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왕의 묘호(廟號) 종(宗)과 조(祖)의 차이점.
왕의 호칭에 조(祖)와 종(宗)을 붙인 것을 묘호(廟號)라고 하는데, 이는 임금이 죽은후에 종묘의 사당에 신주를 모시기 위해 붙혀진 이름이다.
또한 묘호(廟號)는 왕이 죽은 후, 신주를 종묘에 모실 때 그 묘실(廟室)을 지칭 하기 위하여 조정에서 의논하여 정하였는데, 연산군이나 광해군처럼 폐위되어 종묘에 들어가지 못한 왕들은 물론 묘호가 없다.
왕의 호칭에는 묘호(廟號)외에도 사후에 중국 황제가 지어 보내주는 시호(諡號)와 신하들이 그 왕의 덕을 칭송하기 위해 지어 올리는 휘호(徽號), 혹은 존호(尊號) 등이 있다.
예를 들면 태조(太祖)의 정식 호칭은 태조강헌지인계운성문신무대왕(太祖 康獻至仁啓運聖文神武 大王)으로 太祖는 묘호, 강헌(康獻)은 시호, 지인(至仁) 이하는 휘호(존호)다.
묘호(廟號)는 원칙적으로 창업 개국한 왕과 그의 四代祖까지만 '할아비 祖'字를 붙이고 그 뒤를 이은 왕들에게는 종통(宗統)의계승자라 하여 宗字를 붙이는 것이 원칙으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宗字는 사당이란 뜻이 포함되어 있기도 하다. 하지만 망한 나라를 다시 일으켜 새운 왕의 경우에도 조(祖) 자(字)를 붙이는 예도 있다. 이렇듯 묘호를 정할 때 흔히 조공종덕(祖功宗德)이니 "有功曰祖, 有德曰宗"이라 하여, 공이 많으면 祖, 덕이 많으면 宗字를 붙인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애매모호한 원칙이라 할 수 있다. 공이 많은지 덕이 많은지 판단 하는것은 매우 주관적인 것이므로 묘호를 정할 때의 의논에 좌우되기 마련이다. 하여 때로는 조정에서 공론이 분열되어 소동이 일어나는 일도 있었다.
대개 宗字보다는 祖字가 더 명예로운 것으로 생각 했음으로 신하들이 아첨하느라 억지로 붙이는 경우도 있었다고 본다. 世祖, 宣祖 그리고 純祖의 경우엔 후대에 이러한 비난을 받았다. 중국의 역대 왕조에서는 건국자인 太祖와 高祖 및 그들의 4조외에 후대의 황제들에게, 祖字를 붙이는 일은 거의 없었다.
묘호는 때로 후에 改定하는 일도 있었는데, 인조(仁祖)의 묘호는 본래 열종(烈宗)이라고 정하였는데, 효종(孝宗)의 명으로 고친 것이고, 영조와 정조의 묘호는 원래 영종(英宗)과 정종(正宗)이었으나 1897년 조선이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친 후 宗을 祖로고쳤다.
정종(定宗)과 단종(端宗)은 오래동안 묘호도 없이 공정왕(恭靖王)과 노산군(魯山君)으로 불리었으나, 숙종 때 와서 비로소 정하여 올린 묘호다. 연산군과 광해군은 반정으로 축출되고 죽은 후, 종묘에 들어가지 못하였기 때문에 당연히 묘호가 없다.
연산군이나 광해군이라는 칭호는 그들이 왕자시절에 받은 봉군(封君) 작호(爵號)이다.
이는 그들이 다시 왕자의 신분으로 강등되었음을 뜻한다.
반대로 왕에 즉위하진 못했지만 후에 왕으로 추존된 이들에게도 묘호를 올렸다. 성종의 생부인 덕종(德宗), 인조의 생부인 원종(元宗), 정조의 생부인 장조(莊祖) 양부인 진종(眞宗), 헌종(憲宗)의 생부인 익종(翼宗: 후에 文祖로 개칭)이 그들이다. 이들은 모두 왕자의 신분이었으나 사후에 아들이 왕이 됨으로 예우상왕의 지위로 격상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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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호(廟號)는 왕이 죽은 후에 조정의 신하들이 의논해 붙이는 것으로 첫 글자는 선왕의 업적을 평가한다는 의미로 글자마다 고유한 의미가 있다. 그리고 뒤에 붙은 조(祖)와 종(宗)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를 살펴보면 고려 초, 학자이자 정치가였던 최승로가 성종에게 올린 시무 28조에, “대체로 공이 큰 임금을 조(祖)라 일컫고, 덕이 높은 임금을 종(宗)이라 일컫는다.”라 하여, 창업 및 공이 높은 임금을 조 라 하였고, 덕이 높은 군주를 종이라 일컬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사열전>- ‘최승로’ 편]
중국의 황제들은 일반적으로 대부분 '종(宗)' 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조(祖)'는 아주 특수한 경우로, 대개는 왕조의 개창자에게만 붙여주는 특수한 명예였다. 그러나 이것이 조선에 들어와서는 묘하게 변형된다.
