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보재이상설선생.

헤이그 밀사는 살아있다.

야촌(1) 2006. 10. 13. 18:32

■ 헤이그 밀사는 살아있다.

 

●조선족의 고향 연변,

 

연변에서도 조선족의 비율이 가장 많은 용정, 그 용정에서 올 9월 20일 개교 100주년을 맞이하는 학교가 하나 있다. 

‘용정실험소학교’. 우리식으로 말하면 시범학교인 셈이다. 용정실험소학교의 100년 전 이름은 서전서숙(瑞甸書塾)이다.

 

서전서숙은 1906년 북간도에 설립된 대한제국 최초의 신학문교육기관으로 1907년 고종의 특명으로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파견됐던 특사(이상설, 이준, 이위종) 가운데 한 분인 이상설(1870~1917) 선생은 을사늑약(1905) 이후 망국의 어두운 그림자가 대한제국에 드리우게 되리란 것을 예감하고 이동녕, 정순만, 여준 등 애국지사들과 함께 북간도로 망명, 용정촌에 설립한 사립학교다.


서전(瑞甸)은 용정시와 일송정 사이의 너른 들판을 일컫는다. ‘상서로운 들녘’이란 뜻으로 연변에서는 속칭 세전벌로 일컫기도 한다. 일송정 너머 용정과 발해의 중경현덕부인 서고성 사이의 들녘은 해란 벌, 혹은 평강벌판이다. 이곳은 발해시대 때부터 벼농사를 지었던 곳으로 유명하다.


가을 일몰 무렵 일송정에서 굽이도는 해란강과 누런 들판을 바라보면 가슴이 뻥 뚫리고 마음이 한결 평화로워진다. 또 한 겨울 눈 덮인 들판도 정말 장관이다. 지난해 일송정에만 5번 올라갔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일송정에서 바라 본 세전벌과 해란벌은 계절마다 특색이 있다. 또 대낮보다는 일출 때나 일몰 무렵이 훨씬 더 운치가 있다. 


●그럼 서전서숙이 설립된 구한말 역사적 배경에 대해 한번 살펴보자.


1905년 9월 일제는 러.일 전쟁 승리의 기세를 몰아 러시아와 포스머드조약을 맺고 러시아를 조선에서 몰아내는 한편, 조선에서의 정치, 군사, 경제적 이익을 보장받고 외교권을 박탈해 식민지 야욕의 발판을 마련했다.


조선의 지식인들은 당시 교육구국운동을 펼쳐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고자 했다. 애국정신에 기초한 민족적 각성만이 국권회복을 위한 지름길임을 깨닫고 ‘내수외학’(內修外學). 즉 안으로는 나라의 힘을 충실히 기르고 밖으로는 선진 국가에서 배울 것을 주장하였다. 

 

이 근대교육 구국운동은 을사늑약 이후 전국에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 수많은 사립학교를 탄생시킨다.
1894년 갑오개혁 이후 조선에서는 서울과 지방의 행정중심지에 한성사범학교를 비롯 근대적인 성격을 띤 관립, 공립학교가 세워졌다. 

 

그 이전엔 한국 최초의 근대학교인 원산학사(1883)를 비롯 아펜셀러 선교사가 세운 배재학당, 스크랜턴 부인이 설립한 이화학당 등이 있었다. 그러나 일제통감부는 1906년 8월 친일파 내각을 사주해 갑오개혁 이후 실시해오던 ‘6년제 소학교령’을 폐지하고 ‘4년제 보통학교령’을 발표함으로써 초등교육 기간을 2년 단축시켰다.

 

또 ‘정치와 교육의 분리’를 내세워 초등학교에는 일본인교감을 배치하고 중등학교에는 일본인학감을 집어넣어 학교 교육을 직접 감시하고 통제했으며 민족교육을 억제하고 노예교육을 강요했다. 대구 최초의 관립학교인 대구초등학교와 경북의 의성초등학교도 1906년 당시 설립됐다.

 

대구의 계성학교도 1906년 미국인 선교사 J.E 아담스에 의해 설립됐다. 이상설은 국내의 관립 및 공립학교가 결국 일제의 노예교육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고 판단하고 민족독립운동의 근거지를 북간도로 옮겨 일제에 항거하고자 했다.


