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묘지명(墓誌銘)

시조 유허비. 중수기(始祖遺墟碑/重修記)

야촌(1) 2007. 2. 10. 23:13

■ 신라 좌명공신 급량부대인 이알평 유허비

    (新羅 佐命功臣 及梁部大人 李謁平 遺墟碑)

 

삼가 살펴 보건데 경주이씨 옛 족보에「시조의 이름은 알평(謁平)인데 진한(辰韓)의 표암봉(瓢巖峰), 아래에서 처음 내려왔다」하였으니, 처음 내려 왔다함은 탄생(誕生)을 말한 것이다.

 

시전(詩傳)에 유악강신(維嶽降神)하야, 생보급신(生甫及申), 이로다.

생각 컨데 묏부리가 신을 내려서 보아 신을 낳았도다. 

 

묏부리의 제사를 잘 지내면 감동하여 좋은 아들을 낳는다고 생각 하였다.

「보는 보(甫)의 제후인 후작 보후(甫侯)이고 신은 신(申)의 제후인 백작 신백(申伯)을 의미한다.」라고 하였으니 소자첨(蘇子瞻 :소동파의 자)이 신(申)과 여(呂 : 甫를 말함, 甫라고 부르기 전에는 呂라고 불렀음)가, 다 묏부리에서 내려 주엇다고 하였으니 옛날이나 현재나 그 전해지는 것이 거짓이 없을 것이다.

 

대개 뫼가 높고 신령이 맑아서 그 기운이 정수를 모으고 영채를 길러서 철인(哲人)을 낳는 것은 이치의 필연적인 결과인데 유독 우리나라 동경지(東京誌)에만  육부(六部 : 경주이씨 세보 서문을 보라)의 대인들이 다 하늘에서 강생 하였다고 기록 하였으니 이상한 일이다.

 

신인이 태백산 단목(太白山檀木), 아래에 강생하여 단군이 되었으니 나정부(羅井部)의 알에서 나온 사람이 좌명공신(佐命功臣)이 되었느니 하는 등의 말이 옛날부터 전하여 이어왔다.

 

이것은 내려오는 전설의 말이어서 의심할 것인가 믿을 것인가 하는것은 물론 단정짓기 어려운 일이나,

오직 이 표암일구(瓢巖一區)가 급량대인(及梁大人)의 유허(遺墟)로서 우리이씨의 근본이 되는 땅이라고 하는 것은 명백하다.

 

시조(始祖) 이래로 덕(德)을 쌓고 인(仁)을 쌓아서 여경(餘慶)이 자손에게 미쳐서 신라와 고려사高麗史)에  높은 관작(官爵)이 연이어 왔고 이름있는 선비가 잇달아 왔다. 우리 조정(朝廷 : 조선국)에 들어와서 가지가 뻗고 파가 갈리어 자손이 여러 수십만이 되어 혹은 재상(宰相)이 되고 혹은 정경(正卿 : 판서), 아경(亞卿 : 참판)이 되어 대대로 아름다움을 이루어서 二千年 동안에 빛나고 커서 우리 동방(東邦)의 명망있는 씨족이 되었다.

 

이것은 오직 급량공(及梁公)의 음덕이 도와주고 덮어준데 의한 것이다. 금오산(金鰲山)기슭 어느곳이 우리 시조의 묘소인지 연대가 오래되고 문헌도 증빙 할바가 없으서 마침내 실전하고 말았다.

 

지금까지도 자손들이 추원(追遠)하고 사모하는 바는 오직 표암만이 그대로 있다. 丁未 1837년(憲宗 1)에 후손 집성(集星)이 영양(永陽)군수가 되었을때 표암위에 새겨 표지 하였다.

 

여러 경주의 자손들이 이것만으로는 유적을 천양하기에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돌을구하여 구륭형(穹隆形)의 비(碑)를 표암 아래에 세우려 한다. 종인(宗人), 요신(堯臣)이 비로소 와서 나, 경일(敬一)에게 비문 쓰기를 요청하였다.

 

내가 생각컨데 이 일은 여러 일가들과 상의하지 않으면 이러니 저러니 말이 많을것 같으나 그 근본을 잊지않는 다는데 대개 같을줄 안다. 비를 세운 뒤 영구히 보호하여 아이들로 하여금 두드려서 모가 떨어지지 않도록 하는것은 경주에 사는 여러 사람들의 책임이 아니겠는가. 드디어 이러한 사실을 기록한다.

