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신도비명

이몽량 신도비명(李夢亮 神道碑銘) - 이항복의 아버지

야촌(1) 2009. 1. 11. 02:21

생졸년 : 이몽량『李夢亮, 1499년(연산군 5) ~ 1564년(명종 19)』

◈ 시대 : 조선
◈ 비의 건립 연대 : 1604년(선조 37)

◈ 유형/재질 : 비문/돌
◈ 문화재지정 : 비지정
◈ 크기 : 높이 110Cm, 너비 43Cm, 두께 35Cm
◈ 소재지 : 경기도 포천군 가산면 금현리
◈ 서체 : 해서(楷書), 전액(篆額) 전서(篆書)
◈ 찬자/서자/각자 : 최립(崔岦) / 한호(韓濩) 전액(篆額) 노직(盧稷) /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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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헌공 이몽량 신도비명(定獻公李夢亮 神道碑銘)


유명조선국 증 순충적덕병의보조공신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 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세자사 시림부원군 행 자헌대부 의정부 우참찬 겸 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 이공 신도비명 병서

 

영남(嶺南) 지방에는 당초 모든 지역을 관장하는 군장(君長)이 없었다.

이알평(李謁平)이라는 분이 경주(慶州) 표암(瓢巖) 아래에서 태어나 사량부 대인(沙梁部大人>及梁部大人의 잘못)으로 있었는데, 당시에 동등한 부(部)의 대인(大人)이 모두 여섯 명이었다.

 

이에 이들이 서로 신이(神異)한 인물을 물색하여 임금으로 세우니, 이이가 바로 신라의 시조인 혁거세(赫居世)이다. 그리하여 이씨(李氏)가 마침내 신라의 원훈(元勳)으로서 거족(巨族)이 되었다.

 

그 뒤로 고려 시대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대관(大官)이 배출되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사문(斯文)에 명성을 떨쳐 지금까지 전해 오는 분이 있으니, 그분이 바로 익재 선생(益齋先生)인 문충공(文忠公) 이제현(李齊賢)이다.

 

국조(國朝)에 들어와서 휘 연손(延孫)이 공조 판서를 지냈는데, 공은 그분의 4세손이다.

증조고인 휘 숭수(崇壽)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使)이고, 조고인 휘 성무(成茂)는 안동부 판관(安東府判官)이며, 고(考)인 휘 예신(禮臣)은 성균관 진사(成均館進士)이다.

 

진사는 은덕(隱德)의 소유자로 의취(意趣)가 또한 고아(高雅)하여 고사전(高士傳)에 들어가고도 남을 분이었다. 그런데 자신의 당대에 그 덕을 모두 보답받으려 하지 않고 후손에게 물려주었는데, 나중에 공과 그 자손이 귀하게 됨에 따라 누차 증직(贈職)된 결과 의정부 좌찬성에 이르렀다.

 

그리고 배필인 전주 최씨(全州崔氏) 역시 정경부인(貞敬夫人)에 이르렀으며, 위로 3세(世)까지 차등 있게 추증을 받았다. 공은 휘가 몽량(夢亮)이요, 자가 언명(彦明)으로, 홍치(弘治) 기미년(1499, 연산군5)에 태어났다.

 

유년기와 소년기를 거쳐 성장하면서 학문에 힘을 쏟은 결과, 가정(嘉靖) 임오년(1522, 중종17)에 생원시와 진사시에 입격하였으며, 무자년(1528, 중종23)에 형인 이몽윤(李夢尹)과 함께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교서관(校書館)에 분속(分屬)되었다.

 

몇 년이 지나면서 더욱 이름을 날려 예문관(藝文館)에 뽑혀 들어가 검열(檢閱)을 거친 뒤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로 전직(轉職)되었으며 다시 관례에 따라 성균관 전적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형조와 예조와 병조의 좌랑(佐郞)을 역임하고서 사간원 정언에 임명되었다가 경성부 판관(鏡城府判官)으로 나갔다.

 

얼마 있다가 사헌부 지평으로 부름을 받았다. 이에 언관(言官)이 ‘너무 빨리 불러올리는 것은 일단 엄선해 보내어 공을 세우도록 권면하는 뜻이 못 된다’고 하였으나, 상은 이르기를, “북로(北路)는 조정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장리(將吏)들이 대부분 법을 준수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그 지방에서 사람을 불러다 이목지관(耳目之官)으로 기용하는 것도 북로를 중하게 하는 하나의 길이 될 것이다.” 하였다. 조정에 돌아오자마자 상(喪)을 당했다. 상복을 벗은 다음에 예조 정랑에 제수되었다.

 

진하사(進賀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경사(京師)에 갔다가 돌아와서 한성부 서윤(漢城府庶尹)과 승문원 판교(承文院判校)를 역임한 뒤, 사헌부 장령에 임명되었다가 집의로 승진하였으며, 또 선공감(繕工監)과 사복시(司僕寺)의 정(正)을 역임하였다.

