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昌德宮仁政殿上樑文
이만수 찬(李晩秀 撰) - 甲子年(1804, 순조 4)
伏以六龍捧日。丹扆敞北辰之居。八柱承天。紫殿正南面之位。轉灾爲瑞。雖舊維新。原夫左墄右平之䂓。粤自漢長樂受賀。九室八牕之義。若稽周明堂出治。靈臺之庶民自來。化及鳥獸魚鱉。斯干之百堵皆作。頌叶室家君王。卑宮采椽。雖聖人克勤而克儉。高臺廣廈。顧王者不重則不威。巍乎昌德丕基。儼然仁政法殿。昔英陵文物之大備。實始經營。逮宣廟兵燹之旣平。重新輪煥。瞻璿殿而拱淸廟。配陟降於昭之靈。面引慶而負神嵩。湊山河欝葱之氣。禮重路寢。遠倣太極皇極之儀。史稱正衙。近取勤政明政之制。五禮九功之所惇叙。百官萬民之所瞻仰。辨色入朝。劒佩秩王會之序。按月布令。象魏肅天闕之懸。鏤玉摸金。殿上皆呼千歲。蒐獜羅鳳。日下常奏五雲。昭皇朝九錫之恩。陛級示等威之截。協聖祖重光之譜。庭簴播政敎之和。惟其二字之名。亶在萬化之本。春噓物茁。天地之大德曰生。澤潤海涵。聖王之所過者化。羲農堯舜禹湯文武。以是相傳。格致誠正脩齊治平。於斯爲始。盖玆殿天造地設。永祚東方。粤我家聖繼神承。式至今日。恭惟主上殿下。乾坤覆載。日月光華。迓駿命於玄穹。猗歟萬年不拔。敷鴻化於紫極。慨然三代自期。一政一謨。監玆先憲。仁心仁聞。浹于下民。嗟曩日欝攸之灾。卽我后堂構之會。今天大警動。盖將勵精圖治。若室勤墍塗。所貴述事繼志。華盖之蹟可鑑。殆若造物相之。玉帶之舊圖足徵。曷比先王觀也。慈旨惻怛。奉徽猷於簾帷。廷議僉同。協吉繇於龜筮。拓靈光之嘉址。屹含元之脩梁。郢石魯斑。竟奏風斤月斧。徠松甫栢。悅疑鬼運神輸。毋奪民時。始尋尺之勿亟。如趨父事。終鼛皷之不勝。是月也定之方中。其義則取諸大壯。藻井內耀。晶光壓朱明之神。龍首上蟠。呼吸通紫微之座。增九闥之氣色。和風轉白玉之墀。聳八方之觀瞻。旭日射黃金之榜。大而卿士。小則民庶。驩然若披霧覩天。內自宮闈。外至朝廷。鎭之如宅師定鼎。載陳六偉之頌。恭替九如之詞。兒郞偉拋梁東。上元甲子瑞曦紅。王心藹若陽和至。萬品同歸發育功。兒郞偉拋梁西。金天正氣肅端倪。今年大有書惇史。四野黃雲一色齊。兒郞偉拋梁南。薰風曲裏化工參。邇英喜得堯夫講。晝漏如年日接三。兒郞偉拋梁北。華岳三峰天咫尺。繡線新添愛日長。流虹壽爵仙桃色。兒郞偉拋梁上。衆星環極森相向。燕涓不與堂皇殊。對越一心來景貺。兒郞偉拋梁下。林葱揔我同胞者。重門洞闢天階尊。薄海三千大庇廈。伏願上樑之後。飛革長輝。升恒彌煥。虞廷騰喜起之什。宵旰萬幾。豊水貽燕翼之謀。本支百世。上下千五百載。復見化日仁風。衡從三十二楹。永奠泰山磐石。
屐園遺稿卷之六○賜笏集>上樑文.
●창덕궁인정전(昌德宮仁政殿)
창덕궁의 정전(正殿)으로. 조정의 각종 의식이나 외국 사신의 접견을 하던 곳으로, 정면 5칸, 측면 4칸의 중층(重層) 팔작 기와 지붕 다포(多包)집이다. 1405(태종 5)년 창덕궁이 창건되면서 지어졌는데,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1609(광해군 1)년 재건되었다가 다시 화재로 소실되었고 1804(순조 4)년 현재의 모습으로 재건되었다. 국보 제225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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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인물소개]
●이만수(李晩秀)
1752(영조 28)∼1820(순조 20).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성중(成仲), 호는 극옹(屐翁)·극원(屐園). 아버지는 좌의정 복원(福源)이며, 어머니는 안수곤(安壽坤)의 딸이다. 1783년(정조 7)사마시에 합격하고 음보(蔭補)로 부사과를 지냈으며, 1789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어 직각이 되고 도당록(都堂錄)에 등록되었다.
1795년 대사성으로 규장각제학을 겸하였으며, 이듬해 정리자(整理字)만드는 일을 감독하였다.
이듬해 대사간에 이어 1799년 대사성으로 우유선(右諭善)을 겸하였고, 1800년 제조·예조판서·검교직제학·이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이어 공조판서를 거쳐, 순조가 즉위한 뒤 수원부유수가 되어 화령전(華寧殿)을 완성한 공으로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승진되었다.
1801년(순조 1)판의금부사·대제학·형조판서·병조판서·내각제학(內閣提學)·호조판서를 거쳐, 1803년 사은정사(謝恩正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804년 광주부유수(廣州府留守), 1806년 함경도관찰사·판의금부사를 역임한 뒤 1808년 호조판서를 거쳐, 1810년 평안도관찰사가 되었다.
1811년 홍경래(洪景來)의 난이 일어나자 치안유지를 잘못하였다는 죄로 이듬해 파직되고 경주에 유배되었다가 곧 사면되어 공조판서·병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814년 우빈객(右賓客)이 되고, 1816년 좌빈객을 거쳐 다음해 빈객이 되었다.
1819년 예조판서에 이어 1820년 수원유수로 나아갔으나 그해 임지에서 죽었다.
글씨에 능하여 정주에 〈양성기적비 兩聖紀蹟碑〉, 장단(長湍)에 〈서명선사제비 徐命善賜祭碑〉가 있다.
저서로는 《극원집(屐園集)》이 있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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