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촌공 이대건 신도비명 병서(梧村公李大建神道碑名竝書)
◇이대건『李大建, 1550년(명종 5)~1574년(선조 7)』
◇신도비 건립연대 : 1658년(효종 9년)
◇유형/재질 : 비문/화강암 돌
◇문화재지정 : 비지정
◇크기 : 높이 250Cm, 너비 90Cm
◇소재지 : 충청북도 진천군 초평면 용정리 21~57
◇서체 : 해서(楷書)
◇찬자/서자/각자 : 최립(崔笠) / 이경휘(李慶徽) / 이정영(李正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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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1658년(효종 9)에 세워진 이대건(李大建)의 신도비이다. 조선시대의 문인이자 학자인 최립(1539~1612)이 비문을 짓고, 손자인 이경휘『李慶徽, 1617년(광해 9) ~ 1669년(현종 10)』가 썼다. 전서·주서에 뛰어났던 이정영(李正英, 1616~1686)이 전서(篆書)하였다.
이대건『1550년(명종 5)~1574년(선조 7)』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여립(汝立), 호는 오촌(梧村), 원(黿)의 증손이다. 고려 말의 유명한 학자인 문충공(文忠公)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의 후손으로 선조 때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동료 간에 추앙을 받던 중 25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아버지 이경윤(李憬胤)은 좌승지에 증직되었다. 어머니 원주이씨(原州李氏)는 병절교위 이은(李垠)의 딸로, 1550년(명종 5) 제천에서 이대건을 낳았다. 이대건은 어려서부터 청수하고 명민하며 남달리 빼어났다.
아버지 이경윤은 활쏘기와 말 타기에 전념하고 있었으므로 청주(淸州)의 종숙부 이징사(李徵士)에게 가서 가만히 세 아들을 부탁했는데, 이대건의 나이 15살 때였다. 이징사는 그의 기운이 호탕하면서도 뜻은 순수한 것을 보고 기꺼이 데려다 교육을 시켰다.
이대건은 형인 군수 이대수(李大遂)보다 3살 아래였는데, 마치 엄한 아버지를 모시듯 하였고, 동생 이대적(李大迪)이 공부가 늦은 것을 걱정하여 마음을 다해 우애하고 가르쳐 함께 생원이 되었다.
일찍 어머니를 잃는 아픔을 겪었으나 추후에 상복을 입는 정성을 행하지 못해 기일이 올 때마다 재계하고 지나친 예를 행했다. 이징사에게는 부모와 스승과 임금에 대한 의리를 다해 모셨다.
부부 사이에는 부부유별의 도리를 정중하게 지켰으며, 뜻을 같이하는 친구들은 전염병에 걸렸더라도 기어이 돕고 살펴보고, 서로 평소 익힌 것은 꼭 실행으로 옮겼다. 1610년(광해군 2)에 진천(鎭川)의 동쪽 초평(草坪) 서향 언덕에 영구히 장사 지냈다.
비문은 1609년(광해군 1)에 지어졌고, 그로부터 50년이 지난 뒤 1658년(효종 9)에야 비로소 비석에 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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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국 증 의정부 좌찬성 성균진사 오촌공 이대건 신도비명 병서
[朝鮮國 贈 議政府 左贊成 成均進士 梧村公 李大建 神道碑銘 幷序]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최립(崔岦)은 글을 짓고
손자 통훈대부 행 이조정랑 지제교 겸 세자시강원문학 교서관교리 한학교수 이경휘(李慶徽)는 글씨를 쓰고
통정대부 승정원좌승지 지제교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관 이정영(李正英)은 전서(篆書)를 쓰다.
공의 휘(諱)는 대건(大建)이요. 자(字)는 여립(汝立)이고 경주이씨다. 공(公)의 조상에 이인(異人)이 있어, 시조(始祖)인 알평(謁平) 공이 표암(瓠巖)에서 태어나 신라의 개국을 주도적으로 도와 대대로 이름난 가문(家門)을 이루었다.
고려 말에 문하시중(門下侍中) 문충공(文忠公) 제현(齊賢)공이 덕업과 문장으로 천하에 이름을 날렸는데, 지금에 이르도록 사람들은 익재(益齋) 선생이라 부른다. 공의 10대조가 된다.
조선(朝鮮)에 들어와 六대조 윤인(尹仁)공이 관찰사를 지냈고, 고조(高祖) 공린(公麟)공은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현령(縣令)에 이르렀고, 증조(曾祖)인 원(李黿)은 예조좌랑을 지냈으며 호는 재사당(再思堂)이다.
