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신도비명

백사 이항복 신도비명 병서(白沙李恒福神道碑銘幷書)

야촌(1) 2009. 2. 5. 10:43

[생졸년] 이항복『李恒福, 1556년(명종 11) ~ 1618년(광해군 10)』

 

■ 유명 조선국 추충분의평난충근정량갈성효절협책호성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예

     有明 朝鮮國  推忠奮義平難忠勤貞亮竭誠效節協策扈聖功臣 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領議政 兼 領經筵

    弘 文館藝

 

문관춘추관관상감사 세자사 오성부원군 이공 신도비명 병서

文館春秋館觀象監事 世子師 鰲城府院君 李公 神道碑銘 幷序

 

상촌 신흠 찬(象村 申欽 撰)

 

선조 대왕(宣祖大王) 25년(1592년)에 일본(日本)의 추장(酋長) 수길(秀吉)이 대대적으로 군대를 일으켜 쳐들어옴으로써 경도(京都)가 함락되고 거가(車駕)가 파천하였다. 오직 이때 신하가 있어 천조(天朝)에 구원병을 요청하여 재차 종사(宗社)를 회복시켰으니, 그가 바로 백사(白沙) 이공(李公)이다.

 

폐주(廢主)가 즉위하여서는 동기(同氣)를 죽이고 자전(慈殿)을 폐하려고 꾀하자, 간신(奸臣) 이이첨(李爾瞻), 정조(鄭造) 등이 그 일을 더욱 종용함으로써 천상(天常)이 절멸되어 조선 삼천리 강토가 거의 요괴(妖怪)의 지역으로 빠지게 되었다. 오직 이때 신하가 있어 항거하여 말하고 바르게 고해서 이륜(彝倫)을 붙들어 세웠으니, 그가 바로 백사 이공이었다.

 

그래서 담론하는 이들이 말하기를『중흥(中興)의 업적은 해동(海東)에만 입혀졌을 뿐이지만, 백성의 윤기(倫紀)를 세운 것은 곧 만세의 효순(孝順)을 수립한 것이니, 이 도리는 천하에 널리 입혀질 것이다』 하였다. 공이 말 때문에 죄를 얻어 북쪽 변방에 유찬되었을 적에는 담론하는 이들이 말하기를,『공은 진실로 죽을 곳을 얻었으나, 나라는 어찌한단 말인가』 하였다. 

 

이윽고 공은 배소에서 작고하였는데, 금상(今上)이 계해년에 반정(反正)하여 공을 복관(復官)시키고 사제(賜祭)함에 이르러서는 담론하는 이들이 말하기를,『거의 잘 되어 가는구나. 나라에 교화가 있게 되었다』 하였으니, 대체로 공의 존망(存亡)과 영췌(榮悴)로써 세운(世運)의 흥상(興喪)을 점친 것이었다.

 

동양(東陽) 신흠(申欽)이 온 나라의 담론하는 이들에게서 이런 사실을 듣고 말하기를,『이것이 여정(輿情)이요 이것이 공의(公議)이니, 이것이 어찌 천명(天命)에 의해 미리 정해진 것이 아니겠는가』하였다. 그래서 그 사업과 공렬을 차례로 엮어서 신도(神道)의 빗돌에 다음과 같이 기재하는 바이다.


공의 휘는 항복(恒福)이고, 자는 자상(子常)이며, 씨족(氏族)은 계림(鷄林)에서 나왔다. 그 처음에 사량부 대인(沙梁部大人→及梁部大人의 誤記임) 알평(謁平)이란 분이 있어 신라(新羅) 시조(始祖)를 도와 종신(宗臣)이 되었는데, 그의 주손(冑孫)과 지손(支孫)이 마침내 면면히 이어져 오다가 고려(高麗)에 이르러 더욱 성해졌으니, 그 중에 드러난 이가 바로 문충공(文忠公) 이제현(李齊賢)으로, 세상에서 익재 선생(益齋先生)이라 일컫는 분이다.


본조(本朝)에 들어와서는 공조 참판(工曹參判)을 지낸 휘 연손(延孫)이 있어 이분이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숭수(崇壽)를 낳았는데, 숭수는 공에게 고조(高祖)가 된다. 증조(曾祖) 성무(成茂)는 안동 판관(安東判官)으로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고, 조(祖) 예신(禮臣)은 성균 진사(成均進士)로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추증되었다.

 

찬성공은 은덕(隱德)이 있어 일찍이 포천(抱川)에 묘역(墓域)을 가려 정하고 말하기를,『내 뒤에 반드시 이세(二世)가 연하여 현달(顯達)할 것이다』하였는데, 공의 고(考) 참찬공(參贊公)이 과연 그 예언에 부응하였다.

 

참찬공의 휘는 몽량(夢亮)인데, 삼조(三朝)를 내리섬기면서 청검(淸儉)과 충효(忠孝)로 명성이 있었고, 영의정(領議政), 시림부원군(始林府院君)에 추증되었다. 비(妣)는 전주 최씨(全州崔氏)로 결성 현감(結成縣監) 최륜(崔崙)의 딸이며 눌헌(訥軒) 이공 사균(李公思鈞)의 외손(外孫)인데, 정경부인(貞敬夫人)에 추증되었고, 규범(閨範)이 있었다.


가정(嘉靖) 병진년에 공을 낳았는데, 공은 막 태어나서 젖을 빨지도 않고 울지도 않으므로, 가인(家人)들이 놀라 이상하게 여겼다. 그런데 마침 고사(瞽師)가 문에 이르자, 참찬공이 그에게 아이의 점을 쳐 보게 하였다. 점을 다 쳐 보고는 축하하며 말하기를,『삼공(三公)에 관한 점사(占辭)를 보니, 공보다 이급(二級)이 높습니다』하였다.

 

겨우 두어 돌이 지나서는 뛰어나게 영리하여 장난하고 노는것이 보통 아이들과 달랐고, 조금 자라서는 마음이 침착하고 도량이 있어 행동거지가 기특하고 어묵(語黙)이 구차하지 않았으므로, 식견 있는 이들이 하늘높이 치솟는 재목이 될 줄을 알았다. 8세 때에는 시(詩)를 지었는데, 말을 내면 사람을 놀라게 하였다.

 

9세 때에는 참찬공이 작고하자, 너무 슬퍼하여 몸이 쇠약해 지는것을 예(禮)와 같이 하였다. 14,5세 때에는 이미 재물을 아끼지 않고 의리를 좋아했으며, 웅건(雄健)하여 어디에도 속박을 받지 않았다. 그리고 씨름과 공차기를 잘하여 길거리에서 용맹을 뽐내곤 하면 여러 소년들이 감히 맞설 자가 없었다.

 

대부인(大夫人)이 그 사실을 듣고 경계하여 이르기를,『미망인(未亡人)은 얼마 못 가서 죽을 것인데, 네가 무뢰한 자제(子弟)들과 종유를 하니, 나는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할 것이다』하니, 공이 울면서 가르침을 받아 호탕한 습성을 닦아 없애고 신실한 태도를 지녔다.

 

신미년에 대부인이 작고하자, 죽(粥)만 마시면서 여묘살이를 하였다. 복(服)을 마치고는 민씨(閔氏)의 아내가 된 자씨(姉氏)에게 의탁해 있으면서 경서(經書)의 의리를 분석하고 학습의 취향을 변별하여 학업을 마침내 독실히 함으로써 문사(文思)가 방일하여 차츰 고인(古人)의 문사에 가까워지자, 한때의 명류(名流)들이 모두 공의 얼굴을 알기를 원하였다.

 

상국(相國) 권철(權轍)이 그 명성을 듣고 손녀를 공에게 시집보냈으니, 바로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의 소생이었다. 상국이 공을 한 번 보고는 공보(公輔)의 그릇으로 기대하였다.


만력(萬曆) 경진년(1580 선조13)에는 알성 문과(謁聖文科)의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 부정자에 보임되었다. 신사년에는 예문관 검열이 되었다. 계미년에는 선묘(宣廟)가 장차《주자강목(朱子綱目)》을 강(講)하려고 재신(才臣)을 미리 간선하여 궁중에 비장된《주자강목》을 내려 익히게 하였는데, 이 간선에 응한 사람 5인 가운데 공이 참예 되었으니, 율곡(栗谷) 이공 이(李公珥)가 실로 공을 천거했던 것이다.

 

율곡은 도학(道學)과 문장(文章)이 온 세상을 압도했는데, 공이 한 번 만나 보고는 일언지하(一言之下)에 계합(契合)된 바가 있었다. 그 후 이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고, 홍문관에 천거되어 정자, 저작, 박사를 역임하였다.


을유년 봄에는 예문관의 대교, 봉교, 성균관 전적, 사간원 정언, 이조 좌랑, 지제교, 고공랑을 제수받았다. 이상의 관직을 세상에서 열관(熱官)이라 일컬었는데, 공은 이 관직을 역임하는 동안에 담박하기가 마치 한산한 관서(官署)와 같아서, 관청에는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고 좌중에는 낯선 빈객이 없었으며, 날마다 같은 마을 사람들과 종유하여 조촐하게 앉아서 서로 만나 보곤 하였다.

 

한 번은 두 현관(顯官)이 한때의 명망을 믿고 공에게 천거해 주기를 요구하여 공이 이미 전조(銓曹)에 들어간 뒤에는 중간에서 공을 꾀는 짓을 수없이 하였으나, 공이 그 행위를 증오하여 끝까지 응하지 않았으므로, 두 현관이 서로 공에게 앙심을 품었다. 이어 수찬, 정언, 교리, 이조 정랑, 예조 정랑을 역임하였다.


기축년 겨울에는 문사랑(問事郞)으로 정여립(鄭汝立)의 옥사(獄事)에 참국(參鞫)하였다. 이 때 선묘(宣廟)께서 친히 임어하여 죄수를 논죄하였는데, 공의 응대(應對)가 주도하고 민첩하며, 임금 앞에서 총총걸음하는 것이 절도에 맞았으며,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입으로 묻고 손으로 기록하곤 하니, 동료 관원들은 그저 수수방관하고 있을 뿐이었으므로, 이서(吏胥)들이 모두 눈여겨보고 놀라면서 공을 신(神)처럼 여겼다. 

 

선조는 자주 공의 재주를 칭찬하고 매사를 반드시 공에게 맡겼다. 공은 연루된 죄수가 많은데다 조속히 판결을 하지 못함으로써 남의 불행을 고소하게 여기는 자들의 흉심을 발단시키게 되는 것을 민망히 여겨, 정의(亭疑)를 당해서는 힘써 평번(平反)하여 생의(生議)를 붙여 주고, 죄안(罪案)의 문서(文書)를 상세히 검토하여 혹 불분명한 사실이 있을 경우에는 반드시 당사자(當事者)에게 정밀히 조사해서 처리하였으니, 한갓 붓대를 잡고 옥안(獄案)만 작성할 뿐만이 아니었다.


경인년 여름에는 응교에서 의정부의 검상, 사인에 전임되었다. 가을에는 평난공신(平難功臣)에 책록되었는데, 이는 공이 문사랑으로 노고가 많았었기 때문에 관례대로 삼등훈(三等勳)에 책록되었던 것이다. 이어 전한에 전임되었는데, 일찍이 경연(經筵)에 입시(入侍)했을 적에 선조가 공을 앞으로 가까이 불러 놓고 공의 국옥(鞫獄) 때의 일을 말하면서 수십 마디를 연해서 고재(高才)라 칭찬하고 작질(爵秩)을 올려서 권장하였는바, 직제학으로 승진시켰다가 통정대부 승정원 동부승지를 특별히 더하였으니, 장차 공을 크게 쓰려는 것이었다.


