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조선사(朝鮮史)

사대사화(四大士禍)

야촌(1) 2015. 1. 2. 14:02

영남파와 기호파로 나눠진 훈구와 사림의 파벌과 사대사화.

 

"기호(畿湖)"란 경기와 호서(충청도).호남(전라도)을 아울러 지칭하는 이름이다. 따라서 기호 지방이라고 하면 전라도도 포함되는 것이다. 영남 지방에는 고려 말에 정몽주(영천 출신), 길재(선산 출신), 정도전(본이 영주 봉화 출신), 하륜(진주) 등의 대학자들이 출현하여 많은 유학자들을 양성하였다. 

 

그 후에도 김숙자(거창, 김종직의 아버지). 김종직(밀양 출신), 김굉필(현풍 출신), 정여창(진주), 이언적(경주), 이황(안동) 등 수 많은 유학자들이 배출되어 추로지향(鄒魯之鄕 : 공자 맹자의 고향)이라는 말이 있었다. 그래서 성리학이 발달하였고, 영남지방은 사림파의 온상이 되었다.

 

서울. 경기에는 워낙 벼슬하는 학자,.관료들이 많아 주로 관학적 학풍이 발달하였고, 조광조(서울), 이이(고양), 송익필(서울), 김육(가평) 등 많은 유학자들이 있었다. 충청 지역에는 김장생. 김집 부자(연산)의 제자들인, 송시열. 송준길(회덕), 윤증(논산시 노성면), 권상하(청풍) 등을 중심으로 많은 유학자들이 배출 되었다. 호남에는 최부(나주), 김인후(장성), 기대승(광주), 정철(장흥), 유몽인(고흥), 윤선도(해남) 등 많은 유학자들이 활동하였다.

 

이렇게 삼남지방에서 유학이 발달하고 사림파 계열의 많은 학자들이 배출되었던 것은 농업경제의 발달과 관련이 있다고 하겠다. 경제적으로 여유있는 환경이 학문생활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몇몇 대학자들에 의한 교육활동도 그 지역의 학문을 진작시키고 학문적 전통를 형성하게 하였다.

 

강원도나 평안도 함경도 지역에는 이러한 여건이 되지 않아 학문의 발달이 늦었다고 하겠다. 지역별 과거 합격자 수도 대체로 학문의 발달과 비례한다고 하겠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과거 합격만으로는 훌륭한 학자로 인정하지 않았고, 성리학에 대한 깊은 조예와 도덕적 실천이 중요하게 간주되었다.

 

정승. 판서도 다 훌륭한 학자가 아닌 것과 같다. 과거 합격자 수는 서울이 압도적으로 많았지만, 유학자의 배출로 보면 삼남지방이 많았다. 조선후기의 과거 출신지역을 보면 평안도 정주가 서울 다음으로 많았던 적도 있었다.

 

"기호파(충정도)와 영남파와 300여년 동안 대립 - 충청이 세력중심"

 

[요약]

조선중기에 조당에 신하(朝臣) 및 선비들이 반대파에게 몰려 화(禍)를 입은 사건.

조선 개국 이래 역대의 임금이 문치(文治)에 힘을 쓰고 유학(儒學)을 장려했기 때문에 우수한 학자가 많이 배출 되었고, 선비사회, 즉 유림(儒林)은 활기에 차 있었다.

 

그러나 세조(7대)∼성종(9대) 때에 이르러 그들 사이에 주의·사상·감정·정실(情實)·향토(鄕土)관계 등으로 여러 파별(派別)이 생겼는데, 이중에는 사상이 통하는 파(派)도 있었으나 서로 대립·반목하는 파(派)도 있었다. 이를 네개의 파(派)로 대별(代別)하면 훈구파(勳舊派)·절의파(節義派)·사림파(士林派)·청담파(淸談派) 등이다.