그리고 이것이 변형이 시작된 것은 세조 묘호를 올린 예종 때였다.
오늘날 용어로 쿠데타로 집권한 세조는 자신의 정변 명분을 김종서 같은 권신들이 국가를 장악하여 왕이 허수아비가 되고 결과적으로 왕권이 침탈당했기 때문이라고 미화 하지만, 그의 묘호인 세조는 이 주장을 반영한 그의 아들 예종의 주장에서 비롯된 것이다. <예종실록> 왕조를 위기에서 구했으니 왕조를 새로 개창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그 후 선조는 임진왜란을 극복하여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공로로, 인조는 광해군을 몰아내고, 병자호란을 극복했다 하여 '조'를 붙였다. 후기로 가면 이것이 점점 남용 되어, 영조와 정조는 나라를 다시 부흥 시켰으니 창업의 공과 맞먹는다 하여, 순조는 홍경래의 난을 극복했다고 해서 조(祖)를 썼다. 그렇지만, 선조나 영조, 정조, 순조는 모두 처음에 쓰여진 묘호는 덕이 높은 임금에게 붙여진 ‘종(宗)’ 이었다.
그렇다면, 조선시대 이전엔 어떻게 붙여 졌을까? 최초로 조와 종이 쓰인 것은 삼국시대라고 하는데, 그것은 고구려의 태조(국조)왕, 백제의 고이왕, 신라의 미추왕이 국가 기반을 확고이 했다 하여 왕조의 개국자에게만 주어지는 ‘태조(太祖)' 라는 묘호를 지어 각각 불렀다는 데에서도 알 수 있다.
종(宗) 이라는 묘호가 붙여진 것은 신라 무열왕 사후 문무왕 때였다.
즉, 삼한일통에 공로가 많아 태조(미추왕)의 업적에 비견된다 하여 문무왕이 무열왕 김춘추에게 ‘태종(太宗)’이라는 묘호를 올렸던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당이 알게 되자 즉각 태종 묘호의 폐지를 요구해 오는데, 이유인즉 자신들에게 태종(이세민)이 있으므로 굳이 신라에서 태종이라는 묘호를 사용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다.
결국, 이것은 나. 당간의 주요 쟁점으로 부각되었다. 하지만, 당시 신문왕은 무열왕이 삼국통일에 기여한 공이 크다는 이유를 들어 당의 요구를 일축해 버렸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신문왕’ "조"
고려시대에는 태조와 그 추존된 조상 3대(시조, 의조, 세조) 이외에는 모두 철저히 종을 사용하도록 하였지만, 후기 원의 간섭 기에 이르러 고려가 원의 반 속국으로 전락하자 천자의 묘호를 함부로 쓸 수 없다는 원의 압력에 의해 "왕" 이라는 칭호로 격하되고 말았다. 충렬왕이니 충선왕이니 하는 왕의 칭호가 그 예라 할 수 있다.
항간에는 정실부인 소생이거나 정당하게 장자가 계승했으면 종, 그렇지 않으면 조를 붙인다는 이야기도 돈다고 한다. 따져보면 그것도 비슷하게 맞았다고 할 수 있겠으나, 그러나 이것을 보면 과연 우리나라다운 변형 이 다라는 탄식을 하게 한다.
좀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중국과 비교하면 우리나라는 정실과 측실, 그리고 그들의 자녀들 까지 차별하는 풍조가 훨씬 심했다고 한다. 사실 서얼 차별은 중국에는 없는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법이다.
심지어 황제와 왕의 상징은 용인데, 중국에서는 황제를 상징하는 용은 칠조 용이라고 발가락이 일곱 개, 왕의 경우는 발가락이 5개인 오조룡을 새긴다. 중국의 구별은 그것뿐인데, 그것이 우리나라로 들어오자 왕은 5개, 세자는 4개, 대군(왕비 소생의 왕자)은 3개, 군(후궁 소생왕자)는 2개 이런 식으로 구별이 되었다.
매사가 이렇다 보니 조(祖)와 종(宗)의 호칭 법에서도 한국적인 해석이 나온 것 같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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