신묘년 봄에는 호조 참의에 제수되었다. 호조의 일을 본 지, 겨우 한 달 만에 조무(曹務)가 막힌 것이 없게 되고, 창고의 비축도 부족함이 없게 되자, 당시 호조 판서로 있던 상국(相國) 윤두수(尹斗壽)가 공(公)을 드러내서 존중하여 말하기를,『문한(文翰)을 다루는 선비가 다시 전곡(錢穀)도 잘 다스린단 말인가』하였다.

 

이때 얼신(孼臣) 홍여순(洪汝諄)이란 자가 온 세상 선비들을 모조리 그물질하여 장차 다 죽이려고 하는 바람에 공 또한 승지로서 그 파급(波及)을 입어 파면되었다. 이해 여름에 서용되어 다시 승지에 제수되었으나, 공을 해코지하는 자들이 아직 없어지지 않았으므로, 전에 공에게 앙심을 품었던 두 관원이 이 틈을 타서 일어나 공을 중죄(重罪)에 빠뜨리려고 꾀 하였는데, 이공 원익(李公元翼)이 마침 대사헌이 되어 몸소 친히 쟁론을 벌임으로써 이 일이 무사하게 되었다.

 

임진년 4월에는 왜구(倭寇)가 갑자기 이르자, 공은 지신사(知申事)로서 매우 분개하여 몸소 순절(徇節)하려고 작정하였다. 그래서 적보(賊報)를 듣고 부터는 퇴청하여 사제(私第)로 가서 안집과 통행을 금하고 집안 일로 자신을 혼란 시키지 못하도록 경계하였으며, 측실(側室)은 한 번만이라도 대면(對面)하기를 요구했으나, 그것도 할 수가 없었다.


대가(大駕)가 서쪽으로 나갈 때에 미쳐서는 백관이 다 흩어져서 궁중(宮中)은 텅 비어 사람이 없고 비는 쏟아지고 밤은 칠흑 같았는데, 밤 4경에 중전(中殿)이 홀로 여사(女史) 10여 인을 데리고 인화문(仁和門)으로 걸어서 나갔다.

 

이때 공이 홀로 촛불을 잡고 앞에서 인도하니, 중전이 돌아보면서 물어 보고 위로와 면려가 갖추 지극하였다. 대가가 임진(臨津)에 다다라서는 상하(上下)가 서로 분열되었으므로, 공이 병조랑(兵曹郞)과 함께 도보(徒步)로 가면서 진창 가운데에서 도중(徒衆)을 불러모았다.

 

동파역(東坡驛)에 이르러서는 상이 대신(大臣) 및 윤두수를 불러 계책을 물었는데, 공이 맨 먼저 말하기를,『우리 나라의 병력(兵力)으로는 이 적을 당해 낼 수 없으니, 오직 서쪽으로 달려가서 부모(父母)의 나라에 우러러 호소할 수밖에 없습니다』하였다.

 

송경(松京)에 이르러서는 이조 참판 오성군에 제배하고 가선대부를 더하였다. 그리고 공에게 왕자(王子)를 호위하고 먼저 평양(平壤)으로 가게 하였다. 대가가 평양에 이르러서는 형조판서 겸 도총관을 임명하고 자헌대부를 더하였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대사헌에 제수되었다.


적이 이미 경성(京城)을 크게 유린하고는 급히 양서(兩西)를 짓밟아 치면서 노략질을 하려고 할 적에 조정의 의논이 정해진 계책이 없어 허둥지둥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공이 한음(漢陰) 이공 덕형(李公德馨)과 함께 계책을 협찬하여 사신을 보내어 천조(天朝)의 구원병을 요청하도록 건의하였고, 또 삼도(三道)에 조도사(調度使)를 파견하여 군흥(軍興)을 관장하도록 하였으니, 마침내 재조(再造)의 공렬을 이룬 데에는 이것이 그 조짐이 되었던 것이다. 이어 병조판서 겸 홍문관제학 지경연춘추관사 동지성균관사 세자좌부빈객에 제배되었다.


임진(臨津)이 함락되자, 혹자는 평양을 지켜야 한다고 말하고, 혹자는 함흥(咸興)이 의거할 만하다고 말하므로, 공이 좌상 윤두수와 함께 함흥으로 가는것은 계책이 아니라는 뜻을 강력히 진술하고 영변(寧邊)으로 행행할 것을 청하였으나, 뭇 사람들의 의논은 굳이 함흥을 주장하였다. 그래서 중전과 세자빈(世子嬪)이 먼저 덕천(德川)을 향하여 함흥의 길을 취하였는데, 적들은 이미 대동강을 핍박해 왔다.

 

그러자 한음공이 자기가 나가서 적장(賊將) 현소(玄蘇)와 조신(調信)을 직접 만나서 군대의 진격을 늦추도록 꾀하겠다는 뜻으로 청하여 말하기를,『군대를 만일 늦추어 주지 않으면 의당 두 적장의 머리를 베어 오겠습니다』하니, 공이 그리 하지 못하게 말리면서 말하기를,『당당한 국가에서 어찌 도적의 행위를 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대가가 평양을 떠난 뒤에는 공이 한음과 함께 영변으로 가서 머물 것을 거듭 청하고, 또 요동(遼東)에 가서 구원병을 요구하겠다고 자청하여 양공(兩公)이 서로 다투어 자신이 가려고 했는데, 밤중에 이르러서야 선조가 심충겸(沈忠謙)의 말을 받아들여 한음을 요동에 보내기로 하였다.

 

공은 한음을 남문(南門)까지 전송하고 자신이 타던 말을 한음에게 풀어 주면서 말하기를,

『구원병이 나오지 않으면 그대는 의당 나를중획(重獲)에서 찾아야 할 것이네』

하니, 한음이 말하기를,

『구원병이 나오지 않으면 나의 시체는 의당 노룡산(盧龍山)에 버려질 것이네』

하고, 서로 눈물을 뿌리며 작별하니, 듣는 이들이 얼굴빛을 고쳤다.


적을 수비하던 여러 관군(官軍)이 또 무너지자, 선조가 밤에 여러 신하들을 불러 놓고 중국에 내부(內附)할 일을 의논하여 이르기를,

『부자(父子)가 함께 압록강(鴨綠江)을 건너가 버리면 국사가 가망이 없게 되니, 세자(世子)는 의당 묘사(廟社)의 신주(神主)를 받들고 길을 나누어 가야겠다. 나는 약간의 신료(臣僚)를 대동하고 의주(義州)로 들어갈 터이니, 누가 나를 따르려는고?』하니, 뭇 신하들이 아무도 대답을 못했는데, 공이 울면서 대답하여 따르기를 청하였다.

 

대가가 박천(博川)에 머무르자, 중전이 덕천(德川)으로부터 와서 서로 회합하였는데, 이어서 평양이 함락되었다는 보고가 이르렀다. 그러자 선조가 대가를 재촉하여 밤에 출발하였는데, 호종(扈從)하던 자들이 대부분 길에서 도망가 버린 가운데 비는 내리고 길은 좁고 하므로, 공이 갑작스런 변이라도 생길까 염려하여 연속(椽屬)에게 말하기를,

『전군(前軍)이 매우 허술한데, 우리들은 모두 병관(兵官)이니, 앞에서 인도할 수 있다하고』

말을 속히 몰아서 앞으로 나가니, 선조가 물어 보고 공인 줄을 알고는 공을 더욱 중히 여겼다.

 

대가가 의주에 들어서자, 공이 말하기를,『한성(漢城) 남쪽의 제도(諸道)에서는 반드시 대가가 이미 요동(遼東)으로 건너갔으리라고 여길 터이니, 급히 사자(使者)를 파견하여 호남, 영남에 유시(諭示)해서 군대를 일으켜 근왕(勤王)하도록 하고, 또 행재소(行在所)를 모두 알도록 해야겠습니다』하였다. 그래서 이때부터 조정의 명령이 사방에 통해져서 근왕병(勤王兵)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앞서 요좌(遼左)에,『조선(朝鮮)이 왜(倭)를 인도하여 입구(入寇)하게 했다』는 유언비어가 떠돌자, 병부(兵部)에서 지휘(指揮) 황응양(黃應暘)을 보내어 은밀히 우리의 사정을 탐지하게 하였다. 

 

그런데 공은 조정에 있을 때에 이미 이런 일이 있을 것을 우려하여 신묘년에 접수한 왜서(倭書)를 찾아 가지고 와 있다가 그것을 황응양에게 보이니, 황응양의 의심이 크게 풀리어 그가 황조(皇朝)에 돌아가 그 사실을 보고함으로써 비로소 구원병을 내보낼 일을 의결하였다.

 

그 후 조승훈(祖承訓), 사유(史儒) 등이 3천의 군대를 거느리고 먼저 이르자, 조야(朝野)가 모두 반드시 승첩(勝捷)을 거둘 것이라고 말하였으나, 공은 말하기를,『조 장군(祖將軍)은 경조(輕躁)하고 지모(智謀)가 적으니, 그 군대는 반드시 패할 것이다』하였는데, 과연 크게 패하였다.

 

그런데 조승훈은 황조에 돌아가서 심지어 우리 군대가 도리어 왜적을 돕는다고 속여 말하였으므로, 공이 대신(大臣)을 보내어 신변(伸辨)할 것을 청하고, 또 사신을 보내어 대군(大軍)을 보내 주도록 요구할 것을 청하였다.


겨울에는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이 4만의 군대를 거느리고 강을 건너 동으로 나오자, 공이 그의 군대 지휘하는 것을 보고 상께 아뢰기를,『반드시 공을 이룰 것입니다. 그러나 다만 막하(幕下)에 정 동지(鄭同知), 조 지현(趙知縣) 두 사람이 용사(用事)를 하므로, 좌절되는 일이 있을까 염려됩니다』하였다.

 

그런데 계사년에 대첩(大捷)을 거두어 평양성(平壤城)을 탈환하였으나, 이윽고 화의(和議)에 이끌리어 다시 전쟁을 하지 않았으니, 실로 정 동지, 조 지현 두 사람이 그렇게 만든 것이었다.


경사(京師)가 수복되자 환궁(還宮)할 것을 강력히 청하여, 10월에 선조가 구도(舊都)로 돌아왔다. 행인(行人) 사헌(司憲)이 칙서(勅書)를 받들고 나왔는데, 선성(先聲)이 없었으므로, 조정에서 갑자기 그 사실을 알고 공에게 원접사(遠接使)를 맡기자, 공은 명을 받은 즉시 떠났다. 

 

행인이 이틀 길을 하루로 줄여 급히 달려오므로, 행인이 지나는 군읍(郡邑)들이 어찌할 바를 몰랐는데, 공이 앞뒤에서 도와줌을 힘입어 관소(館所)의 접대에 흠결이 없었다. 황조(皇朝)의 칙서에, 세자에게 호관(戶官), 병관(兵官)을 대동하고 나가서 전라도(全羅道), 경상도(慶尙道)의 군무(軍務)를 다스리도록 하였으므로, 공은 병관이었기 때문에 접반사의 직임을 해면하고 세자를 모시고 남쪽으로 내려갔다.


갑오년 봄에는 호서(湖西)의 역적 송유진(宋儒眞)이 분조(分朝)에 반란을 일으키자, 여러 신하들이 세자를 받들고 대조(大朝)에 회합하여 역적을 피하려고 하므로, 공이 차자를 올려 그리 하지 못하게 하였는데, 이윽고 적이 평정되었다. 

 

이해 가을에 소명을 받고 돌아와서는 주사대장(舟師大將)을 겸하여 주함(舟艦)을 계획하고 어염(魚鹽)을 자본 삼아 재물을 불려서 면포(綿布) 3만 필을 준비하여 호조(戶曹)로 실어 보냈다. 을미년에는 이조 판서로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지춘추관성균관의금부사를 겸하였다.

