욱 번거롭게 되면서 부화뇌동(附和雷同)하여 깨뜨릴 수 없는 정론(定論)으로 되고 사가(史家)들도 여기에 의거해서 필삭(筆削)하여 후세에 전하게 됨으로써 다시는 식별할 수조차 없게 된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찌 폐출할 때를 당하여 유씨(劉氏)가 아니라는 사실로 대의(大義)를 부르짖고 사방에 명백히 고하지 않았으리요.

 

그리고 만약 그것이 사실이었다면 마땅히 전왕의 아들을 세워야 한다는 의론을 목은 또한 감히 발설하지 못했을 것이다. 창왕 때에 와서야 〈신씨라는 설을〉 구실삼아 폐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목은이 우씨(牛氏)로 사마씨(司馬氏 진(晋)의 국성(國姓)이 사마씨이다)를 이었다는 설로 살기를 도모한 것 또한 구차한 것이다. 대개 당시 강좌(江左)의 제공(諸公)들이 반드시 이를 알고 있었다고는 할 수 없다.

만약 그가 타성(他姓)임을 확실히 알았다면 무슨 옛 왕업에 의지하는 것이 있었겠으며, 당시에 어찌 사마씨성을 가진 사람이 하나도 없어서 반드시 이것으로 편안할 수 있었겠는가? 이것은 단지 형세의 이로움만을 가지고 말한 것이지 그 의리의 한쪽은 접어둔 것이었다.

 


어떤 자가 당시의 사정을 명확히 말할 수 없는 무엇이 있기 때문에 이 설에 가탁한 것일까? 전겸익(錢謙益)이 《명시주(明詩注)》에서 또 호씨의 설을 인용하면서 끝에 가서 단언하기를, “유구한 천년에 누가 우씨 마씨의 시비를 분별하랴!”하였다. 노(魯)의 정공(定公)ㆍ애공(哀公) 시대에는 은미(隱微)한 말이 많은데 우리 나라 역사에도 그러한 것이 있다.

 

●유학교수(儒學敎授)를 두었다.
   몽고란(蒙古亂) 이래 학교가 피폐하고 해이해져서 〈향원(鄕愿)으로 유명(儒名)을 가탁하고〉 군역(軍役)을 피하는 자들이 5~6월 사이에 동자(童子)들을 모아 놓고 당송(唐宋) 시대의 절구(絶句)를 읽히다가 50일이 되면 파하니 이를 하과(夏課)라 하였다.

 

조준(趙浚)이 청하기를, “외방(外方)에서 유학을 업(業)으로 하며 한가히 사는 자들을 그 고을의 교도(敎導)로 삼아 자제들로 하여금 항상 사서(四書)와 오경(五經)을 읽히도록 하고, 교수관(敎授官)을 5도에 각 1인씩 나누어보내 군현(郡縣)을 두루 돌며 교과 과정을 엄격히 세우고 그 통달(通達) 여부를 상고해서 서적(書籍)에 이름을 올리고 이끌어 주고 권장하여 쓸 만한 인재를 양성하되, 인재를 많이 얻은 자는 차서(次序)에 관계 없이 발탁해 쓰고, 성과가 없는 자는 벌하도록 하소서.”하였다.

 

이에 서울의 5부(部)로부터 시작해서 각도(各道)의 목(牧)ㆍ부(府)에 이르기까지 유학교수관을 두었다. 김첨(金瞻) 등이 상소하여, 원자(元子) 및 종실(宗室) 자제의 입학을 청하였다.

 

●대부(大夫)ㆍ사(士)ㆍ서인(庶人)의 제례(祭禮)를 정하였다.
  우리 나라 가묘(家廟)의 법이 오랫동안 폐지되어 왔다.

 

무릇 집이 있는 자는 반드시 신사(神祠)를 세우니 이것을 위호(衛護)라고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판대부(判大夫) 이상은 3세(世)를 제사지내고, 6품 이상은 2세를, 7품 이하 및 서인은 부모만 제사지내게 하고 모두 가묘를 세우게 하였으며, 삼령절(三令節 정조(正朝)ㆍ추석(秋夕)ㆍ한식을 말한다)인 한식(寒食)에는 상분(上賁 조상의 묘소를 참배하고 돌보는 것)하되 구속(舊俗)에 따르도록 허락하였다.

 

행례(行禮)의 의식(儀式)은 한결같이 주 문공(朱文公 문공은 주자(朱子)의 시호)의 《가례(家禮)》에 준하도록 하되 편의에 따라 가감하게 하였다.

