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중국사(中國史)

왕소군(王昭君)/중국 한(漢)나라 원제(元帝) 때의 미인 궁녀.

야촌(1) 2004. 2. 20. 17:44

왕소군(王昭君)

 

중국 한(漢)나라 원제(元帝) 때의 궁녀로, 중국의 4대 미녀중의 한사람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장(嬙). 자는 소군. BC 33년(竟寧 1) 흉노(匈奴)와의 친화정책을 위해 흉노왕 호한야선우(呼韓邪單于)에게 시집가서 아들 하나를 낳았다.

 

그 뒤 호한야가 죽자 흉노의 풍습에 따라 왕위를 이은 그의 정처(正妻) 아들에게 재가하여 두 딸을 낳고,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왕소군에 대한 이야기는 전설화되어 후대에 많이 윤색되어 전해졌다.

 

《서경잡기(西京雜記)》에 따르면, 원제(元帝)는 화공들에게 궁녀를 그리도록 명하여 그림을 보고 마음에 드는 여자를 불러들였다고 한다. 궁녀들은 모두 화공에게 뇌물을 주고 아름답게 그려달라고 했으나, 왕소군(王昭君)은 뇌물을 주지 않아 추하게 그려졌다.

 

원제는 그런 사실을 모르고 왕소군을 호한야에게 보내기로 결정한 후 그녀의 뛰어난 미모를 알고 나서 매우 안타까워했다. 그러나 외국과의 신의를 저버릴 수 없어 그녀를 보내고는 화공들을 죽였다고 한다.

 

또 《후한서(後漢書)》·《금조(琴操)》에는 왕소군이 몇 년 동안 황제의 관심을 받지 못하여 자진해서 흉노의 왕에게 시집갔으며, 그녀가 호한야의 아들에게 재가하게 되었을 때 독을 마시고 자살했다고 되어 있다.

 

이 이야기는 후세에 널리 전송되었으며 많은 문학 작품에서도 다루어 졌다. 진(晉)의 석숭(石崇)이 작사·작곡하여 기녀에게 부르게 했다는 《왕명군사(王明君辭)》는 매우 유명하다.

 

두보(杜甫)와 이백(李白)을 비롯해서 당대(唐代)의 시인들도 이 이야기를 즐겨 썼다. 원·명대에는 희곡으로도 각색되었는데, 특히 원대 마치원(馬致遠)의 희곡 《한궁추(漢宮秋)》가 최고의 걸작으로 꼽힌다.

 

 

↑왕소군(王昭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