 

병신년에는 황조에서 일본(日本)을 책봉(冊封)하는 일로 인하여 부사(副使) 양방형(楊邦亨)이 나와서 공을 자기의 접반사로 삼고자 하므로, 선조께서 이를 윤허하였다. 공이 조정에 하직을 하고 나서는 이조 판서와 대제학의 해면을 요청하여 의정부 우참찬에 임명되었다.

 

양방형이 공을 존경하여 말하기를,『동국(東國)에 이런 사람이 있으니, 어찌 외국(外國)이라 하여 가벼이 볼 수 있겠는가』하였다. 공은 정사(正使) 이종성(李宗城)을 가리켜 말하기를,『한갓 부귀한 집의 자제로 문묵(文墨)이나 다룰 뿐이니, 반드시 왕명(王命)을 욕되게 할 것이다』하였는데, 뒤에 과연 그러하였다. 겨울에는 양 부사를 전송하였다.


정유년 봄에는 병조 판서가 되었다. 이 때 경략(經略) 양호(楊鎬)가 대군을 거느리고 동으로 나왔는데, 적합한 접반사를 신중히 고른 끝에 공을 추천하자, 공이 사양해도 되지 않으므로, 호관(戶官), 공관(工官)을 대동하고 구련성(九連城)으로 가서 경략을 만났는바, 그때에 조목조목 열거한 문답(問答)은 모두가 찬란하게 나라를 빛낸 것들이었다. 이해 9월에 병으로 해면되었다가 11월에 다시 제수되었다.

 

공은 병조 판서를 모두 다섯번, 이조 판서를 한번 역임했는데, 마음씀이 곧고 신실하여 부정한 청탁이 미치지 못했고, 인재를 의용(擬用)하고 제탁(除擢)하는 데 있어서는 오직 그 재능만을 보아서 일체 공의(公義)를 따랐으므로, 감히 다른 길로 진취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관방(官方)이 질서가 잡히고 사도(仕道)가 이 때문에 맑아졌으니, 조정에 근근이나마 범할 수 없는 장벽이 존재하고 사대부(士大夫)들이 조금이나마 염치를 알게 된 것은 공이 전석(銓席)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병부(兵部)를 관장했을 적에는 수륙(水陸)으로 천병(天兵)이 모여드는 때를 당하여, 본병(本兵)에 관계된 일의 경우 큰 것은 맹렬한 천둥처럼 화급하였고 잗단 것은 쇠털처럼 번잡하였으나, 공은 이를 자유자재로 적절하게 처리함으로써 일이 많이 쌓여도 막힘이 없었다.

 

그래서 양 경략이 매양 긴요한 일을 만날 때마다 반드시『이 상서(李尙書)와 의논하리라』고 말하였다. 공이 병부를 떠난 뒤에도 항용수(恒用數) 이외에 만 필(匹)의 면포(綿布)가 넘쳐 있었으므로, 부중(部中)에서는 이 상서가 비축한 것이라고 서로 전하면서 오래도록 이를 지켜 간직하였다.

 

근세에 유능한 병부의 장관을 일컬을 때 율곡(栗谷) 이공(李公)을 말하는데, 공은 충분히 율곡과 맞설 만하거니와, 시기의 몹시 바쁘거나 수월한 점으로 말하자면 공이 더 우월하였다. 무술년 가을에는 황조의 찬획사(贊畫使) 정응태(丁應泰)가 우리 나라에 대하여 터무니없는 사실을 날조해서 상주(上奏)하였으므로, 선조께서 크게 놀라 공을 우의정에 임명하고 대광보국숭록대부를 더하여 부원군을 봉하고 진주사(陳奏使)로 삼았다.

 

공이 누차 사양하였으나 윤허를 얻지 못하여 밤중에 출발해서 이틀 길을 하루에 달려가서 황제께 진주(進奏)하고, 다음으로는 날마다 내각(內閣)과 예부(禮部), 병부(兵部)에 나아가 정문(呈文)을 올려 사실을 진술하였는데, 말이 분명 적절하였고 예절에 맞는 거동이 우아하였으므로, 여러 관원(官員)들이 경의를 표하며 승낙하여 말하기를,『국가의 수치는 절로 씻어질 것이니, 공은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하였다.

 

그래서 황제가 마침내 칙서를 내려 우리를 칭찬하고 정응태의 관직을 파면하였다. 기해년에 복명하니, 선조가 크게 기뻐하여 공에게 전토(田土)와 노비(奴婢)를 하사해서 칭찬하고 장려하였다.

 

그런데 당시의 의논이 정응태가 무주(誣奏)한 일을 가지고 그 죄를 정응태의 접반사였던 백유함(白惟咸)에게 돌려 그를 하옥(下獄)시키고 처벌하려 하였는데, 공이 위관(委官)이 되어 마음속으로 그의 억울함을 알고는 평의(評議)를 매우 분명하게 아뢰니, 선조가 그를 용서하였다. 얼마 안 있어 일로 인하여 관직을 해면하였다.


경자년에는 도체찰사 겸 도원수에 임명되어 남쪽 지방의 군대를 시찰하면서 백성을 편안히 할 것[安民]과 해상을 방어할 것[防海] 등 십육책(十六策)을 올렸다. 여름에 영의정에 임명되어 돌아왔다. 6월에 의인왕후(懿仁王后)가 승하하였는데,당시 전쟁을 치른 뒤라서 의궤(儀軌)에 관한 전적(典籍)들이 남김없이 불타 없어졌으나, 공이 지시해 주고 재량한 것이 예문에 어긋나지 않았다.

 

재궁(梓宮)이 산릉(山陵)에 내려졌을 때 한밤중에 잘못 화재가 나서 상하(上下)가 몹시 당황하였는데, 공은 변(變)을 당하여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처리하는 데에 방도가 있어 마침내 이날 장사를 치르고 반우제(反虞祭)까지 마쳤다.


신축년에는 사직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으므로, 공이 다시 나와서 경비를 절약하고[節經費], 전제를 바로잡고[正田制], 성심을 열고[開誠心], 공도를 펴고[布公道], 염치를 면려할[礪廉恥] 일로 청하니, 선조께서 가납하였다. 

 

가을에 노추(奴酋)가 글을 보내 와서 강화(講和)를 요청하였는데, 공이 말하기를,『이 노추는 천조(天朝)로부터 관작을 받았으니, 인신(人臣)의 의리상 사사로이 사귈 수 없거니와, 또 후세의 걱정거리가 될 것이니, 청컨대 그 사자(使者)를 거절하소서』하였다.


임인년 봄에는 삼사(三司)가 서로 소장(疏章)을 올려 우계(牛溪) 성혼(成渾)을 논박하므로, 공이 소장을 올려 그를 구하려고 했는데, 소장을 미처 올리기 전에 어떤 사람이 권신(權臣)의 사주를 받고 지레 소장을 올려 공을 오로지 공격 하였으므로, 공이 인책하여 사직하자, 공을 흔드는 자가 더욱 많아져서 끝내 이 때문에 자리를 떠났다.


갑진년 원조(元朝)에는 흰 무지개가 해를 관통하는 변이 있어 선조가 구언(求言)의 전교를 내리자, 공이 천인(天人)의 사이에 대해서 자세히 말하고, 끝에 가서 말하기를,『성심을 전하는 것은 의당 간언(諫言)을 받아들이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하고, 공평함을 갖는것은 의당 사람을 등용하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하였는데, 세상에서 말을 제대로 안다고 하였다.

 

이해 여름에 호성공(扈聖功)을 책록하였는데, 공이 원훈(元勳)이 되자,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어 영의정에 임명되자, 또한 사직을 고하여 해면하였다. 병오년 가을에는 대마도(對馬島)의 오랑캐 의지(義智)가 임진년에 우리 능(陵)을 침범한 적이라고 거짓으로 칭하면서 두 사수(死囚)를 결박하여 바쳐 와서 강화를 요구하였다.

 

그러자 당시 유영경(柳永慶)이 영상으로서 자기의 공으로 삼고자 하여 장차 종묘(宗廟)에 헌부례(獻俘禮)를 행해서 자기의 공을 과시하려 하므로, 공이 그 두 사수를 부산(釜山)에서 죽여 왜사(倭使)에게 보이고자 하니, 유영경이 짐짓 잡아다가 신문하였으나 소득이 없었다.

 

정미년 10월에 선조(宣祖)의 병환이 위독하자, 공이 명을 받고 종묘에 기도를 드렸더니, 그 이튿날에 병환이 조금 나아졌다. 그랬다가 무신년 2월 1일에 선조가 승하하였고, 2일에 폐주(廢主)가 즉위하였다. 선조는 일월(日月) 같은 밝음으로 건강(乾剛)의 덕을 간직하여 일찍부터 신기(神器)를 이끌어 오다가 폐주에게 기탁하였는데, 폐주는 17년 동안이나 동궁(東宮)에 있었다.

 

그런데 불행히도 선조가 여러 해를 병석에 누워 있다 보니, 남의 불행을 즐기고 공을 탐하는 자들이 남의 마음을 추측하는 술책을 가지고서 깊은 속내를 틀어막고 단서를 숨긴 채 불의를 선동하여 종횡 무진한 논변으로 사람들의 이목을 미혹시켰는데, 마침내 정인홍(鄭仁弘)의 봉소(封疏)가 들어가고 나서는 인정이 더욱 현란해져서 화(禍)의 단서가 끝없게 되었다.

 

그런데 맨 먼저 임해군(臨海君)을 요주의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중외(中外)가 몹시 허둥지둥하는 가운데 위사(衛士)들은 갑옷을 입고 대궐을 수비하고, 궁문(宮門)은 대낮에도 열지 않은 지가 여러 달이었다.

 

이때 한 간관(諫官)이 임해군의 일로 공에게 와서 묻는 자가 있자, 공이 말하기를,『복상(服喪) 중인 왕자(王子)에게 아무런 형적도 드러나지 않았는데, 무슨 근거로 처벌을 한단 말인가』하였다.

 

그 후 삼사(三司)가『임해군이 모반을 꾀하니 절도(絶島)에 유찬해야 한다』고 밀고(密告)하자, 공은 사은(私恩)을 온전히 할 것을 청하였는데, 논자(論者)들이 역적을 비호한다고 공을 지목함으로써, 사은을 온전히 하라는 말이 끝내 선류(善流)들의 화근(禍根)이 되고 말았다.


4월에는 좌의정이 되어 도체찰사를 겸하고 총호사(摠護使)가 되었다. 6월에는 목릉(穆陵)의 봉분(封墳)을 마치자마자 삼사가 임해군을 죽이기를 청하고 또 상부(相府)가 정쟁(廷爭)하지 않은 것을 허물하였으며, 정인홍은 이를 이어서 사은을 온전히 하라고 한 잘못을 배척하였다. 그러자 공이 차자를 올려 두 번이나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신해년에는 정인홍이 봉소(封疏)를 올려 회재(晦齋)와 퇴계(退溪) 두 선생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해서는 안 된다고 대단히 헐뜯었으므로, 성균관(成均館)의 유생(儒生)들이 상소하여 그것을 변명하고 정인홍을 유적(儒籍)에서 삭제하였다. 그러자 정인홍의 무리인 박여량(朴汝樑)이 그 사실을 폐주에게 고자질하여 아뢰니, 폐주가 정인홍의 삭적(削籍)에 대한 의논을 수창한 자를 조사해 내어 금고(禁錮)시키도록 하였다.

