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오사화 10

연좌 3족 멸문지화(緣坐 三族 滅門之禍)

■ 연좌 3족 멸문지화(緣坐三族滅門之禍) ​ ​1411년 11월 16일 의정부(議政府)에서 태종에게 아뢰기를 "대명률(大明律) 모반대역조(謀反大逆條)에 이르기를 ‘무릇 모반대역(謀反大逆)과 다만 공모(共謀)한 자는 수범(首犯)·종범(從犯)을 나누지 않고 모두 능지처사(凌遲處死)하고, 부자(父子) 16세 이상은 모두 교형(絞刑)하고, 15세 이하의 모녀(母女), 처첩(妻妾)·조손(祖孫)·형제(兄弟)·자매(姉妹), 자식의 처첩은 공신의 집에 주어서 종을 삼는다. 아울러 그들의 재산은 관가에 몰수하고, 남자 나이 80과 독질(篤疾) 부인(婦人) 나이 60과 폐질(廢疾)은 아울러 연좌(緣坐)의 죄를 면하고, 백숙부와 형제의 자식은 호적의 같고 다른 것에 관계없이 3천리에 유배를 시켜 안치(安置)하고, 연좌된 사..

사대사화(四大士禍)

영남파와 기호파로 나눠진 훈구와 사림의 파벌과 사대사화. "기호(畿湖)"란 경기와 호서(충청도).호남(전라도)을 아울러 지칭하는 이름이다. 따라서 기호 지방이라고 하면 전라도도 포함되는 것이다. 영남 지방에는 고려 말에 정몽주(영천 출신), 길재(선산 출신), 정도전(본이 영주 봉화 출신), 하륜(진주) 등의 대학자들이 출현하여 많은 유학자들을 양성하였다. 그 후에도 김숙자(거창, 김종직의 아버지). 김종직(밀양 출신), 김굉필(현풍 출신), 정여창(진주), 이언적(경주), 이황(안동) 등 수 많은 유학자들이 배출되어 추로지향(鄒魯之鄕 : 공자 맹자의 고향)이라는 말이 있었다. 그래서 성리학이 발달하였고, 영남지방은 사림파의 온상이 되었다. 서울. 경기에는 워낙 벼슬하는 학자,.관료들이 많아 주로 관학적..

무오당적(戊午黨籍)

■무오당적(戊午黨籍) ●김종직(金宗直) 1431년(세종 13)∼1492년(성종 23) / 향년 62세 김종직의 자는 계온(季溫), 호는 점필재(佔畢齋), 본관은 선산(善山)으로, 강호(江湖) 숙자(叔滋)의 아들이다. 세조 기묘년에 문과에 오르고 성종(成宗) 때 벼슬이 형조판서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며, 임자년에 죽으니 나이 62세였다. 무오년에 화가 묘(墓: 부관참시를 말함)에 미쳤다. 숙종(肅宗) 때 영의정을 증직하였다. ○ 공이 총각 때 날마다 수만 자(字)를 기억하고 20세 때에는 문명을 크게 떨쳤다. 어세겸(魚世謙)이 공의 시를 보고 찬탄하여, “나는 그의 종 노릇 밖엔 할 수 없다.” 고 까지 말하였다. 계유년에 진사, 기묘년에 문과에 올랐다. 성종(成宗)이 문사들을 뽑았는데 공이 제..

재사당집(再思堂集)

↑필자 소장본(1939년 石版本) 행록>정염(丁焰) 찬(撰) ↑묘갈명>김상헌(金尙憲) 찬(撰) ↑발문>이용우(李用雨) 찬(撰) ↑재사당선생 유필 ■ 재사당집(再思堂集) [序] 著雍攝提格(1938)...宋浚弼 [跋] 戊寅(1938)...金泰鎭 [跋] 著擁攝提格(1938)...李用雨 이원『李黿, 1471년(추정)~1504년(연산 10)』 조선 초기의 문신이다. 무오사화 때 김종직의 당인으로 지목되어 유배되었으며, 갑자사화 때 참형을 당하였다. 문장에 능하였는데, 저서《금강록》은 김일손이 당대 최고의 문장이라 평하였다. -----------------------------------------------------------------------------------------------------------..

나주 영강사 향토문화유산 고시

■ 나주 영강사 향토문화유산 고시 나주시향토문화유산보호조례 제10조의 규정(나주시향토문화유산보호위원회 심의 : 2010. 12. 24.)에 따라 나주시향토문화유산(지정구역 포함)으로 지정키로 심의된 문화유산을 행정절차법 제46조의 규정에 따라 지정고시를 위한 행정예고(나주시공고 제2011-166호, 2011. 3. 31. ~ 4. 19.)를 거쳐 나주시향토문화유산(지정구역 포함)으로 지정하고 동 조례 제10조의 규정에 따라 고시합니다. 2011. 7. 26. 나주시장 1. 지정고시 내용 가. 나주시향토문화유산 지정 : 14건(錦社亭, 褒忠閣, 歸來堂, 永泰閣, 함평이씨 참판공문중 소장고문서, 榮江 祠, 月井書院, 景賢書院, 구 금남금융조합, 구 왕곡공립심상소학교, 구 나주잠사, 남평 주조장, 죽림사 석불..