1906년 4월 이상설 등 일행은 인천항에서 중국인의 상선에 올라 상하이로 갔고 그 곳에서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을 거쳐 8월 용정촌에 도착했다. 용정촌은 당시 일제의 탄압과 가난을 피한 조선인으로 가득한 곳이었다. 

 

그는 용정의 기독교 인사인 최병익의 집을 사비로 사서 동포의 자녀들을 교육시키는 요람인 서전서숙을 설립했다.

서전서숙의 초대 교장은 바로 이상설이다. 당시 교원은 이상설을 포함해 4명, 학생은 23명이었다고 한다. 서전서숙은 이상설의 개인자본에 의해 운영되었다. 

 

이 학교에서는 소, 중학교 교육을 통합한 근대교육을 실시했으며 반일사상으로 무장한 가운데 과학과 민주, 민족독립사상을 가르쳤다. 서전서숙은 20살 전후의 청년은 갑, 그 밑으로는 을로 반을 편성했다. 이상설은 갑학급의 산수신서(算數新書) 상, 하를 저술해 가르쳤고 황달영은 역사와 지리, 김우용은 산수를 가르쳤다.

 

또 여준은 한문, 정치학, 법학 등을 지도했다. 당시 이상설이 직접 쓴 산술신서는 일본의 우에노 기요시의 근세산술(近世算術)을 번역해 편집한 책으로 한국의 수학자들에겐 이상설이 ‘한국 근대 수학교육의 아버지’로 추앙받고 있다.


그러나 서전서숙은 1907년 4월 고종이 이상설을 특사로 헤이그에 보냄에 따라 재정난으로 어려움을 겪었고 또 일제가 연변에 간도파출소를 세우면서 서전서숙의 운영에 간섭하자 여준 등은 일제와 공동 경영할 수 없다고 항의하며 학교를 폐쇄하였다.

 

서전서숙은 8개월 만에 문을 닫았으나 서전서숙의 재학생들은 훈춘현 탑도구 부근으로 옮겨 1년간 교육을 받은 뒤 단기속성으로 3개 반에서 74명이 졸업했다. 이 와중에 일제는 매달 20원의 보조금을 지급하겠다고 제안하면서 친일교육을 시킬 것을 강권하였다.


서전서숙이 해산된 후 서숙의 교원과 졸업생들은 연변 각지에서 분산돼 국권을 회복하기 위한 사립학교 설립운동을 전개했다. 이때부터 연변의 교육은 옛 서당 수준에서 근대학교로 변신하게 된다. 명동학교, 창동학교, 길동학당, 장동학교, 정동중학, 영신중학, 은진중학 등이 그것이다.


조선관내에선 친일교육이 뿌리를 내렸으나 1910년대부터 북간도 지역엔 사립학교가 더 늘어났다. 이는 북간도가 독립운동의 실질적인 거점이 될 것이란 믿음에서 비롯된다. 1928년 당시 통계에 따르면 북간도지역엔 사립학교가 211개가 있었다. 서간도와 동간도에도 사립학교가 우후죽순처럼 생겼다.

 

1929년 전 간도지역엔 조선인 사립학교 수가 470개, 교원은 839명, 학생은 16,929명이었다. 사립학교의 주된 교육방침은 교육을 통해 민족혼을 심고 나라를 되찾기 위함이 그 목표였다. 서전서숙은 100년간 간도보통학교, 홍중우급학교, 3.1소학교 등 16차례나 교명변경을 거쳤다고 한다.

 

지금까지의 교장은 28명. 초대 교장이후 2대에서 12대까지 일본인이 교장을 했지만 광복이후부터는 조선족교장이 맡고 있다. 이 학교 출신은 연변의 대표적인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인 심연수의사, 중국과학원 강경산 씨를 비롯 남한, 북한 ,중국 등 각지에 흩어진 3만 여명의 졸업생이 있다. 현재 용정소학교는 34개 학급에 학생 1천 250명, 교사 124명이 있다.

 

●북간도에 작은 밀알을 뿌린 비운의 선구자 이상설의 일생은 어떠했을까? 


선생은 1870년 충북 진천군 덕산면 산직마을에서 경주이씨 이행우 선생과 벽진 이 씨 어머니 사이에 큰 아들로 태어났으나 7세 때 이용우 선생의 양자로 편입돼 서울로 상경한 후 한학을 공부했다. 어려서부터 총명했던 그는 이미 20대 초반에 율곡 이이를 따라갈 만한 학자라고 칭송을 받을 만큼 유학에 조예가 깊었다.


