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신도비명

망호 이주남선생 신도비명(望湖 李柱南先生神道碑銘)

야촌(1) 2008. 8. 8. 03:06

경주이씨 익재공후>청호공>혹)공의 증손 29世 주남(柱南)

 

■ 증가선대부병조참판 망호선생이공 신도비명

 

우리 원효왕(元孝王=조선 제19대 숙종을 말함) 즉위 5년인 무오에 망호선생 이공이 임금의 부름에 응하여 출사하니 당시에 조야에서 주시하며 상서로운 세상의 기린이나 봉으로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공이 이에 숙배를 마치고나서는 곧 돌아와 말하기를 " 임금이 세번째 벼슬로 불렀으니 가서 인사드림은 예다. 나에게는 백성에게 도움을 줄 방도가 없으니 숨어서 검소하게 사는 것은 분수다" 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처음 먹었던 마을대로 얽매인데 없이 경전을 연구하고 도를 즐기며 88년을 지내고 졸하였다

 

묘소는 해남 북평면 동해리의 안산 호보 위의 묘로 등진 언덕에 있으니 세칭 복호좌목(엎드려 있는 호랑이 왼쪽 눈)이라는 국형이다 풍수가들의 꺼리고 구애받는 바가 되어 아침내 고운 빗돌 하나 세우지 못했는데 근래 선비들의 의논이 함께 나오는 것에 인하여 분암의 앞에다 신도비를 세우자고 도모하자 공의 십대손 상대가 문장노의 명으로 나에게 그 명을 지으라는 책임을 지우니 어떻게 감히 당해내랴. 여러 차례 못하겠다고 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햇다.

 

그래서 삼가 살펴보니 공의 휘는 주남 자는 대숙 호는 망호였다 . 시조의 휘는 알평 계림(경주)에서 태어나 그 곳으로 관향을 삼았다.

고려 말엽에 휘 진은 시호가 문정으로 이단을 물리치는 공이 있었다. 이분이 익재선생 문충공 휘 제현을 낳으니 우리 유림의 사표가 되었다. 이 분이 운와 휘 달존을 낳으니 임해군에 봉해졌고 2대를 내려와 대언 휘 담이 조선왕조에 처음으로 벼슬하였다. 그 분의 아들이 희니 영남관찰사였으며 그의 아들은 문환으로 부제학이었으니 공에게는 7대조였다.

 

증조 할아버지 호암의 휘는 반기 학행으로 특별히 추천되어 선전관을 겸하였으나 을사사화를 보고는 온 가족을 일끌고 남쪽의 낭주에 숨어서 살았다.  할아버지 월재의 휘는 인걸 임진왜란에 의병을 일으켜 행주에서 순절하여 병조참판에 증직되었으며 금곡과 영호 두 사우에서 제향한다. 아버지 녹은의 휘는 희규 호조참의에 증직되었다. 비는 증숙부인 김해김씨인 참군 건의 딸이다

 

만력 신해(1611년)년에 공이 녹문의 옛 집에서 태어났는데 그 때 월출산에 정기가 내려오고 덕호에 신령이 달려왔다는 민요가 있었다. 공은 어린 시절부터 기우가 헌앙하고 재주와 슬기가 탁월하였다. 12세에 아버지로부터 사람되는 글인 소학을 배우면서 공은 읽어감에 따라 행하면서 하나 같이 배운 바대로 하여 반드시 몸에 익혀서 증험이 되게 하였다.

 

이어서 논어와 맹자 서경 역경 가례 예기등의 책을 읽었는데 모두 한번 눈에 들어오면 문득 외우고 외우면서 잊지 않으니 남들이 말하기를 " 이 사람은 하늘이 낳아준 뛰어난 재주이니 범인들은 따라갈 수가 없는 사람이다" 라고 하였다.

 

을해(1635)년에 녹은공의 상을 당하자 주자의 가례를 붙잡고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기묘(1639년)년에 또 어머니 김씨의 상을 당하여 너무 슬퍼하여 거의 목숨이 끊어지려다가 살아나니 보던 사람들이 효성에 감동한 원인이라고 말하였다.

 

복제가 끝나자 덕진호의 위에 띠집을 짓고 그 곳에서 거처하였다. 우암 송시열선생이 그 집에 이름하기를 망호라 하였던 탓으로 망호를 호로 삼았다.

 

정자 주자등의 성리학에 관한 저저들을 보관해두고 도학의 연원과 지류의 실마리를 연구하고 수 십년 동안 몸소 행하고 실천하니 좋아하던 사람들이 무리 지어 왔다. 그 중에는 온 가족이 옮겨와서 살게 되자 거처하던 곳이 마침내 취락이 이루어졌다. 그 당의 이름에 미루어 그 마을의 이름을 망호정이라 불렀는데 지금도 그렇게 부르고 있다.

 

또 별도로 정사를 지어 학생들에게 학문을 가르쳤으니 매 월초에 글을 외우는 규약을 두고 여러 생도들은 집의 뒤안에서 투호놀이를 하여 그 땅을 사정이라 이름하자 듣는 사람들이 몰려 들어와 그 집에서 수용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 분께서 학문에 도움을 받고 서로 간에 이로움을 주던 분으로는 오직 송우암(시열) 김문곡(수항) 남약천(구만) 이소재(이명) 등 제현과 가장 두터히 지내며 서로 오고 갔었다. 그런 때문에 그 분의 마음 쓰심은 공정하고 처세에는 신중하고 접물에는 관대하였다. 온 종일 단정히 앉아 있으며 마음이 평화롭고 순수하여 진흙으로 빚은 사람 모습과 같았다.