 

당시 전(前) 판사(判事) 윤귀생(尹龜生)은 찬성(贊成) 택(澤)의 아들인데, 금주(錦州) 지금의 금산(錦山) 에 은퇴하여 살면서 사당을 세우고 제례(祭禮)를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따라 행하니, 관찰사 노숭(盧嵩)이 금주에 이첩(移牒)하기를, “지금 국가에서 영을 내려 가묘를 세우라고 하였으나 한 사람도 시행하는 자가 없었다.

 

오직 윤귀생은 국가의 영이 있기 전에 스스로 가묘를 세우고 제사를 닦아 조고(祖考)를 공경히 섬기므로, 선왕(先王 주 강왕(周康王)을 말한다)의 정사가 ‘착한 이를 표창하고 악한 자를 구별하여 풍조(風潮)와 명성을 그곳에 세우라.’ 하였으니 마땅히 정려(旌閭)하고 효자비(孝子碑)를 세울 것이며 그 집을 복호(復戶 조세(租稅) 이외의 잡부금을 면제하는 일)하여 여러 사람들을 권면(勸勉)하라.”하였다.


3월 홍영통(洪永通)을 영삼사사(領三司事)로, 우현보(禹玄寶)를 판삼사사(判三司事)로 삼았다.
영통은 탐욕이 많고 불법을 자행하는 자로 임견미(林堅味)ㆍ염흥방(廉興邦)의 화를 면하였는데, 왕이 즉위한 뒤에 간관(諫官)들이 그가 변안열(邊安烈)의 옥사에 관련된 사실을 들어 소장을 번갈아 올려 극형에 처할 것을 청하였지만 왕이 윤허하지 않고 이 직을 제수(除授)한 것이다.

 

우현보도 김저(金佇)의 옥사에 관련되었으나, 그 손자 우성범(禹成範)이 왕의 부마(駙馬)인 까닭에 왕이 법을 굽혀 비호하였다.

 

●윤소종(尹紹宗)을 금주(錦州)로 방축(放逐)하였다.
   오사충(吳思忠)과 윤소종은 남을 탄핵하고 논박하기를 즐겨하였으므로 왕이 이들을 매우 미워하여 언관직(言官職)을 모두 갈아 버렸다. 소종이 예의판서(禮儀判書)가 되어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이시중(李侍中)은 군자를 진출시키고 소인을 물리칠 줄 모른다.

 

만약 하루아침에 소인의 간계에 빠진다면 후회막급할 일이다.”하였는데, 심덕부(沈德符)가 이 말을 듣고 왕에게 고하자 왕이 노하여 윤소종을 죄주려 하니, 태조가 말하기를,“조정 신하 중에 바른말을 하는 사람은 오직 윤소종뿐이니 죄를 주어서는 안 됩니다.”하였으나,

 

왕은 이르기를, “이시중은 사직(社稷)에 공을 세웠는데 소종이 감히 욕을 하니 그를 죄주지 않을 수 있겠소?”하고, 드디어 그를 방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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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윤소종의 뜻은 오로지 우리 태조를 위한 것이었으나 왕이 태조를 욕한다고 핑계하고 내친 것은 대개

     태조의 우익(羽翼)을 제거하려는 뜻이었다.

 

○우리 태조가 사직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고, 교서(敎書)를 내려 9공신(功臣)을 포상(褒賞)하였다.


○문하주서(門下注書) 길재(吉再)가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였다
  길재는 해평인(海平人)으로 성품이 매우 총명하고 청렴하기가 그지없었으며 효성으로 부모를 섬겼다.

 

이색(李穡)ㆍ정몽주(鄭夢周)ㆍ권근(權近)의 문하에 유학하면서 비로소 이학(理學)의 이론을 들었다. 이때에 이르러 장차 나라가 망할 것을 알고 어머니가 늙었다는 것을 이유로 벼슬을 버리고 귀향한 것이다.

 

귀향 도중 장단(長湍)에 들러 이색을 찾아보고 거취를 물으니 색이 말하기를, “나는 대신이니 국가와 더불어 기쁨과 슬픔을 같이할 것이지만 그대 같은 사람은 마땅히 가야 한다.”하였다.

 

길재가 돌아가겠다고 고하자 이색이 시(詩)를 지어 주었는데, 그 끝구절에 이르기를,

귀한 벼슬이 주어져도 서둘러 받지 않고 / 軒冕倘來非所
나는 기러기 한 마리 명명 중에 있도다 / 飛鴻一箇在冥冥

하였다.

 

물러가 봉계(鳳溪)의 옛집에 살면서 관직을 제수하여도 나아가지 않았다.

