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묘지명(墓誌銘)

숙인 평성박씨 묘지명(淑人平城朴氏 墓誌銘) /창평공 이공린 선생 배위.

야촌(1) 2018. 12. 11. 01:28

■ 숙인 평성박씨 묘지명(淑人平城朴氏 墓誌銘)

   (사육신 박팽년의 둘째 딸)

 

   [생졸년] 1440년(세종 22) 11월 9일 ~ 1523년(중종 17) 11월 27일 / 84歲

 

자식(子息)으로서 그 어버이를 후(厚)하게 장례를 모셔 드리려고 하는 것은 정(情)이요. 장사 지내고 묘지(墓誌)가 있다는 것은 예(禮)라 하겠다. 삼가 생각건대 선비 박씨(先妣 朴氏)는 계(系)가 평성(平城)에서 나왔는데 고려(高麗)의 대족(大族)이었다. 

 

고조(高祖)의 휘(諱)는 원상(元象)인데 나라 초기(初期)에 출사(出使)하여 관(官)이 가선대부 공조전서(嘉善大夫工曹典書)에 이르고 전서공(典書公)은 의영고시직 안생(義盈庫侍直 安生)을 낳았고 시직공(侍直公)은 공조판서 중림(工曹判書仲林)을 낳았으며 판서공(判書公)은 형조참판 팽년(刑曹參判彭年)을 낳았다.


참판공(參判公)은 천안(天安)의 이름 높은 가문(家門)인 전미(全彌)의 딸한테 장가들어 정통 경신 11월 초9일(1440년 11월 9일)에 선비(先妣)가 태어났다.


병자년(1456년) 나이 17세 되던 해, 선고(先考)에게 시집왔으나 미처 구고(舅姑=시부모)도 배알(拜謁)하지 못한체 가문(家門)의 화(禍)를 만나, 중림(仲林)과 팽년(彭年), 부자(父子)는 구몰(俱沒=부모가 모두 세상을 떠남) 되었고 생각지도 않은 터에 선군(先君) 역시 귀양 가게 되었으니 비(妣)는 갈 곳이 없게 되어 외숙모 전씨(外淑母全氏) 댁에 의탁했으나 사람들은 형화(刑禍)를 두려워하고 자부(子婦)가 문화(門禍)를 입은자(者)는 모두 본가(本家)로 돌려보내게 되었다. 

 

우리 조부(祖父) 관찰사 휘 윤인(觀察使 諱 尹仁) 공은 혼잣말로 죄는 자기가 저지른 것이 아니므로 심(甚)히 가련(可憐)하다 하시고 사람을 시켜 데려오도록 하였다. 선비(先妣)의 예의범절(禮儀凡節)이 정숙 단정하고 성행(性行)이 정숙(貞淑) 함을 보시고 참으로 우리집의 맏며느리 감이다 라고 칭찬하시고 돌보아 주시며 불상히 여기기를 더욱 돈독히 하여 집, 내외 일을 다 맡기었다.


선군(先君)께서 14년 동안 귀양 갔다가 석방되어 돌아왔는데 이는 관찰사 공(觀察使公)의 부인 열부 홍씨(夫人烈婦洪氏)의 아들이기에 벼슬을 주라고 하기 때문인 것이다. 그래서 함열 현감咸悅 縣監=오늘날의 전북 익산[함열] 면장』, 창평 현령(昌平縣令=오늘날 전남 담양지역의 군수)이 되고 내조(內助)의 미덕(美德)이 있었다.

 

연산군(燕山君)의 음란 잔학 살육이 자심하게 되자무고한 아들 원(黿)까지 역시 참형(斬刑)을 당하고 선군(先君)도 또 연좌(連坐)되어 청주(淸州)의 촌사(村舍=오늘날  충북 청원군 미원면 가양리를 말함)에서 귀양살이를 하게 되었다가 성상(聖上=중종)의 반정(反正)을 만나 석방되었다.


공(公)은 이미 중풍증(中風症)에 걸렸을뿐 아니라 나이도 늙었기로 다시 조정(朝廷)에 벼슬하지 않고 집에서 은거하였다. 기사년(1509년) 2월에 병환(病患)으로 졸(卒) 하니 선비(先妣)는 상사(喪事)에 그 예(禮)를 극진히 하셨다.


구(龜)는 충주(忠州), 홍주(洪州), 상주(尙州)에도 다 뫼시고 부임(赴任), 감지 육공(甘旨六供)으로 봉양(奉養)하였고 계미년(1523년) 2월에 상주(尙州)로부터 귀환(歸還)하고서는 제(第) 경(鯨), 곤(鯤)이 뫼시었다.


11월에 병환이 위독(危篤)하더니 그달 17일 계미(癸未)에 침실(寢室)에서 거(去)하니 수(壽) 八十四요. 아들은 여들을 두셨는데 장(長)은 오(鼇)인데 문과(文科)에 합격(合格)되어 호조좌랑(戶曹佐郞)이 되고 차(次) 구(龜)와 차(次) 원(黿)은 예조좌랑(禮曹佐郞)이 되었고 차(次) 타(鼉), 별(鼈), 벽(鼊), 경(鯨)은 모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合格)되었고 곤(鯤)은 그다음이었다.


선비(先妣)가 졸(卒)한 때에는 오자(五子)가 먼저 별세(別世)했고, 생존자(生存者)는 구(龜), 경(鯨), 곤(鯤), 뿐이었다. 갑신(1524년) 3월 19일 갑신(甲申)에 청주(淸州)의 동(東)쪽 수락동(水落洞) 선군(先君)의 묘(墓), 좌측(左側)에 안장(安葬) 하였는데 이는 유교(遺敎)에 따른 것이다.


명(銘)에는 “수락촌 원(水落村原)은 선고(先考)의 유택(幽宅)이로다. 이승을 떠나 분묘(墳墓)를 같이함은 선비(先妣)의 염원(念願)이었도다. 장례(葬禮)를 모시고 나니 쌍분의 높이가 4척(四尺)이 되도다.


부모(父母)께서는 거듭 기뻐하시겠지만 이 자식들은 무엇을 믿어오리까? 휘어잡고 통곡한들 쫓을길 없어 오장(五臟)이 타는것 같도다. 하늘은 거칠고 땅은 늙지만 오직 돌만은 기록(記錄)할 수 있도다라고 하셨다. 고애자(孤哀子=아버지 어머니가 모두 돌아가신 자식) 구(龜)는 통곡(痛哭)하여 삼가 기록(記錄) 하노라. 


 차자(次子)  구(龜) 기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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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사항]


본 묘지명은 경주이씨 23世인 창평공(昌平公) 휘(諱) 공린(公隣)의 배위(配位)인  순천박 씨(順川朴氏=당시에는 평성박 씨로 불리었다) 묘지명(墓誌銘)이다.

 

숙인 평성박씨(淑人平城朴氏)는 사육신(死六臣박팽년(朴彭年)의 둘째 따님이시다.

장례시에 무덤 속에 묻은 이 묘지명을 읽어보면 무오사화 당시의 시대 상황을 알 수 있다.

지은이는 둘째 아들 사미정공(四美亭公) 구(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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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08 18:06

옮긴이 : 야촌 이재훈

 

 

↑창평 현령(昌平縣令) 이공린(李公麟) 선생과 부인 숙인 평성박 씨(淑人平城朴氏=順天朴氏) 묘이다. 
   소재지 : 충북 청원군 미원면 가양리 산17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