일찌기 김한훤(金寒暄 : 김굉필)공과 함께 점필재(佔畢齋 : 김종직)의 문하에서 경학(經學)의 연구에 힘을 썼으며,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다. 무오사화(戊午史禍 1498 연산 5)때에 김탁영(金濯纓 : 김일손)공과 같이 억울한 죄명을 입게되어 갑자년(1504연산 10)의 옥사때 원통한 죽엄을 당했다. 그후 중종 원년(1505)에 죄가 설원(雪冤)되어, 도승지(都承旨)의 추증(追贈)을 받았다.
남추강(南秋江 : 남효온)공의 『사우록(師友錄)』에 그 행적이 뚜렷이 드러나 있다.
조부(祖父) 발(渤)은 좌통례(左通禮)에 추증(追贈)되고, 조부 이하는 지금 관찰사로 있는 공의 맏 아들이 귀하게 되어 추은(推恩)을 입은 것이다.
발(渤)은 원(黿)의 동생 생원공(生員公) 타(鼉)에게 출계(出系)했다. 집안이 화를 당한 끝에 형제들이 각각 지방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제천(提川)엔 생원공 타(鼉)부터 은거하여 살게 되었는데, 기개와 절개로도 유명했다.
아버지 경윤(憬胤) 공은 이조판서(吏曺判書)에 증직 되었고, 어머니 원주이씨(原州李氏)는 병절교위 이은(李垠)의 딸로, 가정 경술년(1550, 명종 5)에 제천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났고 명민하여, 의견이 크고 넓어서 어른들을 놀라게 하였다.
공부 할때 한번 가르쳐 준 것은 몇번 읽지도 않고 바로 암기 하였으니 뛰어난 재주다.
나이 六세나 七세의 소년 시절에도 아버지와 형의 훈계하는 말을 들으면 그때마다 마음속에 담아 두었다가 잊지않고 실천 하였다.
일가집이 주천현(酒泉縣 : 평창)에 있었는데, 공의 나이 八살 때에 어른을 따라서 그곳에 간 일이 있었다.
여러 어른들이 있는 자리에서 글을 지었는데, 주천무주견문이(酒泉無酒見聞異)다.
동네 이름이 술이 샘솟듯 한다는데 술이 왜 안보이느냐는 뜻이다.
이 모습을 본, 여러 식자들이 그 재치를 기이하게 여겼다.
아버지 승지공은 날마다 활쏘기와 말 달리기 등의 무예를 즐기고 있었음으로 행여 아들이 글 공부는 힘쓰지 아니하고 본인처럼 무예를 좋아할까 두려워 하여 청주(淸州)의 종숙부 징사[徵士=학문과 덕행이 높아 임금이 부르나 나아가 벼슬을 하지 않은 은사(隱士)] 휘(諱) 잠(潛)공을 찾아가 세 아들의 학업을 부탁했다.
그중 공은 둘째 아들로 나이는 15살이었다. 징사공은 삼형제의 인상을 살피어 보드니 공의 기운이 호탕하면서도 뜻은 순수한 것을 보고 삼형제를 반갑게 맞이하며 교육을 가르킬 것을 허락 했다.
우선 섬계서당(剡溪書堂)에 거처를 하게하고 거기서 공부를 하도록 하였는데, 자기 아들을 사랑하듯 하였다. 봄과 여름에는 자사(子史 : 子類 와 史類) 공부를 시키고 가을과 겨울에는 경전(經傳) 공부를 시켰다. 공은 놀기를 좋아하여 별로 공부에 힘쓰는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날이 가고 달이 갈수록 공부는 훌륭하게 진전 있어, 몇년되지 않아서 학문의 이치를 깊게 깨닫고 덕행도 뛰어났다. 이때 섬계서당에서 공부하는 학자(學者 : 학생)들은 항상 수십명이 함께 있었는데 누구도 공을 앞서지 못했다.
무진년(1568, 선조 1)에 증광향시(增廣鄕試)에서 양장(兩場 : 생원, 진사)에 모두 장원(狀元) 하였지 마는 대과에는 합격하지 못했다. 이듬해 목사 유중영(柳仲郢)이 고을의 선비들을 불러 재주를 겨루게 했는데, 공이 수석을 차지했다.