청일전쟁, 동학농민혁명, 갑오개혁 등이 일어났던 1894년. 이상설은 25세의 나이로 조선왕조 최후의 과거시험인 갑오문과에 급제했다. 이승만은 당시 20세. 그는 이 마지막 과거에 낙방한 뒤 배재학당에 입학했다. 김구는 당시 19세였다. 그는 2년 전 과거 낙방의 고배를 마시고 동학에 투신, 아기접주가 돼 해주 성 공략의 선봉에 섰다.


벼슬길에 오른 보재 이상설은 성균관 교수 겸 관장을 하다가 한성사범학교 교관에 임명됐다. 이 무렵 그는 미국인 선교사 헐버트를 만나 영어, 불어 등 외국어와 수학, 물리, 화학 ,경제학, 법학 등 신학문을 깨쳤다. 1904년 일제가 황무지개척권을 요구하자 그는 침략성과 부당성을 들어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1905년 그는 의정부 참찬에 발탁됐다. 그해 11월 이또오 히로부미가 조약을 체결하러 온다는 사실을 알고 반대운동을 추진했다. 그러나 실무책임자인 참찬이었으나 일본군인의 제지로 대신회의에 참석하지 못한 채 을사오적의 찬성으로 을사늑약체결을 하게 됐다. 

 

그는 늑약을 파기할 것을 주장하는 상소를 5차례나 올리고 종로거리로 나와 통곡을 하면서 항쟁 연설을 한 뒤 자결을 시도하다 시민들의 제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06년 그는 간도로 발길을 돌렸다. 당시 용정을 비롯한 북간도는 조선의 많은 이주민들이 터를 잡아 살고 있었고 일제의 감시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웠기 때문이었다.

 

그는 일제에 대항할 인재를 기르기 위해서 사비를 털어 북간도에 연변 최초의 근대학교인 서전서숙을 세웠다.

그러나 1906년 그의 간도행이 영원히 고국으로 돌아 올 수 없는 운명이 될 줄 그도 몰랐을 것이다.


1907년 그는 고종의 밀명을 받고 이위종, 이준과 함께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파견됐다. 그러나 일본과 영국 등 제국주의 열강의 방해로 회의장에 참석을 하지 못한 채 한국의 독립을 주장하는 외교활동을 벌이다 밀사 중의 한명인 이준이 분사했다.


그해 7월 두 밀사는 영국, 프랑스를 직접 순방해 일제의 한국침략을 폭로하고 독립을 주장했다. 일제는 이를 알고 국내에서 궐석재판을 열어 이상설을 사형, 이준과 이위종에게는 종신형을 선고한다. 이상설은 국내입국을 포기하고 미국을 거쳐 러시아로 가 연해주 블라디보스톡에서 독립운동기지인 한흥동을 건설한다.


여기서 활동하던 그는 1910년 이범윤, 이남기 등과 함께 연해주의 의병을 모아 13도 의병군을 편성하고 유인석을 도총재로 추대했다. 또 한일병탄 후 연해주와 간도 일대의 동포들을 규합해 성명회를 조직,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일제의 사주로 러시아 관헌에게 체포돼 니콜리스크로 추방됐다가 다시 블라디보스톡으로 돌아왔다. 

 

그는 1914년 한흥동을 거점으로 다시 권업회와 신한혁명단을 조직하고 교민들에게 독립운동 사상을 고취시키는 권업신문을 만들었다. 그는 의친왕을 내세워 망명정부를 세우려다 1916년 병을 얻어 1년간 투병하다 48세의 일기로 순국했다.

그는 그의 임종을 지켰던 동료들에게

“동지들은 합세하여 조국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조국광복을 이루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인들 조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은 모두 불태우고 그 재도 바다에 날린 후 제사도 지내지 말라” 고 하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생전에 남긴 그의 저작도 모두 모두 불태워져 그의 공훈에 비해 남아있는 자료는 거의 없다. 그러나 이상설은 비운에 갔어도 용정실험소학교에는 서전서숙 기념비와(1995년) 이상설을 기념하는 정자(2000년)가 있다.(사진) 

 

또 그가 심었다고 하는 나무도 한 그루 남아있다. 9월 20일 용정실험소학교에서는 재학생들의 민속공연과 함께 100주년 기념식이 성황리에 펼쳐졌다고 한다. 이에 앞서 연변에서는 ‘중국 조선족 근대교육 1백주년 학술대회도 열었다.