 

1. 훈구파(勳舊派)

훈구파나 사림파는 모두 동일하게 성리학을 배경으로 하는 조선의 지배계급으로 다만 성리학을 실천함에 있어서 서로 방법이 달랐던 것이다. 훈구파는 관학파(官學派)라고도 한다. 훈신(勳臣)·훈구대신·훈구공신 등의 용어에서 알 수 있듯이 이들은 조선 초기 세조의 집권을 도와 공신이 되면서 정치적 실권을 장악한 이후 형성된 집권 정치세력이었다.

 

이들은 세조의 측근으로 등장하여 그 이후 몇 차례의 정치적 격변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존재했는데, 이는 정치변동 과정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공신으로 책봉되었기 때문이다.

 

즉 1453년(단종 1) ~ 1471년(성종 2)의 약 20년 동안 정난(靖難)·좌익(佐翼)·적개(敵愾)·익대(翊戴)·좌리(佐理) 공신 등으로 책봉되었으며, 그뒤에도 1506년 중종반정에 따른 정국공신(靖國功臣)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 공신으로 거듭 책봉됨으로써 중요한 정치세력을 이룰 수 있었다. 

 

이들은 때로 군주와 정치적 갈등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대체적으로 신진 유학파인 사림파(士淋波)와 정치적 갈등을 빚어 여러차례 사화를 일으켰다. 이러한 갈등은 여러 면에서 지적되고 있지만, 대체로 향촌 통치의 방법을 둘러싸고, 관권중심의 지배체제를 확립하려는 훈구파와 사족중심의 지배체제를 형성하고자 하는 사림파 사이에 나타났다.

 

흔히 훈구파는 사장(詞章: 주로 한당시(漢唐詩)와 당송고문(唐宋古文)을 모범으로 수사적 기교에 중점을 둔 장식적인 문학론에 충실했다. 이를 중시한 학문이 사장학(詞章學)으로, 도학(道學)과 주자학(朱子學)의 대칭 개념으로 쓰였고, 조선 중종 때에는 도학 중심의 사림파에 대립하는 개념으로 사장파가 형성되기도 했다. 

 

조선왕조를 성립시킨 신흥사대부 세력은 국가·사회의 모든 제도·문물을〈주자가례에 의해 개혁하고 각급 학교에 사서오경과 소학을 필수 과목으로 정하는 한편, 문과에도 초시(初試)와 복시(覆試)의 초장(初場)에 강경시험(講經試驗)을 보게 하는 등 경학을 장려했다.

 

그러나 관청의 문서기록, 명(明) 사신의 접대 등을 위해 한시(漢詩)와 한문의 문장을 잘 짓는 문사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리하여 <경국대전>에 초시의 삼장(三場), 복시의 중종장(中終場), 전시(殿試)는 모두 사장 중심의 제술시험을 보도록 규정했다.

 

그리고 문신의 경우 매달 몇 수(首)의 한시와 문장을 짓게 했다. 이로 인해 관학파(官學派)의 학자·관료들은 사장학 중시의 학풍을 이루고 현실 긍정의 자세에서 관료적(官僚的) 문학이 풍미하게 되었다. 

 

반면 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의 학풍을 이은 김숙자(金淑滋) 등은 재야에서 '사장의 학으로서 인륜(人倫)이 전하여져 밝혀지지 못했다'는 명분하에 관학파들의 사장 중시를 비판하고 주자학 경전을 도학으로 절대화하여 이를 중점적으로 연구했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사장은 정도전(鄭道傳)·성현(成俔)·서거정(徐居正)을 들 수 있다.)을, 사림파는 경술(經術: 유교의 경서(經書)를 연구하는 학문.)을 강조했다고 한다.>

 

2. 절의파(節義派)

고려말의 충신 정몽주와 개경(開京: 개성) 두문동(杜門洞) 72현(賢)의 충의를 본받아 세조(世祖)의 패륜 행위에 분개하여 단종(端宗)을 위해 의거를 일으키다가 실패하였거나, 세조에게 협조를 거부하고 은둔생활을 한 사람들을 말한다.

