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상여(藺相如)와 염파(廉頗) BC 280년경
문경지교(刎頸之交)의 고사로 유명한 조(趙)나라 재상 인상여와 장수 염파다.
인상여는 조(趙)나라 유세객으로 조(趙)나라 혜문왕((惠文王))이 얻은 구슬(화씨의 벽)을 진(秦)나라에서 탐내자 진나라에사신으로가 땅도 되찾고 구슬을 온전히 보존하여 돌아왔다. 이로부터 완벽(完璧)이라는 단어가 생겨났다.
염파는 趙나라 장수로 제(濟)나라 군사를 무찔러 상경의 지위에 올랐다. 그러나 인상여(藺相如)가 「화씨지 벽(和氏之 璧)」후로 지위가 높아져 염파(廉頗)보다 높게되자 염파는 인상여를 모욕주려 하였다. 이 말을 듣고 인상여는 염파를 피하고 조회 때에도 병을 핑계삼아 서열을 다투려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염파를 멀리 보이기만 하면 피하고 숨어 버렸다.
사람들이 그 이유를 묻자 인상여는「지금 강한 진(秦)나라가 조를 치지 못하는 것은 나와 염파장군 두사람이 있기 때문이오. 내가 염파를 피하는 이유는 나라의 위급함을 먼저 생각하고 개인의 명예를 뒤로 하기 때문이오.」라 하였다.
이 말을 전해들은 염파는 부끄러워 웃옷을 벗고 가시 채찍을 등에 짊어지고가서 사죄하고 문경지교(刎頸之交)를 맺었다. 그 후 혜문왕이 죽고 7년 후에 진나라와 일전을 벌인 장편전투에서 진(秦)나라의 계책에 말려 장군의 자리에서 해임되었으며 후임으로 임명된 조괄(趙括)이 크게 패함으로서 趙나라의 세력은 기울기 시작했다.
이후 다시 등용되어 연(燕)나라를 격파하여 신평군에 봉해졌다. 그러나 도양왕이 즉위하자 악승을 염파 대신 장군으로 임명하자 달아나 재등용되지 못하고 결국 초나라 수춘이란 곳에서 생을 마쳤다.
↑염파인상여열전(廉頗藺相如列傳)에서의 부형청죄(負荊請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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