 

그러자 공이 경악하여 망국적인 거조라고 말하고, 밤새도록 차자를 작성하여 새벽에 올렸다. 제생(諸生)들은 이때 폐주의 명을 듣고 일제히 성균관을 비우고 나가 버렸으므로, 공이 또 차자를 올려 그 사실을 진술하였다. 그 후 인대(引對)할 때에 미쳐서는 회재에 관한 일을 네 조목으로 갖추 기록하여 올렸는데, 정인홍이 이로 말미암아 공에게 대단히 앙심을 품었다. 

 

그래서 돌발적인 화의 조짐이 점차 일어남으로써 명경 선사(名卿善士)들이 발을 포개고 숨을 죽이는 가운데 참소가 고슴도치 털처럼 수없이 모여들어 공을 밀어내는 것을 급선무로 삼아서, 이에 체찰부(體察府)의 병권(兵權)이 너무 중하다는 말을 제창하여 기필코 공을 사지(死地)에 빠뜨리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공은 날마다 떠나기를 요청하는 것만 일삼았는데, 마침내 임자년에 이르러 김직재(金直哉)의 무옥(誣獄)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폐주는 날마다 국청(鞫廳)에 나가서 털끝만한 것 이상의 일은 모두 몸소 결단하였으므로, 공이 일에 따라 억울한 사연들을 바로잡아 구원하였다.

 

이때 시인(詩人) 권필(權鞸)은 시(詩)로 죄를 얻어 함께 체포되어 신문을 받았는데, 공이 자리를 옮겨서 간절히 간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그리고 한 술관(術官)이 천도(遷都)의 설(說)을 올린 자가 있어, 재신(宰臣)들이 대부분 그 설에 부화 뇌동하여 상의 뜻에 영합하였는데, 공이 직언(直言)으로 그 설을 거절하였다.

 

이해 4월에는 박응서(朴應犀)가 상변(上變)하였는데, 일을 차마 말할 수도 없는것이 무신년의 일보다 혹렬하였다. 그 피고(被告) 가운데 무인(武人) 정협(鄭浹)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공은 평소 알지 못한 사람이었다. 다른 대신(大臣)이 그를 천거함에 따라 공이 그를 변방의 수령에 의용(擬用)했을 뿐이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사련(辭連)으로 연좌되자, 공은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이때 삼사가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이기를 청하였는데, 정부(政府)에서는 정청(廷請)의 거조가 없었으므로, 재신(宰臣) 두 사람이 잇달아 밤낮으로 공의 처소에 찾아와서 화복(禍福)으로 달래었는바, 그 협박적인 말들은 사람으로 하여금 머리털이 곤두서게 하였다.

 

그리하여 자제(子弟)들이 울면서 서로 번갈아 간하자, 공이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의연히 말하기를,『나는 양조(兩朝)에서 은혜를 입어 재상 지위에 오른 지 16년이 되었는데, 어찌 거의 죽게 된 나이에 스스로 더러운 이름을 취하여 양조의 은혜를 깊이 저버릴 수 있겠느냐』하니, 그 재신이 공의 마음을 돌릴 수 없음을 알고 한음(漢陰)에게로 가서 또한 공에게 말한 것처럼 하였다.

 

후일에 공이 한음과 함께 국청(鞫廳)에 있을 적에, 대관(臺官)이, 대신(大臣)이 복합(伏閤)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드러내어 배척하자, 한음이 공에게 말하기를,『자네는 장차 어떻게 하려는가?』하니, 공이 말하기를,『나의 의논은 무신년의 의논에 있네』하였다.

 

옥사(獄事)가 날로 급해지고 화염(禍燄)이 날로 일어나서 대관 정조(鄭造), 윤인(尹訒) 등이 앞장서서 폐모론(廢母論)을 주창하자, 공이 한음에게 말하기를,

『내가 죽을 곳을 얻었네.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위해서 죽는다면 용맹을 손상할 것이거니와, 모후(母后)를 위해서 죽지 않는다면 의리를 손상하게 될 것이네. 어찌 차마 우리 임금으로 하여금 정조, 윤인에게 가리운 바가 되어 천하 후세에 누(累)를 끼치게 할 수 있겠는가.

 

지금 사람들이 이미《춘추(春秋)》를 속여 인용하고 있는데, 나도《춘추》를 조금은 익혔으니, 의당 경(經)을 인용하여 의리에 의거해서 그들의 사설(邪說)을 깨뜨려야겠네. 그들이 말하는 역적에 대해서는 참으로 역적임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감히 신하를 토벌하지 못하고 임금의 어머니를 폐하려는 것이니, 그들이 참으로 역신(逆臣)일세. 혹 헌의(獻議)를 하게 되면 한 장의 차자를 올려야겠네』

하고, 이날 저녁에는 집에 가서 조의(朝衣)도 벗지 않고 외랑(外廊)에 앉아 있었다.

 

그러자 자제들이 그 까닭을 물으니, 공이 말하기를,『삼강(三綱)이 절멸되었는데, 나는 불세(不世)의 지우(知遇)를 입은 대신(大臣)으로서 어찌 남은 목숨을 아끼어 이 광경을 차마 볼 수 있겠느냐. 의당 들것에 실린 시신(尸身)으로 돌아오기를 기할 뿐이다』하였다.

 

대사헌 최유원(崔有源)이 와서 공을 만나자, 공이 말하기를, 『만대(萬代)에 숭앙(崇仰) 받는 일이 이번 거조에 달려 있다』하였는데, 최유원은 본디 공을 존경해 왔던 터라, 이에 의논을 결정하여 2, 3인의 동료와 함께 정조, 윤인과 의논을 달리하였으니, 그 즉시 모후를 폐하지 않은 것은 바로 공의 말 때문이었다.

 

그러나 공이 소(疏)를 작성하여 한음에게 보여서 다듬어 놓고 기다리던 중에 공이 일찍이 정협(鄭浹)을 천거했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고 떠남으로써 일을 이미 이룰 수 없게 되었다. 폐주가 마침내 공의 상직(相職)을 체직시키고 서추(西樞)에 임명하였다.

 

을묘년에는 공의 장자 성남(星男)이 적노(賊奴)의 고발로 인하여 하옥(下獄)되자, 가인(家人)이 세속을 따라 뇌물을 쓰자고 청하니, 공이 정색을 하면서 그리 하지 못하게 하였는데, 옥사가 이윽고 변백(辨白)되었다.

 

겨울에는 정인홍이 상소하여 공의 죄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고 말하자, 삼사가 공을 삭출(削黜)할 것을 청하였는데, 그 상소문은 궁중에 두고 내리지 않았다. 공은 동쪽 교외에 셋집을 얻어 우거하다가 망우리(忘憂里)에 조그마한 집을 짓고 그 곳으로 옮겨 가, 살았는데, 얼굴에 조금도 근심스런 빛이 없이 산수(山水) 사이를 배회하였고, 거친 음식도 넉넉지 못했으나 마음 편히 지냈다.

 

한번은 청평(淸平)의 수석(水石)이 뛰어나다는 말을 듣고 노새[騾]를 타고 가서 완상하면서 전부 야로(田夫野老)들과 섞여 놀았는데, 아무도 공이 귀인(貴人)인 줄을 알지 못했다.

 

정사년 11월에는 폐모론(廢母論)이 마침내 결정되어 이이첨(李爾瞻), 김개(金闓), 허균(許筠) 등이 역적 무리들을 불러서 상소문을 들고 대궐로 들어갔는데, 외람되이 태학생(太學生)이라 칭하는 자들 또한 사주(使嗾)를 받고 모여들어 날로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온 나라 안이 물끓듯 소란하고 생명을 가진 자마다 모두가 기(氣)를 잃어버렸다.

 

이때 공은 침식(寢食)을 모두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비분 강개해 마지않았는데, 갑자기 큰 천둥 소리가 집을 흔들자, 공이 말하기를,『하늘이 경계하여 고하는 것이다.』하였다. 이윽고 추부랑(樞府郞)이 상지(上旨)를 가지고 와서 헌의(獻議)를 하게 하므로, 공이 한창 병을 앓던 중이라, 시자(侍者)가 붙들어 일으키니, 공이 붓을 휘둘러 다음과 같이 썼다.


『누가 전하를 위하여 이 계책을 냈는지 모르겠습니다. 요순(堯舜)의 도가 아니면 임금에게 말하지 않는다는 것은 옛날의 밝은 교훈입니다. 우순(虞舜)은 불행하여 완악한 아비와 어리석은 어미가 항상 우순을 죽이기 위해 우물을 파게 하고 창고를 수리하게 하였으니, 위태롭기가 또한 극에 달하였습니다. 그러나 우순은 부르짖어 울고 원망하면서도 사모하여 부모의 옳지 못한 점을 보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아비는 비록 인자하지 않을지라도 자식은 효도하지 않아서는 안 되기 때문에《춘추의 의리가》

"자식은 어머니를 원수로 삼을 수 없다"

는 것입니다. 더구나 《예기(禮記)》에 의하면

『공급(孔伋)의 아내가 된 사람은 분명히 공백(孔白)의 어머니이다』

라고 하였으니, 성효(誠孝)가 중한 곳에 어찌 간격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제 효(孝)로써 국가를 다스리는 때를 당하여 온 나라 안에 장차 점차로 교화될 희망이 있는데, 이런 말이 어찌하여 전하의 귀에 들어갔단 말입니까.

 

지금에 하실 도리로 말씀드리자면, 우순의 덕을 본받아서 능히 효로써 화해시키고 차차로 다스려서 노여움을 돌려 인자함으로 변화시키시는 것이 어리석은 신의 바람입니다』

이 의논이 들어가자, 보는 이들이 몹시 두려워 하여 심지어는 몰래 서로 눈물을 닦는 이도 있었다.

 

삼사가 공을 절도(絶島)에 위리 안치하기를 청하여 무릇 네 번이나 배소(配所)를 바꾸어 삼수(三水)로 결정하였는데, 폐주가 명하여 북청(北靑)으로 옮기게 하였다. 무오년 정월에 배소에 도착하였다. 3월에 병을 얻었는데, 이상한 꿈을 꾸고 말하기를,

『내가 오래 가지 못하겠구나』

하였다. 또 노추(奴酋)가 요광(遼廣) 지방을 침범하므로, 황조(皇朝)에서 우리 군대를 보내 달라고 요구했는데, 조정에서 허락하지 않았다는 소식을 듣고는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나라가 다시는 경쟁(競爭)도 할 수 없게 되었다』

하였다.

 

그로부터 이틀 뒤에 작고하니, 이달 13일이었고 향년이 63세였다. 공이 일찍이 가인(家人)에게 말하기를『나는 나라를 잘못 섬겨 이런 견책을 입었으니, 내가 죽거든 조의(朝衣)로 염(殮)을 하지 말고 입고 있는 심의(深衣)와 대대(大帶)를 사용하라』하였다. 7월에 포천(抱川)의 선영(先塋)으로 운구(運柩)해 두었다가 8월에 참찬공(參贊公)의 묘(墓) 왼쪽 을좌(乙坐)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앞서 도하(都下)의 인민들은 공이 유배된다는 소식을 듣고 위로는 조신(朝臣)으로부터 아래로는 여러 조(曹)의 고리(故吏), 시대(廝臺), 여졸(輿卒)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뵙기를 요청하였고, 일로(一路)의 촌민(村民)이나 여염집 부인들도 서로 다투어 와서 우러러 절하였으며, 선비로 일컬어지는 이들은 공의 풍의(風儀)를 사모하여 존경해서 본보기로 삼았다.


