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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설의 눈물 유언

야촌(1) 2011. 10. 13. 20:28


“동지들은 합세하여 조국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조국광복을 이루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인들 조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은 모두 불태우고
그 재도 바다에 날린 후
제사도 지내지 말라”


                                      연해주 니콜리스크에서(1917. 3. 2)



[관직생활 및 국권회복운동]

 

선생의 아버지는 행우(行雨)이나, 1876년 용우(龍雨)의 양자로 입양되었다. 1894년 조선왕조 마지막 과거인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춘방시독관에 제수되고 다음해 비서감비서랑에 임명되었다. 1896년 성균관 교수가 되고, 탁지부재무관에 임명되었으며, 이무렵 헐버트와 친교를 맺고 신학문을 공부했다.

 

1904년 일제가 황무지의 개간권을 요구하자 박승봉(朴勝鳳)과 연명으로 그 침략성과 부당성을 들어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이해 8월 보안회(保安會)의 후신으로 결성된 대한협동회(大韓協動會)의 회장에 선임되었다. 다음해 법부협판·의정부참찬을 지냈다.

 

이무렵부터 여준(呂準)· 이회영(李會榮)· 이시영(李始榮)· 이범세(李範世) 등과 외국 서적을 들여다 만국공법(萬國公法)등 법률을 번역· 연구했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 결사반대와 오적의 처단을 주장하는 상소를 5차례 올렸으나, 12월 체직(遞職)되어 관복을 벗고 국권회복운동에 앞장서게 되었다.

 

당시 〈대한매일신보〉는 11월 24일자에 〈독이참찬소 讀李參贊疏〉라는 제목으로 '순사지의(殉社之義)로써 임금에게 고한 대충대의(大忠大義)의 사람은 오직 이참찬뿐'이라고 게재했다. 민영환(閔泳煥)의 순국 소식을 듣고 종로에서 민족항쟁을 촉구하는 연설을 한 다음 자결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망명과 헤이그 특사]

 

1906년 이동녕· 정순만(鄭淳萬) 등과 조국을 떠나 상하이[上海]와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러시아령 연추(煙秋)로 가서 이범윤(李範允)과 국권회복운동의 방략을 협의하고, 간도 용정촌(龍井村)으로 갔다. 이곳에서 또한 이상설(李相卨)은 민족주의 교육에서도 큰 자취를 남겼는데, 이동녕(李東寧), 여준(呂準), 정순만(鄭淳萬), 박정서(朴禎瑞),김우용(金禹鏞), 황달영(黃達永)등과 근대적 항일민족교육의 요람인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하고 신학문과 항일민족교육을 실시 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으로 다음해 문을 닫았다.

 

1907년 제정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발의로 네덜란드 수도 헤이그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되자, 고종은 그를 정사로 하고 이준(李儁)과 이위종(李瑋鍾)을 부사로 삼아 파견했다. 5월 차고려(車高麗)의 안내로 러시아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이르러 러시아 황제에게 고종의 친서를 전하고 헤이그에 도착했다. 그들은 대한제국의 실정과 국권회복 문제를 제기하고자 했으나 한일협약은 각국 정부가 승인했으므로 외교권이 없는 대한제국 대표의 참석과 발언은 허용할 수 없다고 거절 당해, 제국주의 열강의 이익협상의 장이었던 회의에서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그러나 6월 대한제국의 정당한 주장을 밝힌 〈공고사 控告詞〉를 만국평화회의와 각국 위원에게 보내었고, 7월에는 이위종이 국제협회에서 세계 언론인들에게 '한국의 호소'를 연설하여 국제여론에 한국문제를 부각시켰다. 회의 참석이 끝내 거부되자 7월 14일 저녁 이준이 헤이그에서 순국하여 그곳 아이큰다우의 공원묘지에 매장하고, 이후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러시아 등 여러 나라를 직접 순방하면서 일제의 침략상을 폭로하고 대한제국의 영세중립화를 역설했다.

 

이 헤이그 밀사사건을 들어 일제는 특사를 위칭(僞稱)했다고 하여 재판에 회부, 궐석 판결로 이상설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이준과 이위종에게는 종신형을 선고하는 한편 선위(禪位)라는 미명으로 고종을 강제퇴위시켰다.

 

[외교운동과 망명정부 수립]

 

1908년 미국에서 대한제국의 독립 지원을 계속 호소하는 한편, 각지의 한인교포를 결속시키는 데 힘쓰고, 콜로라도 주에서 개최된 애국동지대표회에 연해주 한인대표로 참석했다. 1909년 국민회(國民會) 중심의 독립운동 확대를 위해 이위종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 이승희(李承熙)· 김학만(金學萬)· 정순만 등을 규합해 러시아와 만주 국경지방 싱카이 호[興凱湖] 남쪽 봉밀산(蜂蜜山) 부근에 한인을 이주시키고 최초의 독립운동기지라 할 수 있는 한흥동(韓興洞)을 건설했다.

 

1910년 국내외의 의병을 통합하여 보다 효과적인 항일전을 수행하고자 유인석· 이범윤· 이남기(李南基) 등과 연해주 방면에 모인 의병을 규합하여 13도의군을 편성, 도총재에 유인석을 선임하고 고종에게 13도의군 편성을 상주하고 군자금의 하사와 고종의 아령파천(俄領播遷)을 권하는 상소문을 올려 망명정부의 수립을 시도했다.

 

이해 한일합병이 체결되자 연해주와 간도 등의 한족을 규합하여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성명회(聲明會)를 조직하고 한일합병의 반대운동을 전개했으며 미국· 러시아· 중국 등에 일제의 침략규탄과 한민족의 독립결의를 밝히는 선언서를 보냈다. 이해 일제의 교섭에 의해 러시아 관헌에 체포되어 니콜리스크로 추방되었으나,

 

다음해 다시 블라디보스토크으로 왔다. 김학만· 이종호(李鍾浩)· 정재관(鄭在寬) 등과 권업회(勸業會)를 조직하여 〈권업신문 勸業新聞〉을 간행하고 한인학교를 확장시키는 한편, 한인교포의 경제향상과 항일독립운동을 위한 기관으로 발전시켰다.

 

1914년 이동휘· 이동녕· 정재관 등과 함께 중국과 러시아령 안에서 규합한 모든 동지들을 모아 한일합병 후 최초의 망명정부인 대한광복군정부를 세워 정통령에 선임되었다.

 

그러나 대한광복군정부는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일본과 러시아가 연합국으로 동맹하여 한인의 정치· 사회 활동을 엄금했기 때문에 표면적인 활동을 하지 못한채 해체되었고, 권업회마저 러시아 관헌에 의해 해산당했다.

 

1915년 상하이에서 박은식· 신규식· 조성환 등이 신한혁명단을 조직하여 본부장에 선임되었다. 1917년 망명지인 연해주 니콜리스크에서 병으로 죽었다.

 

"조국광복을 이루지 못했으니 몸과 유품은 불태우고 제사도 지내지 말라"는 유언에 따라 유해는 화장하고 문고도 모두 불태워졌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고, 1971년 보제 이상설 선생 기념사업추진위원회에서 숭모비(崇慕碑)를 건립하고, 1975년 숭렬사(崇烈祠)를 건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