 

성삼문(成三問) 등의 사육신(死六臣: 집현전 학자로서 세종의 신임이 두터웠던 성삼문, 형조참판 박팽년, 직제학 이개, 예조참판 하위지, 사예 유성원 등과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 무인 유응부)과 김시습(金時習) 등의 생육신(生六臣 : 김시습.성담수, 원호, 이맹전, 조려, 남효원)이 이에 속하고, 이들의 절의(節義)는 뒤에 영남 사림파(도학파), 임진왜란 때의 의병들과 병자호란 때의 청나라고 끌려간 삼학사(三學士: 홍익한, 윤집, 오달제 ) 등에 의하여 계승되었다.>

 

3. 사림파(士林派)

사림(士林)은 전원의 산림(山林)에서 유학을 공부하던 문인·학자로서 15세기 이후 조선 중기 중앙 정계를 주도한 정치집단이다. 고려 말기의 유학자 길재(吉再)가 은퇴하여 고향에서 후진 양성에 힘쓴 결과 영남 일대는 그의 제자가 많이 배출되어 조선 유학의 주류를 이루었으며, 훈구파와 대립하여 사림파(士林派)라고 불리기도 한다.

 

길재의 제자 김숙자와 그의 아들 김종직은 영남 유학의 사종(師宗)으로, 그의 문하에서 김굉필·정여창·김일손 등이 배출되어 성종 때에는 중앙의 정치무대에 대거 등장했다. 이들을 사림파라 하는데, 관학자들과는 학문의 경향을 달리하고 있었으며, 주로 삼사(三司) 계통에서 언론문필을 담당하였다.

 

이들은 대개 유교의 이상 정치 실현을 위해 노력하였는데, 종래부터 정계에 뿌리박고 있던 훈구파와 불화가 생겨, 조선 사회에 새로운 활기와 파란을 불러 일으켰다. 이들의 진출로 사화가 되풀이되어 일시적으로 큰 타격을 받기도 했지만, 서원과 향약을 토대로 한 사림파는 꾸준히 그 학통을 계속하면서 발전하여 갔다.

 

이들은 원래 대부분이 조선의 건국에 협력하지 않고 지방에 내려간 학자들로, 중소지주층을 이루고 있었다. 이들은 대농장을 소유하고 있었던 훈구세력과는 달리 생업에 힘쓰면서 학문을 해야 했기 때문에, 훈구세력에 비해 경제적 기반이 취약했다.

 

그러나 16세기 이후로 온사직설과 같은 농서가 간행되고, 목화와 약초 등의 재배가 널리 퍼지면서, 농산물을 사고 파는 시장이 발달하여 전국적으로 형성되었다. 또한 저수지와 같은 농업 기반시설 확충으로 남부의 일부 지역에만 보급 되었던 새로운 중국의 논농사 기술인 모내기법이 전국으로 퍼지고, 이모작 역시 널리 퍼지면서 농업생산성이 향상되었다. 

 

사림은 이를 통해 농촌의 중소 지주인 사림도 경제적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되고, 농민과 공존하는 안정된 농촌사회를 건설 하고자 하였다. 이때 훈구 세력은 권력을 이용하여 광대한 농장과 많은 노비를 소유하는 등 재산을 크게 늘렸다.

 

조선은 건국 이후 100여 년간 나라의 기반을 다지는 데에 힘을 쏟았으며, 이것은 경국대전의 편찬으로 종료되었다. 그런데 15세기 말부터 사림이 중앙의 정치에 등장하여 기존의 훈구 세력과 대립하기 시작하였다.

 

성종 집권 시에 그는 합리적이고 온건한 유교 정치를 회복하기 위하여 영남 출신의 김종직과 그의 제자들을 대거 등용하여 언론 기관에 배치하고 정책을 비판하도록 하였다. 이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의 정치 세력으로 성장하여, 훈구 세력의 문제점을 공격하면서 공론 정치를 유도하였다. 이에 따라 이 두 세력 간의 정치적(政治的) 견제가 심해졌다.