재상 서애(西厓: 유성룡)가 수찬관이 되어 부모님을 뵈러 가던 중에 청주(淸州)에 들렸는데, 공의 글을 보고 뛰어난 재주를 칭찬 하면서 앞으로 나라의 뛰어난 큰 선비가 될 바탕을 가지고 있다고 기대했다. 이때 부터 온 도(道)에 공의 명성이 자자하게 되었다.
경오년(1570, 선조 3)의 일이다. 수암(守庵) 박지화(朴枝華)공이 청연(淸淵) 오지촌(烏之村)에 살고 있을때 공이 찾아 가서 논어에 대해 질문했다. 그동안 공부를 하면서 모르는 것을 그대로 두지 않고 의문이 가는곳 모두를 잘 케내어 조리있게 질문하니 세밀하게 강론(講論)을 마친 수암공이 입이 마르도록 탄복 하면서 말하기를『참으로 뛰어난 수재(秀才)로다,
벌써부터 이렇게 까지 깊게 연구 하였으니 앞으로의 깊이를 어떻게 헤아릴 수가 있겠는가 )』하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공이 문리를 얻은 후 부터는 위기지학(爲己之學)에 힘을 썼으며 논어를 읽을 때에는 거기에 담겨진 깊은 뜻을 찾아 내기에 온 정력을 기울였다.
또 뜻이 이상한 곳이 있으면 바로 잡기에 애섰으니 날마다 빠르게 깊은 이치를 깨닳았다. 언제나 논어를 옆에 놓고 연구를 하였으며 깊은 뜻을 께달을 때에는 팔 다리를 움직이면서 춤을추는 기쁨에 잠기기도 하였다. 그 뒤 부모의 명을 어기지 못하여 과거 공부를 계속 하였으나 공이 가지고 있는 마음은 변하지 않고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
임신년(1572, 선조 5) 여름 과장(課場)이 있을때다. 유생(儒生)들이 사방에서 많이 모여, 글을 지었는데, 공이 매번 뛰어난 글을 짓자 동료들이 시기하여 쑥덕 거리니, 공이 저런 사람들과 같이 글을 짓는것은 도리어 수치스러운 일이라 하여 먼저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공이 끝내 수석을 차지했다.
또 계유년(1573, 선조 6)에는 사마진사시(司馬進士試)에 장원급제하여 성균관에서 공부하게 되자, 사방의 선비들이 공의 뛰어난 재주와 선비다운 행동을 흠모하여 앞을 다투어 공을 사귀고저 하였다.
이렇게 되니 조정의 명망 있는 사대부(士大夫)들 까지도 공의 재주를 사랑하고 한편으론 공경하며 언제나 예로서 대하였다. 어느날 공이 교외에 나가 얼음을 밟으면서 쓴 이빙시(履氷詩) 절구(絶句) 한 수를 지었는데 이 글만 보더라도 공의 학문이 이미 경(敬)과 신(愼)을 신조로 하고 있음을 알수있다.
어느 날 과시(課試 : 정기시험)에서『제외양중잠(制外養中箴 : 밖을 통제하고 안을 기르는 잠언)』을 지어 二등을 하였는데, 제주(祭酒) 허초당(許草堂 : 허엽)이 그의 논리가 특별히 깊이 있음을 사랑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자주 이야기하며 특별히 예우하고 소중히 대했다.
갑술년(1574, 선조 7) 정월에 청주로 돌아와 마침 병환이 생기어서 섬계서당에 누워 있을때다.
공과 항상 가깝게 지내던 친한 친구가 별세 하였다는 부고를 받자, 병중에 누워 있으면서도 평소 친하게 지내던 정리를 잊지못해 직접 제문(祭文)을 지어서 보냈다.
공은 이렇게 까지 우정을 잊지않는 마음씨였다. 공의 병환은 점점 악화되어서 그해 3월 20일에 별세 하였으니 나이 겨우 25세의 아까운 나이였다. 공이 작고하자 공의 형제들은 부모를 잃은것 같았고 청주 북쪽 목령산(鶩嶺山) 아래에 안치했다가 한달이 지난뒤에 진천군 초평면 두타산 아래에 장사를 지냈다.
공의 일생을 살펴보면 뜻 한바도 컸고, 행한 바도 많았다. 그러나 뜻한바를 모두 이루지 못하고 일찍 돌아갔으니 한스럽기 그지없다. 그러나 생전에 하려든 일은 이루지 못한것이 한두 가지가 있을지 모르지마는 십의 팔구는 모두 이루었다. 이것은 여러 선비들의 말을 듣고 글로 본바에 의하여 분명한 사실이다.