이때 모친의 나이가 60이었는데 혼정신성(昏定晨省)하며 봉양을 극진히 하였고, 도학(道學)을 강구하되 정주(程朱)의 논지(論旨)에 부합되도록 힘썼으며, 말마다 반드시 충효를 으뜸으로 삼고 이단(異端)을 배척하여 중들 중에도 감오(感悟)하여 근본을 되찾은 이가 수십인이었고, 마을의 부녀자들까지도 그의 가르침에 감화되어 예(禮)로써 자기 몸을 지킬 줄 알았으며, 세상에 전해 오는 이야기에, 야은(治隱 길재의 호)이 사는 이웃에 먼 변방으로 수자리간 한 병졸의 집이 있었는데, 그의 아내가 겁탈로 몸을 더럽힐까 걱정하여 가시울타리를 쳐놓고 정절을 지키며 살았다.

 

거의 10년이나 지난 어느날 밤, 그 병졸이 수자리에서 돌아와 문을 열라고 소리쳤으나 아내가 응하지 않자 병졸이 말하기를  “오랫동안 군역(軍役)을 치르고 이제야 돌아왔는데, 어찌하여 환영은커녕 문도 열어주지 않는가?” 하자,

 

그 아내가 대답하기를, “나는 비록 제 남편인 줄을 알지만, 늦은 밤중에 몰래 들어온다면 어찌 반평생 수절(守節)한 뜻이리요. 길 선생(吉先生)께서 들으신다면 무어라고 하시겠소?”하였다.

 

병졸을 울타리 아래서 밤을 지새우게 하고, 이튿날 아침 이웃들을 모아 놓은 자리에서 맞아들여 부부가 되니, 그들의 사이는 다시금 전과 같이 되었다고 한다. 원근의 학도가 사방에서 모여들었다.

 

우리 태종(太宗)이 잠저시(潛邸時) 입학했을 때 길재도 한 마을에 살아 같이 다니며 학문을 닦았으므로 공정(恭靖 정종(定宗)을 말한다)에게 천거하여 태상박사(太常博士)로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자, 주관(州官)이 서울에 올라가도록 독촉하므로 길재는 글을 올려 두 성(姓)을 섬길 수 없는 의리를 스스로 진술하니, 상(上)도 그 절의를 아름답게 여겨 우악(優渥)한 예로 대접하였다.

 

길재가 일찍이 박분(朴賁)ㆍ이색(李穡)ㆍ권근(權近)의 문하에서 학업을 닦았으므로 이들 세 사람의 죽음에 당하여는 모두 심상(心喪 스승의 상에는 복(服)이 없으므로 마음속으로 상을 당한 것처럼 하는 것) 3년을 지냈다.

 

학자들이 이를 종사(宗師)로 삼아 야은 선생(冶隱先生)이라 일컬었고, 우리 세종(世宗) 기해년(1419)에 졸하니 향년이 67이었다. 권근이 일찍이 길 재를 논하기를, “고려 5백 년에 교화를 배양하여 선비의 기풍을 장려한 효과가 모두 선생의 일신(一身)에 모여 거두어졌고, 조선(朝鮮) 억만년에 강상(綱常)을 부식(扶植)하여 신절(臣節)의 근본을 밝힌 것은 선생 일신으로부터 시작하여 기틀을 잡았으니 그가 명교(名敎)에 끼친 공이 크다.”하였다.


하4월 흰 무지개가 해를 꿰었다.
○왕모(王母) 복녕 궁주(福寧宮主)를 높여 삼한국 대비(三韓國大妃)로 삼았다.


전(殿)을 정명(貞明)이라 하였다. 이때에 대사성(大司成) 김자수(金子粹)가 상언하기를, “전하께서 국대비전(國大妃殿)에는 친행(親幸)이 잦으시며 봉양 또한 지극하시나 왕대비전(王大妃殿)에는 일찍이 나아가 뵌 일이 한번도 없으시니 이는 낳아 길러 주신 은혜에는 친압(親押)하면서 승조(承祧 대통(大統)을 잇는 것)의 중함에는 소홀한 것이니 옳은 일입니까?

 

앞으로는 세시(歲時) 명절이나 복일(伏日)ㆍ납일(臘日)에 반드시 왕대비전에 배알하여 한훤(寒暄 추위와 더위, 즉 문안을 말한다)을 살핀 뒤에야 국대비전에 배알하심으로써 대의(大義)를 밝히소서.”하였다.

 

●이색 등을 옮겨 다시 먼 곳으로 유배하였다.
   이색은 함창(咸昌)에, 정지(鄭地)는 횡천(橫川)에, 이림(李琳)은 철원(鐵原)에, 이귀생(李貴生)은 고성(固城)에, 우인열(禹仁烈)은 청풍(淸風)에 유배하고, 이을진(李乙珍)ㆍ이경도(李庚道)는 곤장을 쳐서 유배하고, 왕안덕(王安德)은 풍주(豊州)에, 우홍수(禹洪壽)는 인주(仁州)에, 원상(元庠)은 광주(光州)에 유배하였다.

