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최초의 통일 국가, 신라!
신라는 뱃길을 통해 해상 왕국의 꿈을 실현했고, 종교를 통해 불국토의 이상을 꿈꿨으며 황금의 나라로 불릴만큼 번성한 문화와 과학을 가졌던 나라다. 박혁거세를 시작으로 마지막 경순왕에 이르기까지 한반도를 지켰던 천년왕국. 그 찬란한 역사와 문화를 꽃 피웠던 왕들의 삶과 죽음이 신라 왕릉속에서 다시 태어나고 있다.
신라는 시조인 박혁거세로부터 56대 경순왕으로 이어지는 왕조를 건설했다.
992년간 천년 왕국을 이룩한 역대 56명의 왕, 그들의 마지막이 신라의 도읍지 경주를 중심으로 한 왕릉에 묻혀있다.
동 시대를 살았던 삼국시대, 고구려, 백제의 왕릉이 거의 확인되지 못하거나 현존하지 않는 것에 비해 신라는56대왕 중 37왕의 능묘가 확인·추정되며 19왕의 능묘만이 밝혀지지 않고 있다. 신라왕릉은 1961년부터 1975년까지 무열왕릉으로 시작해 경순왕릉을 마지막으로 모두 31지역이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이 지역의 규모를 합치면 최소 2,870평에서 최대 6만 2100평 신라 왕국의 웅장함과 번성함을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으로 신라를 고분의 나라라 부르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또한 ,신라왕릉의 분포지역을 살펴보면 신라 마지막 왕인 제56대 경순왕의 능만이 경기도 연천군에 있을 뿐, 나머지는 모두 경주시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이는 경주가 명실상부한 신라의 도읍이었음을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신라왕릉의 대표적인 무덤양식은 ‘돌무지덧널무덤’, 적석목곽분이다.
지하에 무덤광을 파고 상자형 나무덧널을 넣은 뒤 그 주위와 위를 돌로 덮은 다음 다시 그 바깥을 봉토로 씌운 신라 귀족의 특수무덤이다. 돌무지덧널무덤은 금관, 과대, 유리잔를 비롯하여 화려한 부장품이 많았는데 이는 거대한 봉토로 덮여있어 도굴이 어렵기 때문이었다.
천마총, 황남대총, 금관총 등이 유명하다. 이러한 돌무지덧널무덤은 고구려, 백제와는 전혀 다른 신라만의 뚜렷한 역사와 개성을 갖고 있다. 신라왕릉은 거의 모두 원형토분이고, 오릉을 비롯하여 초기의 능들은 일반 분묘와 같이 특별한 시설을 하거나 의물을 설치하지 않았다.
진골로서 처음으로 왕위에 오른 제29대 무열왕릉 660 년경에 이르러, 처음으로 능비를 세우고 봉토밑에 자연석을 장치하는 등 신라의 능묘제도에 일대 변화가 일어났다. 이보다 약 30 년 후인 제31대 신문왕릉에 이르러서는 봉토 밑에 돌아가면서 가공석으로 성을 쌓듯이 여러 단을 쌓아 올리고 다시 삼각형의 가공석을 수십 개 받쳐 놓아 봉토 외호석을 보호하고 있다.
이후 신라 능묘제는 진일보하여 장판석/ 탱주/ 지대석 등으로 능 주위가 보강되고, 다시 석사자/ 문인석/ 무인석/ 12지신상 등 수호석으로 장식하게 되었다. 4세기 전반에 일어나서 6세기 전반에 소멸한 돌무지덧널무덤 양식은 가장 번성했던 신라 왕들의 또 다른 왕국이었던 것이다.
신라는 경주 평야에 있던 여섯 부족의 촌장들이 박혁거세를 왕으로 추대하면서 건국된 나라다.
건국 초기부터 935 년 멸망할 때까지 장장 992 년간 신라의 도읍이었던 곳이 바로 경주다.
그로부터 천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경주는 신라의 숨결이 그대로 살아있는 역사도시다.
경주에는 천년도 더 전에 살았던 신라왕들의 무덤이 곳곳에 흩어져 있다.
그 중 대표적인 곳이 경주시 황남동에 자리잡은 대릉원이다.