공이 작고함에 이르러 원근에서 부음(訃音)을 듣고 회곡(會哭)한 사람들로 말하자면, 부의(賻儀)를 가지고 와서 조문한 수재(守宰), 변장(邊將)과 제문(祭文)을 지어 가지고 와서 술잔을 부어 제사한 시골 사부(士夫)들이 그 얼마였는지 알 수 없었고, 초종(初終) 때부터 문 밖에 와서 지키고 있다가 빈소(殯所)를 마련한 뒤에야 돌아간 사람들 또한 그 얼마였는지 알 수 없었으며, 영남(嶺南)의 선비 중에는 평소 공과 서로 알지 못한 처지인데도 천리 길을 와서 부의한 이가 있었다.

 

장사를 마친 뒤에는 손수 술 한 잔, 고기 한 접시를 갖추어 3수(首)의 시(詩)와 제문(祭文)을 가지고 묘하(墓下)에 와서 곡(哭)하고 상주(喪主)도 만나지 않은 채 떠난 이가 있었는데, 그 또한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북청과 포천의 제생(諸生)들은 재목을 모아서 사우(祠宇)를 건립하고 공을 향사(享祀)하였는데, 조정에서 여기에 대해 금령(禁令)까지 내렸으나 끝내 저지할 수가 없었다. 아, 공이 무엇으로 사람들에게 이런 존경을 받았던가. 의열(義烈)이 충분히 사람을 감동시킬 만하였기에 인심을 깊이 속일 수 없었던 것이다. 누가 공론(公論)이 후세에 있다고 말하였던가.


공은 풍채가 엄중하고 도량이 활달하였으며, 널찍한 이마와 우뚝한 코에 뺨은 두툼하고 살결은 희었으며, 긴 수염은 이리저리 휘날렸다. 키는 보통 사람을 넘지 못했으나 기개는 온 세상을 덮었고, 행실은 외면적인 것을 꾸미지 않았으나 동작마다 규칙이 있었다.

 

월등하게 세속을 초월하였고, 여유 있게 사물에 잘 대처하였으며, 광명(光明)하여 잗단 일에 얽매이지 않았고, 정대(正大)하여 특별히 뛰어났으며, 마음이 안온하여 순리대로 처신하였고, 정취가 담박하여 때가 끼지 않았다.


그리고 선영을 받듦에 있어서는 의절(儀節)이 물(物)보다 돈독했고, 꾸밈은 정성에 가리워졌다. 임금을 섬김에 있어서는 범하면서 숨김이 없었고, 꺾이어도 지조를 바꾸지 않았다. 동기간에 우애함에 있어서는 큰형 받들기를 마치 어버이 섬기듯 하였고, 중형과 숙형을 마치 한몸처럼 대우하였다. 종족들과 서로 친함에 있어서는 빈궁한 이나 현달한 이에게 각각 도리를 다하였고, 소원하거나 친근함에 서로 간격이 없었다.

 

향당(鄕黨)에 있어서는 친구와의 사귀는 정을 변치 않았고, 지우(智愚) 간에 모두 원만하게 대하였다. 집에 있을 때에는 깊은 방구석을 마치 번화한 대로(大路)처럼 여기고, 침실(寢室)을 마치 조정처럼 여기어 매우 근신하였다. 

 

관직을 수행함에 있어서는 마치 포정(庖丁)이 자유 자재로 쇠고기를 바르듯, 편작(扁鵲)이 담장 너머에 있는 사람을 환히 보듯, 능란한 솜씨와 밝은 안목으로 여유 있게 처리하였다. 교제(交際)를 함에 있어서는 신의(信義)를 두터이 부지하고, 승낙(承諾)하는 것을 반드시 신중하게 하였다.

 

남에게 물건을 주거나 취함에 있어서는 청렴하면서도 명예를 취하려 하지 않았고, 구분을 하되 이견(異見)을 세우려고 하지 않았다. 집안을 위함에 있어서는 수묘(數畝)의 토지도 없고, 바구니에 남겨준 돈도 없었다. 남의 시비(是非)를 논함에 있어서는, 선(善)을 좋게 여기는 데는 넉넉하고 악(惡)을 증오하는 데는 부족하였다.

 

훼예(毁譽)의 사이에 처신함에 있어서는 고운 것이나 추한 것이 밝은 거울에 거짓 없이 제대로 비치듯 하였다. 이상과 같은 여러 가지 아름다움을 갖추고 대절(大節)로 이것을 통괄 하였으므로, 벼슬을 처음 시작한 때부터 선조(宣祖)에게 알아줌을 입었던 것이다.

 

임진년의 난리 때에는 분골 쇄신토록 충성을 다하였으니, 첫째도 공심(公心)이요. 둘째도 공심으로, 중병(中兵)을 총괄해서 거느리고 참혹한 난리를 평정해 내었다. 들어와서는 사류(士流)의 으뜸이 되고, 나가서는 사방 변방의 울타리가 되어, 마침내 왕운(王運)이 거듭 밝아지게 하고, 재상의 자리에 올라서 중흥(中興)의 원공(元功)이 되었으니, 그 위대한 사업(事業)은 충분히 당(唐) 나라 초기의 명상(名相)인 방현령(房玄齡), 두여회(杜如晦)와 서로 오르내릴 만하거니와, 정사 년의 한 마디 말은 천지(天地)를 지탱시키고 일성(日星)처럼 빛나서, 몸은 비록 꺾이어 패했으나 인도(人道)가 이로 말미암아 서게 되었으니, 임진년의 공에 비하면 또한 더욱 훌륭하지 않겠는가.

 

공이 소싯적에는 기개와 의리로써 자부 하다가 늦게야 학문을 좋아하였는데, 기해년에 상직(相職)을 해면한 이후로는 세상일을 끊어 버리고 경사(經史)에만 전념하였다. 그리하여 학문을 구하는 데 있어서는 전모수사(典謨洙泗)로부터 염락관민(濂洛關閩)에 이르렀고, 문장(文章)을 하는데 있어서는《좌전(左傳)》과 《국어(國語)》로부터 진한(秦漢) 시대의 문장까지 연구하여, 20년 동안을 일찍이 손에서 책을 놓은 적이 없었다.

 

자품이 고상하기 때문에 견해 또한 고상하였고, 욕심이 적기 때문에 이치가 절로 밝아졌다. 도(道)의 오묘함으로 말하자면 밝고 광대한 근원을 홀로 깨달았고, 실천한 것을 관찰해 보면 털끝 만큼의 세세한 것도 놓치지 않았다. 조복(朝服)을 입고 묘당(廟堂)에 앉아 있으면 구정 대려(九鼎大呂)와 같은 존재였고, 옷깃을 풀어 헤치고 편히 쉬던 곳은 구학 운수(丘壑雲水)의 사이였다.

 

인품이 매우 고상하여 세속 밖에 뛰어났으니, 칼 차고 신 신은 채로 황각(黃閣)에 오르는 영광이나 영원토록 국가의 운명과 함께하는 공신(功臣)의 책록 같은 것들은 다만 공에게는 하나의 뜬구름일 뿐이었다. 그런데 세속의 천박한 자들이야 공의 깊이를 헤아리지 못한것은 괴이할 것이 없겠으나, 비록 공을 안다고 칭하는 자들도 또한 공을 고작 세상 따라서 명성이나 세운 사람의 반열에 놓아 버리니, 사람을 알기가 참으로 쉽지 않도다.

 

조정이 당파(黨派)를 만들어 서로 다툰지 40여년 동안에 현불초(賢不肖)를 막론하고 누구나 어느 한쪽을 표방(標榜)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나, 공은 홀로 중립(中立)하여 한쪽으로 기울지 않아서 우뚝 하기가 마치 태산 교악(泰山喬岳)과 같았으므로, 사람들이 감히 공을 헐뜯지 못하였다.

 

그런데 임인년 이후로는 시사(時事)가 날로 어그러져서 뭇 정인(正人)들이 자취를 감춤으로 인하여 공이 비로소 조정에서 편치 못하게 되었다. 그 후 비록 재차 상위(相位)에 오르긴 하였으나, 사양하고 떠나 버렸다. 

 

그리고 폐주(廢主)의 초정(初政) 때에 다시 중서(中書)에 들어간 것은 선조(先朝)의 구신(舊臣)인 까닭에 마지못해서 다시 나갔던 것인데, 세도(世道)는 이미 크게 어긋나 버린 뒤였으니, 이것이 어찌 국가의 불행이 아니겠는가.

 

공은 문장(文章)에 대해서는 본래 하기를 탐탁지 않게 여겼으나, 법을 취한것은 고아(古雅)하여 웅건하고 뛰어나서 스스로 일가(一家)를 이루었다. 그래서 장차(章箚) 등의 글은 품격이 높아서 위로 서한(西漢), 동한(東漢)의 문장에 근접하고 간혹 강좌(江左)의 기풍도 섞였으며, 척독(尺牘)은 명쾌하여 일정한 법식을 초월하였고, 필적(筆跡)은 호방하면서도 법칙이 있었다.

 

그리고 노자(老子), 장자(莊子)의 현방(玄放)함과 선도(仙道), 불도(佛道)의 묘오(妙悟)에 대해서는 그 본지(本旨)를 터득하지 못한 것이 없고, 천문 지리(天文地理)의 이론과 서화 의술(書畵醫術)의 기예까지도 모두 통효(通曉)하였으나, 더 끝까지 연구하지는 않았다.

 

일찍이 함양명(涵養銘)과 치욕(恥辱), 서상(書床), 양야(養夜), 계주(戒晝), 경석(警夕) 등 다섯 편의 잠(箴)을 지어서 스스로 일과(日課)의 수양 공부로 삼았다. 시문(詩文) 약간권(若干卷)과 조천창수(朝天唱酬) 1권, 주의(奏議) 2권, 계사(啓辭) 2권,《사례훈몽(四禮訓蒙)》1권,《노사영언(魯史零言)》15권이 집에 소장되어 있다.

 

공의 소싯적의 호는 필운(弼雲)이고 혹은 청화진인(淸化眞人)이라고도 칭하였는데, 만년에는 백사(白沙)라 호칭하였고 또는 동강(東岡)이라고도 불렀다.  아들이 두 명인데, 큰아들 성남(星男)은 음보(蔭補)로 벼슬하여 광흥창 수(廣興倉 守)가 되었고, 다음 정남(井男)은 임자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또한 군수(郡守)가 되었다.

 

딸 한 명은 윤인옥(尹仁沃)에게 시집갔다. 측실(側室)에서 낳은 아들이 두 명인데, 큰아들 규남(奎男)은 계축년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다음은 기남(箕男)이다. 딸이 두 명인데, 하나는 학관(學官) 권칙(權侙)에게 시집갔고, 하나는 어리다.

 

성남의 초취(初娶)는 판서 권징(權徵)의 딸로서 1녀 1남을 낳았는데, 딸은 진사(進士) 최욱(崔煜)에게 시집갔고, 아들은 시중(時中)이다. 계취(繼娶)는 판관(判官) 김계남(金季男)의 딸로서 4녀 3남을 낳았는데, 아들은 시정(時挺)이고, 나머지는 어리다. 정남은 참의(參議) 윤의(尹顗)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시술(時術)이고 딸은 어리다.

 

규남은 권대순(權大純)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시행(時行)이다. 기남은 박제남(朴悌男)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을 낳았는데 어리다. 내가 소싯적에 청강(淸江)의 문하(門下)에서 공을 만났는데, 한 번 보고 즉시 망년교(忘年交)가 되었고, 그 후로 공과 한 골목에 마주하여 30년을 살았다.

 

생각건대, 공은 남을 쉽사리 허여하지 않았고, 나 또한 세인(世人)들과 잘 부합하지 못했는데, 공과는 형해(形骸)를 초월하여 서로 허여하여 정취와 의향이 간혹 말하지 않고도 서로 똑같을 때가 있었고, 만년에는 더욱 서로 계합(契合)하였다.