 

사림을 옹호하던 성종이 승하하고 연산군이 왕위에 오르자, 훈구세력은 무오사화와 갑자사화 등을 일으켜 사림을 대량숙청 하였고. 중종 반정(연산군을 몰아냄) 이후 사림이 다시 등용되어 조광조를 중심으로 유교적 이상 정치를 펴고자 하였으나, 훈구세력의 반발로 기묘사화가 일어나 피해를 입었다. 인종 때 잠시 등용됐다가, 명종 때는 을사사화를 6년 동안 겪어면서 많은 사림들이 숙청 되었다.

 

연산군 ~ 명종에 이르기 까지 네번의 사화(士禍)로 인해 사림은 큰 손실을 보았으나, 이들은 완전히 몰락하지 않았으며, 향촌의 서원과 향약을 바탕으로 꾸준히 성장해 나갔다.>

 

4. 청담파(淸談派)

중국 진(晉)나라의 죽림칠현을 모방하여 시정 속사를 떠나 고담준론(高談峻論)으로 소일하던 일련의 학자들을이른다. 궁벽한 시골에 살면서 속세를 멀리하고, 나름 고고(孤高)한 기풍으로 일생을 보내는 학자들이다. 홍유손(洪裕孫)에 이에 속한다. >

 

훈구파는 조정의 요직에 있어 세조∼성종 시대의 여러 가지 관찬사업(官撰 지을찬 事業), 즉 조정에서 간행하는 서적 편찬에 큰 공헌을 한 사람들이며, 따라서 한 나라의 문화 발전에 이바지하였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또 그들의 녹전(綠錢)은 주로 경기도·충청도에 있었기 때문에 지역적으로 볼 때, 이들은 기호파(畿경기경湖派)이고, 김종직과 그의 제자들은 대개 경상도, 즉 영남(嶺南) 지방에 있었기 때문에 이들을 영남파라 하였다. <경기파=> 한양을 중심으로 약500리(200km) 이내 지역)>

 

훈구파와 사림파는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 대립과 반목이 점점 심각해졌는데, 1498년(연산군 4) 두 파는 정면충돌을 하였으며, 그 결과 권력을 쥐고 있던 훈구파의 일격에 사림파는 패배하였다.

 

 

4대사화

 

첫번째 사화인 무오사화(戊午士禍): 연산군(燕山君) 4년 1498년 유자광이 연산군과 합작하여 이미 죽은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 조선 성종 때 김종직이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빗대어 지은 글. 항우가 초나라 회왕인 의제를 죽인 고사를 비유한 것인데, 무오사화의 빌미가 되었다.)’을 김종직의 제자인 김일손이 사초(史草)에 게재(揭載)한 것에서 발단이 되었다.

 

사초(史草: 사관(史官)들이 그때그때의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여 둔 《사기(史記)》의 초고(草稿). 실록(實錄)의 원고가 되었다.)가 원인이 되었다하여 ‘史’(사)자를 넣어 한자로 무오사화(戊午史禍)라고도 표기한다.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의하여 김종직은 이미 죽은 후였으므로 부관참시(剖棺斬屍)의 욕을 당하고 그 밖의 많은 제자들은 처형되거나 귀양갔다. 

 

연산군의 할머니인 인수대비(폐비윤씨가 양반의 후처 출생인 것을 평소에도 못 마땅하게 여겨 윤씨 죽음에 일조를 하였다.)의 권력을 누루기 위하고, 성종 이후 사림이 무섭게 성장하여 이에 훈구파는 그들을 견제하기 위해 사림파 김종직이 지은 제의조문을 사초에 기록하였고, 이것이 빌미가 되어 연산군은 자기 할아버지인 세조가 쿠데타로 정권을 잡아 왕위 정통성에 오점이 생겼다.

 

(그는 인목대비의 그늘에서 벗어나가기 위해서 훈구파는 눈에 가시인 사림을 타도하기 위해 손발이 잘 맞았다.) 그래서 연산군은 강력한 왕권을 조정과 그의 할머니에게서 찾아오는 과정에 훈구파와 짝짝이가 되어 사림파가 축출된 과정이 무오사화이다.