약 12만 5,400 평의 평지에 23 기의 고분이 솟아 있는 대릉원은 고분군의 규모로는 경주에서 가장 크다.
황남대총, 천마총, 미추왕릉 등의 돌무지덧널무덤이 밀집한 곳으로, 미추왕을 ‘대릉에 장사 지냈다’는 기록에 따라 대릉원이라 이름 붙였다. 이중에서도 황남대총은 동서 80 m, 남북 120 m, 높이 23 m로 신라 고분중 가장 큰 규모다.
거대한 표주박 모양의 쌍무덤으로 남쪽 무덤에서는 남자의 뼈 일부 및 유물이 나왔고 북쪽 무덤에서는 금관과 부인대 라는 글씨가 있는 은팔찌 등이 발굴된 것으로 보아 각각 남자와 여자의 무덤 즉 부부의 무덤을 붙여 만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황남대총과 더불어 대릉원을 유명하게 한 고분군이 있는데 155호 고분인 천마총이다.
1973년 발굴된 천마총은 지름 47m, 높이 12.7m의 규모로 5세기 말~6세기 초의 전형적인 단곽식 돌무지덧널무덤이다.
이 무덤의 주인공에 대해서는 제 21대 소지마립간 이라는 설과 지증마립간 이라는 설이 있을뿐이다.
주인이 없는 155고분이 천마총이라 불리게 된 것은 출토된 말다래에 천마가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대릉원의 23 기의 고분중 신라의 왕을 모신 고분이 있으니 바로 미추왕릉 이다.
신라 13대 왕인 미추왕(262~283)은 김씨로는 최초의 왕이며 여러차례 백제의 공격을 막아내고 농업을 장려했다.
미추 왕릉은 원형봉토분으로 높이 10m, 직경 20m 로 내부 구조는 돌무지덧널무덤일 것으로 추정되며 경주 시내 평지 고분 가운데에서도 대형분에 속한다. 능 앞에는 혼이 머무는 자리인 ‘혼휴석’이 있다.
천년왕국 신라를 세운 시조, 박혁거세. 그의 마지막 흔적 또한 이곳 경주에 있다.
경주 서남쪽 평지에 위치한 4기의 봉토무덤과 1기의 원형 무덤인 신라 오릉이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시조 박혁거세와 제2 대 남해왕, 제3 대 유리왕, 제5 대 파사왕 등 신라 초기 4명의 박씨 임금과 박혁거세의 왕후인 알영왕비 등 5명의 무덤이라 되어있다.
내부는 알 수 없으나 무덤의 겉 모습은 경주시내에 있는 다른 삼국시대 신라 무덤과 같이 둥글게 흙을 쌓아올린 원형봉토무덤으로, 1호 무덤이 높이 10 m 로 가장 크며 2호 무덤은 표주박형으로 봉분이 두개인 2인용 무덤이다.
천년 신라 56 대 왕 중 확인, 추정된 37 왕의 능묘는 대부분 경주 곳곳에 산재해 있다.
찬란한 역사를 꽃 피웠던 신라의 왕들이 천년고도 경주에 살아 숨쉬고 있는 것이다.
경주 북서쪽 선도산에서 남쪽으로 뻗은 구릉위에 신라 제29대 태종 무열왕의 능이 있다.
첫 진골 출신 왕으로 당과 연합하여 660년 백제를 멸망시키고 통일 대업의 기반을 닦았던 무열왕. 그의 능은 밑둘레 114m, 높이 8.7m의 대형능으로 무열왕의 둘째 아들인 김인문이 쓴 ‘태종무열대왕지비”라는 글씨가 돋을 새김 되어있어 능의 주인이 누구인지 말해주고 있다.
바닷길을 열어 전남 완도의 청해진을 두고 장보고를 대사로 삼아 해상권을 장악, 해상왕국으로서의 신라를 만든 왕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흥덕왕이다. 신라 42대왕인 흥덕왕의 능은 밑둘레 65m, 높이 6.4m로 신라 역대왕릉 중 가장 규모가 크고 형식이 갖춰진 왕릉이다. 이 능의 둘레에는 호석에 십이지신상을 새겼고 그 주위로 난간을 둘렀다.