 

후손 대광보국 숭록대부(大匡輔國 崇祿大夫), 원임 좌의정(原任左議政 : 원임은 전직이라는 뜻임), 오은군 (鰲恩君) 경일(敬一)은 글을짓고, 

 

정헌대부 형조판서(正憲大夫 刑曺判書)겸, 경연(經筵) 춘추관(春秋館)의 지사(知事), 오위 도총부(五衛都摠府) 도총관(都摠官)  집두(集斗)는 삼가쓴다.

 

본 유허비는 병인(丙寅) 1806년 9월에 세우다.

 

◇도   검(都 檢) : 전장령(前掌令) : 이진택(李鎭宅)

◇유   학(幼 學) : 이증규(李增奎)

◇감역유사(監役有司) : 이형묵(李亨默), 이규태(李奎泰)

◇각자유사(刻字有司) : 이경춘(李景春).

◇감관(監官) : 절충(折衝) 이중인(李重仁).

 

[原文] 

新羅佐命功臣及梁部大人李公諱謁平遺墟碑

 

謹按慶州李氏舊譜曰 始祖諱謁平初降辰韓之瓢巖峰下 初降云者降生之謂歟 詩曰維嶽降神生甫及申 蘇子瞻以爲申呂自嶽降 古今所傳不可誣也 盖崧高靈淑之氣鍾精毓英 篤生哲人理之所必然者 而獨東京誌所載六部大人 皆從天而降云者異焉 神人降于太白山檀木下而爲檀君與蘿井剖卵遂爲佐命功臣等說自昔沿襲而齊東之言疑信固難定惟此瓢巖一區之爲及梁大人之遺墟而爲我李根本之地則明矣 自始祖以來積德累仁慶流雲仍羅麗之間簪組蟬聯名碩相望逮于我朝枝達派分子孫千億廼公廼卿世濟厥 美二千年之間赫舃爲吾東望族者惟及梁公之餘蔭是庇是庥耳金鰲之麓▨處是我始祖衣履之藏而年代渺茫文獻無徵遂失其傳在今後孫之追遠而想慕者獨瓢巖在耳歲 丁未後孫集星之守永陽也鐫刻于巖上標識之慶之諸孫以爲此不足表揚遺蹟 廼伐石爲穹碑將樹於巖下宗人堯臣輩來徵記文於敬一余以爲此事不謀於衆似有甲乙之論而其爲不忘本則亦或一義旣樹之後永世衞護旡俾童敲而角勵則顧非在慶諸人之責乎遂爲之書.

 

後孫大匡輔國崇祿大夫原任左議政鰲恩君敬一謹記

後孫正憲大夫刑曹判書兼知經筵春秋館事五衛都摠府都摠管集斗謹書 

聖上卽阼六年丙寅九月日立

 

◇都檢 : 後孫 前掌令鎭宅,幼學 增奎.

◇監役有司: 亨默. 奎泰.

◇刻字有司:景春.

◇監官 : 折衝 重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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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譯]

■ 유허비각중수기(遺墟碑閣重修記)

 

後孫 裕元 撰(후손 유원 지음)

 

경주읍에서 동쪽으로 5리에 산과 바위가 있는 곳에 돌을 등지고 우뚝하게 서있는 것이 바로 표암이니 우리 이씨의 시조이신 알평(謁平)이 처음 강생한 곳이다.

 

삼한사승(三韓史乘)을 살펴보면 신인(神人)이 표암(瓢巖) 아래에 내려와 혁거세(赫居世)를 도와 왕(王)을 삼고 이(李)로 사성(賜姓) 받아 수(壽)를 이백세(二百歲) 하였다고 한다.

 

그 뒤 자손들이 번창하여 신라(新羅)와 고려(高麗) 이후로 벼슬이 이어져 대가(大家)가 되었으니, 산이 높지 않으나 감히 우러러 보지 않을 수가 없으며 바위는 비록 오래 되었으나 공경하지 않을 수가 없다.