 

○회군공(回軍功)을 녹(錄)하였다.
   우리 태조를 으뜸으로, 그 다음으로 조민수ㆍ왕안덕(王安德)ㆍ지용기(池涌奇) 등 45인에게 모두 공신호를 내렸다.

 

○덕녕 공주(德寧公主 충혜왕(忠惠王)의 비(妃))와 노국 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공민왕(恭愍王)의 비를 태(太廟)에

   부였다.



●윤4월 처음으로 무과를 설치하였다.

   도당(都堂)에서 아뢰기를, “문과 무는 어느 한쪽도 폐지할 수 없는 것인데, 본조(本朝)에서는 문과만 뽑고 무과는 뽑지 않았기 때문에 무예(武藝)에 뛰어난 인재가 드뭅니다.

 

마땅히 인(寅)ㆍ신(申)ㆍ사(巳)ㆍ해(亥)가 되는 해에 무과를 실시하여 시험해 뽑고 합격자에게는 패(牌)를 주어 한결같이 문과의 예에 따르되, 제가(諸家)의 병서(兵書)에 모두 통하고 또 문예에 익숙한 자를 1등으로 3명 뽑고, 무예를 대강 익히고 병서에 통한 자를 2등으로 7명 뽑고, 병서에 통하거나 한 가지 무예에 인숙한 자를 3등으로 23명 뽑는 것을 영원히 변하지 않는 법식(法式)으로 삼으십시오.”하니, 그대로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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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이것이 우리 나라 무과의 시초이다.

 

○지신사(知申事) 이행(李行)을 청주(淸州)에 유배하였다.
   대간이 이색 등의 죄를 논핵하므로 왕이 재상과 의논하고자 하니, 이행이 아뢰기를, “대간의 뜻이 공신들의 뜻입니다.”

하니, 우리 태조와 여러 공신들이 상서(上書)하기를, “대간이 논거(論擧)하는 일을 신등은 모르는 것인데 사람들이 이 말을 인연하여 신등에게 허물을 돌리고 우(禑)ㆍ창(昌)의 당(黨)이 말을 날조하여 비방을 일으키니, 바라건대 신등은 사직하여 성명(性命)을 보전코자 합니다.”하고, 모두 두문불출(杜門不出)하니, 왕이 이에 시무(視務)하도록 명하고 이행을 청주에 유배하였다.

 

적전(籍田) 증지(甑池)의 물이 솟구쳤는데 그 소리가 우레와 같았다.


○정도전(鄭道傳)을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삼았다.
   정도전이 일찍이 왕에게 아뢰기를,

“당(唐)에서는 사람을 쓰는 법에 5가지 조목이 있었으니, 교양(敎養)은 재덕(才德)을 성취시키는 것이고, 선거(選擧)는 우수한 자를 뽑는 것이고, 전주(銓注)는 그 직임에 마땅하게 하는 것이고, 고과(考課)는 그 공과(功過)를 살피는 것이고, 출척(黜陟)은 권면과 징계를 보이는 것입니다.

 

조목 중에 또 각기 조목이 있으니, 경사(經史)에 널리 통하고 율령(律令)에 밝으며 사어(射御)에 익숙한 이 3가지는 교양의 조목이요, 〈문학(文學)ㆍ재간(才幹)ㆍ무예(武藝)ㆍ문음(門蔭)의 4가지는 선거의 조목이요,〉

 

덕망과 식견과 도량이 있는 자는 재상을 삼고

지략(智略)과 위엄과 용맹이 있는 자는 장수로 삼고,

 

직언(直言)하기를 꺼리지 않는 자는 대간(臺諫)을 삼고,

명찰(明察)하여 공평하게 용서하는 자는 형관(刑官)을 삼고,

 

산수(算數)에 인숙한 자는 전곡(錢糓)을 주관하게 하고,

정교하고 민첩한 자는 공장(工匠)을 주관하게 하는, 이 6가지는 전주의 조목이요,

 

사사로움을 잊고 공(公)만 알아 맡은 직책에 부지런한 것이 공(功)이고,

사욕(私慾)을 채우면서 공사(公事)를 소홀히 하고 직무를 태만히 하는 것을 과(過)라 하니

이 2가지는 고과(考課)의 조목이요,

 

관직과 품계를 올리고 녹봉을 더해 주는 것이 척(陟)이며,

관직을 삭탈하고 귀양보내는 것을 출(黜)이라 하는데,

이 2가지는 출척의 조목입니다.

