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중국사(中國史)

진시황(秦始皇)

야촌(1) 2004. 2. 15. 21:56

■ 시황제(始皇帝, BC 259~BC 210 - 중원을 통일시킨 최초의 皇帝)

 

[요약]중국 진(秦) 나라의 제1대 황제(BC 259~BC 210, 재위 BC 247~BC 210). 이름은 정(政)이며, 기원전 221년에 천하를 통일하고 자칭 시황제(始皇帝)로 군림하였다. 군현제(郡縣制)에 의한 중앙집권을 확립하고, 분서갱유(焚書坑儒)를 일으켜 사상을 통제하는 한편 도량형과 화폐를 통일시켰다. 아방궁(阿房宮)과 만리장성을 축조하는등 위세를 떨쳤다.

 

↑진시황(秦始皇)

 

중국 역사상 전국을 최초로 통일하여 중앙집권국가를 건립. 자신의 국가가 만세(萬世)토록 영원하라고 시황제(始皇帝)라 칭함.

 
도량형(度量衡=단위법))을 통일 . 마차바퀴의 폭과 법류(法類), 문자(文字)를 통일함. 도로(道路)와 운하(運河)망도 건설. 흉노족의 침입을 막기위한 요새인 만리장성(萬里長城)을 시작.


분서갱유(焚書坑儒)를 실시. 후기에는 방생술 등, 개인적인 향락(享樂)에 빠져 백성들에게 중과세와 강제노동을 강요했으며, 엄한형벌로 다스려 고관대작들은 간신배들만 늘고 백성들은 등을 돌렸다.

 
시황제는 즉위하자마자 여산(驪山)에 자신의 무덤을 조성(造成).무덤 속을 궁전모형(宮殿模型)과 문무백관(文武百官)의 자리를 만들고, 진귀(珍貴)한 보물(寶物)로 가득 채웠다.


1974년 3월 우물을 파던 농부가 처음으로 발견. 6000구가 넘는 실물 크기의 병사와 병마 토용이 매장되어 있었다. 같은 모양이 하나도 없었다. 시황제는 즉위 15년 만에 전국을 순행(巡幸)하다가 사구의 평대에서 죽었다.

 

●분서갱유(焚書坑儒)

 

중국의 진시황이 학자들의 정치적 비판을 막기 위하여 의약, 점복, 농업에 관한 것을 제외한 민간의 모든 서적을 불태우고, 이듬해 유생들을 생매장한 일을 말한다.

 

●여산능(驪山陵)과 아방궁(阿房宮)

 

시황제(始皇帝)는 여산(驪山-중국 장안의 동북, 현재의 산시 성 린퉁 현의 동남부에 있는 산)에다 자신의 능묘(陵墓)를 만들기 시작했는데 죽을 무렵인 50세에 완성(完成)했다.

 

높이 115m, 주위의 길이2.5km, 사방이 각각 600m인 대규모(大規模)의 능이다. 능묘(陵墓) 안에는 궁전(宮殿), 누각(樓閣), 회랑(廻廊)이 있어 진기(珍奇)한 보물(寶物)이 들어있었다.

 

능묘(陵墓)안의 돔식 천장에는 진주(珍珠)로 아로 세긴 일월성진(日月星辰)이 반짝이고 지면(地面)에는 수운(水銀)으로 만들어진 하천(河川)과 호수(湖水)가 만들어져 천문(天文), 지리(地理), 현세(現世)의 천하가 펼쳐져 있다.

 

실내(室內)에는 문무백관(文武百官)의 자리가 벌려있고 고래의 뼈나 내장에서 짜낸 기름으로 조명(照明)이 점등(點燈)되어 있다. 공사에 투입(投入)된 죄인(罪囚)이 75만명이었다 한다.

 

동시에 시작한 것이 아방궁(阿房宮)이었다. 이 공사에도 70만명의 강제노역(强制勞役)이 동원(動員0되었다 한다. 항우가 아방궁을 불 질렀는데 석달을 탔다고 한다.

 

 

↑앞에 보이는 산이 진시황의 릉이다.

 

●아직 릉 안이 세상에 공개되지 않은 진시황릉(秦始皇陵)

 

중국을 통일한 최초의 황제 진시황이 여기에 묻혀 있다. 능묘는 37년간이 걸려 완공되었는데, 무덤의 둘레가 6㎞, 높이는 40m에 달한다. 무덤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야산이라고 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하지만 아직 내부는 개발이 되지 않아 있어서 입장료를 내고 들어간다고 해도 내부는 볼 수가 없다.

 

그 이유는 진시황이 무덤을 설계할 때 훗날의 도굴을 방지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함정들을 설치해 두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진시황릉 앞까지 간다고 해도 내부에 들어갈 수는 없고, 밖에서 사진 촬영을 하는 정도의 관광을 할 수 있다. 1987년 유네스코는 진시황릉을 <세계유산목록>에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