공은 매양 고금(古今)을 담론할 때마다 논의가 넘쳐나왔는데, 전인(前人)의 법칙을 답습하지 않고 스스로 가슴속에 주관을 세워서, 고명(高明)하고 투철(透徹)하면서도 처음부터 고현(古賢)에 위배된 적이 없었으니, 그 호쾌(豪快)한 자품은 근대에 보지 못한 것이었다. 나는 항상 세상에 나를 알아줄 이가 있는 것을 다행으로 여겼었는데, 공이 떠남으로써 나 혼자 외롭게 될 줄을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그래서 나는 일찍이 공을 논하기를『공이 추로(鄒魯)에서 났더라면조만(操縵)의 무리를 벗어났을 것이고, 열국(列國) 시대에 났더라면 거의 정(鄭) 나라 동리(東里) 자산(子産)의 정사(政事)를 했을 것이다. 

 

문정공(文靖公) 사안(謝安) 같은 인품을 지녔으나 시대와 서로 맞지 않았고, 충헌공(忠獻公) 한기(韓琦) 같은 덕량(德量)이 있었으나 화(禍)의 그물에 걸렸다.그렇다면 공보다 뒤에 나온 사람은 또한 조석간에 좋은 시대를 만나는 이도 있을 법하다』하였다.

 

인하여 기억하건대, 공이 유배되어 갈 때에 글에 이르기를『오늘에야용동공(遼東公) 적흑자(翟黑子)를 저버리지 않게 되었다』하였는데, 이는 한음(漢陰)을 가리킨 것이었으므로, 나는 여기에서 눈물을 줄줄 흘렸다. 나의 문장은 돈사(惇史)를 지을 수 없는게 부끄러우니, 어떻게 공의 행적을 영원히 전하도록 할 수 있겠는가.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그 옛날 우리 선조 대왕께서 / 착아선조(昔我宣祖)
훌륭한 덕으로 왕위에 올라 / 병덕당건(秉德當乾)


영재를 기르고 축적하기를  / 육재저영(毓才貯英)
밭에서 곡식 가꾸듯이 하여 / 야묘예전(若苗藝田)


제철에 비 내려 적시어 주고 / 시우고지(時雨膏之)
따스한 바람으로 잎 피우니 / 조풍발지(條風發之)


오직 이때 뛰어난 선비들이 / 유시무순(惟時髦俊)
배출하여 창성한 시대 이뤘네 / 위호창기(蔚乎昌期)


이때에 누가 그 으뜸이었던고 / 숙위기종(孰爲其宗)
바로 우리 이공이었다네. / 왈아이공(曰我李公)


아, 왕께서 공에게 명을 내리되 / 예왕유명(繄王有命)
군신 간에 우리 서로 계합하니 / 계합조융(契合昭融)


동관의 빛나는 저 서적들을 / 황황동관(煌煌東觀)
너는 모두 융회 관통할 것이요. / 여기회통(汝其會通)


나에게 화려한 곤룡포 있으니 / 아유화곤(我有華袞)
네가분미를 수놓아 꾸미어라. / 여기분미(汝其粉米)


국운이 큰 재액을 만났으니 / 방운맥육(邦運百六)
홍수를 누가 건네 줄꼬 하였네. / 도천주제(滔天疇濟)


그래서 공은 배와 노가 되어 / 공위주집(公爲舟楫)
해진 옷으로 물 샌 틈을 막으니 / 수유의녀(繻有衣袽)


임금의 자리가 다시 안정되고 / 두극천정(斗極天奠)
국운이 처음같이 되었도다. / 국보여초(國步如初)


왕이 이르되 네가 가상하구나 / 왕왈여가(王曰汝嘉)
너는 나의 팔이요 다리로다. / 여아고굉(汝我股肱)


무슨 직임을 너에게 줄거나 / 비지이하(畀之伊何)
영상의 직임을 받아라 하고 / 원보시응(元輔是膺)


공을 맨 뒤에까지 남겨 두어 / 유지우후(遺之于後)
국가의 원대한 계책 돕게 했네. / 비찬홍도(卑贊洪圖)


옛날의 인재를 이미 거두어서는 / 고검기수(故劍旣收)
큰 계책을 거의 펴게 되었는데 / 서전우모(庶展訏謨)


일이 그렇지 못한 게 있었으니 / 사유불연(事有不然)
세상은 창날이요 공은 방패였네. / 세모공순(世矛公盾)


그래서 지주가 중간에 꺾어지고 / 지주중최(砥柱中摧)
정승의 별이 밤중에 떨어졌도다. / 태계초운(台階宵隕)


그 변론한 말은 하도 당당하여 / 기설당당(其說堂堂)
소인들의 예봉을 꺾었거니와 / 절피지각(折彼之角)


그 절의는 이와 같이 우뚝하니 / 기절탁탁(其節卓卓)
참소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리요. / 하유요착(何有謠諑)


아, 훌륭하신 선조 대왕이여 / 어황선조(於皇宣祖)
선조 대왕께는 신하가 있었도다. / 선조유신(宣祖有臣)


금석은 혹 부스러지기도 하련만 / 금석혹륵(金石或泐)
해와 달은 영원히 새로우리라 / 일월장신(日月長新)


삼대를 추존하고 제사를 내리니 / 이관사제(貤官賜祭)
성대한 예가 이에 두루 미쳤네.  / 은예시보(殷禮斯溥)


천도는 본디 미리 정해진 것이라 / 천고유정(天固有定)
은혜가 실로 특별한 대우였도다. / 은실이수(恩實異數)


영화가 공에게 무슨 상관이며 / 영어공하(榮於公何)
욕됨이 공에게 무슨 상관이리요. / 욕어공하(辱於公何)


영화와 욕됨이 가거나 오거나 / 영욕거래(榮辱去來)
공에게는 좋고 나쁠 게 없어라. / 공부소다(公不少多)


천지간에 하나의 참다운 것 / 일미진유(一味眞腴)
신령한 성정은 온전히 지니었고 / 령성칙전(靈性則全)


탁세에 남은 쓸모 없는 공명은 / 탁세비강(濁世粃糠)
섶 다 타도 불은 전하듯 할 뿐이네. / 화진신전(火盡薪傳)


공은 서쪽 바다로 동쪽 바다로 / 함지부상(咸池扶桑)
바람을 타고 훨훨 날아다니리 / 승풍표연(乘風飄然)


후일에도 백세가 돌아올 게고 / 백세재후(百世在後
이전에도 백세가 지나갔는데 / 백세재전(百世在前


공은 그 사이에 있어 / 공재기간(公在其間
하늘과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도다. / 불괴불작(不愧不怍


내가 명을 지어 후세에 알리노니 / 아명조지(我銘詔之
사리에 어두운 자들이 진작하리라 / 매자기작(昧者其作)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 세자사 신흠(申欽)은 찬(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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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이참조]

 

[주01]급(伋)의 …… 하였으니 : 급은 공자의 손자 자사(子思)의 이름이고 백은 그의 아들 자상(子上)의 이름임. 자상의 쫓겨난 어머니가 죽었을 때 자사가 아들에게 상복을 입지 못하게 하니, 그이유를 물은 문인의 질문에 대해 자사가 대답한 말임. 곧 아버지의 아내는 생모가 아니더라도 어머니이고 쫓겨났을 경우에는 아무리 생모라도 어머니로 볼 수 없다는 것임. 《禮記 檀弓上》


[주02]꿈에 …… 일어나 : 백사가 북청에서 5월 어느 날 밤 꿈을 꾸었는데, 선조는 마루 위에 앉아 있고 유성룡ㆍ이덕형ㆍ김명원(金命元) 등 두세 대신이 입시한 자리에서 이덕형이 아뢰는 말이 “이항복이 아니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니 빨리 부르소서.” 하였다. 그리하여 막 달려가다가 꿈을 깼다고 함. 《白沙集 附錄 卷2 家狀》


[주03]전모(典謨)와 …… 이르고 : 사서삼경과 송 나라 때의 성리에 관한 서적들을 전부 섭렵하였다는 것임. 전모는 《서경》의 편명인 요전(堯典)ㆍ순전(舜典)과 대우모(大禹謨)ㆍ고요모(皐陶謨) 등이고 수사는 공자를 지칭하는데 곧 《논어》를 뜻함. 염락관민은 염계(廉溪)의 주돈이(周敦頤), 낙양(洛陽)의 정호(程顥)ㆍ정이(程頤), 관중(關中)의 장재(張載), 민중(閩中)의 주희(朱熹)임.


[주04]좌국(左國)에서부터 …… 망라하였는데 : 좌국은 《춘추좌전》과 《국어(國語)》이고, 진한은 진 나라와 한 나라 때의 글이라는 뜻으로 제자(諸子)와 《사기(史記)》ㆍ《한서(漢書)》 등을 말함.


[주05]양경(兩京) : 한(漢) 나라 때의 서경(西京) 장안(長安)과 동경 낙양(洛陽)임. 여기서는 그 시대의 대표적인 문장가 사마천(司馬遷)과 반고(班固)ㆍ양웅(揚雄)ㆍ사마상여(司馬相如) 등을 가리킴.


[주06]강좌(江左) : 양자강 하류의 동쪽 지역으로 오늘날 강소성(江蘇省) 일대인데 동진(東晉)의 행정구역임. 여기서는 동진의 문장가 안연지(顔延之)ㆍ사안(謝安) 등을 가리킴.


[주07]육예(六藝)를 …… 대열 : 육예는 예(禮)ㆍ악(樂)ㆍ사(射)ㆍ어(御)ㆍ서(書)ㆍ수(數) 등 여섯 가지 과목임. 공자의 제자 3천 명 가운데 육예를 정통한 72명의 제자들을 말함. 《史記 卷47 孔子世家》


[주08]국교(國僑)의 정사 : 국교는 춘추시대 정(鄭) 나라의 대부 동리 자산(東里子産)의 성명임. 약소국인 정 나라가 패권을 다투는 진(晉)ㆍ초(楚) 두 강대국의 틈바구니에 끼어 있는 상황에서 자산은 능란한 외교수완을 발휘하여 나라를 아무 탈없이 유지하였음. 《史記 卷42 鄭世家》


[주09]동관 : 한(漢) 나라 때 궁중의 도서를 저장하던 곳으로 홍문관을 가리킴.

 

[주10]그 논설은 …… 꺾었으며 : 정인홍과 이이첨의 주도하에 인목대비를 폐위할 당시 백사가, 춘추의 의리에 자식이 어미를 원수로 여기는 의리가 없다는 등의 말로 폐모론을 당당하게 반대하여 그들의 간담을 서늘케 한 일을 말함. 한 선제(漢宣帝) 때 주운(朱雲)이, 임금의 총애를 받아 기고만장한 소부(少府) 오록 충종(五鹿充宗)과 《양구역(梁丘易)》을 놓고 토론을 벌여 여지없이 충종의 논리를 무너뜨리자, 제유(諸儒)들이 말하기를 “오록의 드높은 뿔을 주운이 꺾었다.”고 하였음. 《漢書 卷67 朱雲傳》


[11]함지이며 부상 : 함지는 동방에 있는 큰 못으로 해가 목욕하는 곳이라 하고, 부상은 신목(神木)의 이름으로 해가  그 아래에서 나온다고 함. 《楚辭 離騷經》에 “내 말 함지에서 물먹이고 내 고삐 부상에 잡아맸네.” 하였음.