 

본조(本朝)는 사람 쓰는 법이 크게 무너져 교양하고자 하면 사도(師道)가 밝지 못하고, 선거하고자 하면 사(私)로써 공을 폐하고, 전주하고자 하면 현명한 자와 우매한 자가 뒤섞여 진출하고, 고과하고자 하면 청탁이 성행하고, 출척하고자 하면 뇌물이 공공연히 행하여져 5가지가 모두 폐해졌으니 무슨 방법으로 인재를 구하겠습니까?

 

최근에 5도(道)에 출척사(黜陟使)를 나누어보내기는 하였으나 이것은 근본은 헤아리지 않고 말단만 다스리는 것입니다.”하니, 왕이 매우 옳게 여겨, 검토관(檢討官) 한상경(韓尙敬)에게 그 말을 써서 올리게 하였다.

 

○우리 태종(太宗)을 우부대언(右副代言)으로 삼았다
태종은 우리 태조의 다섯째아들로, 영특하고 지혜가 뛰어났다. 이때에 정사는 어지럽고 백성은 이산하여 국세가 위태하니, 개탄하여 세상을 구제할 뜻이 있었다. 변계량(卞季良)의 헌릉비(獻陵碑)에서 보충


●5월 진눈깨비가 내렸다.


○이색ㆍ우현보 등을 하옥(下獄)하였다가 곧 석방하였다

   조반(趙胖) 등이 경사(京師)에 갔더니, 예부(禮部)에서 조반을 불러 말하기를, “너희 나라 사람인 파평군(坡平君) 윤이(尹彛)란 자와 중랑장(中郞將) 이초(李初)란 자가 와서 황제께 일러바치기를 ‘고려 이시중(李侍中 이성계를 말한다)이 자기의 인척(姻戚)인 왕요(王瑤 : 공양왕(恭讓王)의 성명이다)를 왕으로 세우고 장차 군대를 동원하여 상국(上國)을 범하려 하므로 재상 이색 등이 불가하다고 하니, 곧바로 이색ㆍ조민수(曹敏修)ㆍ이림(李琳)ㆍ변안열(邊安烈)ㆍ권중화(權仲和)ㆍ장하(張夏)ㆍ이숭인(李崇仁)ㆍ권근(權近)ㆍ이종학(李種學)ㆍ이귀생(李貴生) 등을 죽이려 하고, 우현보(禹玄寶)ㆍ우인열(禹仁烈)ㆍ정지(鄭地)ㆍ김종연(金宗衍)ㆍ윤유린(尹有麟)ㆍ홍인계(洪仁桂)ㆍ진을서(陳乙瑞)ㆍ경보(慶補)ㆍ이인민(李仁敏) 등을 먼 곳으로 유배하려 하므로, 유배되어 있는 재상들이 우리를 비밀리에 파견하여 천자에게 고하고 이어 친왕(親王)이 군대를 거느리고 와서 토벌해 주도록 청하게 하였습니다.’ 하였다.”하고, 이어 이(彝)ㆍ초(初)가 기록한 이색 등의 이름을 내어 보이므로, 반(胖)과 이(彛) 등이 대면하여 쟁론(爭論)하기를, “너의 지위가 봉군(封君)함에 이르렀다 하니 나를 알아볼 수 있겠는가?”하고 묻자, 이가 깜짝 놀라면서 얼굴빛을 변하였다.

 

그러자 예부의 관원이 말하기를,

“천자의 성명(聖明)으로 그것이 무고(誣告)임을 이미 안다.”하였다.

조반 등이 환국하여 이를 아뢰니, 이에 대간이 이ㆍ초의 당을 국문하자고 청하였지만 소(疏)를 머물러두고 내리지 않았는데, 때마침 김종연이 도망을 쳤으므로 이 때문에 큰 옥사가 갑자기 일어난 것이다.

 

드디어 우현보ㆍ권중화ㆍ경보ㆍ장하ㆍ홍인계ㆍ윤유린을 순군옥(巡軍獄)에 가두었다.

유린은 윤이의 사촌형인데, 이어서 옥관(獄官)이 먼저 유린을 엄하게 국문하니 공사(供辭)에 최공철(崔公哲)ㆍ최칠석(崔七夕) 등이 관련되어 아울러 하옥하였고, 유린은 괴롭고 통분하여 굶어 죽으니 그 머리를 베어 효수(梟首)하고 그 집을 적몰하였다.