어버이를 섬길때에 집이 가난하고 공이 벼슬길에 있었기에 집에있지 못하고 객지에 있었다. 항상 어버이 옆에서 보양하지 못하는 것을 한탄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버이를 공양할 자료를 수시로 마련해서 드리었다.
또 의복이나 음식이 생기면 별다른 것이 아니 더라도 어버이의 손을 거친 후에 의복을 입었고 음식도 아버지가 잡수신 후에 먹었다. 이렇게 어버이를 공경하는 마음이 두터웠다. 형님인 군수공 대수(大遂)보다 세 살 아래인데, 마치 엄한 어버이를 모시듯 하였고, 동생 대적(大迪)이 공부가 늦은 것을 걱정하여 마음을 다해 우애하고 가르쳐 계유년(1573 선조 6)에 함께 진사시(進士試)에 급제 하였다.
十二세 되던해 어머니 원주이씨(原州李氏)의 상을 당하였다. 소년시절이었기에 三년동안 정성껏 상제 노릇을 못한것을 마음속 깊이 슬프게 여기었다. 그러기에 제사날이 돌아오면 제수를 정성껏 장만하여 예절 바르게 제사를 올리었다. 공을 아들처럼 공부를 가르쳐준 징사(徵士 : 諱 潛)공을 지성껏 섬기었다. 군사부(君師父)일체의 이념을 잘 지키어 부모에게 효성을 다하듯 하였다.
부부간에 한 일을 보면 부부유별(夫婦有別)의 예절을 엄격하게 지키었다.
병환으로 누워 있을 때에도 二十리 거리에 살고 있었지 마는 찾아보지 않고 올곧게 끝마쳤다.
이렇게 까지 일평생을 공명정대(公明正大)한 마음으로 예절에 맞는 생활을 하였다.
친구간에 지낸일을 보면 우정(友情)이 매우 극진 하였다. 친구 중에서 어려운 일이 일어나면 힘껏 도와 주었고. 친한 친구라면 전염병으로 누워 있더라도 조금도 구애받지 아니하고 문병을 하였다.
뜻이 맞은 선비를 만나면 학문을 강론 하기에 시간가는줄을 모르기도 하였다. 또 인재 양성을 위해서도 노력을 하였다. 이런 일들이 공으로서는 예사롭게 행한 일이였지마는 다른 사람들의 안목으로 볼 때에는 누구던지 그렇게 할수없는 훌륭한일들이었다.
공의 일상생활은 모두가 모범이 될 일뿐이었다. 이렇게 까지 오륜(五倫)의 도리를 실천하였기 공이 별세 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경향각지(京鄕各地)에서 장사에 필요한 물건을 주선하여 주었기 장례를 편안하게 지냈다.
그밖에 먼 곳에있는 사람은 제수를 작만하여 오기도 하고 만장(輓章)을 지어서 가지고 오는 선비들이 헤아릴수 없이 많았다. 공의 배위는 안동김씨(安東金氏)다. 부인은 상락공(上洛公) 김방경(金方慶)의 후손이고, 부사 김직수(金直燾)의 따님이다.
二남을 두었으니 장남 시발(時發)은 기축년(1589 선조 22)에 문과에 급제하여 현재 평안도 관찰사이고, 차남 시득(時得)은 유복자로 태어나 병오년(1606 선조 39)에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현재 현감(縣監)으로 있다.
장남 관찰사공의 배위는 여흥민씨(驪興閔氏)니, 진사 경남(敬男)공의 따님으로 설하에 1남 3녀를 두었으니, 큰 딸은 이창운(李昌運)에게 출가하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후실에 三남을 두었으니 모두 어리다.
현감공의 배위는 문화유씨(文化柳氏)니 사과(司果) 희연(柳希淵)공의 따님으로 설하에 一남 二녀를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신축년(1601 선조34)에 공은 전례에 의해 호조참판으로 증직되었고, 을사년(1605 선조38)에는 이조판서(吏曺判書)로 가증(加贈)이 더해졌다.
표암(瓢巖)에 상서(祥瑞)로운 기운 내려와 신라가 시작되고
익재공은 고려에서 쇠퇴하여 가는 유학(儒學)을 중흥(中興)시켰도다.
1천 5백 년의 역사속에 경주이씨(慶州李氏)와 같이 면면하게 이어받은 성(性)이 어디에 있으리오.
조선시대(朝鮮時代)에 들어와 혁혁한 이름을 날린분이 있으니 재사당(再思堂)공의 절의(節義)로다.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원수로다 하느님도 무심한지 천지가 아득 하도다.