 

[참고문헌]

◇상촌선생집 제27권 >신도비명(神道碑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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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領議政白沙李公神道碑銘 別稿

 

宣祖大王之二十五年。而日本酋秀吉大擧兵入寇。京都陷車駕遷。惟時有臣。請援天朝。再恢宗社。乃惟曰白沙李公。光海卽位。誅夷同氣。謀廢慈殿。姦臣李爾贍,鄭造等縱臾之。天常滅蝕。環三千里殆淪於縱目之域。惟時有臣。抗言正告。扶樹彝倫。乃惟曰白沙李公。談者曰。中興之績。被於海東而已。民紀植則立萬世之孝順。優於天下矣。公以言獲罪。纍于北荒。談者曰。公固得死所矣。國其如何。俄而公卒於纍。而至癸亥今上反正。復官賜祭。談者曰。其庶幾哉。國有敎矣。蓋以公存亡榮悴。卜世運興喪也。東陽申欽聽於一國之談者曰。此輿情也夫。此公議也夫。茲非天之有定也乎。肆次其事烈。載之神道之石曰。公諱恒福。字子常。氏出鷄林。其始有沙梁部大人謁平者。翊羅祖爲宗臣。胄支遂綿。至麗彌盛。其著者曰。文忠公齊賢。世稱益齋先生云。入本朝有官工曹參判者諱延孫。寔生崇壽。僉知中樞府事。公高祖也。曾祖曰成茂。安東判官。贈吏曹判書。祖曰禮臣。成均進士。贈議政府左贊成。贊成公有隱德。嘗卜葬兆於抱川曰。我後聯二世必達。公考參贊公果應之。參贊公諱夢亮。歷事三朝。以淸儉忠孝聞。贈議政府領議政始林府院君。妣曰全州崔氏。結城縣監崙女。訥軒李公思鈞外孫也。贈貞敬夫人。有壺편01範。嘉靖丙辰生公。生而不乳不啼。家人驚異。會有瞽師到門。參贊公使筮之。筮畢賀曰。鼎軸之兆。崇於公二級。甫數朞。峻拔岐嶷。嬉戲動與凡兒殊。稍長沈深有度。顧盻偉如。語默不苟。識者知其爲昂霄材也。八歲。屬詩出語驚人。九歲參贊公卽世。致毀如禮。十四五。已疏財好義。雄健不羈。當街賈勇。諸少年莫敢埒。大夫人聞而戒之曰。未亡人朝暮入地。汝乃從無賴子弟游。吾死不暝矣。公泣受敎。刮摩豪習恂恂也。辛未。大夫人卒。啜粥居廬。服闋。托于姊閔氏婦。摛經辨志。居業遂篤。藻思橫放。亹亹逼古。一時名勝願識其面。權相國轍聞其聲。歸以孫女。卽都元帥慄之出也。相國一見。期以公輔。萬曆庚辰。登謁聖丙科。補承文院權知副正字。辛巳。藝文館檢閱。癸未。宣廟將講朱子綱目。預揀才臣。賜中祕所藏帙以隷之。膺簡者五人。公與焉。栗谷李公珥實進之。栗谷道學文章伏一世。公一見有言下之契。旋賜暇湖堂。薦弘文館爲正字著作博士。甲申秋。得疾革。中外之人識不識擧憂之。來候者履錯於巷。乙酉春良已。授藝文館待敎奉敎。成均館典籍,司諫院正言,吏曹佐郞,知製敎。考功世稱熱官。公居之淡若散署。庭無造請。座無生客。日與里閈游從。淸坐相看。有二顯官怙時望。要公推轂。已入銓地。多居間餂公。公惡其爲。竟不應。二官交憾公。歷修撰正言校理,吏禮正郞。己丑冬。以問事郞參鞫鄭汝立獄。宣廟親臨論囚。公應對周敏。趨蹌中節。目覽耳受。口詢手書。言不刊落。筆不停輟。縱橫膠擾。俱領其要。僚寀袖手。吏胥旁觀。驚以爲神。宣廟亟才公。每事必畀公。公愍囚多株連。不遄斷啓倖禍者心。當亭疑。務平反。傳生議。薦數從中。文書或忞忞者。必諦審於當事者。不徒執管成案爲也。庚寅夏。應敎轉議政府檢詳舍人。秋錄平難功。公以問事勞。例策三等勳。移典翰。嘗侍經筵。宣廟呼公前。談公鞫獄時事。稱高才者累十言。躋秩以奬之。進直提學。特加通政大夫承政院同副承旨。擬大用公也。辛卯春。除戶曹參議。才一月。曹務無㥈懘者。庫藏無罅灓者。尹相國斗壽爲判書。顯重公曰。文翰士乃復能錢穀耶。時有孼臣洪汝諄者。網一世士將魚肉之。公以承旨亦被波及罷。夏。敍復除承旨。害公者猶未艾。二官之挾前憾者抵而起。謀置重辟。李公元翼適秉憲。以身爭之乃已。壬辰四月。倭寇猝至。公爲知申事。居嚍嚍欲以身徇節。自聞賊報。公退就第。背屛側席。塡闔處外。飭家累無溷我。側室求一面不得。逮大駕定西幸計。公趨朝。唯與家兄訣別而去。前駕出一日。公詣閤門請事。宣廟命以左議政柳成龍爲留都大將。公言若控上國辭命。非成龍不可。成龍得西。乃後聞奏封牘。多成龍手。駕出。百僚皆散。宮中虛無人。雨注天黝。夜四鼓。中殿獨與女史十餘。步出仁和門。公執燭前導。中殿顧問。慰勉備至。駕薄臨津。上下相失。公同兵曹郞徒步。召集徒衆於泥淖中。至東坡驛。召大臣及尹斗壽問計。公首言我國兵力。無以當此賊。唯有西赴。仰籲父母之邦。到松京。拜吏曹參判鼇城君。加嘉善大夫。令護王子先詣平壤。大駕至。拜刑曹判書兼都摠管。加資憲大夫。未幾授大司憲。賊旣大蹂京城。急欲兩西而撇掇之也。廷議無定算。劻勷而已。公與漢陰李公德馨。協策建遣請天朝兵。又撥三調度。以管軍興。其卒成再造烈者。此爲之兆也。拜兵曹判書兼弘文館提學知經筵春秋館事同知成均館事世子左副賓客。臨津失守。或言當守平壤。或言咸興可據。公與左相尹斗壽力陳咸興非計。請幸寧邊。然群議猶主咸興。中殿東嬪先向德川。以取咸興路。而賊已逼浿水矣。漢陰公請出見賊將玄蘇,調信謀緩兵曰。兵苟毋緩。當斬兩將頭來。公止之曰。堂堂國家。豈可行盜賊事。駕離平壤。與漢陰申請進住寧邊。且自請赴遼東求救。兩公爭往。至夜分。宣廟用沈忠謙言遣漢陰入遼東。公送之南門。解所驂與之曰。兵不出。君當索我於重獲。漢陰曰。兵不出。吾當棄骨於盧龍。洒涕而別。聞者易容。守灘諸軍又潰。宣廟夜召諸臣議內附曰。父子同渡鴨水。國事無可幾。世子宜奉廟社主分往。予帶若干臣僚入義州。從予者誰。群臣莫對。公泣對請從。駕次博川。中殿自德川來會。而平壤陷報至。宣廟趣駕夜發。扈行者多道亡。天雨道隘。公慮有倉卒。謂椽屬曰。前茅甚疏。吾屬皆兵官。可先導疾驅而前。宣廟問知爲公。益重之。駕入義州。公言漢南諸路必謂大駕已渡遼。急發使諭湖,嶺起兵勤王。且令知行在所住。自此朝廷命令得通。而勤王之師始起。先是遼左有行言。朝鮮導倭入寇。兵部遣指揮黃應暘密覘我。公在朝時已虞有此事。求辛卯倭書來乃進之。應暘疑大釋。歸報皇朝。始議出兵。祖承訓,史儒等將三千兵先至。朝野皆言指日可捷。公曰祖將躁而寡謀。軍必敗。果大衂。承訓歸至。誣我兵反助倭賊。公請遣大臣伸辨。又請遣使乞發大兵。冬。提督李如松提兵四萬過江而東。公見其行師。白上曰。必成功。但幕下有鄭同知,趙知縣兩人用事。恐有沮撓。癸巳。得大捷復平壤城。而旣又掣於和議不更戰。實鄭趙二人爲之也。京師復。力請回鑾。十月。宣廟旋軫舊都。行人司憲奉勑來。未有先聲。朝廷猝知之。急授公遠接使。受命卽行。行人兼程疾馳。所過郡邑失措。賴公先後館待無缺。皇朝勑世子同戶,兵官進理全,慶軍務。公以兵官故。解儐任陪世子南下。甲午春。湖西賊宋儒眞反。分朝諸臣欲奉世子會大朝避賊。公上箚止之。頃之賊平。秋召還。兼舟師大將。算舟艦資魚鹽以息之。備綿布三萬疋輸之度支。乙未。吏曹判書兼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兼經筵知春秋館,成均館,義禁府事。丙申皇朝冊封日本。副价楊邦亨欲得公爲接伴。宣廟許之。公旣辭朝。乞解東銓文柄。拜右參贊。邦亨敬禮公曰。東國有此人。何可以外國輕之。公指正使李宗城曰。徒紈綺文墨爾。必辱命。後果然。冬。送楊使。丁酉春。判西銓。楊經略統大兵東來。難其儐。復推公。辭不起。同戶工官見經略於九連城。其條列問答俱彬彬光國。九月病免。十一月復授公。凡五長兵部。一長吏部。處心貞亮。關節不及。擬用除擢。唯視其才。一徇公議。無敢以他路進。官方有序。仕途以澄。朝廷僅存墻壁。而士夫稍知廉隅者。以公之在銓席也。其兵部也。丁水陸天兵之湊。事關本兵者。大者迅雷。少者牛毛。公游刃中窽。積而不苑。楊經略每値肯綮。必曰李尙書云。公去部。有萬匹布溢於恒用之外。部中傳以爲李尙書藏。久而猶守之。近世稱擧兵部者言。栗谷李公。公足當之。而以時之劇易言。公有加焉。戊戌秋。皇朝贊畫丁應泰誣搆我國上奏。宣廟震驚。大拜公加大匡輔國崇祿大夫右議政封府院君陳奏使。公辭不獲。星夜倍道進奏。日詣內閣,禮,兵部操文陳說。辭語明剴。禮容都雅。諸官拱手唯諾曰。國恥自湔。公無憂也。帝賜勑褒之。革應泰職。己亥復命。宣廟大悅。賜土田臧獲以嘉之。時議以應泰誣奏。移罪於接伴使白惟咸。下獄當罪。公爲委官。心知其冤。奏讞甚晳。宣廟原之。尋控免。庚子。拜都體察使兼都元帥。視師南土。上安民防海十六策。夏。以首輔還。六月。懿仁王后薨。時屬干戈。儀軌典籍燹滅無遺。公指授裁量。節文不惑。梓宮下山陵。夜半失火。上下遑惑。公當變不錯。招所司各職其職。導世子就位。行慰安祭。以是日克葬返虞。辛丑。乞釋負不從。公復起。請節經費正田制。開誠心。布公道。礪廉恥。宣廟嘉納。秋。奴酋通書請媾。公言此酋受爵天朝。人臣義無私交。且爲後世虞。請謝絶其使。壬寅春。三司交章論成牛溪渾。公上章救之。未及進。有人承柄臣旨。徑上疏專攻公。公引告。而撼公者益衆。卒以是去位。甲辰元朝。