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보재이상설선생.

보재 이상설(溥齋 李相卨)

야촌(1) 2009. 7. 26. 01:47

■ 보재 이상설(溥齋 李相卨)

   경주이씨 39世 익재공(益齋公)후 오촌공파(梧村公派)

 

이상설선생 존영

 

보재(溥齋) 이상설 선생은 1870년 12월 7일 충북 진천군 덕산면 산직마을에서 경주이씨(慶州李氏) 이행우(李行雨) 선생과 어머니 벽진이씨(碧珍李氏)의 큰아들로 태어났다.

7세때 이용우(李龍雨) 선생의 양자(養子)로 입양 되어, 서울로 상경한 그는 한학을 공부하는 한편, 이범세(李範世). 여규형(呂圭亨). 이회영(李會榮). 이시영(李始榮) 등과 함께 신학문을 배웠다.

 
헐버트(Hulbert, H.B.)와도 친교를 맺어 영어, 불어를 익히고 수학, 물리, 화학, 경제학, 국제법 등을 공부하였는데, 두뇌가 명석하고 학문에 대한 열의가 대단하였다. 25세 때인 1894년(고종 31) 조선의 마지막 과거인 갑오전시(甲午殿試) 병과(丙科) 2위로, 급제하여 성균관 관장(成均館 館長), 한성사범학교 교관, 탁지부재무관(度支部 財務官, 등을 거쳐서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 : 종2품)에 승진하였다.

 

1904년 6월 박승봉(朴勝鳳)과 연명으로 일본인의 황무지개척권의 요구를 거부해야 한다는 상소 곧 [일인요구 전국 황무지 개척권 불가소(日人要求 全國 荒蕪地 開拓權 不可疏)]를 올렸는데 고종이 상소를 받아들여, 일인의 요구를 물리쳤다. 이해 8월 보안회의 후신인 대한협동회(大韓協同會)의 회장에 추대되었다.

 

1905년(고종 38) 학부협판(學部協辦)과, 법부협판(法部協辦)에 보임되고 11월초에 의정부 참찬(議政府 參贊 : 종2품)에 올랐다. 1905년 그해, 11월에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 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 군부대신 이근택(李根澤), 학부대신 이완용(李完用), 농상부대신 권중현(權重顯) 등, 을사5적(乙巳五賊)의 찬성으로 을사늑약(乙巳勒約)을 체결하려할 때, 공은 대신회의의 실무책임자였으므로 회의에 참석하여 조약을 저지하려 하였으나 일본의 철저한 제지로 끝내 들어가지 못하였다.

 

을사늑약은 강제로 체결되었으나 고종이 인준하지 않았음을 알고 선생은 5적을 즉시 처단하고, 조약을 파기할 것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나아가서 조병세(趙秉世). 민영환(閔泳煥). 심상훈(沈相薰) 등의 원로대신을 소두(疏頭)로 하는 백관반대상소(百官反對上疏)와 복합상소(伏閤上疏)를 올리도록 주선하였다.

 

11월말에 민영환이 자결했다는 소식을 듣고 종로로 나와서 울면서 “민족의 궐기와 결사항일투쟁”을 호소한 다음, 현지에서 울분을 참지 못하여 자살을 기도 하기도 했다. 이때 1906년 봄, 오직 구권회복을 위한 길은 항일투쟁 밖에 없음을 께달고, 이동녕(李東寧). 정순만(鄭淳萬) 등과 비밀리에 북간도 용정(龍井)으로 망명하여 8월에 자신(自身)의 비용으로 항일민족교육의 요람인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하고 숙장(塾長)이 되었다.

 

여기에서 이동녕 등과 함께 역사. 지리, 수학, 국제법, 정치학 등의 신학문과 민족교육을 실시하였다. 1907년 6월에 고종의 밀지(密旨)를 받고 네델란드의 헤이그에서 열리는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특파되었다. 이때에 이상설선생은  정사(正使)였고 부사(副使)로는 이준(李儁)과 이위종(李瑋鍾)이 보좌했다.

 

일행은 현장에 도착하여 "국권회복(國權回復)을 위하여, 온갖 노력을 기울였으나 일본의 간악한 방해 공작에 의하여 회의에 참석조차 거부되는 참경에 이르렀으나, 선생은 대한제국의 현황과 주장을 밝힌 성명서 <공고사(控告詞)>를 헤이그에 모인 세계 각국의 대표에게 보내는 등, 국권회복에 있는 힘을 다하였다.

 

일행 가운데 불행하게도 현지에서 이준(李儁)이 숙환(宿患)으로 죽게되자, 선생이 자기손으로, 헤이그 서쪽 외곽에 있는 니우 에이컨다위넌(Nieuw Eykenduynen) 시립공동 묘역에 장례를 치렀다. 그후,  호모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 이위종(李瑋鍾). 송헌주(宋憲澍). 윤병구(尹炳球) 등을 대동하고 영국 → 프랑스 → 독일 → 미국 → 러시아 등지를 순방하면서 일제의 침략상을 폭로하고 대한제국의 독립만이 동양평화를 보장하는 길이라는 것을 역설하였고, 더불어 대한제국의 <영세중립>을 제의하기도 했다.