 

두 번째의 사화는 1504년(연산군 10)의 갑자사화(甲子士禍)이다. 갑자사화는 투기가 심하여 왕비(王妃)의 자리에서 쫓겨나 사약을 받은 성종의 계비(繼妃) 윤씨(尹氏: 제헌왕후 齊獻王后)의 소생인 연산군이 성종의 뒤를 이어 임금이 된 후 생모(生母)에 관한 사실을 알게 되자, 폐비에 찬성한 신하들과 평소에 연산군의 학정을 불평하던 일부 사림파의 선비들을 한데 묶어, 큰 옥사(獄事)를 일으켜서 일어났다. 

 

이것은 무오사화처럼, 훈구 ·사림파 간의 대립으로 일어난 것은 아니지만, 선비가 많이 죽음을 당하였다는 의미에서 사화이다. 갑자사화 때 그의 할머니인 인목대비가 연산군이 머릴 받아 죽였다.

 

세 번째의 기묘사화(己卯士禍)도 훈구파와 사림파 간의 대립에서 발생한 사화이다. 훈구파의 중종반정(中宗反正)의 공훈에 비판적이던 조광조(趙光祖) 등의 신진사류(新進士類)들이 훈구파들의 위훈삭제사건(僞勳削除事件)을 일으켜 심정(沈貞)·남곤(南袞)·홍경주(洪景舟) 등에게 타격을 가하려다, 도려 그들의 반격을 받아 패배한 사건이다. 

 

조광조· 김식(金湜)· 기준(奇遵)· 한충(韓忠) ·김구(金絿)· 김정(金淨)· 김안국(金安國)· 김정국(金正國) 등의 기묘명현(己卯名賢)이 죽거나 유배되었다.

 

<위훈삭제란 : 조광조의 사람파가 주도하여 거짓 공신을 구별하여 그 직위를 삭제하자는 주장으로, 중종 반정때 공을 세운 신하들의 공신 시호를 박탈. 토지와 노비를 몰수한 사건을 말한다. 

 

중종반정 공신들은 대부분 훈구세력들이었고 그 일부가 위훈삭제로 인해 피해를 보게 된다. 이사건이 1519년 기묘사화의 발생원인이 된다.>

 

기묘사화의 발생이유: '위훈삭제사건'에 대한 반격으로 훈구세력들은 조광조를 모함하기 시작하였다.

 

희빈 홍씨를 이용하여 왕이 자주 거니는 후원 길목에 꿀로 '주초위왕'(走肖爲王: 조씨가 왕이 된다)이라 써 놓았고, 이를 벌레들이 갉아먹었는데 이는 곧 중종의 눈에 띄었고, 안그래도 자기 생각보다 앞서나가는 조광조에게 싫증을 느끼기 시작했던 중종에게 그를 멀리하기 위한 좋은 빌미가 되었다.

 

1519년(중종 14) 11월 조광조(趙光祖)·김정(金淨)·김식(金湜) 등 신진사류가 남곤(南袞)·심정(沈貞)·홍경주(洪景舟) 등의 훈구 재상에 의해 화(죽임)를 입은 사건.

 

역사적 배경: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을 폐하고 왕위에 오른 중종은 연산군의 악정을 개혁함과 동시에 쫓겨난 신진사류를 등용해 파괴된 유교적 정치 질서의 회복과 교학, 즉 대의명분과 오륜을 존중하는 성리학의 장려에 힘썼다. 이러한 새 기운 속에서 점차 정계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이 조광조 등 신진사류였다.

 

조광조는 신진사류의 대표적 존재였던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자, 성리학에 조예가 매우 깊었던 김굉필(金宏弼)의 제자였다. 그는 유숭조(柳崇祖)의 도학정치론에 감화된 당시 성리학의 정통을 이어받은 신예 학자였다. 조광조는 1515년 성균관유생 200인의 추천으로 관직에 올라 왕의 신임을 받았다. 

 

중종반정 초기에는 이과(李顆)의 옥과 같은 파란도 있었으나, 연산군의 악정에 대한 개혁이 진행되었다. 중종의 신임을 받은 조광조는 성리학으로 정치와 교화의 근본을 삼아 고대 중국 3대(하·은·주시대)의 왕도정치를 이상으로 하는, 이른바 지치주의(至治主義) 정치를 실현하려 하였다.