 

갑진년(1544, 중종39)에 중묘(中廟)의 상을 당해 빈전도감(殯殿都監)의 도청(都廳)으로 일을 마무리하였다. 을사년에 관례에 따라 당상(堂上)으로 품계가 오른 뒤 곧이어 나주 목사(羅州牧使)로 나갔다.

 

명묘(明廟)가 처음 정사를 행할 때에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로 부름을 받고 돌아와 우부승지와 좌부승지로 승진하였으며 장례원 판결사(掌隷院判決事)를 역임하였다. 그 뒤 사간원 대사간에 임명되고 또 병조의 참지(參知)와 참의(參議)를 거치고 나서 강원도 관찰사로 나갔다.

 

기유년(1549, 명종4)에 동지사(冬至使)로 경사에 갔다. 신해년에 도승지에서 특별히 가선대부의 품계로 오른 뒤 경상도 관찰사로 나갔다. 계축년(1553, 명종8)에 충청도 관찰사로 나갔다가 조정에 들어와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거쳐 한성부(漢城府)의 우윤(右尹)과 좌윤(左尹)을 역임하였다.

 

을묘년(1555)에 전라도가 왜구의 환란을 당해 피해가 막심하였으므로, 조정에서 방백(方伯)의 선임을 의논하게 되었다. 이때 이조 판서 윤춘년(尹春年)이 아뢰기를, “오늘날 재능으로 보나 기국(器局)으로 보나 이모(李某)보다 나은 사람이 없습니다.” 하였는데, 사실은 공을 밀어내려는 의도에서 그런 것이었다.

 

그런데 임당공(林塘公) 정유길(鄭惟吉)이 마침 그 당시에 이조 참판으로 있다가, 공이 몇 년 동안 계속 혼자서만 고생을 하고 있다고 난색을 표했으므로, 마침내 그 일이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이해에 다시 대사간으로 임명되었다가 판결사(判決事)로 바뀌었다. 정사년(1557)에 경기 관찰사로 나갔다. 기미년에 사헌부 대사헌에 임명되고, 병조와 예조의 참판을 역임하였다. 경신년에 다시 도승지로 임명되었으며, 신유년에 다시 예조 참판을 거쳐 특별히 자헌대부로 가자(加資)된 뒤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이 되었다. 임술년에 형조 판서와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가 되었다.

 

계해년에 다시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어떤 사건과 관련되어 파면을 당한 뒤 선영이 있는 시골로 돌아가 거처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서용되어 의정부 우참찬과 지의금부사 및 오위 도총관(五衛都摠管)을 역임하고는, 갑자년 겨울에 세상을 하직하니, 향년 66세였다.

 

상이 부음을 듣고는 조회(朝會)를 일시 중지하고 조문(弔問)과 제사를 의례(儀禮)대로 행하게 하였다.

을축년 봄에 포천현(抱川縣) 화산리(花山里)에 안장(安葬)하였다.

 

전부인(前夫人)인 함평 이씨(咸平李氏)는 참봉(參奉) 이보(李保)의 딸이다. 그 소생인 아들 이운복(李雲福)은 영평 현령(永平縣令)이고, 장녀는 충의위(忠義衛) 김익충(金益忠)에게 출가하였으며, 차녀는 진보 현감(眞寶縣監) 홍우익(洪友益)에게 출가하였다.

 

후부인(後夫人) 전주 최씨(全州崔氏)는 결성 현감(結城縣監) 최윤(崔崙)의 딸이다.

그 소생인 아들 이산복(李山福)은 수성금화사 별제(修城禁火司別提)이고, 이송복(李松福)은 선공감 감역관(繕工監監役官)이고, 이항복(李恒福)은 원임(原任) 의정부 영의정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이다.

 

딸은 승정원 좌승지인 민선(閔善)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원임 호조참의 행 고성군수(行高城郡守) 유사원(柳思瑗)에게 출가하였다. 내외손(內外孫)의 남녀는 다음과 같다.

 

삼등 현령(三登縣令)인 이계남(李桂男)과 청단도 찰방(靑丹道察訪)인 이탁남(李擢男)과 직장 유사경(柳思璟)의 처는 영평(永平)의 소생이고, 사인(士人)인 이성남(李星男)과 이정남(李井男)은 오성부원군의 소생이고, 형조 참판 박동량(朴東亮)의 처는 승지(承旨)의 소생이고, 사인(士人)인 유부(柳薂)는 참의(參議)의 소생이다.

 

만력 무술년(1598, 선조31)에 공에게 영의정과 시림부원군(始林府院君)의 증직이 명해지고, 전부인과 후부인에게도 모두 정경부인(貞敬夫人)의 명이 내려졌다.

 

공은 마음가짐이 소탈하고 평이하였으며, 청렴과 검약으로 자신의 몸을 단속하였다. 사람들과 사적(私的)으로 이야기할 때에는 정성과 성의를 다하였으며, 일단 일에 임하였을 때에는 위엄을 갖추고 안색을 엄숙하게 하여 누구도 감히 범접할 수가 없었다.

