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물/조선시대 인물

점필재 김종직선생 영정

야촌(1) 2009. 2. 13. 00:33

김종직(金宗直)

     [생졸년]  1431년(세종 13) ~ 1492년(성종 23)

 

조선 전기의 성리학자로 자(字)는계온(季溫). 효관(孝盥). 호는 점필재(佔畢齋). 시호는 문충(文忠). 본관은 선산(善山 또는 一善)이다. 아버지는 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正四品) 숙자(叔滋)이고 어머니는 밀양 박 씨로 사재감정(司宰監正-正三品) 홍신(弘信)의 딸이다. 외가(外家)인 밀양(慶南 密陽)에서 태어났다.

 

1453년(단종 1)에 진사(進士)가 되고, 1459년(세조 5)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이듬해 사가독서를 했으며 정자(正字). 교리(校理). 감찰(監察). 경상도병마사사(慶尙道兵馬詞事)등을 역임 한후, 경연관(經筵官)이 되었고, 이어서 도승지(都承旨). 이조참판(吏曹參判). 한성부윤(漢城府尹)등을 두루 거쳤다.

 

학문과 문장이 뛰어나 영남학파의 종조(宗祖)가 되었고, 성종(成宗)의 특별한 총애를 받아 자기 문인(文人)들을 관직에 등용 시켰으며, 기성 세력인 훈구파(勳舊派)와 심한 반목과 대립을 일어 켰다.

 

일찍이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지은바 있었는데, 사후(死後 : 죽은뒤)인 1498년(연산군 4) 제자(第子) 김일손(金馹孫)이 사관(史官)으로 있으면서 이것을 사초(史草)에 적어 넣은 것이 원인이 되어 무오사화(戊午史禍)가 일어났다.

이로 말미암아 그는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고, 많은 문집이 소각 되었으며, 그의 문인(文人)들이 모두 참화(慘禍)를 입었다.

 

그가 성리학(性理學)에 뜻을 두게 된 것은, 18세(歲) 때였고, 23세가 되던 해, 성균관(成均館)에 입학하여 유생들과 교류 하면서 성리학의 근원을 탐구하게 되었다. 길제(吉再)와. 아버지의 학통(學統)을 이어받아 학문 경향은 효제충신(孝悌忠信)을 주안으로 하는 실체적 방면에 치중한 것이었다.

 

성종(成宗) 초(初)에 경연(經筵)을 열고, 학문 있는 선비를 선발할때, 그가 가장 특출하여 임금의 신임을 얻었다. 

그러나 그해 밀양(密陽)에 계신 노모(老母)를 위해 사직을 청하여 낙향 하였다.

 

이때 그는 많은 제자들을 배출 하였는데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김일손(金馹孫). 유호인(兪好仁). 조위(曺偉). 남효온(南孝溫). 홍유손(洪裕孫). 이종준9李宗準)등이 있다.

 

그는 일생을 통하여 여러가지 정치적 업적도 많았으나 문인을 다수 배출 하였다는 것이 후세의 문화유산에  더 큰 업적이라 하겠다. 그의 문인들에 의하여 후일 사대부정치(士大夫政治)가 이루어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숙종(肅宗)때 영의정(領議政)을 증직(贈職)하였고, 밀양의 예림서원(禮林書院). 선산의 금오서원(金烏書院). 함양의 백연서원(栢淵書院)등에 제향 되었다.

 

저서로는 점필재집(佔畢齋集). 유두유록(遊頭流錄). 청구풍아(靑丘風雅). 당후일기(堂後日記)가 있으며, 통재관(摠裁官)으로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55권을 증수(增修) 했으며, 서화(書畵)에도 뛰어났다. 시호(諡號)는 문충(文忠)이다.

 

↑점필재 김종직선생 영정

   2004년 경남 밀양 출신 오태환(吳泰煥) 화백이 그린 작품으로 선산(일선)김씨 문충공파의 공식적인 영정이다.

 

↑점필재 김종직선생 반신 영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