재사당공은 원통하게 옥사 하였으니 그 훌륭한 사적 만민(萬民)이 칭송하네.
공은 일찌기 섬계서당(剡溪書堂)에서 공부할 때, 수사학(洙泗學)에 열중 하였도다.
논어(論語)에 성스런 스승 여기 있다고 일평생 연구 하였네.
옛 사람을 벗 삼으니 어느 곳에 종사하겠는가 .
공은 독서를 좋아하였기 경전과 백가서 까지도 능통 하였도다.
어버이는 과거 공부를 하라고 명하였지만 공이 결심한 바는 어찌 변하리요.
三十세도 다 살지 못하고 二十四세를 일기로 아깝게도 별세 하였네.
꽃만 활짝 피워 놓고 열매를 맺지 못하였으니 어느누가 애석하다 아니 하리오.
천지의 이치가 어찌 무심할수가 있으리오!? 아드님 형제분이 태어났도다.
선대(先代)부터 내려오는 훌륭한 학문을 이어 받아서 공부에도 무예(武藝)에도
다른 사람보다 뛰어났으니 문무겸전(文武兼全) 그대로라.
큰 바탕을 타고나 관찰사(觀察使) 되어 큰 지역 다스리고 온갖 직임 훌륭히 수행하니
비록 유명(幽明)을 달리 하였건만 훌륭하게 공의 뒷길을 받들 귀한 아들 형제로다.
정이품(正二品) 이상의 벼슬을 추증(追贈) 받았으니 아드님의 귀함 이로다.
이제 묘도(墓道)를 깨끗이 하고 비석을 세우려는 큰 일을 시작 하였도다.
이는 부모님께 효도를 다하려는 정성스러움이요. 조상의 훌륭한 사적을 찬양 함이로다.
내 쓰는 이글 시원치 못한점이 많도다. 보는 분들이여!
널리 이해하여 주기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내 무슨말을 더 하리오. 공의 후손 들이여!
어질고 착한일 많이하고 학문과 덕망이 고상한 사람,
그기에 효자가 많이 나기를 바랄 뿐이다.
공(公)을 처음에는 목령 아래 장사지냈다가 나중에 다시 옮겼다.
천계 정묘년(1627, 인조 5)에 진천(鎭川)의 동쪽 초평(草坪) 서향 언덕에 영구히 장사 지냈다.
숭정 무진년(1628, 인조 6)에 부인 김씨가 사망하여 같은 언덕에 장사 지냈다.
천계 갑자년(1624)에 좌찬성으로 증직이 더해졌는데, 진무공신으로 추은(推恩)을 받았기 때문이다.
비문은 만력 기유년(1609, 광해군 1)에 지어졌고, 그로부터 50년이 지난 뒤 무술년(1658, 효종 9) 에야 비로소 비석에 새겼다.
숭정 무술년 7월 일 세움.
옮긴이 : 야촌 이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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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贈吏曹判書成均進士李公神道碑銘。
有明朝鮮國 贈資憲大夫吏曺判書兼知義禁府事成均進士李公袖道碑銘幷序。
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 崔岦 撰。
孫男通訓大夫行吏曺正郞知製敎兼 世子侍講院文學校書館校理漢學敎授李慶徽書。
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知製 敎兼 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李正英篆。
