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원군 조승[平原君 趙勝, ?~BC 251] 4공자(公子)의 한사람.
중국 전국(戰國)시대 조(趙)나라의 6대 무령왕(武靈王)의 아들로 이름은 조승(趙勝)이다. 평원(平原: 山東省 平原縣 남쪽)에 봉하여졌으므로, 평원군(平原君)이라 하였다. 그의 형 혜문왕(惠文王)과 조카 효성왕(孝成王)때 재상을 지냈다.
BC 257년 진(秦)나라 군사가 조나라 도읍 한단(邯鄲)을 포위하자, 평소 식객(食客)으로 대접한 모수(毛遂)의 헌책으로 초(楚)나라의 춘신군(春申君)과 위(魏)나라 신릉군(信陵君)의 원군을 얻어 이를 물리쳤다.
제(齊)의 맹상군(孟祥君), 위(魏)의 신릉군(信陵君), 초(楚)의 춘신군(春申君)과 더불어 4공자(公子)의 한 사람이다. 어느날 평원군이 모수에게 말하였다.
"선생께서 나의 문하에 있는 것이 오늘로 몇 해나 되었소?"
"3 년입니다."
"현사(賢士)가 세상에 있는 것은, 비유하면 송곳이 주머니 속에 있는 것과도 같아서, 당장에 그 끝이 드러나 보이는 것이요. 지금 선생이 나의 문하에 있은지 3 년이나 되었는데 좌우의 사람들이 아직 선생을 칭송하는 일이 없었소. 이것은 선생께서 가진 재능(才能)이 없다는 것이요."
"저는 비로소 오늘 주머니 속에 있기를 청할 뿐입니다. 만약 저를 일찍부터 주머니 속에 있게 하였다면 곧 자루까지 주머니 속에서 벗어나왔을 것입니다. 어찌 그 끝만이 드러나 보이는 정도였겠습니까?"
그리고 같이 외국에 가서 모수의 힘만으로 성공을 거두고 왔다. 돌아온 후 평원군이 말하였다. "나는 감히 다시는 선비를 고르지 않겠다. 내가 선비를 골라 뽑음이 많으면 천 명, 적어도 백명 단위로 세었다.
스스로 생각 하기를 천하의 선비를 한 사람도 잃지 않았다고 자부하였다. 그런데 모선생에게는 실패하였다.~~모선생의 세 치의 혀는 백만의 군사보다 강하였다. 나는 다시는 선비에 대하여 아는 체 하지 않겠다."
[모수자전(毛遂自薦)]
平原君像 | 平原君銅像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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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순(毛遂, ?~BC 251)/조(趙)나라 평원군의 식객(食客).
조(趙)나라가 진(秦)나라의 공격(攻擊)을 받아 위험에 처해 있을 때 초(楚)나라로가서 구원(救援)군을 요청(要請)하기 위한 인원을 식객 중에서 뽑는데 모수가 자진하여 나서면서 따라가겠노라 했다. 결국 모수(毛遂)의 지략(智略)과 말솜씨로 초나라의 구호군(救援軍)을 얻을 수 있었다.
인재(人才)는 자루 속에 있어도 불거져 나온다.
[낭중지추(囊中之錐)]
모순(毛遂) | 모순 묘(毛遂 墓)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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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릉군(信陵君), 중국 전국시대 4공자중의 한사람.
위공자 무기(無忌)는 위(魏)나라 소왕의 아들이다. ...
공자(公子)는 사람됨이 어질어 선비 앞에 자신을 낮추어, 선비의 어질거나 불초(不肖)하거나를 구별하지 않고 다 겸손(謙遜)한 태도로 그들과 예를 지켜 사귀었으며, 감히 자신이 부귀(富貴)하다고 선비에게 교만(驕慢)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선비들이 사방 수천 리에서 다투어 그에게로 모여드니, 식객(食客)이 3천명이나 되었다.
당시에 천하의 여러 공자(公子)들도 또한 선비를 좋아하는 이가 있었다.
그러나 신릉군만이 산림에 숨어사는 현사(賢士)와 접촉하고 신분이 낮은 자와 사귀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이름이 제후 중에 으뜸이었다는 사실은 헛소문만은 아니었다.
한 고조는 여기를 지날 때마다 백성을 시켜 신릉군에게 제사지내는 것이 끊이지 않게 하였다 한다.
信陵君 | 信陵君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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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맹상군(孟嘗君), ?~BC 279/ 중국 전국시대 4공자 중의 한사람.
성은 전(田)이고 이름은 문(文)이며, 맹상군은 시호이다. 제 위왕(威王)의 막내 아들이며 선왕(宣王)의 이복동생 정곽군(靖郭君) 전영(田嬰)의 아들로 태어났다. 식객 1,000여 명을 거느렸고 위(魏)의 신릉군(信陵君), 조(趙)의 평원군(平原君), 초(楚)의 춘신군(春申君)과 함께 전국시대 말기 4군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힌다.