 

그리고 이색ㆍ이임ㆍ우인열ㆍ이인민ㆍ정지ㆍ이숭인ㆍ권근ㆍ이종학ㆍ이귀생 등을 체포하여 청주옥(淸州獄)에 가두고 평리(評理) 윤호(尹虎) 등을 보내어 국문하려 하자 홀연히 천둥이 치고 큰 비가 쏟아져 앞 내가 갑자기 넣쳐서 성 남문을 허물어뜨리니 성중의 수심(水深)이 한 길이나 넘어 관사가 물에 잠기므로 옥관(獄官)은 창황중에 객사(客舍) 앞에 있는 압각수(鴨脚樹 : 은행 나무를 말한다)에 기어올라가 목숨을 건졌다.

 

왕이 수재(水災)를 이유로 심덕부(沈德符) 및 우리 태조를 불러 서울과 지방의 죄수들을 풀어 줄 것을 의논하여 마침내 이색ㆍ우현보 등이 모두 석방되자 국인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그러나 대성(臺省)과 헌부(憲府)에서 번갈아 소장(疏章)을 올려 이색 등을 추론(追論)함으로써 연달아 유배되었고, 김종연을 체포하여 사지를 갈라 조리돌리고, 사신을 보내어 이ㆍ초의 무고를 상주(上奏)하니, 그때는 황제가 이미 두 사람을 표수현(漂水縣)에 유배한 뒤였다.

 

이ㆍ초의 옥사가 일어나자 좌사의(左司議) 김진양(金震陽)은 동료들에게 말하기를, “이ㆍ초의 일은 세 살 먹은 어린아이라도 그것이 무고임을 알 것인데, 헌사가 가벼이 대역(大逆)으로 몰아 탄핵함으로써 정론(正論)을 크게 해쳤다.”하였으므로 드디어 연좌되어 파면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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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이 일은 성지(聖旨)로 자문(咨文)을 보낸 것이 아니고, 다만 예부가 구두로 일러준 데서 나온 것이며, 조

     반 등도 구두로 전하였으므로 징험할 만한 근거가 없으니 진실로 의심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뒤에 와서 조반이 임견미(林堅味)염흥방(廉興邦)의 옥사를 일으켜 결국 개국공신의 훈록(勳祿)에 참여하였으니 김진양이 의심한 것도 실로 당연하다 하겠다.

 

○왕강(王康)을 삼도 수군도체찰사(三道水軍都體蔡使)로 삼았다.
   왕강은 종실의 먼 친척이다. 이때에 왜구가 제멋대로 날뛰어 조운(漕運)이 통하지 못하자, 도당(都堂)에서 강(康)이 재능이 있다고 추천하여 해도(海道)를 맡기니 왕강은 국가를 이롭게 하는 것으로 자기의 임무를 삼고 어염(魚鹽)의 이(利)에 힘을 기울여 몇 해가 안 되어 거만(鉅萬)으로 헤아리기에 이르니 국가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왕강이 해도(海島) 백성을 침탈하여 백성들의 원망이 많았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취렴(聚斂)하는 신하라 하였고, 유안(劉晏)으로 지목하였다.

 

○일본 원요준(源了俊)이 사신을 보내어 토산물을 바쳤다

   6월 예성강(禮成江) 물이 붉은 색으로 변하여 3일 동안 끓어올랐다.
왕이 근심하는 기색이 있자 검토관(檢討官) 신원필(申元弼)이 아뢰기를, “그것이 어찌 상서(祥瑞)가 아닌지 알겠습니까?”하였다.

 

신원필은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왔는데도 매양 아첨하는 말을 아뢰고 궁중에 드나들며 환관과 어울리니 사림(士林)들이 그를 비루하게 여겼다.

 

○태백(太白)이 경천(經天)하였다.


○왜적이 양광도(楊廣道)에 침구하였다

추7월 대사(大赦)하였다.
이때에 대관(臺官)이 이ㆍ초의 당을 힘써 논핵하였는데, 적경원(積慶園)에서 추숭례(追崇禮)를 거행하자 정몽주(鄭夢周)가 왕에게 아뢰기를,

“추숭례를 거행하는 기회에 큰 은혜를 내리소서.”하니 그대로 따른 것이다. 형조에서 정몽주가 이ㆍ초의 당을 두둔한다고 탄핵하자, 정몽주는 두 번 상소하여 사면을 청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한양(漢陽)의 궁궐을 수축(修築)하였다.
   서운관(書雲觀)에서 《도선비기(道銑秘記)》의, 지리(地理)에는 쇠운(衰運)과 왕운(旺運)이 있다는 설(說)로 한양에 행행하여 송도(松都)의 지덕(地德)을 쉬게 하도록 청하자, 왕이 이것을 박의중(朴宜中)에게 물으니 아뢰기를, “도참설(圖讖說)의 술수로써 그 나라를 보전하였다는 말을 신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또 백성들을 괴롭히고 인력 자를 공급해야 하니 그 폐단을 이루 말할 수 있겠습니까?”하고, 대신(臺臣)이 또 간쟁(諫爭)하였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8월 왜적이 서해도(西海道)를 노략질하고 또 전라도도 노략질하였다.


