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그 특사 18

이상설(李相卨)

독립운동가 이상설 1870. 12. 7 충북 진천출생~1917. 3. 2. 연해주 니콜리스크에서 순국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고종의 특사로 파견되었으나 외교권이 없는 나라의 대표라는 제국주의 열강의 반대로 실패하고, 이후 각국에서 외교운동을 벌였다. 1914년 이동휘(李東輝)·이동녕(李東寧) 등과 함께 중국과 러시아령 등에 있는 동지를 모아 대한광복군정부를 세웠다. 본관은 경주. 자는 순오(舜五), 호는 보재(溥齋)이다. 관직생활 및 국권회복운동 아버지는 행우(行雨)이나, 1876년 용우(龍雨)의 양자로 입양되었다. 1894년 조선왕조 마지막 과거인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춘방시독관에 제수되고 다음해 비서감비서랑에 임명되었다. 1896년 성균관 교수가 되고, 탁지부재무관에 임명되었으며, 이무렵 헐버트와 친교를..

第2回 萬國平和會議 提出 控告詞

第2回 萬國平和會議 提出 控告詞 [해설] 이 글은 고종(高宗)의 밀사(密使)로서 1907년 6월 27일자로 네델란드의 수도 헤이그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 의장과 각국 대표 위원들에게 보낸 이상설(李相卨). 이준(李儁). 이위종(李瑋鍾). 서명의 공고사(控告詞)와 그 부속 문서다. 이 글에서 밀사들은 한국에 대한 일제의 침략, 특히 1905년 11월에 늑결(勒結=을사늑약)된 을사오조약의 불법성을 규탄하였으며, 한국의 국권회복을 위한 세계 각국의 협조를 정당히 요구 하였다. 비교적 장문(長文)의 이 글은 역사적으로 일본의 침략상을 조리 있고, 생생하게 표현하였으며, 또한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명백히 밝혔다. 이 글 가운데서 을사오조약 체결 경위에 관한 부분은 이상설선생이 국내에서 직접 겪은 실담(實談)으로 ..

중명전(重明殿)

■ 중명전(重明殿) ↑최초 지어졌을 당시 중명전(1899년 아펜젤러 촬영-배재학당 소장) 중명전은 원래 정동지역 서양 선교사들의 거주지에 속해 있다가, 1897년 경운궁(현 덕수궁)이 확장되면서 궁궐로 편입되었다. 이때 당호를 ‘수옥헌’이라 짓고, 주로 황실 도서관(King's Library) 용도로 사용되었으나 1901년 화재로 전소된 후 재건되어 지금과 같은 2층 벽돌 건물의 외형을 갖추게 되었다. 건물의 설계는 독립문, 정관헌 등을 설계한 러시아 건축가 사바찐(A.I. Sabatin)이 하였다. ↑좌로부터 이준. 이상설. 이위종 중명전은 대한제국의 중요한 현장이다. 특히 1904년 경운궁(현 덕수궁) 대화재 이후 중명전으로 거쳐를 옮긴 고종황제의 편전(便殿)으로 사용 되었다. 1905년 11월 을사..

조국 광복의 지도자 보재 이상설선생 사적비

■조국 광복의 지도자 보재 이상설선생 사적비 조국을 찾아 민족의 정기를 세우려던 수많은 애국지사들 중에서도 광복의 최고 지도자는 보재(溥齋) 이상설(李相卨) 선생이시다. 이상설 선생은 제국주의 열강이 한반도를 에워쌌던 무렵인 1870년(고종 7년) 12월 7일 이곳 진천군 덕산면 산척리 산직마을에서 선비 이행우(李行雨)와 벽진 이씨(碧珍李氏)의 장남으로 탄생하시었다. 선생의 자는 순오(舜五), 호는 보재(溥齋), 본관은 경주이씨(慶州李氏)이고, 고려 말의 명유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의 22대 손이 되시며, 어려서 이조참의(吏曺參議)를 지내시던 이용우(李龍雨)에게 출계(出系=양자)하여 학문에 전심하시었다. 선생은 25세가 되던 해인 1894년 갑오문과(甲午文科)에 급제하시고, 이미 율곡(栗谷) 이이(..

이상설선생 뉴욕항 입국 기록 발견

[뉴스데스크] 일제시대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도산 안창호 선생과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로 파견됐던 이상설. 이위종 선생 등이 1900년대 초 미국 뉴욕항에 입국했던 기록이 처음으로 발견됐습니다. 특히 안창호 선생의 1911년 입국 기록에는 한일합방 이후임에도 불구하고 국적이 코리아로 돼 있는데, 이 기록들은 미국의 한 재단에서 인턴으로 일하고 있는 한국인 대학생이 찾아내 뉴욕 총영사관에 전달했습니다. (SBS)

보재 이상설(溥齋 李相卨)

■ 보재 이상설(溥齋 李相卨) 경주이씨 39世 익재공(益齋公)후 오촌공파(梧村公派) 이상설선생 존영 보재(溥齋) 이상설 선생은 1870년 12월 7일 충북 진천군 덕산면 산직마을에서 경주이씨(慶州李氏) 이행우(李行雨) 선생과 어머니 벽진이씨(碧珍李氏)의 큰아들로 태어났다. 7세때 이용우(李龍雨) 선생의 양자(養子)로 입양 되어, 서울로 상경한 그는 한학을 공부하는 한편, 이범세(李範世). 여규형(呂圭亨). 이회영(李會榮). 이시영(李始榮) 등과 함께 신학문을 배웠다. 헐버트(Hulbert, H.B.)와도 친교를 맺어 영어, 불어를 익히고 수학, 물리, 화학, 경제학, 국제법 등을 공부하였는데, 두뇌가 명석하고 학문에 대한 열의가 대단하였다. 25세 때인 1894년(고종 31) 조선의 마지막 과거인 갑오전..

헤이그 밀사는 살아있다.

■ 헤이그 밀사는 살아있다. ●조선족의 고향 연변, 연변에서도 조선족의 비율이 가장 많은 용정, 그 용정에서 올 9월 20일 개교 100주년을 맞이하는 학교가 하나 있다. ‘용정실험소학교’. 우리식으로 말하면 시범학교인 셈이다. 용정실험소학교의 100년 전 이름은 서전서숙(瑞甸書塾)이다. 서전서숙은 1906년 북간도에 설립된 대한제국 최초의 신학문교육기관으로 1907년 고종의 특명으로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파견됐던 특사(이상설, 이준, 이위종) 가운데 한 분인 이상설(1870~1917) 선생은 을사늑약(1905) 이후 망국의 어두운 그림자가 대한제국에 드리우게 되리란 것을 예감하고 이동녕, 정순만, 여준 등 애국지사들과 함께 북간도로 망명, 용정촌에 설립한 사립학교다. 서전(瑞甸)은 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