 

이러한 일련의 애국활동을 문제삼은 일제는 그들의 주구(走狗)들을 시켜, 국내에서 선생을 궐석재판에 회부하여 [사형]을 선고하고 이준, 이위종 에게는 종신형을 선고했다. 1908년에는 1년 동안 미국에 머물면서 미국의 조야에 독립을 지원해 줄 것을 호소하는 한편 각지에 산재해 있는 교포들을 규합하여  <조국의 독립운동을 주도하는 세력>으로 끌어 올리는데 온 정성을 다하였다.

 

그러한 결실로 동년 8월에, 콜로라도주 덴버에서 열린 <애국동지 대표자대회>와 이듬해 4월에 열린 <국민회 제1회 이사회>를 열리게 되었다. 이때에 공과 함께 재미교포의 애국운동을 위한 조직화사업에 동참한 대표적 인물로는 이승만(李承晩)과 국민회 총회장 최정익(崔正益) 이었다.

 

다시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온 선생은 이승희(李承熙). 김학만(金學萬). 정순만 등과 더불어 항카오(興凱湖) 남쪽 봉밀산(蜂密山) 부근의 땅 45만방(方)을 구입하여 한인 교포 100여 가구를 이주시키고 “한흥동(韓興洞)” 이라고 명명하여 최초의 독립운동 기지를 마련하였다.

 

이어서 국내외의 의병들을 통합하여 보다 강력한 항일전선을 구축하고자 1910년 6월에 유인석(柳麟錫). 이범윤(李範允). 이남기(李南基) 등과 회동하고 연해주 방면에 모인 의병을 통합하여 13도의군(十三道義軍)을 편성하였다.

 

7월에는 전 군수 서상진(徐相津)을 국내에 보내어 고종에게 13도의군의 편성을 아뢰고 군자금을 내려줄 것과 망명정부의 수립을 추진하겠다는 상소문을 올렸다. 8월에 나라가 망하자 연해주와 간도 등지의 교포를 규합하여 [성명회(聲明會)]를 조직하였고. 9월에 일본의 음모에 넘어간 러시아가 공의 일행을 체포하여, 연해주의 니콜리스크로 추방하였기 때문에 함께 쫓겨 갔다가 다시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왔다.

 

1911년 한민장(韓民長). 김학만. 이종호(李鍾浩). 최재형(崔在亨) 등과 [권업회(勸業會)]를 조직하고 회장에 취임하여 ≪권업신문≫의 주간을 함께 맡기도 했다. 1913년 이동휘(李東輝). 김립(金立). 이종호(李鍾浩). 정재관(鄭在寬) 등과 나자구(羅子溝)에 [사관학교]를 세워 광복군의 장교를 양성하였고. 이듬해에 이동휘(李東輝). 이동녕(李東寧). 정재관( 鄭在寬)등과 중국과 러시아령 안에서 동지들을 모두 규합하여 <대한광복군정부(大韓光復軍政府)>를 수립하고 정통령(正統領)에 추대 되었다.

 

 1915년 3월 중국 상해(上海) 영국조계(英國租界)에서 박은식(朴殷植). 신규식(申圭植). 조성환(曺成煥). 유동열(柳東說). 유홍렬(劉鴻烈). 이춘일(李春日) 등과 함께 <신한혁명단(新韓革命團)>을 조직하고 본부장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선생 께서는 12년의 오랜세월 동안 홀로 가족과 떨어저 자신의 몸은 돌보지 않으시고, 오직 조국의 광복운동에 심신을 바친 망명 생활로, 결국 몸이 쇠약해저 시베리아 하바로프스크에서 병석에 눕게 되었는대, 이동녕(李東寧), 백순(白純) 등의 동지들이 시베리아에서 가장 온화한 니콜리스크로 옮겨 선생을 정양(靜養)하게 하였으나, 끝내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동지와 후배들에게 서릿발 같은 유언을 남긴체 1917년 3월 2일 차디찬 이국 땅에서 48세의 한참 일할 나이에 임종을 맞이하게 되었다.

 

임종의 순간에 내린 그의 유언은

 

"동지들은 합세하여 조국 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조국 광복을 이룩하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니

내가 어찌 고혼인들 조국에 갈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 유고는 모두 불태우고,

그 재마저 바다에 날린후에 제사도 지내지마라"

 

이같은 선생의 임종을 지킨, 이동녕(李東寧), 백순(白純), 조완구(趙琬九), 이민복(李敏馥), 등은 선생의 유언에 따라 아무르 강가에 장작을 쌓아놓고, 화장한 후, 그 유골 조차 가루로 만들어, 날려 버리고, 그의 유고와 유품 일체를 모아, 남김없이 불살라 버렸다.

 

그후 1962년 3월 1일 대한민국정부에서 독립유공자로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다.  숭렬사(崇烈祠)에 매년 봄 제향(祭享) 되고 있다.

 

글 이재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