●비운의 선구자가 뿌린 작은 밀알이 1백년이 지나도록 죽지 않고 살아 그가 심은 나무같이 울창하게 큰 그늘을 만들었

   다.  그러나 현실은 어떨까?


당시 조선인이 90퍼센트 이상 살던 북간도의 용정을 비롯한 연변은 중국의 동북3성이 되었지만 형식적으로나마 재중동포자치주를 이루며 살고 있다. 조선족학교도 아직은 한족학교보다 많다. 그러나 동포 아이들은 민족의 말과 글은 배우지만 한민족의 역사를 알지 못하고 중화민족의 역사를 배우고 있다.

 

동포들은 점점 연변을 떠나고 있고 그 빈자리는 한족들이 속속 채우고 있다. 심지어 중국은 고구려와 발해까지 그들의 역사로 편입시키고 있다. 겉으로는 자치지만 사실 동화정책이나 다름없는 중국에 이미 동화돼 말과 글을 알지 못하는 동포들도 부지기수로 늘어나고 있다.

 

더욱이 한심한 것은 마치 미국의 재미동포가 우리말을 하나도 몰라도 전혀 부끄럽지 않아 하듯 일부 몰지각한 조선족 지식인과 관리들이 세계에 떠오르는 중화민족의 구성원이 되기를 자청해 그들의 자녀에게 한민족의 말과 글보다 중국말을 먼저 가르치고 동화에 앞장선다는 점이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그 사회에서 출세하고 잘 먹고 부요하게 살기위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고 강변할지 모르겠지만 중국의 한족(漢族)이나 미국의 와스프(WASP) 등 주류사회로부터는 뒤로 ‘얼빠진 녀석’ 이란 비아 냥을 들을지도 모른다.

 

한국이 지금의 저 출산율을 계속 유지해 2080년이 되면 이 지구상에 한민족이 사라진다고 한다. 그렇게 되길 바라는 국민은 얼빠진 일부를 제외하곤 아무도 없다. 유태인과 만주족을 비교해 보자. 어려서부터 부모와 랍비로부터 철저한 유태교육을 받는 유태인들은 평생을 가도 그들의 정체성을 잃지 않는다.

 

이 시대 미국의 주류는 단연코 유태인이며 지금도 세계를 좌지우지하고 있다. 그 힘은 바로 유태인의 교육철학에 있다. 

만주족은 어떠한가? 우리와 같이 동이(東夷)였던 그들은 선양이나 요양, 신빈에 가면 그 흔적이 비문에 약간 남아 있을 뿐이다. 베이징 자금성의 서까래 밑에서 만주족의 글자를 확인해 본 적이 있는가?


중국에 남아있는 만주족은 약 1천만명으로 동북3성에 주로 살고 있다. 지난 해 한 만주족 친구와 중국의 서남쪽인 쓰촨성으로 여행을 열흘간 간 적이 있다. 그 친구는 만주족이었지만 부인은 한족이었다. 그 친구는 말수도 적었고 말투도 투박했다. 소수로 거대한 한족을 집어삼켰던 만주족의 후예답게 씩씩하고 남자다웠다. 

 

그의 부인은 그 친구의 카리스마에 눌린 듯 기를 펴지 못하는 듯 했다. 선양으로 오는 마지막 밤 그와 같이 통음을 하며 은근슬쩍 “너의 조상(금나라, 청나라)은 우리 민족과 같은 동이족인데 지금 너희들은 한족에 동화돼 문자도 글도 잃어버려 좀 억울한 점이 없느냐”고 물었더니 “메이쓰”,“씨엔자이 만주 허 한주 이양” 이라고 말했다. 

 

대답인즉 “한족과 만주족은 같다”고 말하며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한족 여인과 결혼한 친구에게 그런 질문을 한 것이 우문이었으나 난 속으로 “얼빠진 녀석”이라고 생각하고 같이 웃어버렸던 적이 있다. 만주족은 현재 호적에만 구분돼 있을 뿐이지 대부분 그 친구처럼 한족과 구별하지 않는다.


