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 비행장이 폐쇄된 이후 김현옥 서울특별시장이 주택문제를 해결하는 동시에 신시가지 개발을 목적으로 여의도 개발계획을 세웠고, 1970년 2월 10일 밤섬폭파로부터 불과 110일 만에 여의도 윤중제(제방)가 준공되었다.
당시 김수근은 그의 도쿄대학 은사였던 단게 겐조(丹下健三)의 '도쿄계획 1960'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여의도종합개발계획'을 세우게 되는데 지금 보아도 상당히 SF적인 입체도시 계획이다.
그러나 윤중제 공사만으로도 서울시재정은 상당한 압박을 받고, 김현옥이 벌인 다른 동시다발적 공사 중 와우아파트 붕괴사고가 일어나면서 김현옥은 경질된다.
김현옥의 후임인 양택식 서울시장은 김수근의 입체도시 계획을 완전히 갈아엎고 여의도를 평면계획으로 변경하여 일반에 분양하는 데 주력했다. 물론 서울시청 이전계획과 함께 여의도 지역을 전국 유일의 야간통행금지 해제지역으로 만들겠다고 했으나 무산되기도 했다.
추후 여의도 택지사업대금은 실제로 빈사상태의 서울시회계장부를 겨우 숨통 트이게 만들었으며, 이 중 10억 원이 전용되어 개통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서울지하철 1호선 종로구간이다.
1971년 첫 입주가 이루어진 여의도시범아파트는 양택식 시장의 민자 사업 중 첫 단추에 해당한다. 와우아파트 붕괴사고로 인해 서울시는 민간으로부터 강한 불신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市 입장에서는 이러한 인식을 일거에 해소하려는 전시효과도 노렸다고 한다.
처음에는 아무도 입주하려 하지 않아서 공무원 등에게 반강제로 입주케 하기 도 했으나 1974년 삼익주택, 한양건설을 비롯한 민간건설사업자들도 진출, 당시로서는 처음으로 민간 고층 아파트 단지가 생겼으며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고층 고속엘리베이터, 중앙집중식난방 등이 설치되었고 특히 여의도를 특별학군으로 분류하는 조치를 단행하여 소득 높은 고학력층들이 많이 이주했다.
이어서 1968년 첫 삽을 뜬 대한민국 국회의사당이 1975년 8월 15일에 준공되었다. 원래 동 여의도에는 법원과 검찰청 등 법조단지가 계획되어 있었으나 이 부지가 시범아파트로 팔리며 김수근사단의 여의도 개발계획은 좌초되고, 이어서 5.16광장(현재의 여의도공원)이 여의도 한가운데를 떡하니 가르고 들어오면서 여의도 입체도시계획은 완전히 박살나게 된다.
당시 한국 재정사정으로 볼 때 어차피 실현하기는 어려웠겠지만, 만약 여의도계획이 실현되었으면 종로>마포>여의도>영등포>부천>인천을 잇는 선형도시계획 메갈로폴리스가 완성되었을 것이다.(도쿄계획 1960의 모방이란 얘기가 나오는 건 이 때문이다.
도쿄계획 역시 선형계획이기 때문.) 하지만 구자춘 시장에 의해 서울의 도시계획은 강남에 보다 초점이 맞추어지게 되고. 특히 서울지하철 2호선이 지나가지 않게 되면서 여의도는 현재의 모습으로 남게 된다. 그러나 서울특별시의 부 도심 중 하나로 급속하게 개발이 진행되어 대한민국의 주요 기능 중 일부를 담당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 요지 중 하나임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출처 : Naver 블로그 만생(晩生) l 글쓴이>이선생(teli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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