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신도비명

국당 이공 신도비명(菊堂 李公 神道碑銘)

야촌(1) 2008. 1. 10. 00:16

국당공신도비명(菊堂公神道碑銘)

 

高麗僉議政丞月城府院君諡文孝菊堂李公神道碑

 

단운 민병승 찬(丹雲 閔丙承 撰/文 吏參)

1866(고종3)∼1947)

 

고려(高麗) 말기에 도학과 절의의 인물이 우뚝하여 서로 바라보이게 배출되었으니 경주 이씨(慶州李氏)에는 국당(菊堂) 이선생(李先生)의 종제 익재공(益齋公)으로 더불어 도의(道義)를 강마(講磨)하여 일찍부터 문채(文彩)있고 영걸(英傑)하여 조정에서 강직함으로 드날리었으니 사람들이 지금에 이르도록 일컫게 되었다.

 

공(公)의 휘는 천(蒨)이요, 자(字)는 군실(君實)이요, 국당(菊堂)은 그 호(號)이니 신라급량부 대인(新羅及梁部大人) 휘 알평(謁平)에서 시작 되었고 여러 대(代)를 전하여 휘 금서(金書)가 있으니 삼한공신(三韓功臣)에 참여했고, 휘 윤홍(潤弘)은 대제학(大提學)이니 벼슬이 혁혁하였다.

 

또 11대(十一代)를 내려와서 할아버지 휘는 핵(翮)이니 문하평리(門下評理)로 좌복야(左僕射)에 증직되었고. 아버지 휘 세기(世基)는 밀직부사 대제학 검교정승(密直副使大提學檢校政丞)이요, 시호는 문희(文僖)이며 어머니는 이천서씨(利川徐氏)니 예빈윤(禮賓尹) 찬(瓚)의 따님이다.

 

공(公)의 문장이 현저하고 벼슬이 추성보리공신 삼중대광첨의정승 지예문관 춘추관사 문하 시랑동평장사 월성부원군(推誠輔理功臣 三重大匡僉議政丞知藝文館 春秋館事 文下侍郞 同平章事 月城府院君)에 이르고, 시호는 문효공(文孝公)이요, 남원부 어은사(南原府 漁隱祠/현 全北 任實郡 三溪面 漁隱里 )에 배향 되었다.

 

사기(史記)를 살펴보면 공(公)이 충렬왕(忠烈王 25) 기해(己亥:1299)년에 문과(文科) 장원에 발탁되어 한림 사인(翰林舍人) 이부랑중(吏部郞中)을 지내고 충숙왕(忠肅王) 신유(辛酉 : 1321)년에 우사보(右思補)가 되었는데 이때에 왕(王)에게 고이는 사람 이인길(李仁吉)이 그 첩(妾)의 아비를 랑장(郞將)을 시키려 하자 직접 서명하지 않으니 인길(仁吉)이 왕(王)에게 참소하여 공(公)을 곤장 때리고 해도(海島)로 유배하니 정직한 소문이 세상에 들리었다.

 

충혜왕(忠惠王) 4년(四年 : 1343)에 첨의상의(僉議商議)가 되고 5년(五年) 3월(三月)에 원나라에 가서 교사(郊赦)를 축하하고 6월(六月)에 서연(書筵)에 들어갔다.

 

공(公)이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가 되어 익재(益齋)와 채하중(蔡河中). 한종유(韓宗愈). 박충좌(朴忠佐)로 더불어 날을 바꿔가며 왕(王)을 뫼시고 글을 읽었고 10월(十月)에 정당문학(政堂文學)이 되었다.

충목왕(忠穆王) 을유(乙酉 : 1345)년에 참리가 되었으니 이것이 공(公)의 처음부터 끝까지의 약력이다.

 

일찍이 세 아우와 여러 종항(宗行)으로 더불어 같은 마을에 살았고 연달아 장원급제에 올라 한 문중이 빛이 나니 사람들이 평장리(平章里)와 한림촌(翰林村)으로 불렀다.