 

인륜지사(人倫之事)는 한결같이 지성에서 우러나와 행하였다. 일찍이 거상(居喪)을 잘 한다는 것으로 일컬어졌으며, 먼 지방에서 형의 상을 당해 통곡할 때에는 그 애통해하는 모습이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종족(宗族)에 대해서도 후덕스럽기 이를 데 없어, 생활이 빈한하여 살아가기 어려운 이를 만날 때에는 반드시 구휼해 주곤 하였다. 그리고 시집이나 장가를 가지 못한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자금을 대주어 때를 놓치지 않게 하였다.

 

그래서 친소(親疎)를 막론하고 마치 자기 집처럼 여겨 공의 집을 드나들었는가 하면, 밥상을 이어 놓고 먹는 광경이 벌어지면서 날마다 빈 자리를 찾을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공은 평생토록 술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오직 심하다 할 정도로 좋아했던 것은 오직 음악뿐이었는데, 특별한 일이 없을 때에는 한 번도 옆에서 이를 떼어 놓으려고 하지를 않았으니, 그 천품(天品)이 고매한 것이 또한 이와 같았다.

 

공이 공무를 처리하는 솜씨로 말하면 넉넉하게 여유가 있고 또 민첩하기만 하였다.

또 공이 문서를 열람할 때에는 한꺼번에 몇 줄씩 읽어 내려가곤 하였다.

그래서 당시에 모두들 공을 따라갈 수 없다면서 추앙하였다.

 

영남에 있을 당시, 개인적인 상사(喪事) 때문에 해직을 청하는 상소를 올리고는 열흘 동안 관아를 비운 적이 있었는데, 그동안 처리하지 못한 부첩(簿牒)들이 계속 쌓여만 갔으므로 늙은 아전들이 걱정을 하였다.

 

그런데 해직을 허락받지 못하게 된 상황에서 공이 한번 일을 보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책상 위에 쌓인 부첩들이 한꺼번에 말끔히 처리되었으므로, 이를 보고서 탄복하지 않는 이들이 없었다.

 

호서(湖西)에 있을 당시, 어떤 사인(士人) 하나가 절도와 약탈을 당했다면서 도적을 붙잡은 뒤 현(縣)에서 작성한 문서를 가지고 공에게 왔는데, 공이 보니 도옥(盜獄)의 성립 조건이 모두 갖추어져 있었다.

 

그렇지만 공이 먼저 본인의 가산(家産)과 도적이 소지한 기물(器物) 및 의복 등을 물어 본 결과, 그 사람은 바로 남의 종으로서 나중에 부자가 된 사람이고 도적으로 몰린 사람은 그저 몰락한 사인(士人)일 뿐이라는 심증을 갖게 되었다.

 

이에 공이 말하기를, “이는 사인(士人)이 강퍅한 종을 혼내 주려고 왔다가 거꾸로 봉변을 당하고 붙잡힌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변변치 못한 관리가 그의 말만 듣고서 도옥(盜獄)으로 단정지은 것이다.” 하였다.

 

그러고는 다시 심문하여 그 실정을 알아낸 뒤 그에 따른 죄를 주니, 도 전체가 공의 신령스럽고 밝은 식견에 탄복하였다. 이에 앞서 금성(錦城 나주(羅州))에 있을 적에, 어떤 토호의 집안에서 일으킨 송사(訟事)를 처리하면서 그 송사의 내용이 도리에 어긋난다[非理]는 것을 알고는 패소시킨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은대(銀臺 승정원)에 들어와 있을 적에, 형조가 본도(本道)의 첩문(牒文)에 의거하여 계청(啓請)을 한 뒤 판결을 내린 것을 보니, 바로 예전의 비리(非理)에 해당되는 송사와 관련된 것이었다.

 

이에 공이 동료들에게 논의를 꺼내기를, “가령 송관(訟官)이 판결을 잘못했다고 하더라도, 감사(監司)까지 편들어 주었을 리는 만무하다.” 하자, 모두 말하기를, “문서가 제대로 갖추어져 있는데, 어찌 의심할 수가 있겠는가.” 하였다.

 

그러나 공이 다시 그 직인(職印)의 흔적을 살펴본 결과 간사하게 위조한 사실이 밝혀졌으므로 그 사건이 마침내 바르게 귀결되었는데, 대개 이런 종류의 일들이 매우 많았다. 재차 어사대(御史臺 사헌부)의 어른이 되었을 적에, 상신(相臣) 심통원(沈通源)의 아들인 심뇌(沈鐳)가 겨우 서른 살의 나이에 평안도 절도사(平安道節度使)로 나가는 일이 있게 되었다.