진(秦) 소양왕(昭襄王)의 초빙으로 재상이 되었으나 곧 의심을 사게 되어 죽음을 당할 위기에 처했는데 그의 식객 중에 좀도둑질[狗盜]을 잘하는 사람과 닭울음소리[鷄鳴]를 잘 흉내내는 사람이 있어 그들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했다고 하는 고사 '계명구도'(鷄鳴狗盜)가 유명하다. 제와 위에서 잠시 재상을 지냈고, BC 284년 제의 민왕(湣王)이 죽은 후에 자립해 제후가 되었다.
맹상군(孟嘗君) | 맹상군(孟嘗君)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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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환(馮驩), BC 270년경/중국의 전국시대 맹상군의 식객(食客).
교토삼굴(狡兎三窟)의 지혜(智慧)로 은인(恩人)을 구(救)한 수완가(手腕家) 맹상군이 설(薛)땅에다 이자(利子)를 놓고 있었는데 임대금(貸付金)을 받아올 적임자(適任者)로 추천(推薦)이 되어 가게 된다. 이자를 받았지만 안낸 사람도 많아서 전부 차용증(借用證)을 가지고 모이게 한 후, 받은 돈으로 술과 고기를 장만하여 잔치를 벌인다.
그런 후 利子를 낸 사람에게는 원금을 감해주고 이자를 못 낸사람에게는 차용증(借用證)을 태워 빚을 없애준 후 이렇게 말했다. ‘맹상군이 돈을 대부(貸付)해 준 것은 가난한 영민의 생업자금을 위해서였고 이자를 받은 것은 식객(食客)을 위해서였다.
’주민들은 맹상군의 덕(德)을 감사히 여겼다. 보고를 받은 맹상군이 화를 내니까 풍환이 말하길 ‘변재능력이 있는 자는 기한(期限)을 약속(約束)했고 변재능력이 없는 자는 10년을 독촉(督促)해도 이자(利子)만 쌓여갈 뿐이니 닦달한들 도망갈 뿐일 텐데 그것도 차용증(借用證)을 잃은 것과 다름없습니다.
유명무실(有名無實)한 차용증(借用證)을 불태워 버림으로써 돈 주고 사기 힘든 은혜(恩惠)와 의리(義理), 군주(君主)의 이름을 샀습니다.’ 맹상군이 풍환의 기지(機智)에 감탄했다.
1년 후 맹상군이 제나라 민왕에게 미움을 타서 식객들은 전부 떠나서 실의에 빠져 있을 때 풍환이 맹상군에게 설(薛)에 가서 쉬라고 했는데 설의 주민들이 그를 환호하며 맞이해 주는걸 보고, 맹상군이 풍환의 한일을 그제야 깨닫게 되었다.
뒤에 풍환은 진(秦)나라에 가서 맹상군을 등용(登用)해쓰기를 권유(勸誘)했고, 많은 보화(寶貨)를 가지고 맹상군을 초빙(招聘)하기로 해놓고, 다시 제(齊)나라 왕을 만나 진(秦)나라가 맹상군을 초빙(招聘)할려고 한다는 정보(情報)를 주어 맹상군을 다시 복직(復職)시켜야 한다는 당위성(當爲性)을 설명하여 다시 재상(宰相)에 복직 하게함.
※교토삼굴(狡兎三窟) : 교활한 토끼는 굴을 세 개 파 놓는다는 뜻으로, 사람이 교묘하게 잘 숨어 재난을 피함을 비유(比喩)하여 이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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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춘신군 황헐(春申君 黃 歇: ?~BC238), 4군자 중의 한사람. 중국 전국시대 초(楚)나라 정치가.
제(齊)나라 맹상군(孟嘗君), 조(趙)나라 평원군(平原君), 위(魏)나라 신릉군(信陵君)과 더불어 전국시대 4군(君)으로 불렸다. 진(秦)나라의 공격을 막기 위해 태자 완(完)과 함께 진나라에 인질로 붙잡혀 있다가 계략으로 탈출에 성공하였다.
완이 효열왕(孝列王)으로 즉위하자 재상에 임명되어 20년간 정치를 보좌하였다.
세력은 왕을 능가하였으며, 荀子)를 비롯한 세객(說客),모사(謀士)들을 식객으로 두고 보호하였다.
누이의 아들을 왕에게 바쳐 권신(權臣)이 된 이원(李園)의 모략으로 효열왕이 죽은 뒤 일가와 함께 살해되었다.
春申君 黃 歇) | 춘신군 황헐(春申君 黃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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