 

민묵헌(閔默軒) 지(漬)의 시에 이르되,『빛나는 꽃 봉우리는 세집의 다섯 장원이니 사람들이 말하기를 모두 적선(謫仙) 이태백(李台白)의 재주라 한다』하였고 이도은(李陶隱) 숭인(崇仁)은 세과(世科)라고 했으니 대저 동암(東菴) 문정공(文定公) 진(瑱)과 송암(松巖) 문희공(文僖公) 세기(世基)와 내서사인(內書舍人) 단(槫)과 익재(益齋) 문충공(文忠公) 제현(齊賢)과 및 공(公)이 서로 이어서 장원한 까닭이다.

 

공(公)의 제 3자(三子)인 달충(達衷)이 사마시(司馬試)에 장원하여 축하하는 손님이 가득히 찾아왔는데 백반(白飯)을 장만하니 당시에 열반회(熱飯會)라고 칭하였으니 공의 청백하고 검소함이 대개 이와 같았다.

 

충정왕(忠定王) 원년(元年) 기축(己丑 : 1349)年 7월(七月) 계묘(癸卯)에 돌아가셨다.

묘소(墓所)는 파주 교하군 북리산(坡州交河郡北里山)에 있으니 지금의 파주시 아동 백금(坡州市 阿衕 佰今)의 자좌(子坐)이니 삼부인(三夫人)을 합부(合祔)했다.

 

4남(四男)을 두었으니 담양 설씨(潭陽薛氏)는 경중(敬中)을 낳아 대광중서 월성군(大匡中書月城君)이요. 배중(培中)은 전리상서(典理尙書)요.

 

죽산 박씨(竹山朴氏)는 죽성군(竹城君) 전(顓)의 따님인데 달충(達衷)을 낳아 익찬공신 삼중대광 계림군(翊贊功臣三重大匡鷄林君)이며 시호는 문정(文靖)이요.

 

순창 박씨(淳昌 朴氏)는 성중(誠中)을 낳아 개국원종공신 특진보국 검교좌의정(開國原從功臣特進輔國檢校左議政)이요. 시호는 정순(靖順)이다. 딸은 윤지표(尹之彪)에게 출가했다.

 

손자에 육(毓)은 소감(少監)이요. 민(敏)은 지군사(知郡事)요. 치(穉)는 선전(宣傳)이니 장방(長房)의 소생이요. 천서(天瑞)는 동지(同知)니 이방(二房)의 소생이요. 준(竴)은 전서(典書)요. 전 (竱)은 밀직(密直)으로 월성군(月城君)이요. 수(䇕)는 계림군(鷄林君)이요. 횡(竑)이니 3방(三房)의 소생이요.

 

원(援). 부(扶)는 다 부사(府使)요. 휴(携)는 한성판윤(漢城判尹)이니 4방(四房)의 소생이다.

 

육(毓)의 아들은 정보(廷輔)니 문과로 감사(監司)인데 청백리(淸白吏)에 들었고. 정석(廷碩)은 부령(副令)이요. 정견(廷堅)은 밀직(密直)으로 월성군(月城君)이요.

 

민(敏)의 아들은 정상(廷商)이요.  

전(竱)의 아들은 승적(升啇)이니 이조판서(吏曹判書)로 계림군(鷄林君)이며 시호는 공의(恭懿)이다.

 

수(䇕)의 아들은 구적(具啇)이니 계안군(鷄安君)이요. 영적(寧啇)은 참판(參判)이요. 종적(從啇)은 사정(司正)이요. 흥적(興啇)은 이조판서(吏曹判書)로 시호가 양희(襄僖)이고 영적(榮啇)은 부정(副正)이다.

 

원(援)의 아들은 현상(賢商)이니 참봉(參奉)이요. 혁손(赫孫)도 참봉(參奉)이요.

부(扶)의 아들은 원상(元商)이니 감찰(監察)이요. 종상(終商)이다.

휴(携)의 아들은 효상(孝商)이니 감찰(監察)이요. 효림(孝林)은 판관(判官)이다.

 

아! 공이 세 조정을 섬기어 직위도 높고 덕망도 중했데 윤리가 무너지는 날을 당하여 마땅히 세상에 뛰어나는 사업이 있을 것인데 이와 같이 전함이 없으니 비록 한스러우나 그러나 제현(諸賢)들이 추중하여 말 한 것을 본다면 백대(百代) 아래에서도 족히 그 풍채를 상상할 수 있다.