 

공은 심상(沈相)과 오랜 친구 사이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날 대석(臺席)에서 그 일을 맨 먼저 꺼내어 말하기를, “서쪽 지방의 중진(重鎭)을 어찌 경력도 없는 연소한 사람에게 맡겨서야 되겠는가.” 하였으므로, 동료들이 모두 깜짝 놀라면서 다시 의논해 보도록 하자고 대답하였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이 사실을 심가(沈家)에 남몰래 알려 주자, 심(沈)이 간원(諫院)을 부추겨서 공이 대리시(大理寺)에 있을 때의 일을 주워 모아 탄핵을 하여 파직시키도록 하였다. 이에 조야(朝野)가 경악을 하고 통분하게 여기는 가운데, 대신(大臣)이 나서서 구해 주려고까지 하였으나, 결국에는 면할 수가 없게 되었다.

 

이웃에 사는 판서(判書) 김개(金鎧)가 찾아와서 공을 위로하자, 공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심(沈)은 원래 뒤끝이 없는 사람인데, 어찌하여 이렇게까지 원한을 품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하였는데, 이 말을 듣고는 김(金)이 말하기를, “공은 그저 그가 억지로 웃어 주는 모습만 보았을 따름이다.” 하였다.

 

최 부인(崔夫人)의 외조부는 판서 눌헌(訥軒) 이사균(李思鈞)이다.

이에 앞서 눌헌이 태학생(太學生)을 대상으로 시험을 주관하고는 집에 돌아와 부인 황씨(黃氏)에게 말하기를, “내가 오늘 뛰어난 선비를 얻어보게 되었다.” 하고는 이어 말하기를, “포천(抱川) 출신의 이모(李某)라는 유생은 뒷날 국가의 중한 그릇이 될 것이 분명하다.” 하였으므로, 황 부인이 마음속에 기억하게 되었다.

 

그런 일이 있고 나서 10여 년이 지나 눌헌(訥軒)이 세상을 하직하였는데, 그때에는 최 부인도 이미 장성해 있었다. 그런데 그때 마침 공이 첫부인과 사별(死別)하게 되었는데, 황씨 가문의 서족(庶族)이 지나가는 말로 이 사실을 이야기하자,

 

황 부인이 이를 듣고는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 이가 바로 선부자(先夫子)께서 기특하다고 일컬었던 사람이다. 나의 손녀 역시 뛰어난 여성이니, 반드시 그의 배필이 되도록 해야 하겠다.” 하였다. 이에 일가친척이 내외(內外)를 막론하고 모두들 나이가 서로 맞지 않는다면서 반대하였으나, 황 부인은 그런 말을 귀 담아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공 역시 이미 편방(偏房 첩실(妾室))을 두어 어린 자식들을 양육하는 데에 부족함이 없었으므로 재혼하여 가정을 꾸릴 의사가 전혀 없었다. 하지만 원주 목사(原州牧使)로 있던 공의 형이, 명가(名家)의 훌륭한 여성을 잃을 수는 없다고 하면서 강력히 권고한 결과, 마침내 결혼이 성사되었다.

 

최 부인이 일단 공에게 출가한 뒤로는 온유하고 화순한 태도로 부도(婦道)를 견지하면서 오직 공의 뜻을 따라 순종하였다. 당시에 공의 누이가 일찍 과부가 된 몸으로 아들 넷을 두었는데 집안이 가난해서 제대로 기를 수가 없었고, 족질(族姪 종형제의 아들) 몇 사람이 또 집안에서 기식(寄食)하였으며, 전 부인(前夫人) 소생의 세 자녀도 모두 미혼이었고, 부인의 소생 역시 조금씩 자라나고 있는 형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부인이 한결같이 성의를 다하여 양육하면서 독립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는데, 집안의 친족들이 볼 때에도 털끝만큼이라도 차이를 두어 대하는 점을 부인에게서 발견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뒤에 미망인(未亡人)으로 자처하며 거하게 되었을 때에는 삼년(三年)의 상기(喪期)가 지난 뒤에도 검소한 가운데 슬퍼하는 빛이 여전하였다. 또 오직 거친 명주 옷에만 감소(紺素)의 표리(表裏)를 대었을 뿐, 내의(內衣)와 치마는 반드시 무명과 베로 해 입었으며, 일문(一門)에 혼사나 경사가 있어 크게 모일 때에도 절대로 참석하는 일이 없었다.

 

자녀에 대한 교육은 무척 엄한 편이었다. 그래서 평소에 옷을 걷어올려 몸을 드러낸다거나 한쪽에 몸을 비스듬히 기댄다거나 관잠(冠簪)을 갖추지 않고 대하는 일 등은 감히 상상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내외(內外)를 엄격히 구별하여 앉거나 밥을 먹거나 이야기를 할 때에 법도를 지키게 하였으며, 조금이라도 서로들 장난을 치면서 웃기라도 하면 그 자리에서 바로 꾸짖어 다시는 그런 잘못을 범하지 않도록 하였다.

 

부인의 오빠인 안음(安陰) 최정수(崔廷秀)가 부인보다 약간 위의 나이로 같은 마을에서 살고 있었다.

그래서 노년에 이르도록 누구보다도 가장 빈번하게 만나곤 하였지만, 시비(侍婢)가 있지 않으면 만난 적이 한 번도 있지 않았다.

 

부인이 죽어 장례를 치른 것은 융경(隆慶) 신미년(1571, 선조4) 겨울의 일이었다.