 

순조 병인년(1806)에 족조(族祖)  정승((政丞)인 경일(敬一)과 종장(宗長) 판서(判書)인 집두(集斗) 양공(兩公)이 비석을 세워 사적을 기록하고 비각(碑閣)을 지어 풍우(風雨)를 방지하였다.

 

병오년(1846)에 우리 선친(先親) 문정공(文貞公 : 啓朝)께서 이 고을을 순행하다가 옛터를 찾아 참배하고 비각을 중수하고 종족들과 연회를 베풀자 소문을 듣고 모인 자가 심히 많았으니 이것이 바로 보본추원(報本追遠)하는 뜻이라 하겠다. 

 

아! 교남(嶠南 : 영남)은 지금의 추로(鄒魯 : 공자와 맹자를 이르는 말))의 고을이다.

산은 정기를 얻어 방박(磅礴)하고 청숙(淸淑)하며, 현송(絃誦)의 소리가 집집마다 들리는데, 월성(月城)이 우리 집의 고향이 되었으니 어찌 바다의 남쪽 천리라고 이르겠는가.

 

선유(先儒)가 이르기를 자손이 많아서 비록 천만 명에 이르러도 한 근본이 아님이 없으니 그 처음을 생각하여 근본으로 돌아간다면 천만년이라도 하루와 같고 천만 명이라도 일신(一身)과 같으니, 그러한 즉 비각(碑閣)을 받드는 것이 현원입묘(玄元立廟)에 비한 것이 아니다.

 

우리 제종들은 삼가 수호하고 깨끗이 간직하여 쇠체(衰替 : 쇠하여 다른 것으로 바뀜)하지 말을 지어다.  

 

[原文]

遺墟碑閣重修記

 

後孫 裕元 撰

 

慶州邑治之東月城未五里 有山巖巖背石而特立者曰瓢巖 我李鼻祖謁平肇降處也 按三韓史乘 有神人降于瓢巖下 翊赫居世爲

경주읍치지동월성미오리 유산암암배석이특입자왈표암 아이비조알평조강처야 안삼한사승 유신인강우표암하 익혁거세위

 

王賜姓李氏得壽二百歲 後姓蕃衍羅麗以降簪組蟬聯遂爲大家 山非高而不敢不仰也 巖雖古而不敢不敬也 純祖丙寅族祖相國

왕사성이씨득수이백세 후성번연라려이강잠조선련수위대가 산비고이불감불앙야 암수고이불감불경야 순조병인족조상국

 

敬一宗丈尙書集斗兩公伐石謀竪記述事跡架椽簷以庇風雨 丙午先君子文貞公巡到玆邑拜舊址重修碑閣 讌宗族聞風會者甚衆

경일종장상서집두양공벌석모수기술사적가연첨이비풍우 병오선군자문정공순도자읍배구지중수비각 연종족문풍회자심중

 

寔報本追遠之意也 噫 嶠南今之鄒魯也山得正氣嗙礴淸淑絃誦之聲家家尙聞 而月城爲吾家鄕奚特海南千里之謂也 先儒曰子

식보본추원지의야 희 교남금지추로야산득정기방박청숙현송지성가가상문 이월성위오가향해특해남천리지위야 선유왈자

 

孫之多雖至千萬人而莫非一本原厥始而返諸本則千萬年一日也千萬人亦一身也然則碑閣之奉非玄元立廟之比 惟我諸宗謹守

손지다수지천만인이막비일본원궐시이반제본칙천만년일일야 천만인역일신야연칙비각지봉비현원립묘지비 유아제종근수

 

焉汎掃焉其勿替之

언범소언기물체지

 

옮긴이 : 野村 李在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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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소개] 

 

●효정공 이경일(孝定公 李敬一) 31世

1734(영조10)∼1820(순조20). 본관은 경주(慶州), 자(字)는 원회(元會), 호(號)는 청헌(聽軒)으로 영의정 항복(領議政 恒福)의 6세손으로 세장(李世章)의 증손이며 문좌(文座)의 손자로서 도사 종열(都事 宗說)의 아들이다.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서울 출신이다. 영조 44년(1768) 음보로 관직에 나가 온릉 참봉, 덕산 현감(德山縣監)으로 1775년 빙고 별제(氷庫別提)로 문과 정시에 을과로 급제했다.