 

신도(神道)에 오히려 현각(顯刻)이 없더니 후손 선(善). 종원(鐘元)이 가장(家狀)과 방손(傍孫)인 정승 유원(裕元)이 지은 전기(傳記)를 싸가지고 와서 병승(丙承)에게 주며 명문(銘文)을 청하니 내가 어찌 그 글을 쓸 사람이 되리요. 

그러나 공(公)의 평생에 대절(大節)을 의논한다면 우뚝하여 중류(中流)에 서있는 지주(砥株)와 같아서 일을 만나매 말을 다하여 험란하고 평이함을 가리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절개를 온전히 하였으니 덕이 후하면 흐르는 빛이 무궁함은 필연적인 이치이다.

 

후손이 번창하여 현달한 벼슬과 훌륭한 사람이 전후에 서로 이어지게 되었으니 비록 곽분양(郭汾陽)과 중산(中山)이라도 더 하지 못할 것이다. 비록 아름다워도 아름다운 척 하지 않았으니 하늘이 정하여 줌을 알 수가 있다. 성대하고 빛나도다 마땅히 사기에 기록될 것이다.

 

명(銘)에 이르기를

높고 높은 선생(先生)이시여, 고려(高麗)의 충신(忠臣)이네,

임금 보좌하기로 스스로 임무를 삼았으니, 나라를 위하여 몸을 허락하였네,

때로는 칼과 창을 더하여도, 그 뜻을 빼앗지 못하였네,

공(公)께서 소인(小人)을 배척하였으니, 군자(君子)의 굳센 의리이네,

소인이 참소 하였으니, 몇 해나 바닷가에서 병들었던가,

곤액에 처하여도 도(道)는 형통하였으니, 실지의 일을 구함 이었네,

대대로 왕명(王命)을 맡았으니, 꽃 같고 숲 같은 문장(文章)이네,

경연(經筵)에서 글을 강론하여, 임금의 마음 열어주었네,

믿부다. 중산보(仲山甫)여, 직책(職責)에 부지런하여 궐한 적이 없네,

아들같이 백성에게 사랑이 있고, 왕명(王命)을 전대(專對)하는 이 끈기지 않았네,

크고 작은 그릇이 있으나, 재주와 영리함은 기뻐하지 않았네,

겉과 속이 완전하고 좋았으니, 정성이 말보다 앞에 있었네,

무거운 덕망을 업고 남의 잘못을 용서하니, 마음이 이치에 합하려 하였네,

퇴패한 풍속을 진흥시키니, 그 처음을 생각하였네,

오직 공(公)의 지기(志氣)는, 풍뢰(風雷)와 같은 조화가 회포에 들어왔네,

만일 그 장점을 시험했으면, 음양(陰陽)의 닫고 열림 이루었으리라,

화평한 군자(君子)여, 하늘의 많은 부록을 받았네,

백천명(百千名)의 후손(後孫)이여, 만년(萬年)을 지내며 번창하리라,

일편단심(一片丹心)으로 나라를 붙잡으니, 빛나기 삼태성(三台星)과 같으네,

덕이 혹시 현달하지 않을가, 그 묘문(墓文)에 표시하노라.

 

선생(先生)이 돌아간 지 578년(五百七十八年)

병인(丙寅 : 1926)년 4월(四月) 하순(下旬)에 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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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高麗僉議政丞月城府院君諡文孝菊堂李公神道碑