 

그 첫 사업으로 과거제 폐단을 혁신하고자 현량과(賢良科)를 설치하고 많은 신진사류를 등용해 유교정치 구현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또, 도교의 제사를 맡아보는 소격서(昭格署)를 폐지해 미신 타파에 힘쓰고, 향약(鄕約)을 실시해 지방의 상호부조와 미풍양속을 배양하는 데 힘쓰는 한편, 교화에 필요한 ≪이륜행실 二倫行實≫과 ≪언해여씨향약 諺解呂氏鄕約≫ 등의 서적을 인쇄, 반포하였다.

 

그의 지치주의 정치의 업적은 다방면에 걸쳐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그의 이상주의적인 왕도정치는 구현 과정에서 저돌적이고 급진적인 면이 많아 도리어 증오와 질시를 사게 되었다. 게다가 철인군주(哲人君主)의 이상과 이론을 왕에게 역설한 것이 강요의 인상을 주어 왕마저도 그의 도학적 언동에 대해 점차 혐오감을 가지게 되었다.

 

또, 성리학을 지나치게 숭상한 나머지 고려 이래 장려된 사장(詞章)을 배척, 남곤·이행(李荇) 등의 사장파와 대립하게 되었다. 그리고 청렴 결백과 원리 원칙에 입각한 도학적인 태도는 보수적인 기성 세력을 소인시해 훈구 재상들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

 

당시 반정중신으로서 조광조 등의 탄핵을 받지 않은 자가 없을 정도였다. 이에 조광조 일파에 대한 기성 훈구세력의 불평 불만은 1519년 반정공신 위훈삭제사건(反正功臣僞勳削除事件)을 계기로 폭발하였다. 

 

즉 이 사건은 중종반정공신 가운데 그 자격이 없는 사람이 많으므로 공신호를 박탈해야 한다고 하여, 공신의 4분의 3에 해당하는 76인의 공신호가 삭퇴되고 토지와 노비마저 환수한 조처였다.

 

경과: 이러한 조처는 훈구세력의 부당한 재원을 막고 사대부의 기강을 바로잡기 위한 것이었으나, 결과적으로는 훈구대신에 대한 도전 행위이기도 하였다. 이 때 소인배로 지목된 남곤과 훈적(勳籍: 공훈을 기록한 명부)에서 삭제 당한 심정 등은 조광조의 탄핵을 받은 바 있는 희빈 홍씨(熙嬪洪氏)의 아버지인 남양군 홍경주(洪景舟)와 손을 잡고 조광조 일파를 몰아낼 계략을 꾸몄다.

 

이들은 희빈 홍씨를 이용해 “온 나라의 인심이 모두 조광조에게 돌아갔다.”고 왕에게 밤낮으로 말하여, 왕의 마음을 흔들리게 하였다. 또, 궁중의 나뭇잎에다가 꿀로 ‘주초위왕(走肖爲王 : 走肖는 趙의 破字)’이라고 써서 벌레가 갉아먹게 한 뒤, 그 문자의 흔적을 왕에게 보여 마음을 움직이게 하였다.

 

이때를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한 홍경주·김전(金銓)·남곤·고형산(高荊山)·심정 등은 밀의를 거듭한 끝에, 1519년 11월 조광조 등 일파가 붕당(朋黨)을 만들어 중요한 자리를 독차지하고 임금을 속이며 국정을 어지럽혔으니 그 죄를 밝혀 바로잡아주도록 하는 계를 올렸다.

 

이때는 중종도 조광조 일파의 도학적 언동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터이라 홍경주 등의 상계를 받아들여 조광조 일파를 치죄하게 하였다. 조광조 일파가 투옥되자 홍경주·남곤·심정 등은 이들을 당장에 처벌하게 하려 했으나, 이장곤(李長坤)·안당(安瑭)·정광필 등이 반대하였다. 또, 성균관 유생 1,000여 인이 광화문에 모여 조광조 등의 무죄를 호소하였다.