公諱大建。字汝立。慶之李氏。自其先異人名謁平。生于瓠巖下。實佐開國新羅。而世遂爲聞家。及高麗季。有門下侍中文忠公諱齊賢。以德業文章。顯於天下。至今人稱益齋先生。於公十世祖也。入本 朝而六世祖諱尹仁。觀察使。高祖諱公麟。筮武仕至縣令。曾祖諱龜黿。禮曺佐郞。號再思堂。與金寒暄一時遊於佔畢齋之門。戊午史禍起。與金濯纓同得罪。死於甲子之獄。旣經湔雪。追贈都承旨。南秋江師友錄。著其行。祖諱渤。贈左通禮。自此而下。用公之冑今觀察使貴。推恩也。左通禮後於再思公之弟生員諱黽。家禍之餘。昆季散之外莊。其家堤川。自生員始。而亦以氣節有名。考諱憬胤。贈左承旨。妣原州李氏夫人。秉節校尉垠之女。以嘉靖庚戌。生公于堤川。公自幼淸明秀異。及旣省。聞父兄訓說。輒入于心。未嘗忘失。族人家在酒泉故縣。公八歲造焉。屬一句云酒泉無酒見聞異。識者異其機警。左承旨公自以事弓馬。恐訓誨無方。爲之詣于淸州從叔父李微士潛許。托以三子焉。第二卽公。而時年十有五也。微士見公氣豪而志醇。樂得而敎育。處之于剡溪書堂。恣其婆娑嬉游。不甚程業。而日開月益。不數年。文與行俱進。是時剡上學子常不下數十軰。而莫之或先也。戊辰。增廣鄕試。俱占兩場。而屈於禮闈。明年。柳牧伯仲郢聚一州士子較藝。而公作居首。西厓相公方爲修撰省親。贊其奬美。期以國士。由是籍甚一道。庚午間。朴守菴枝華寓于淸淵之烏村。公就質論語。善疑善問。不知不措。守庵稱之不容口曰。秀才。他日其進未可量也。公自知讀書以來。已有志於古人所謂爲己之學。及讀論語。極意玩繹。中涵外揉。自覺溢新。不復輟此書。殆所謂手舞足蹈之者。自後雖以親命不得廢擧業。而志不爲所奪也。壬申。都會夏課。公之每作出倫。同進有忌言。公耻與爭之先去。然公竟首焉。亦由以擧中癸酉進士試。旣遊大學。四方之士求與之友。如恐或後。蓋不獨艶慕。而道誼所先。信從者衆也。朝之賢士大夫。稍亦延禮之。嘗出郊履氷。有一絶句。足驗公之學已主於敬云。一日課試以制外養中箴。公作在第二。而祭酒許草堂愛其造理特深。數擧以語人。殊加禮重焉。甲戌正月。歸淸鄕。感疾于溪堂。病中聞所愛友訃。自力作祭文送之。疾遂革。至三月念日不起。得年方二十五。公之兄弟若親朋。以公之喪殯于州北鶩嶺下。踰月而葬于是山。觀志觀行。卽公一生。什不能二三。而表表在人耳目。如爲親家貧甚。其在違遠。常使一力代己負米。幷所得美味。一衣一服。不經親體。則不忍先加之己。於兄郡守公大遂。生少三歲。而事之如嚴父。悶弟大迪之晩學。盡心友敎。與之同升上舍。痛早哭所恃。而未遂追服之悃。每諱日將至。齋素過禮。事徵士公期盡於在三如一之義。配匹之際。謹摯別之道。病且絶日。相去二十里地。不要相見。以正其終。同志之友。有急必周。雖染疫必救視。相與素講必行。此皆公之尋常。而人所不能也。公之歿也。襄事諸具。皆京外朋知所經紀。而鷄黍誄挽。多自遠方來者。公配安東金氏夫人。上洛公方慶之後。副司直燾之女。生二男。長曰時發。己丑文科。今平安道觀察使。次曰時得。遺腹而生。丙午武科。縣監。觀察娶進士驪與閔敬男女。生一男三女。女適李昌運。餘及男幼。側出三男皆幼。縣監娶司果文化柳希淵女。生一男二女。皆幼。辛丑。例 贈公戶曺參判。乙巳。加贈吏曺判書。銘曰。
瓠巖降祥。羅運伊始。益齋于麗。文衰爲起。千若五百。孰綿如李。有聳本朝。再思名義。讐以史禍。范乎天意。曰篤厥緖。咸望進士。發學剡溪。源尋洙泗。一部論語。聖師在是。昔者吾友。何所從事。時俗之見。秪以世異。質美好篤。曷程其至。屈從親命。安有奪志。三十庶幾。乃訖卄四。秀而不實。慟誰宜爲。理有可必。遺以二子。文故家傳。武亦尙類。兼資而大。惟觀察使。處得地雄。汔愜歷試。幽明之奉。榮孝而至。賚有正卿。償塞則未。終古松楸。易名表隧。要孝之終。必稱先懿。我銘不爽。來者所眡。悠悠何勸。仁人孝子。公始葬于鶩嶺下後再遷天啓丁卯永葬于鎭川治東草坪酉向之原崇禎戊辰夫人金氏卒同原而葬天啓甲子加贈左贊成以判書公振武功推恩也碑文之成在於萬曆己酉後五十年戊戌始刻石。
崇禎戊戌七月立。
↑쌍오비각(雙梧碑閣) : 충청북북 지방 유형문화재 제142
좌측비가 오촌 이대건 신도비이고 우측은 아들 벽오 이시발 신도비이다.
↑근년에 주변이 정비된 쌍오비각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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