○김윤후(金允厚) 등이 유구(琉球)로부터 돌아왔다.
   김윤후가 돌아올 때 중산왕(中山王)은 또 옥지(玉之) 등을 보내어 신하로 칭하며 표문(表文)을 올렸고, 잡혀갔던 사람들을 돌려보냈으며 토산물을 바쳤다. 이때부터 해마다 사신을 보내왔으며, 그 세자 무령(武寧) 역시 방물(方物)을 바쳤다.


9월 초하루(경인)에 개기일식(皆旣日蝕)이 있었다.
○태백이 경천하였다.


○공사(公私)의 전적(田籍)을 불태웠다.
   그 불이 며칠 동안 그치지 않고 탔다. 왕이 탄식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조종(祖宗) 대대로 내려온 사전법(私田法)이 과인에 이르러 갑자기 혁파되니 애석하도다.”하였다.

 

●도읍을 한양으로 옮겼다.
   동11월 우현보ㆍ이색 등을 사유(赦宥)하였다.

우현보ㆍ이색ㆍ권중화(權仲和) 등에게는 서울과 지방을 막론하고 어디서나 마음대로 살게 하고, 우인열(禹仁烈)ㆍ정지(鄭地)ㆍ권근ㆍ이숭인ㆍ이림(李琳) 등에게는 지방의 어디에서나 마음대로 살게 하였다.

 

권근은 적소(謫所)에 있으면서 《입학도설(入學圖說)》을 짓고, 이듬해에 충주(忠州) 양촌으로 돌아가 《오경천견록(五經淺見錄)》을 지었다. 권근은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였고, 이색ㆍ정몽주의 문하에 출입하였으며 문장과 학술이 당세에 으뜸이었으나 혁명 후에 절개를 지키지 못하여 청론(淸論)에서 버림을 받았다.

 

신씨(申氏)는 이렇게 적었다.

권근이 죄를 받은 것은 하나는 목은(牧隱) 때문이고, 하나는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의 호) 때문이다. 만약에 그가 당시의 유배 생활에 안주(安住)할 수 있었다면 그의 문장과 명론(名論)이 어찌 목은과 도은만 못하였겠는가?

 

그러나 계룡시(鷄龍詩)를 한 번 읊자 갑자기 개국총신(開國寵臣)이 되었으니 애석하다. 그가 절개를 굽힌 뒤에도 지위가 삼사(三司)를 넘지 못하였고, 나이는 육순(六旬)을 누리지 못하였으니 소득도 보잘것이 없었다.

 

그 당시 권근을 기롱(譏弄)한 시에,

청천 백일에 양촌은 의리를 말하였는데 / 白日陽村談義理
어느 세대인들 현인이 없겠는가 / 世間何代更無賢

하였으니, 어찌 부끄럽지 않겠는가? 오직 그 자손들이 벼슬을 하여 끊이지 않고 계속 융성했으므로 사람마다 양촌 양촌 하여 마치 덕행이라도 있는 사람 같지만 그가 명예를 훔친 짓은 너무 심하다고 하겠다.

 

○우리 태조를 영삼사사(領三司事)로, 정몽주를 수시중(守侍中)으로, 배극렴(裵克廉)ㆍ설장순(偰長壽)를 찬

   성사(贊成事)로 삼았다.

 

○심덕부(沈德符)를 파직시키고 우리 태조를 다시 시중으로 삼았다.

 


○판삼사사(判三司事) 지용기(池湧奇) 등을 유배하였다.
   서경(西京) 사람 윤귀택(尹龜澤)이 우리 태조에게 고하기를,“김종연(金宗衍)이 심덕부ㆍ지용기 등과 더불어 공(公)을 해치려고 꾀한다.”하므로 태조가 이 사실을 심덕부에게 알리니, 덕부가 크게 놀라 그 말의 근원을 끝까지 캐본 결과 바로 덕부의 족질(族姪) 조유(趙裕)가 한 말이었다.

 

덕부는 자청해서 옥에 들어가 옥정(獄庭)에서 변론하였고, 조유는 곧 자복하고 교살(絞殺)되었다.

이에 언관(言官)이 심덕부를 탄핵하여 파직시켰고, 지용기 및 공사(供辭)에 연루된 박위(朴葳)ㆍ정희계(鄭熙啓)ㆍ윤사덕(尹師德)ㆍ이빈(李彬) 등을 외방(外方)에 유배하였다. 얼마 안 있어 심덕부는 토산(兎山)으로 유배되었고, 김종연은 옥중에서 죽자 사지를 찢어 제도(諸道)에 조리돌렸다.