 
丹雲 閔丙承 撰


高麗季世道學節義之磊落相望若月城氏則有菊堂先生李公與其從父弟益齋公講道勸義早自蜚英揚廷侃侃人到于今稱之公諱蒨字君實菊堂其號也胄于新羅沙梁部大人諱謁平屢傳而有諱金書叅三韓功臣諱潤弘大提學圭組奕業又十一傳而大父諱翮門下評理贈尙書左僕射考諱世基大提學檢校政丞諡文僖妣利川徐氏禮賓尹瓚女公以文章著顯官至推誠輔理功臣三重大匡僉議政丞知藝文館春秋館事門下侍郞同平章事諡文孝享南原漁隱祠按史記公於忠烈己亥擢文科壯元歷翰林舍人吏部郞中忠肅辛酉爲右思輔時嬖人李仁吉擬其妾父卽將公不署告身仁吉訢王杖公流海島直聲聞于世忠惠四年爲僉議評理商議五年二月如元賀郊赦六月置書筵公判密直事與益齋及蔡河中韓宗愈朴忠輔輪日侍讀十月爲政堂文學忠穆乙酉爲參理此乃公始卒大致也嘗與三弟羣從同巷居連登巍捷一門燀爀人稱以平章里翰林村云閔黙軒漬有詩曰華岳三家五榜魁人言皆是謫仙才李陶隱崇仁則詡以世科蓋以東菴文定公瑱松巖文僖公世基內書舍人榑益齋文忠公齋賢曁公相繼壯元故也忠定元年己丑七月某日卒墓在交河郡北里山今隷坡州衙衕陌金負子之原三夫人祔焉擧四男潭陽薜氏生敬中大匡中書月城君培中典理尙書竹山朴氏竹城君顓女生達衷翊贊功臣三重大匡鷄林君諡文靖淳昌朴氏生誠中開國原從功臣特進輔國檢校左議政諡靖順女適海平君尹之彪孫男毓小監敏知郡事穉宣傳長房出天瑞同知二房出竴典書竱密直月城君䇕鷄林君竑三房出援扶皆府使携判漢城尹四房出毓子廷俌文監司淸白吏廷碩副令廷堅密直月城君敏子廷商生員廷明穉子聖佑進士天瑞子鶴齡郡守竴子允商府使竱子升商吏判諡恭懿䇕子具商鷄安君寧商參判從商司正興商史判諡襄僖榮商副正援子賢商參奉赫孫參奉扶子元商監察終商携子孝商監察孝林判官公之後孫最著者玄孫晳縣監栽文禮判蓍御將五代孫克靖兵使贈兵判月城府院君龜瑞縣監六代孫堪大司諫享漁隱祠七代孫擎柱縣監享平川祠守一副元帥諡忠武鷄林府院君良國都事不就大邦贈左承旨八代孫宕贈領相鰲山府院君潤參知壬辰殉節贈吏參永琛參議壬辰殉節宏甲子扈駕護軍夢台郡守壬辰殉節瀷吏曹正郎浣武右相謚貞翼光庭縣監淸白吏九代孫廷馠僉樞有學行廷馣文知樞贈左相月川府院君諡忠穆享延安忠烈祠廷馨吏判享春川文巖書院廷馚洗馬廷馧佐郞廷馦吏參介立逸縣監享榮川義山祠寬掌樂正仁夏揔戎使惟彦翊贊惟澤郡守惟泰逸參判諡文憲享錦山柳谷書院惟謙縣監十代孫忔文判書贈領相諡忠章享漁隱祠烶參奉十一代孫慶彬翊贊壽翼郡守贈吏參淸白吏允竨以孝贈佐郞重協吏參重述文承旨端章文承旨十二代孫靖武參判始興君煦文監司淸白吏宏文監司宖文監司玗武統制泰和文制書諡榮敏十三代以下則彦基縣監贈吏參聖龍文判書諡惠靖衡萬文承旨福潤文校理晳武捕將容象武判書顯稷武判書御將鶴榮武捕將其餘不盡錄噫公歷事三朝位高望重當彝倫攸斁之日宐其不世之樹立而若是乎無傳雖若可恨然卽諸賢所嘗推讓而言之百歲之下亦足以想見其風采矣神道尙闕顯刻耳孫鍾元䝴家狀與旁孫李相國裕元所著傳記授丙承請銘文余其不朽人者哉然尙論千載公之風栽屹然若中流砥柱遇事敢言不擇險易始終完節而德厚流光必然之理也孫枝昌熾達官聞人前後相望福履之盛雖汾陽中山未有過也雖休不休天定可知郁郁乎宐其載彤史也夫銘曰 

矯矯先生勝國藎臣輔弼自任爲主許身時袵金革不奪其志公斥壬人君子剛義萋斐成錦幾年瘴海處困而亨以求實事世掌絲綸誥花詞林講筵橫經啓沃王心允矣山甫衮職無闕子稱遺愛專對不絶器有洪纖不喜才儇表裏完好誠在言先負重含汚心欲圖理頹俗振興寤言其始惟公志氣風雷入懷若試厥長陰闔陽開愷悌君子受天多祉百千斯男昌阜萬禩丹心扶國炳若三辰德或不顯表厥墓文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