 

그러나 치죄 후 조광조는 능주로 귀양가서 곧 사사되고, 김정·기준(奇遵)·한충(韓忠)·김식 등은 귀양갔다가 사형 또는 자결하였다. 그 밖에 김구(金絿)·박세희(朴世熹)·박훈(朴薰)·홍언필(洪彦弼)·이자(李耔)·유인숙(柳仁淑) 등 수십 명이 귀양가고, 이들을 두둔한 안당과 김안국(金安國)·김정국(金正國) 형제 등도 파직되었다. 이 옥사 이후 김전은 영의정, 남곤은 좌의정, 박유청(朴維淸)은 우의정이 되었다.

 

이 사화에 희생된 조신들을 일명 기묘명현(己卯名賢)이라고 한다. 이 사화는 1515년 왕비 책립 때 조신간의 대립·알력을 배경으로, 조광조의 지치주의 정치에 의해 대량 등용된 신진사류에 대한 불만과, 도의론을 앞세워 사장파를 소인시한 배타적인 태도에 대한 증오 등이 삭훈사건을 계기로 폭발된 것이다.

 

의의와 평가: 이 사화는 무오사화와 같이 훈구파와 신진사류간의 반목·배격에서 일어난 것이지만, 정치적 음모가 유효했던 정쟁이었다는 점과 갑자사화와 같이 정치적 투쟁 목적과 이념이 없었다는 점에서 그 특이성을 찾아볼 수 있다.

 

아울러 조광조의 왕도정치가 실패한 원인을 정치 이념의 진보성과 실현 수단의 과격성에서 찾고 있으나, 당시의 정치 체제가 왕도정치의 실현을 뒷받침해줄 만큼 성숙하지 못한 것에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조광조의 왕도정치의 이상이 무산된 뒤 성리학이 학문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앞의 사실을 입증해주고 있다.

 

네 번째는 사화는 명종 즉위년인 1545년 을사사화(乙巳士禍)이다. 이것은 왕실의 외척인 윤임(尹任), 즉 대윤(大尹)과 같은 파평(坡平) 윤씨인 윤원형(尹元衡), 즉 소윤(小尹) 사이의 권력다툼에 말려들어 많은 선비가 타격을 받은 사건이다. 이것도 갑자사화의 경우처럼 선비사회 사이의 싸움은 아니지만 많은 선비가 희생되었기 때문에 사화라고 한다.

 

4대사화는 1575년(선조 8)에 이르러 당쟁(黨爭)이 일어나기 전의 선비들에 대한 옥사였다. 그러나 사화는 소수인의 음모에 의하여 일어난 것이 아니고, 파당을 가진 다수인의 공공연한 논쟁이 따르는 대립과 투쟁에서 패자는 반역자로 몰려 지위를 빼앗기거나 목숨을 잃고, 한 파가 승리하면 이에 대하여 새로운 반대파가 또 생겨 그것이 또다른 사화를 야기시켰다.

 

이러는 동안 정치의 기강은 더욱 문란해지고, 뜻있는 선비들은 관직을 버리고 당·서원 등을 세워 유생(儒生)들의 집합 또는 강학(講學)의 장소로 삼는 동시에, 그들 일족의 자녀교육을 통하여 동족적인 당파의 결합을 굳게 하였다. 이와 같이 사화에 의하여 육성된 정치비판과 반대파에 대한 복수관념은, 서원의 발전과 더불어 조선 후기의 당쟁을 격화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뜻있는 선비들의 향토 복귀와 교육 실시는 고관대작이 되는 것을 유일한 목표로 삼는 공리적·세속적인 관학(官學)에 대하여 수양과 사색을 주로 하는 진리탐구의 참다운 학문을 하겠다는 사조와 경향을 낳게 하고, 이로 인하여 사학(私學)의 대연원(大淵源)이 열리게 되었다.

 

 

●무오사화

  ◇발생시기 - 1498년

  ◇당시의 왕 - 연산군

 

발생이유 - 사림들을 몰아내려는 훈구세력들은 당시 사림세력을 이끌던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을 핑계로 삼았다.