12월 조민수(曹敏修)가 창녕(昌寧)에서 졸하였다.
○조준(趙浚)을 찬성사로 삼았다.


조준은 이미 태조의 지우(知遇)를 받아 지위가 현달하게 되자, 당시 정사가 혼란함을 보고 마음속으로 쇄신할 생각을 하였다. 오랫동안 헌관직(憲官職)에 있으면서 글을 올려 폐단을 고치고 백성을 교화하며 풍속을 바로잡아 당시의 정사에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인심을 결속시켜 인망을 모으려 하였으므로 태조의 위덕(威德)이 백성들에게 날로 미덥게 된 것도 조준 등의 이러한 보좌 때문이었다.

 

[주01]김저(金佇)의 옥사 : 창왕(昌王) 1년(1389)에 김저 등이 이성계를 암살하려던 사건. 김저는 최영(崔瑩)의 생질로 정득후(鄭得厚)와 함께, 당시 폐출되어 있던 우왕(禑王)으로부터 이성계를 암살하라는 밀지(密旨)를 받고 곽충보(郭忠輔)와 접선, 팔관회(八關會) 날 이성계를 암살할 계획을 꾸몄으나, 곽충보가 이성계에게 밀고함으로써 계획이 실패하고 순군옥(巡軍獄)에 갇혔다. 이 옥사로 많은 사람이 연루되어 화를 입었다. 《高麗史 卷137 列傳50》


[주02]오원제(吳元濟)---사건 : 도적을 철저히 다스려야 한다는 뜻. 당 헌종(唐憲宗) 때에 오 원제가 채주(蔡州)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승상(丞相) 무원형(武元衡)과 중승(中丞) 배도(裵度)가 이를 토벌하라고 청하였다.

 

이때 이사도(李師道)는 번진(藩鎭)에서 오원제와 성세(聲勢)를 의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오원제가 패할까 두려워 도적을 보내어 무원형을 죽이고, 배도에게는 상처를 입혔다.

 

이렇게 되자 여러 신하들은 오원제를 사(赦)하여 번진을 편안히 하게 하라고 청하였으나 헌종은 이 말을 듣지 않고 배도를 정승으로 삼아 오원제를 쳐서 도적을 섬멸하였다. 《高麗史 卷126 列傳41》


[주03]유씨(劉氏)---사실 : 한 고조(漢高祖)가 죽은 뒤 여러 외척들의 세력이 강성해져 유씨의 국가가 위태로운 지경에 처하자, 왕능(王陵)이 백마를 잡아 놓고 하늘에 제사하면서 “고조가 ‘유씨가 아닌 자는 왕 노릇 할 수 없다.’ 했다.” 하고 대의를 부르짖어 국권을 부호(扶護)한 사실을 말한다.


[주04]적전(籍田) : 종묘(宗廟)에 쓰는 자성(粢盛 : 제사에 쓰는 곡식)을 재배하고, 백성들에게 농사의 시범을 보이기 위하여 왕이 직접 나아가 경작하는 전지이다.


[주05]조반이 …… 일으켜 : 임견미와 염흥방이 한창 세도를 부릴 때, 염흥방의 가노(家奴) 이광(李光)이 조반의 전지를 빼앗은 일이 일어났다. 이에 조반이 분격하여 이광을 죽이니 염은 조반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무고(誣告)하고 조반을 순군윽(巡軍獄)에 가두었다.

 

그러나 조반은 끝까지 불복하고, 우왕(禑王)도 조반의 무죄를 알아 석방되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임ㆍ염의 횡포를 미워하던 최영(崔瑩)ㆍ이성계(李成桂) 등이 임ㆍ염을 제거하였다.


[주06]유안(劉晏)으로 지목하였다 : 경제(經濟)에 능하다는 말. 유안은 당(唐)의 현종(玄宗)ㆍ덕종(德宗) 때 명신으로 염철(鹽鐵) 업무를 맡아 국가 재정을 튼튼히 했는데, 특히 안사(安史)의 난리 중 극도로 고갈된 재정을 유안이 모두 주선했다.

 

그는 나라의 이재(理財)에만 치중한 것이 아니라 백성의 이를 앞세웠으므로 다스리는 곳마다 백성들로부터 신임을 얻었다.


[주07]계룡시(鷄龍詩) ---되었으니 : 계룡시란 《양촌집(陽村集)》 첫머리에 있는 풍요(風謠)를 말하는데 내용은 새 왕조의 개국을 칭송하는 것으로 이것이 계기가 되어 크게 등용되었다.

 

[자료문헌]

동사강목 제17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