 

어떤 때에 말이 의리 사정의 분변에 미치면 얼음이 녹듯 강과 바다가 갈라지는 것과 같이 하여 강폭한 자라도 그 흉계를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거짓으로 말 잘 꾸며대는 자도 감히 그 간사함을 부리지 못하였다. 비록 처음에 좋아하지 않던 사람도 심복이 되어 물러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정성과 믿음이 알려져 벼슬에 추천하는 추천서가 작성되기에 이르러서는 맨 처름 참봉에 제수되고 다음에는 종묘 령에 옮겨지고 세번째는 성균사업에 징소되었으나 이점도 특별한 경우의 일이었다. 그러나 끝내 취임하지 않고 돌아와 버렸다. 뒤에 나아가 나이가 높은 탓으로 동지의 위계에 올랐다.

 

명릉(숙종) 무인(1698년)년 12월 16일에 이르러 세상을 떠나고 둘째 아들 귀로 인하여 병조참판에 증직되었다.

배는 정부인 평산신씨로 능득의 딸이며 덕이 군자의 짝이 될 만 하였다. 묘소는 합폄하다.

 

아들 다섯을 두었으니 정량은 선전관으로 공조참의에 증직되었고 정필은 가선의 위계에 올라 효자로 정려를 지었으며 정만은 통덕랑 정빈도 역시 효자로 알려져 통덕랑이었고 정하는 끝 아들이다. 딸은 첨정 이태성에게 시집갔다.

 

손자는 14인으로 세용 세완 세안 세헌 세굉은 큰 아들이 낳았고 세건은 둘째 아들이 낳았으며 세휘 세계 세용은 셋째 아들이 낳았고 세량 세윤 세언은 넷째 아들이 낳았으며 인귀 인령은 끝 아들이 낳았다. 

 

오호라! 공은 깊은 학문과 치밀한 실천에 깨끗한 지조를 지녀 당대의 명류들에게 높은 대접을 받았으며 자질을 탁마하여 임금이 그 어짐을 알고서 벼슬을 내려 불러들였다. 어진 아들과 뛰어난 손자들이 록을 받아 공양하였다.

 

벼슬에 나가기는 어렵게 여기고 물러나기는 쉽게 여기던 절개와 가득찬 인격으로도 남의 충고를 허심탄회하게 받아들이는 뜻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언제나  전전긍긍하면서 자기를 지켜 잠깐이라도 떨뜨릴까 걱정하였다. 구십의 나이가 되도록 이름을 완전히 하였고 완전한 복을 누려 티 하나 찾을 수 없는 옥곤과 빙월의 깨끗함을 유지하였다.

 

하늘이 착한 사람에게 베풀어 주는 것을 징험할 수 있고 뒷 세상의 착한 사람들 역시 권장을 받을 수 있으리라 명에 이르기를

 

아아! 선생이시어

투박한 성품에 순진한 마음。

 

어린 시절에 준마라 칭호 받고

밖에 나가면 상서로운 기린이었네。

 

먼데에 집 짓고 살자 마을이 이루어지고

단정히 앉아 흙으로 빚은 사람 같았네。

 

책상 위에는 정자와 주자의 책이요

가슴 속에는 천과 인의 사상이었네。

 

조정에서 부르는 문서 휘날리니

임금께서 절로 내리심이었네。

 

벼슬하지 않을 마음 굳기만 하여 

애초의 뜻에 즐거움이 있었네。

 

어디서 그런 뜻이 나왔을까?

익재선생의 야인 뜻에서 나왔으리라。

 

흑마(임오 : 1942년) 입하절에

서원 정종호 찬(西原 鄭宗鎬 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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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인소개]

 

●정종호(鄭宗鎬)

 

1875(고종 12)∼1954. 유학자. 본관은 서원(西原). 자는 한조(漢朝), 호는 뇌헌(磊軒). 아버지는 재설(在卨), 어머니는 재령이씨(載寧李氏)이다. 중부(仲父) 재기(在夔)는 파리장서사건(巴里長書事件)의 당사자의 한사람으로서 피체되어 옥고로 사거했다.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수성동 갖말[枝村]에서 정구(鄭逑)의 14대손으로 태어났다. 일찍이 중부 밑에서 학문을 시작하여 결혼 후에는 장인인 노상익(盧相益)과 처숙인 상직(相稷)으로부터도 배웠다.

 

파리장서사건 때는 그 본문(本文)을 지금의 칠곡군에 있는 장석영(張錫英)으로부터 대구의 윤상태(尹相泰)에게 전하는 일을 맡았었다.

 

일본경찰이 기미를 알아차리고 수배 중이어서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었으나 옷솔기 속에 감추어 전달할 수 있었으며, 그 사건으로 인하여 중부가 체포되어 모진 고문 끝에 사거한 후 그도 체포되어 6개월의 옥고를 치루었다. 이 후 망국의 시름을 안고 산중에서 학문에만 전념하다가 나와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성리학을 깊이 파고들었으며, 〈이기변(理氣辨)〉·〈대학정심장존양성찰변(大學正心章存養省察辨)〉·〈인자도(仁字圖)〉·〈온고지신론(溫故知新論)〉·〈종자론(種蔗論)〉 등을 비롯한 많은 저작이 있으며, 특히 〈격몽소편(擊蒙小編)〉은 그의 대표작으로서 높이 평가 받고 있다.

 

그가 죽자 유림장(儒林葬)이 치루어졌고, 선생(先生)으로 불리게 되었다. 저서에는 《뇌헌문집(磊軒文集)》이 있다.

 

출전 : 磊軒文集(鄭宗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