그러니 지금은 공을 장사 지낸 지 39년이 되는 해요, 부인의 장례로부터는 33년이 되는 해라고 하겠다.

 

그러던 어느 날, 오성(鰲城 이항복(李恒福)의 봉호임) 상공(相公)이 직접 공의 행장(行狀)을 가지고 나에게 찾아와서 말하기를, “나는 선인(先人)에게 불효가 막심한데, 분에 넘치게 너무나도 많은 은혜를 입었다.

 

그리고 국가가 다사다난(多事多難)하게 된 이래로 또 빈 자리를 메우며 급속도로 승진하는 등 천지(天地)보다도 더 큰 은총을 받아 인신(人臣)으로서는 더 이상 오를 수 없는 가장 높은 지위에 이르렀다.

 

지금 평상시처럼 예법을 모두 갖추어 사당에 모실 수는 없다 하더라도, 묘소에 비석을 세워 행적을 기록함으로써 불후하게 되시기를 도모해 보는 것이 구구한 나의 소원이다.

 

그러나 나는 아홉 살의 어린 나이에 선공(先公)을 여의었고, 선부인(先夫人) 역시 내 나이 겨우 열다섯 되던 해에 돌아가시고 말았다. 그래서 생전의 행적을 자세히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집안에서 들어서 기억하고 있는 것들만을 정리해 놓았을 뿐이다.

 

또 나 자신이 직접 글을 지을 수도 없는 만큼 문학(文學)에 노성(老成)한 이에게 부탁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그런데 지금 선생이 벼슬살이에 싫증을 느껴 장차 외딴 고을에서 한가한 시간을 보내려 하고 있으니, 이런 때에 나의 일을 도와준다면 더 이상 다행한 일이 없겠다.” 하였다.

 

이에 내가 행장을 받들어 읽고 나서 그렇게 하겠노라고 승낙하였는데, 이와 함께 공과 관련되어 불현듯 떠오르는 일이 하나 있었다. 내가 태학(太學)에서 벼슬을 하고 있을 때, 공이 석전(釋奠)의 초헌관(初獻官)으로 임명되어 의식을 집행한 적이 있었다.

 

이윽고 제례(祭禮)를 다 마친 뒤에 명륜당(明倫堂)에서 음복(飮福)을 행하였는데, 당시에 정부의 백관들이 일 때문에 오지 못하고 오직 향관(享官)들만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는데도, 공이 좌중을 압도하면서 행사를 진행하자 오히려 원수(員數)가 성대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그리고 음복을 끝내고 나서는 각자 자리에서 일어나 연음(燕飮)을 하였는데, 이때에도 반드시 술잔을 잡고 자리에 있는 관원에게 전해 줄 적에 공이 술잔을 들고는 항상 좌우(左右)에 읍(揖)을 하였으며, 좌우에서 술잔을 건네 주어 받게 되었을 때에도 땅에 엎드려 사례를 한 뒤에 마시곤 하였다.

 

이렇듯 공이 끝까지 자기 자리를 고수하면서 술을 마셨으므로 사람들 역시 함께 읍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렇게 하지 말라고 공에게 권해도 공은 조금도 흐트러지는 기색이 없이, 겸허하면서도 평화스러운 분위기가 온몸에서 우러나오곤 하였다. 그런데 다른 헌관(獻官)들은 공처럼 그렇게 제대로 행하는 사람이 있지 않았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선진(先進)들이 보여 주는 행동거지에 대해서 작은 일이라도 자세히 살펴보는 버릇이 있었는데, 이런 광경을 한번 목도하여 공이 장후(長厚)한 군자라는 것을 알고는 항상 칭찬하여 마지않았다.

 

그 뒤에 또 듣건대, 조정에서 문형(文衡)을 맡을 인물을 추대할 적에, 정임당(鄭林塘 임당은 정유길(鄭惟吉)의 호임)과 이량(李樑)이 선발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대상으로 꼽히고 있었는데, 여러 재신(宰臣)들이 누구에게 더 권점(圈點)을 하느냐에 따라 결정될 상황에 처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때 이량의 권세(權勢)가 비록 한 시대를 압도하고 있긴 하였지만, 문망(文望)으로 보면 정임당을 능가할 수 없었으므로, 이량이 정임당에게 윗자리를 양보하는 척하면서 오히려 자신의 명성을 높일 기회로 삼으려 하였는데, 사람들은 이런 사실을 모두 헤아려 알고 있었다.

 

그런데 공이 종이를 앞에 두고는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권점하는 일에 끝내 참여하지를 않았었다. 대체로 보건대 공은 정임당과 평소 친하게 지내는 사이였으면서도, 일이 이렇게까지 된 상황에 대해서 어쩌면 수치스러운 생각을 느껴서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공이 또 이렇듯 확고하고 단호한 태도를 보여 준 것에 대해서 더욱 탄복하게 되었다. 지금 우리 상공(相公)을 우러러 살펴보건대, 풍채(風采)와 신태(神態)가 중후하고 원대한 데다 아무리 어려운 일을 만나더라도 손쉽게 처리하는 솜씨를 보여 주고 있다.