중국의 동북방, 즉 우리의 북방지역엔 중국이 말하는 소수민족이 꽤 있지만 조선족을 빼곤 있으나 마나다. ‘몽골족, 오르천족, 다우얼족, 어원키족, 허저족, 만족 등이 있지만 자기 말을 제대로 할 줄 아는 민족은 조선족밖에 없다. 

 

거란족이 이 지구상에 갑자기 사라졌다지만 그 대부분은 현재 내몽골의 한족이라고 보면 된다. 만주족은 약 1백여 명만이 만주족의 말을 할 줄 알고 그 중 일부 학자만이 그들의 문자를 해독할 수 있다고 한다.


그 친구의 말처럼 지금의 만주족은 곧 북방의 한족인 셈이다. 지금도 중화주의에 의해 중국 땅에서는 소수민족이 하나 둘씩 사라지고 있다. 이제 조선족에 동화작업을 본격적으로 하자니 한국이 난리다. 마치 벌집을 쑤셔놓은 것처럼 말이다. 한국이 유일하게 대륙의 끝에서 쓸개처럼 남아있을 수 있었던 이유를 요즘은 알 것 같기도 하다.


이상설 선생 같은 분은 한국이 유일하게 대륙의 끝에서 쓸개처럼 남아있을 수 있었던 이유를 증명해주는 독립운동가다. 당시에도 을사오적 같은 미꾸라지들이 있었지만 선생 같은 선구자와 선각자들의 희생과 헌신이 있었기에 우리들은 그 분들이 판 우물의 샘물을 먹으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님이 그토록 바랐던 조국의 독립은 이루었으나 남과 북은 또다시 외세와 민족의 분열로 분단됐다. 당시 조선인의 거류지였던 용정을 비롯한 연변은 이제 중국이 실효적으로 점유하고 있다. 그곳에는 조선족학교와 한족학교도 많다.

 

그러나 요즘도 모든 역경을 뚫고 국적까지 미국 국적으로 바꿔가며 이상설 선생과 같이 동토와 북토에 민족의 씨앗을 뿌리는 한국인들이 있다. 연변과기대는 그 중 대표적인 대학이지만 외부에 잘 알려지지 않은 작은 학교가 하나 더 있다.


●2002년 9월 우리민족의 개척지이며 항일 독립운동의 발원지로 겨레의 얼과 숨결이 베이고 선조들의 발자취가 남아있

   는 용정에 또 한분의 이상설 선생 같은 한 한국인이 학교를 설립했다.


‘용정종합고중’ 이 학교의 이념은 독특하다. 재중동포(조선족) 청소년들에게 교육을 통해 국가와 민족과 이념의 벽을 넘어 인류를 위한 봉사를 실천하는 민족의 대들보로 육성하는 한편, 민족의 정체성을 갖춘 코리언 차이니스의 중심인물이 돼 세계적으로 쓰임 받는 인재를 키운다는 목표다.


교육학 박사인 이상현 교장은 한국의 모 대학에서 마련한 좋은 자리를 마다하고 혼자 북방으로 가 실업고등학교를 세웠다. 지금도 용정의 한 허름한 여관에서 혼자 자취를 하며 민족 교육 사업을 펼치고 있다. 교원들은 약 20명 내외로 모두 조선족이다. 

 

졸업생은 이제 100여명 정도. 대체로 이 학교의 조선족학생들은 가난으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어려운 가정형편 출신들이다. 지금까지는 교장선생님의 국내외 인맥을 통한 후원금과 한국, 미국, 캐나다 등지에서의 강연활동 등으로 마련한 수익금으로 이 학교는 지금 그럭저럭 유지되고 있다. 

 

그러나 중국 당국의 석연찮은 간섭으로 폐교할 뻔 했던 적도 있지만 위기를 넘겼다. 결국 조선족 교육자에게 학교를 넘겨야겠지만 그는 아직 할 일이 더 있다고 했다. 2006년 1월 1일 그분과 함께 백두산 정상에 해맞이를 하러 갔다.

 

영하 40도 가까이 되는 백두산 정상에서 그는 자신의 일이 “중국과 전 세계에 흩어진 코리언 디아스포라(Korean Diaspora)를 위해 봉사하는 작은 미션일 뿐”이라고 말했다. 헤이그밀사는 아직 용정에 살아있다.

 

<자료원본>

영남일보 박진관 기자의 "옌벤기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