네 모서리에는 돌사자가 있고 앞쪽에는 문인석과 무인석을 세웠는데 무인석은 서역인의 모습을 하고있어 당시 신라가 서역과 활발한 교류활동을 펼쳤음을 알 수 있다. 경주 선도산 자락에 신라 23대왕 법흥왕의 마지막이 있다.
법흥왕은 처음으로 병부를 설치하는 등 신라의 국가체제를 정비했으며 건원이라는 신라 최초의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다.
법흥왕 15년에는 불교를 공인하여 국교로 정한 왕이다. 법흥왕릉은 지름 13m, 높이 3m의 흙으로 쌓아 올린 타원형의 무덤이다.
역대 56명의 신라왕 중 최초의 여왕인 선덕여왕! 경주 동남쪽 낭산 중턱에 선덕여왕의 능이 자리한다.
백제와 고구려의 공략을 받아 많은 국토를 잃었으나 선정을 베풀어 민생을 안정시켰다.
또한 첨성대를 만들고 분황사, 황룡사 9층 목탑을 축조하는 등 신라 건축의 금자탑을 이룬 여왕이다.
밑둘레 74m, 높이 6.8m, 지름 24m 되는 이 능의 겉모양은 둥글게 흙을 쌓아 올린 형태이며, 아랫 부분에는 능을 보호하기 위한 2~3 단의 자연석 석축이 있다.
신라는 이슬람 사절도 인정한 ‘황금의 나라’였다. 유독 황금을 사랑했던 신라인들은 5~6세기 화려한 장신구 문화를 꽃피웠다.
이는 신라왕릉에서 발굴된 국보급 유물들에서 쉽게 알 수 있다. 관총에서 발굴된 이 금관은 국보 87호로 높이 44.4cm, 대륜 지름 19cm인 신라시대 금관이다.
이마 위에 얹히는 대륜의 둘레에 단순하게 도식화 한 수목형 입식 3개와 녹각형 입식 2개를 세워 장식해놓았다 . 이 의장은 신라 보관의 기본형이다. 금관총에서 출토된 허리띠와 드리개는 곱은옥, 물고기, 칼, 유리병, 숫돌 등 20 여개의 장식이 달려있다 5, 6세기 것으로 추정되며 허리띠 길이는 10.9 cm 드리개 길이는 54.5m로 국보 제 88호다.
신라고분 가운데 호화로운 유물이 가장 많이 발견된 천마총 그 대표적인 것이 국보 189호인 금모자다.
T자 모양과 곱은 모양 당초 무늬등을 맞새김한 얇은 금판 여러장을 붙여 만든 모자로 헝겊이나 가죽 등으로 된 모자위에 덧쓰는 것으로 추정된다.
경주 식리총에서 출토된 금동신발. 식리란 장식 신발이란 뜻이다.
얇은 청동판을 금 도금하여 이어 만든 것으로 신 바닥 가장자리에는 두 줄의 구슬 무늬와 꼰 무늬 사이에 불꽃 무늬가 새겨져 있다 신라는 육로와 해로의 실크로드를 통해 동서 문물을 받아들인 선진화 된 국제 무역국가 였다.
중국은 물론 중앙아시아를 넘어 이슬람 세계와도 활발히 교류했다는 증거들은 신라왕릉의 유물에서 찾을 수 있다. 경주 미추왕릉 지구 C지구 3호분에서 상감옥 목걸이가 출토된다. 서역인이 그려져 있는 이 목걸이는 5~6세기 것으로 짐작되며 보물 634호다.
보물 635호인 보검은 미추왕릉지구 계림로 14호분에서 나온 5,6 세기 경의 유물이다.
이러한 보검은 그리스/ 로마/ 이집트/ 서 아시아에서 유행하던 형식으로 특히 5세기 훈족의 아틸라왕 때 성행했다고 한다.
이것은 5세기 전후 중앙아시아와 신라인과의 교류를 증명해주고 있다.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유리그릇은 고구려/ 백제/ 가야에서는 보이지 않는 유물로 신라문화의 특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이 유리그릇들은 남러시아/ 지중해 주변 서 아시아에서 출토된 로마 유리 제품과 형태나 제작 수법이 비슷하기 때문에 실크로드를 통해 신라에 전해졌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키 큰 물병은 지중해 지방에서 포도주를 담는 용기인 오이노코에’ 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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