 

상공은 낭관(郞官)과 학사(學士)로 있을 때부터 당시 동류들보다 월등하게 출중한 모습을 보여 주었고, 지극히 위태롭고 혼란한 사태를 수습해야 하는 임무를 맡았을 적에도 목소리나 안색 한번 변한 적이 없었다.

 

그리하여 마치 일만 마리의 소를 동원해도 어찌할 수 없어 그 나무의 무게에 머리를 돌려 버리고, 마치 일천 길 두레박 줄을 드리워야 물을 퍼올릴 수 있는 우물처럼 그 깊이를 잴 수가 없었으니, 우리 상공이 이런 그릇을 이룰 수 있었던 그 소이연(所以然)을 우리가 몰라서야 되겠는가.

 

과거에 공이 재혼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벌어졌었고, 그리하여 눌헌(訥軒)의 선견지명이 현실로 드러나면서 우리 어진 상공이 이 세상에 태어나게 되었고 보면, 하늘이 이 사이에 당초부터 간여하지 않았다고 또 어떻게 말할 수가 있겠는가.

 

내가 일단 행장에 근거하여 대략 공의 본말(本末)을 서술하고 나서, 다시 말미에 나의 소견(所見)의 일단을 피력하여 붙이게 되었다. 그러고는 또 다음과 같이 명하는 바이다.

 

사람이 일백 가지 선행에 대해 / 人於百善

마음속으로 본받으며 노력할 순 있겠지만 / 可慕而力

도량과 절제를 겸비한 이는 / 惟量惟節

하늘이 반드시 점지하게 마련이니 / 必其天得

도량이 없으면 어찌 여유가 있겠으며 / 非量焉裕

절제 없이 어찌 탁월할 수가 있겠는가 / 非節焉卓

덕행과 정사에 드러난 일을 보더라도 / 德行政事

범속한 경지를 똑같이 초월하였나니 / 同歸拔俗

우리 공이 남긴 자취야말로 / 如公之爲

옛사람에게서나 찾아볼 수 있으리라 / 求諸古人

직위는 상서(尙書)요 나이는 겨우 육십 대 / 八座六袠

공의 당대에는 이 정도로 그쳤지만 / 而止公身

융숭한 증직과 우악한 추숭 / 寵贈優崇

남겨 놓은 물건을 되찾듯 하였나니 / 若收遺餘

이는 대개 공에게 아들이 있어 / 蓋公有子

공과 같지 않은 점이 없었기 때문이라 / 無所不如

그 아들이 과연 어느 분인고 / 有子伊何

성스러운 임금님 도와 드리는 우리 상공 / 相我聖后

공이 후세에 남긴 은택을 / 維公之澤

실제로 우리들이 받고 있도다 / 我人實受

 

가선대부 행 간성군수 최립(崔岦)은 글을 짓고, 통훈대부 행 흡곡현령 한호(韓濩)는 글을 쓰고, 자헌대부 병조 판서 노직(盧稷)은 전액을 쓰다.

만력 32년 3월 일(1604년 세움[1604년 선조 37)


[추기]

정헌공의 원래 비는 속칭 삼절(三絶)이라 하였다. 그러나 세운 지 오래 되어 마모되고 글자가 훼손되어 판독할 수 없게 되었다. 유원(裕元)은 구자를 탁본하여 돌에 베껴서 새겼으니 이는 우리 선고이신 문정공의 유지이다.

 

옛적에 정헌공의 표석에 비문이 있어 선고께서 개수하는 역사를 소자에게 명하였는데 소자가 겨를이 없어 10여 년이 지났다. 이에 갑자년에 삼가 선훈을 받들어 구비 곁에 새로 비를 세웠으니 무릇 우리 화산의 고향에서 경작하는 자와 초동이 어찌 우리 가문의 유적을 앙망하고 반드시 경모하지 않겠는가. 십세손 숭정대부 행 예조판서 겸 홍문관 제학 원임 직제학 유원(裕元) 삼가 기록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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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有明朝鮮國贈純忠積德秉義補祚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始林府院君行資憲大夫議政府右叅賛兼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都摠管李公神道碑銘 并序

 