'조의제문'은 <초한지>의 항우가 초나라의 어린 왕을 몰아낸 것을 비판하는 내용이었으나, 유자광을 비롯한 훈구세력들은 이것이 세조가 단종을 몰아내고 죽인 것을 빗대어 쓴 글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사사건건 트집잡던 사림들을 싫어하던 연산군은 그 말을 냉큼 받아들였다.

 

발생결과 - '조의제문'을 쓴 '김종직'은 이미 죽었으나, 연산군은 시신에 채찍질을 가하는 부관참시라는 형벌을 내리고 그의 제자들과 후배들의 대다수가 관직에서 쫓겨나거나 먼 곳을 귀양을 떠나게 되었다.

 

★ 3대사화(士禍) 요약 : 무오사화는 갑자사화, 을사사화, 기묘사화와 조금 다르다. 무오사화의 '사'는 史(역사사)

     이고, 다른 3대사화의 '사'는 士(선비 사)이다.

 

 

●갑자사화

  ◇발생시기 - 1504년,

  ◇당시의 왕 - 연산군

 

발생이유 - 간신 '임사홍'은 연산군의 신임을 얻기 위해, 그동안 아무도 말하지 않았던 연산군의 어머니인 폐비 윤씨의 비밀을 연산군에게 일러주게 된다. 뒤늦게 어머니의 한맺힌 죽음을 알게 된 연산군은 할머니인 신씨 부인에게서 피 묻은 적삼과 함께 억울한 사연을 듣고는 처절한 복수를 시작한다.

 

발생결과 - 자신을 길러 준 어머니 정현왕후 윤씨를 궁에서 쫓아내고 사약을 내려 어머니를 죽게 하는 데, 찬성하거나 관련이 된 자들은 물론, 후궁과 그 자손들, 그리고 내시와 궁녀들까지 모조리 죽이고 말았다. 이 일로 인수대비와 정귀인과 엄귀인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발생결과 - 갑자사화 이후 연산군은 경연과 사간원, 홍문관 등을 모두 없애버렸고, 한글로 쓰여진 투서들이 나붙자 한글 또한 쓰지 못하게 하였다.

 

 

●기묘사화

  ◇발생시기 - 1519년,

  ◇당시의 왕 - 중종

 

발생이유 - '위훈삭제사건'에 대한 반격으로 훈구세력들은 조광조를 모함하기 시작했다. 희빈 홍씨를 이용하여 왕이 자주 거니는 후원 길목에 꿀로 '주초위왕'(조씨가 왕이 된다)이라 써 놓았고, 이를 벌레들이 갉아먹었다. 

 

이는 곧 중종의 눈에 띄었고, 안그래도 자기 생각보다 앞서나가는 조광조에게 싫증을 느끼기 시작했던 중종에게 좋은 빌미가 되었다.

 

발생결과 - 조광조는 사약을 받았고, 사림세력들은 다시 한 번 큰 화를 입게 되었다. 이는 중종의 개혁정치가 끝이났다. 

 

 

●을사사화

  ◇발생시기 - 1545년,

  ◇당시의 왕 - 명종

 

발생이유 - 명종이 즉위하자 대윤(장경왕후 윤씨의 오라비인 윤임을 중심으로 한 인종 지지세력)과 소윤(문정왕후

윤씨오라비인 윤원형을 중심으로 한 명종 지지세력)의 싸움은 소윤의 승리로 끝났다. 

 

짧았으나 인종의 통치기에는 기묘사화 때 관직을 떠났던 많은 사림들이 등용되어 있었으므로 윤원형은 이들을 아낼 궁리를 한다. 윤원형은 윤임이 중심이 되어 다른 사람을 왕위에 올리려 했다는 소문을 퍼뜨렸고, 이를 구실로 문정왕후는 관된 사람들을 잡아들여 죽이고 귀양을 보냈다.

 

발생결과 - 윤임을 비롯한 대윤세력과 인종 시기 등용되었던 사림세력들이 귀양을 가거나 목숨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