白虹貫日。公極言天人之際。終之曰。推誠當自納諫始。秉公當自用人始。世以爲知言。夏。錄扈聖功。公爲元勳。辭不允。拜領議政。亦控免。丙午秋。馬島夷義智詐械二死囚。稱犯陵賊來獻求和。時柳永慶擅國。欲自功。將行獻俘禮以夸耀之。公欲誅之釜山。以示倭使。永慶不聽。卒拿訊無所得。丁未十月。宣廟疾大漸。公受命祈于宗廟。翌日宣廟小愈。乃於戊申二月一日賓天。越翌日。光海踐阼。宣廟以日月之明。秉乾剛之德。早挈神器。托于光海光海。在春宮十七年矣。不幸宣廟寢疾。經年樂禍。喜功者因以揣摩。塞窌匿端。煽俑飛箝。以惑人聽。鄭仁弘封疏入而人情尤眩亂。禍端無窮。而先以臨海君爲注。中外遑遑。衛士擐甲守闕。宮門當晝不開者累閱月。有一諫官以臨海事來問者。公曰。服喪王子。形迹未著。胡據置辟。三司密告不軌。當流絶島。公獻議請全恩。論者目以護逆。全恩之說爲善流禍本。四月。爲左揆兼都體察使。六月。以摠護使封穆陵。纔畢。三司請誅臨海。且咎相府不廷爭。仁弘繼之。斥全恩之非。公上箚再辭不許。辛亥。仁弘封疏厚詆晦齋,退溪兩先生不宜祀孔廡。泮儒上疏辨之。削仁弘儒籍。仁弘之徒朴汝樑訐奏之。光海令禁錮首議者。公愕曰。亡國之擧也。通宵搆箚。至曙上之。諸生聞上命。捲堂而去。公又上箚陳之。及後引對。備錄晦齋事四條上之。仁弘由是大銜公。名卿善士重足累喘。讒譖蝟集。以擠公爲先務。乃倡體府兵權太重之說。欲必陷之死地。公日事求去。而至壬子。金直哉獄起矣。光海日御鞫廳。絲毫以上皆躬斷之。公隨事匡捄。詩人權韠以詩得罪竝繫訊。公離席苦諫不從。術官有以遷都之說進者。宰臣多和附。迎合上旨。公直言折之。癸丑夏。朴應犀上變。事有不忍言者。烈於戊申矣。被告之中有武人鄭浹者。公所未識也。有他大臣薦之。公擬於邊守。及是辭連當坐。公不赴朝。三司請誅永昌大君。而政府無廷請擧。有宰臣二人連日夜至公所。誘以禍福。危辭喝語。使人髮豎。子弟涕泣迭諫。公捋鬚毅然曰。吾受恩兩朝。位台鼎十六年。豈以垂死之年。自取汚衊。厚負兩朝。其宰知不可回。顧而之漢陰。如語公者。後日公與漢陰俱在鞫廳。臺官以大臣不伏閤顯斥之。漢陰謂公曰。子將如何。公曰。吾議在戊申之議矣。獄事日急。禍焰日起。臺官鄭造,尹訒等首發廢母之論。公謂漢陰曰。吾得死所矣。爲永昌死則傷勇。爲母后不死則傷義。慗使吾君爲造與訒之蔽也。而負累於天下後世乎。今人旣誣引春秋。我粗習春秋。當引經據義以破之。其所謂逆。未見其爲逆。故不敢討臣。而廢君之母。眞逆臣也。若或獻議。可進一箚。是夕至家。不解朝衣。坐外廊。子弟入問故。公曰。三網滅矣。我以大臣。承不世之遇。寧惜餘命。忍見此耶。當以舁尸爲期。大司憲崔有源來見公。公曰。萬代瞻仰。在此擧也。有源素敬公。乃定議。與二三僚貳於造,訒。其不卽廢母。由公言也。公具疏示漢陰。磨礪以竢。公以薦鄭浹遭劾而去。事已不可諧矣。光海遞公相拜西樞。乙卯。家督星男爲賊奴所告下獄。家人請循俗行賂。公正容止之。獄尋白。冬。仁弘疏言公罪不止此。三司請削黜之。光海留中不下。公就寓東郊。移卜小築於忘憂里。無幾微見色。倘佯山澗。麤糲不厭而怡如也。聞淸平水石之勝。跨一騾往。常雜於田夫野老。不知爲貴人也。丁巳十一月。廢母之論遂決。李爾瞻,金開,許筠呼召醜逆。袖疏赴闕。濫巾東序者承嗾而集。日不記其數。國內鼎沸。含生褫氣。公寢食俱損。忼慨不自已。忽大雷撼宇。公曰。天其戒告之矣。須臾樞府郞持上旨。令獻議。公方病。侍者扶起。奮筆書曰。誰爲殿下畫此計者。非堯不舜陳。古之明訓。虞舜不幸頑父嚚母。常欲殺舜。浚井塗廩。危逆極矣。號泣怨慕而不見其有不是處。誠以父雖不慈。子不可以不孝。故春秋之義。子無讎母之義。況爲伋也妻者。是爲白也母。誠孝之重。夫焉有間也。方今當以孝治國家。一邦之內。將有漸化之望。此言奚爲至於紸纊之下哉。爲今之道。體舜之德。克諧以孝。蒸蒸以乂。回怒爲慈。愚臣之望也。議至。見者懍懍至有潛相抆淚者。三司請絶邊圍籬安置。凡四易配所。配三水而止。光海命移北靑。戊午正月到配。三月遘疾。有感夢之異。曰。吾其不久乎。聞奴酋犯遼廣。天將檄召我兵。而朝廷不許。涕下曰。國不復競矣。越二日不淑。是月十三日也。享年六十三。公嘗謂家人曰。事國無狀。獲此恩譴。我死勿以朝衣。殮用所服深衣大帶云。七月。返輀於抱川先塋。八月。窆於參贊公墓左乙坐之原。都下人民聞公行遣。上自薦紳下逮諸曹故吏廝臺輿卒。靡不求謁。一路村氓閻婦。爭來瞻拜。稱章甫者。想望風儀。以爲矜式。洎卒。遠近之承訃會哭者。守宰邊將。持賵赴弔者。村居士夫操文酹告者。不知其幾。自初終。來守門外。殯而後散者。亦不知其幾人。嶺南士有不相識而千里來賻者。旣葬。有漬綿炙鷄。持三首詩及祭文。來哭墓下。不留謁而去者。亦莫知何人也。北靑抱川諸生。鳩材建宇俎豆公。朝廷設禁而終莫能止。噫。公何以得此於人哉。義烈足以感人。人心不可厚誣。孰謂公論在後世哉。公風采凝遠。壇宇軒豁。廣顙隆準。豐頰而白晳。鬚髥翩翩。長不踰中人而氣蓋一世。行不治邊幅而動有規則。曠乎其超乎俗也。裕乎其宜於物也。光明而洒落也。正大而特達也。恬乎其處順也。淡乎其不滓也。其奉先也儀篤於物。文掩於誠。其事君也犯而無隱。折而不易。其友愛也奉長昆如事親。待叔仲如一己。其親族也幽嘉盡道。疏戚無間。其鄕黨也故舊不渝。愚智同得。其居室也屋漏如康莊。閨闥如位著。其當官也如丁之解牛。如扁之見垣。其交際也惇信扶義。然諾必重。其取與也淸不欲近名。介不欲立異。其爲家也無數畝之籍。無遺籝之金。論人是非。善善長而惡惡短。處已毀譽。姸媸過而明鏡存。具茲衆美。統于大節。爰自釋褐。遇知宣廟。壬辰之訌。竭忠盡悴。一則公二則公。統總中兵。熸亂底平。入而冠冕士流。出而儲胥方隅。卒致黃道重明。紫蓋不愆。晉位鼎鉉。爲中興元功。卓乎事業之大。足以伯仲房,杜。而乃若丁巳一言。撑天柱地。日麗星經。身雖摧敗。人道由立。方之壬辰之功。不亦愈賢乎哉。少負氣義。晩而好學。己亥解相之後。捐棄世故。一意經史。求學自典謨洙泗至濂洛關閩。爲文自左國至秦漢。未嘗去手者二十年。稟高故見亦高。欲寡故理自明。語道妙則獨契昭曠之原。觀踐履則不失銖兩之細。端委廟堂則九鼎大呂也。披襟宴坐則丘壑雲水也。風標遐擧。超軼於埃壒之表。劍履黃閣。帶礪山河。特公之一浮雲爾。世之譾譾者。無怪天未測其涯量。而雖號知公者。亦不過班之於隨世立名之列。知人信不易哉。朝廷黨比相傾四十年餘。賢與不肖。莫不標榜。而公獨中立不倚。屹乎如泰山喬嶽。人不敢訾。而壬寅以來。時事日乖。衆正斂迹。公始不安於朝矣。後雖再入台鼎。而辭而不居。光海初政。復入中書。以先朝舊臣。不免復出。而事有大謬者。庸非邦國之不幸耶。公於文章。雅不屑爲。而取法則古。雄邁奇俊。自闢一家。章箚酋酋上薄兩京。間雜江左。尺牘爽朗。脫去畦逕。筆迹俊逸有法。老莊之玄放。仙佛之妙悟。靡不領會其旨。星象堪輿之家。虎頭岐黃之藝。亦皆通曉而不加竟也。嘗著涵養銘恥辱書床養夜戒晝警夕五箴以自課。詩文若干卷。朝天唱酬一卷。奏議二卷。啓辭二卷。四禮訓蒙一卷。魯史零語十五卷藏于家。公少號弼雲。或稱淸化眞人。晩號白沙。又號東岡。男二人。長星男蔭仕爲縣監。次井男。壬子司馬。亦仕爲監察。女一人適尹仁沃。側室男二人。長奎男。癸丑司馬。次箕男。女二人。一學官權侙。一幼。星男初娶判書權徵女。生一女一男。女崔煜進士。男時中。繼娶判官金季男女。生四女一男。曰時挺。餘幼。井男娶參議尹顗女。生一男一女。男曰時術。女幼。奎男娶權大純女。生一男一女。男曰時行。箕男娶朴信男女。生一女幷幼。欽少也。遇公於淸江門下。一見卽忘年。後與公對巷居三十年。顧公少許可。欽亦寡合。能相與於形骸之外。趣造定向。間有不言而同者。晩年愈契也。每抗談古今軌躅。論議逸發。不襲前人塗轍。自樹於胸中。而高明透徹。未始背於古賢。其豪資爽氣。近代所未見也。常幸世有知己者存。孰謂公去而欽獨踽踽也。嘗論曰。使生東魯。殆乎六藝之列。使生列國。庶幾國僑之政。有謝文靖之標致而篤於學。有韓忠獻之德量而立於節。非誇也。仍記公赴謫時貽尺書於欽曰。今日庶不負遼東翟黑子云。指漢陰也。欽於此淚涔淫。愧欽文不能爲惇史。烏可以不朽公。銘曰。

 

昔我宣祖。秉德當乾。毓才貯英。若苗藝田。時雨膏之。條風發之。惟時髦俊。蔚乎昌期。孰爲其宗。曰我李公。繄王有命。契合昭融。煌煌東觀。汝其會通。我有華衮。汝其粉米。邦運百六。滔天疇濟。公爲舟楫。繻有衣袽。斗極天奠。國步如初。王曰汝嘉。汝我股肱。畀之伊何。无輔是膺。遺之于後。俾贊洪圖。故劍旣收。庶展訏謨。事有不然。世矛公盾。砥柱中摧。台階宵隕。其說堂堂。折彼之角。其節卓卓。何有謠諑。於皇宣祖。宣祖有臣。金石或泐。日月長新。貤官賜祭。殷禮斯溥。天固有定。恩實異數。榮於公何。辱於公何。榮辱去來。公不少多。一味眞腴。靈性則全。濁世粃糠。火盡薪傳。咸池扶桑。乘風飄然。百世在後。百世在前。公在其間。不愧不怍。我銘詔之。昧者其作。<끝>

 

[편01]壺 : 壼

象村稿卷之二十六>神道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