嶺南初無君長。有李謁平者。生於慶之瓠巖下。爲沙梁部大人。時等夷部大人凡六。相與物色神異人而立之。卽新羅始祖赫居世。李氏遂爲新羅元勳巨閥。曁于高麗。代有大官。其尤流聲斯文者。益齋先生文忠公齊賢。入國朝。有諱延孫。工曹判書。公其四世孫也。曾祖考諱崇壽。僉知中樞府事。祖考諱成茂。安東府判官。考諱禮臣。成均進士。進士隱德雅致。優於高士傳。不食其贏。繄歸于後。以公及子貴。累贈至議政府左贊成。配全州崔氏。至貞敬夫人。上反其三世有差。公諱夢亮。字彦明。生于弘治己未。幼長力學。嘉靖壬午。中生員進土二試。戊子。同兄夢尹明經及第。分隸校書館。數年尤有名。選入藝文館。由檢閱轉承政院注書。例遷成均館典籍。歷刑禮兵三曹佐郞。拜司諫院正言。出爲鏡城府判官。未幾。召拜司憲府持平。言者以爲太遽。恐非所以擇遣責效之意。上曰。北路去朝廷遠。將吏多不帥法。卽其地召用耳目。乃所以重北也。甫還朝丁憂。服闋。除禮曹正郞。以進賀使書狀官朝京。還歷漢城府庶尹,承文院判校。拜司憲府掌令。進執義。又歷繕工監,司僕寺正。甲辰。以中廟殯殿都廳竣事。乙巳。例陞堂上。尋出羅州牧使。明廟初政。以承政院同副承旨召還。進右副,左副。歷掌隸院判決事。拜司諫院大司諫。又歷兵曹參知,參議。出江原道觀察使。己酉。以冬至使朝京。辛亥。由都承旨特加嘉善。觀察慶尙道。癸丑。觀察忠淸道。入同知中樞府事,漢城府右尹左尹。乙卯。全羅道被倭患敝甚。廷議選任方伯。吏判尹春年曰。當今才局。無出李某。實有意擠之也。鄭林塘公惟吉。適亞銓。以比歲獨賢難之。事寢。是年復拜大諫。改判決事。丁巳。觀察京畿。己未。拜司憲府大司憲。改兵,禮曹參判。庚申。復拜都承旨。辛酉。復由禮參。特加資憲。爲漢城府判尹。壬戌。刑曹判書,知義禁府事。癸亥。復拜大憲。以事罷免。退居松楸之鄕。旣而敍復議政府右參贊,知義禁,五衛都摠管。以甲子冬卒。享年六十六。上爲之輟朝。使弔祭如儀。乙丑春。葬于抱川縣之花山里。前夫人咸平李氏。參奉堡之女。生男曰雲福。永平縣令。女適忠義衛金益忠。次女適眞寶縣監洪友益。後夫人全州崔氏。結城縣監崙之女。生男曰山福。修城禁火司別提。曰松福。繕工監監役。曰恒福。原任議政府領議政鰲城府院君。女適承政院左承旨閔善。次女適原任戶曹參議行高城郡守柳思瑗。內外孫男女。曰桂男。三登縣令。曰擢男。靑舟道察訪。曰直長柳思璟妻者。永平出也。曰星男。曰幷男竝士人者。鰲城出也。曰刑曹參判朴東亮妻者。承旨出也。曰薂士人者。參議出也。萬曆戊戌。命贈公領議政始林府院君。前後夫人竝貞敬夫人。公居心坦易。而持己淸約。與人言。肫肫如也。至臨事。嶷嶷色莊而不可奪。人倫之際。一出至性。嘗以善居喪稱。遙哭兄則哀動人。厚於宗族。遇貧無。必周之。若無以嫁娶者。必資之。使不失時。故無間疏戚。其來如歸。連案而食者。日不虛席。平生不喜杯酒。獨酷好絲竹。無故未嘗欲去。其天機超邁又如此。吏才贍敏。凡閱文書。累行俱了。時輩皆推莫可及。在嶺南。以私慘拜章乞解。廢衙浹旬。簿牒滯積。老吏以爲憂。比不獲命。則一視事而空案。無不歎伏。在湖西。有一士人被盜劫而執之。持縣牒至。盜獄已具。公先問夲人家産及盜所持器服。人乃人奴而富。盜不過窶獘士人耳。公曰。此必士人來討强奴。而反遭執縛。不才官吏從而成獄也。覆詰。果得其情抵罪。一道稱其神明。先在錦城。黜一豪家非理之訟。及入銀臺。有刑曹因本道牒而啓決下者。即前非理訟也。公發之同僚曰。藉令訟官誤決。監司必不與右之。咸曰。文具何疑。公更察其印跡。果有姦。事竟歸正。蓋此類甚多。再長御史也。沈相通源子鐳。年三十爲平安節度。公於沈相故舊也。一日。於臺中倡言曰。西方重鎭。豈宜付之年少不更事者。同僚憮然。皆以更議答之。至有密通沈家者。沈諷諫院。拾掇公大理時事。劾罷。朝野駭憤。大臣有救者而不得免。隣有金判書鎧來慰公。公笑曰。沈故歇後人。何至以此相怨。金曰。公徒見其嘻笑耳。崔夫人外王父。爲訥軒李判書思鈞。初。訥軒主試明經生。歸謂其夫人黃氏曰。吾今日得佳士矣。因曰。抱川儒李某者。異日必爲國器。黃夫人心識之。後十餘年。訥軒下世。而崔夫人長成。會公已喪初室。有黃門庶族汎以爲言者。黃夫人聞之。喜曰。此先夫子所稱異者。吾孫亦賢女。必以與之。一家內外論皆曰。年歲不侔。黃夫人不聽。公亦已畜偏房。取足以育遺幼。殊無再立家意。兄原牧公以爲名家賢子不可失。亟勸成之。崔夫人旣歸公。溫溫執婦道。一唯公帥之爲。公姊早寡。有四子。貧不能育。又有族姪數人。幷寄於家。前夫人三男女。皆未婚。夫人之出。亦稍振振矣。夫人一誠撫養成立。自門內親屬。不覺其有纖毫異也。旣以未亡自居。雖三年之後。戚形於儉。表裏唯紺素紬衣。裙裳必用綿布。一門有婚慶大會。絶不與。敎子女嚴甚。平居無敢褰袒跛倚不冠簪見者。內外坐食言語。須令有別。少相與謔笑。卽訶止之。無得貳過。夫人之兄崔安陰廷秀。年少長。居同里。至老相見最數。然未嘗見婢侍不在側而接也。夫人之卒。而葬在隆慶辛未冬。今後公之葬三十九年。夫人之葬三十三年。一日。鰲城相公自以狀抵岦許。謂之曰。某不肖于先人。而叨遭遇之幸已甚。自國家多難而來。又承乏驟貴。恩加泉壤。位極人臣。雖不克如平時數備禮登以有廟。而卽墓樹石載詞。以圖不朽。區區之願也。顧某生孩九歲。而先公見違。先夫人亦僅及某之成童。不能具識先行。從一家粗綴記聞而已。又不能自爲詞。必託老於文學者。今先生倦於仕。將以養閑僻郡。幸有以相濟也。岦奉狀卒業而諾。因念岦爲官大學時。公以釋奠初獻官。已祭。設飮福于明倫堂。値政府百官有故不至。唯享官以序。而公押座。員數猶盛多。福酌已。各起燕酌。必執以傳在位。公擧爵揖左右。左右傳得爵。伏謝以飮。公終在位飮。人人與揖。勸不少怠。謙和之色可掬。他獻官不能然。岦尙少。卽先進擧止。雖幾微必諦觀。於是。知公爲長厚君子。常稱道之。及聞廷推典文衡者。鄭林塘與李樑在於高選。而當視諸宰圈過多少以定。李勢傾一時。鄭文望過之。李讓先於鄭。欲更藉以爲名。人皆揣知。公臨紙熟視不與圈。蓋公於鄭素善。而至是豈幷恥之耶。益歎其端確又然也。迺今仰望相公。風神凝遠。遇事迎刃。自爲郞官學士。已援出輩流。不啻數等。而不動聲色於經綸革昧之際。有萬牛不能回其重。千尋之綆。不能測其深者。其可不知所自耶。向公之不能不立再室。訥軒之先見有驗。以 生我賢輔相。又安得曰天未始與於其間哉。岦旣据狀。略敍本末。附以窺斑之說。又從而銘曰。