유금강록(遊金剛錄) - 이원(李黿)

■ 유금강록(遊金剛錄) 금강산 유람을 떠나기로 하다. 금강산(金剛山)은 강원도(江原道)의 진산(鎭山)으로, 북쪽으로는 안변(安邊)에 맞닿아 있고, 남쪽으로는 강릉(江陵)에 닿아 있으며, 동쪽으로는 큰 바다에 임하고, 서쪽으로는 춘천(春川)의 경계로 통한다. 흡곡(歙谷), 통천(通川), 고성(固城), 간성(杆城), 회양(淮陽), 금성(金城), 양구(楊口), 낭천(狼川)등 여러 군들이, 동쪽과 서쪽으로 땅을 나누어, 삼백여 리에 뻗쳐있는 내외의 금강산 산록에 들어 있다. 고개를 경계로 삼고, 내외 수참(水站)을 정하여 서쪽을 내산으로 삼고, 동쪽을 외산으로 삼는다. 금강산은 도가와 승려들이 모이는 곳이며, 시인과 문장가가 왕래하며 노닐며 감상하는 곳이다. 나의 먼 조상인 고려 문충공(文忠公) 익재(益齋) 이..

무오사화의 발생동기

■ 무오사화의 발생동기 재지사림(在地士林)의 주도로 성리학적 정치질서를 확립하려 했던 사림파의 사조(師祖) 점필재 김종직(佔畢齋 金宗直)이. 세조의 즉위를 비판하여 지은〈조의제문(曺繼文〉이 그가 죽은 6년 뒤인 1498년(연산군 4) 제자 김일손이 사관으로 있으면서 사초(史草)에 수록한〈조의제문 弔義帝文〉의 내용이 문제가 되어, 무오사화를 불러일으킨 단초가 되었다. 이 일로 김종직이 부관참시(剖棺斬屍)당하고 생전에 지은 많은 저술도 불살라졌다. 항우가 초(楚)나라 회왕(懷王:義帝)을 죽인 것을 빗대어, 세조가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빼앗은 것을 비난하였다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종래의 집권세력인 유자광(柳子光)· 정문형(鄭文炯)· 이극돈(李克墩) 등 훈구파가 성종 때부터 주로 사간원·사헌..

이 원(李 黿) /재사당

■ 24世 이 원(李 黿) [생졸년] 1471년(성종 2)추정 ~ 1504년(연산 10) [세계] 경주이씨 창평공 이공린(昌平公 李公鱗)의 세째아들. [문과] 성종(成宗) 20년(1489) 기유(己酉)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21위(31/33) [진사시] 성종(成宗) 14년(1483) 계묘(癸卯) 식년시(式年試) [진사] 1등(一等) 2위(2/100) ------------------------------------------------------------------------------------------------------------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자(字)는 낭옹(浪翁), 호(號)는 재사당(再思堂). 고려말 정승(政承) 익재(益齋) 제현(齊賢)의 7세손으로 평안감사(平安監司) 윤인..

점필재 김종직선생 영정

■ 김종직(金宗直) [생졸년] 1431년(세종 13) ~ 1492년(성종 23) 조선 전기의 성리학자로 자(字)는계온(季溫). 효관(孝盥). 호는 점필재(佔畢齋). 시호는 문충(文忠). 본관은 선산(善山 또는 一善)이다. 아버지는 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正四品) 숙자(叔滋)이고 어머니는 밀양 박 씨로 사재감정(司宰監正-正三品) 홍신(弘信)의 딸이다. 외가(外家)인 밀양(慶南 密陽)에서 태어났다. 1453년(단종 1)에 진사(進士)가 되고, 1459년(세조 5)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이듬해 사가독서를 했으며 정자(正字). 교리(校理). 감찰(監察). 경상도병마사사(慶尙道兵馬詞事)등을 역임 한후, 경연관(經筵官)이 되었고, 이어서 도승지(都承旨). 이조참판(吏曹參判). 한성부윤(漢城府尹)등을 두루 거..

김종직(金宗直).

점필제 김종직(佔畢齋 金宗直) 김종직(金宗直)은 문장중심·정치중심인 한당류(漢唐類)의 학풍과, 철학의 이론 부문을 치중하던 송학류(宋學類)의 학풍이 혼합된 시대에 살았다. 이 시기에는 변계량(卞季良)· 윤희(尹憘)· 정인지(鄭麟趾)· 신숙주(申叔舟)· 서거정(徐居正)· 양성지(梁誠之)등 많은 거유들이 있었으나, 이들은 순유(醇儒)로 보기 어려운 점도 없지 않다. 김균(金鈞) 김말(金末) 김반(金泮)등의 이른바 경학삼김(經學三金)과 김종직의 부친 김숙자(金叔滋)가 경학에 정통하였다고 하나 이를 뒷받침 할만한 문헌이 없어서 그들의 학문과 사상의 깊이를 뚜렷이 알기는 어렵다. 그러나 사림파(士林派)의 거두인 김종직에 대해서는 그의 문집이나 여러 문헌을 통하여 전반에 걸쳐 대체적인 윤곽을 이해할 수 있다. 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