 

이듬해 예조 좌랑, 정언을 거쳐 부수찬, 대사간, 이조 참의, 황해도 관찰사, 이조 참판을 역임하고 1800년 공조 판서에 올랐다. 이어 대사헌, 우참찬, 형조 판서에 임명되고, 순조 4년(1804) 한성부 판윤,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이르렀으며, 1808년 봉조하(奉朝賀)가 되어 오은군(鰲恩君)에 봉해졌다. 시호는 효정(孝定)이며, 저서로 시문을 모은《청헌유고(聽軒遺稿)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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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서 이집두(琶西 李集斗) 34世

1744(영조20)∼1820(순조20).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경주(慶州), 자(字)는 중휘(仲輝), 호(號)는 파서(琶西)또는 구학(瑾鶴)이다. 형조판서 시발(刑曺判書 時發)의 6대손이요, 좌의정 경억(慶億)의 5대손으로 감역 진원(進源)의 아들이다.


1774년(영조 50년)에 진사가 되고 이듬해 정시 문과(庭試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 주서(注書)가 되었다. 그뒤 이조 좌랑으로 한식제(寒食祭)를 잘 치른 공으로 문성진 첨절제사에 올랐다.

 

이어서 장령, 이조 참의, 대사성, 승지를 거쳐, 대사간, 대사헌과 외직으로 안동 부사, 1798년(정조 22) 함경도 관찰사가 되어 변방의 야인을 잘 다스렸고, 1800년 주청부사(奏請副使)로서 청나라에 다녀왔다.

 

순조 즉위 후 1804년 8월 7일에 한성부 판윤에 제수되었고 그 후에도 1809년, 1811년 세차례에 걸쳐 한성부 판윤을 역임하였다. 이어 공조(工曹), 예조 판서(禮曹判書)가 되고 1810년 동지사(冬至使)로 다시 청나라에 다녀와서 판돈녕 부사에 이르러 치사(致仕)하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었다.


글씨에 뛰어 났으며 정조가 지은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의 자서(自序)를 해서와 전서로 첩(帖)을 써 바치기도 하였다.

 

아들 일영(一榮)이 전주판관(全州判官)으로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손자 규방이 3번의 형조판서와 이조판서를 역임 이름났고 고종때 헤이그 특사 이상설 선생은 파서공의 5대손이다. 묘지는 충북 증평군 증평읍 미암리 산109-17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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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봉 이진택(德峰 李鎭宅) 32世

    익재공(益齋公)의 15대손, 판윤공(判尹公)의 11대손으로 현 경주시 구정동 출신이다.


조선 후기의 문신 학자로서 1738(영조 14)∼1805(순조 5)의 시대인물이며 향년 68세를 누렸다. 공(公)의 자(字)는 양중(養重), 호(號)는 덕봉(德峯)으로 1764년(영조 40) 성균생원, 경자(庚子) 1780년(正祖 4)에 식년 문과에 합격하여 승문원부정자, 성균관전적, 예조정랑, 사헌부지평 등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고 그후 정조의 특명으로 사헌부장령에 임명 되었다.
 

아버지는 운배(雲培)이고, 어머니는 영양남씨(英陽南氏) 국망(國望)의 딸이다.

그는 김상로(金尙魯), 홍계희(洪啓禧)가 사도세자 사건에 책임이 있다는 이유로 그의 부관참시(剖棺斬屍)를 주장한 사람으로 1793년 그가 대간으로 있을 때 사노비혁파(寺奴婢革罷)를 주장한 상소를 올려 사노혁파에 결정적 계기를 마련하였으며, 이러한 개혁론의 여파로 1801년(순조 1)에는 공노비해방을 보게 되었다.

 

공은 이진원(李晉遠)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그가 개성부 경력(종4품)벼슬에 재임시 무오 1798년(정조 22) 6월에 개성의 죽림당(익재생가터)에 윤자사(尹玆士)가 세우고 그가 쓴 유허비(遺墟碑)가 오늘날에 전한다.



한때, 정조의 신임을 크게 받았으나 관운이 좋지 않았으며 1802년 서유방(徐有防) 등을 옹호하였다는 이유로 삼수로 귀양갔다가 2년 뒤에 풀려났으나 그 다음해에 죽었다.
저서로는 《덕봉문집》이 있다.        

 

글쓴이 : 野村 李在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