人於百善。可慕而力。惟量惟節。必其天得。非量焉裕。非節焉卓。德行政事。同歸拔俗。如公之爲。求諸古人。八座六袟。而止公身。寵贈優崇。若收遺餘。蓋公有子。無所不如。有子伊何。相我聖后。維公之澤。我人實受。<끝>

 

嘉善大夫行杆城郡守崔岦  撰文
通訓大夫行歙谷縣令韓濩  書丹
資憲大夫 兵曹判書盧稷  篆額


萬曆三十二年三月 日建(1604년(선조 37년)


追記
定獻公原碑世稱三絶而年久磨泐字不能辨裕元以拓本舊字摹勒上石是我先考文貞公遺志也在昔定獻公表石字

先考改樹之原碑 之役詔小子而小子未遑者十有館年迺於甲子恭遵先訓豎新石於舊碑之傍凡我華山之鄕耕樵之徒孰不仰我家遺蹟而必敬之也 十世孫崇政大夫行禮曹判書兼弘文舘提學原任 奎章閣直提學裕元謹識。<끝>

 

 

[신도비]

 

↑구 신도비

 

↑신 신도비

 

옮긴이 : 野村 李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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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비세울때 전해오는 일화]

 

박 장군(朴將軍)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선생이 부친 정헌공(定獻公 이몽량(李夢亮)의 신도비(神道碑)를 세울 적에, 묘 아래에 있는 사람 백여 명을 모아 밥을 먹이려고 잠시 물러난 사이에 산 위에서 고함치기를, “비가 저절로 섰다.” 하였다.

 

선생이 크게 놀라고 이상하게 여겨 물었으나 모두 알지 못하였다. 박 장군이란 자가 체부 군관(體府軍官)으로서 모시고 와 있었는데, 고하기를, “많은 인력을 쓸 필요가 없습니다. 조금 전에 저 혼자서 세웠습니다.” 하였다.

 

선생이 꾸짖어 말하기를, “네 힘을 믿는 것은 좋으나, 존경하는 체모를 알지 못한 것이다.” 하고, 곤장 3대를 쳤다. 이 이야기가 집안에 전해 온다.

 

[출전] : 임하필기(林下筆記) 제31권 <순일편(旬一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