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독립운동

기미독립선언서(己未獨立宣言書)

야촌(1) 2019. 2. 22. 20:12

↑기미독립선언서 원문(己未獨立宣言書原文)

    (3.1독립선언서라고도 합니다)

 

기미독립선언서 요약

 

1919년 3.1 운동 때 발표된, 우리나라의 독립을 세계 만방에 알리기 위해 작성된 장문의 선언서. 3.1독립선언서(三一獨立宣言書)라고도 한다. 배운 사람들에게는 "吾等은 玆에 我朝鮮의 獨立國임과 朝鮮人의 自主民임을 宣言하노라"는 구절로 널리 알려져 있다.

 

미국 독립선언서는 국보중의 국보로 취급받는데 3.1독립선언서(기미독립선언서, 기미독립선언문)는 국보로 지정되지 않았다.

 

민족대표 33인의 공동명의로 발표되었으며, 초안을 쓴 사람은 최남선[1], 대원칙을 세운 사람은 손병희라고 한다.

손병희가 독립선언서를 고쳐 쓰려고 했으나 시일이 얼마 안 남아 대원칙만 썼다고 한다.

 

처음에는 여러 단체에서 서로 자기 단체의 이름을 먼저 올리겠다고 격렬히 싸우자, 기독교계통으로 참여한 이승훈의 훈계로 결국 연장자이자 주최자인 손병희가 대표로 첫번째로 실렸다. 그리고 만해 한용운의 주장으로 뒷부분에 '공약 3장'이 추가되었다.

 

당초에는 대중이 모일 탑골공원에서 발표하려고 했으나, 유혈사태가 일어날 것을 우려하여 태화관(泰和館)이라고 하는 요릿집[2]으로 장소를 바꿔 조용히 선언식을 진행했다.

 

또한 민족대표 33인은 선언문을 낭독한 즉시 일본 경찰에 자수하여 순순히 연행되었다. 덕분에 탑골공원에 모여 있었던 사람들은 머뭇거리다가, 민족대표 33인의 선언식과는 별도로 선언식을 진행하고 만세운동을 개시했다.

 

적극적인 독립활동을 하지 않고 자수하는 어리석은 짓을 했다고 비겁하다고 평가받기도 하나, 민족대표 33인은 이 사건으로 옥고를 치렀으며, 손병희 등 후유증으로 사망한 사람도 있고, 이후 독립운동을 하다가 옥사한 사람도 많다. 당시 옥고를 치루는 것과 현재 교도소 생활하는 것은 처우가 천지 차이이기에 옥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학교대사전에 따르면 세계에서 가장 긴 독립선언서라고 한다. 사실관계는 불명하다.

 

선언서의 내용은 크게 다음과 같이 나눌 수 있다.

 

◇선언의 내용과 취지

◇독립 선언의 배경, 일제로 인한 우리 민족의 고통

◇독립의 정당성, 필요성

◇시국에 대해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

◇독립의 의의, 독립에 대한 결의

 

다른 선언문에 비해 기미독립선언서가 내용상으로 두드러지는 부분은, 내용이 지극히 비폭력적이고 온건하다는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발표된 무오독립선언서는 물론,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서와 비교하면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이 선언문에는 무력을 이용해 투쟁하자는 내용은 눈 씻고 봐도 찾아 볼 수 없다.

오로지 '정의라는 이름의 군대'와 '인도주의라는 이름의 무기'에 힘입어 독립을 주장할 뿐이다.

 

또한 '우리는 일본의 배신을 죄주거나 무도함을 책망하려는 것이 아니다',

'지난 잘못을 꾸짖을 겨를이 없다'라는 내용은 일부 대중의 공감을 얻기 다소 힘들었을 것이다.

 

이렇게 '약한' 독립선언서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은 당시 국제사회와 관련이 있다.

당시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천명한 민족자결주의와 제1차 세계대전 직후 독일, 오스트리아, 오스만 제국의 해체로 자주독립 의지만 보이면 독립할 수 있다는 낙관론이 퍼져 있었다.

 

이런 시대적 상황이나 이들의 생각을 모르고 비웃거나 무지하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한편으로 그들의 행동이 당시까지도 외교 론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한계를 지적받기도 한다.[3]

 

그러나 비폭력주의와 인도주의가 현대 시위운동의 대원칙 중 하나인 것을 생각하면 오히려 이쪽 방면에서는 선구자로고도 할 수 있다. 문장력은 매우 깔끔하고 수려한 수준이며, 현대에 비해 한자어 및 한문투 표현이 많이 쓰였다.

 

예를 들어 "이로써"는 "此로써", "얼마이뇨"는 "幾何ㅣ뇨"라고 하는 등 실질형태소는 거의 다 한자어로 표현했으며, 恒久如一(항구여일), 壓縮銷殘(압축소잔), 土昧人遇(토매인우)와 같은 사자성어나 오늘날에 잘 쓰이지 않는 한자어가 무더기로 나온다.

 

한문에 익숙했을 당대 지식인에게는 그리 어려운 문체가 아니었겠지만, 문맹률이 지금보다 훨씬 높았던 당시에는 다수 민중에게 훨씬 까다로운 문체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오늘날에도 그다지 읽기 쉬운 문장은 아니다. 그래서 후대 사람들에게는 앞의 내용상의 온건성과 더불어 민중에게 어필하기에는 부족하지 않았냐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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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미독립선언서(己未獨立宣言書)

(3·1독립선언서(三一獨立宣言書)라고도 칭합니다).

 

吾等(오등)은 玆(자)에 我(아) 朝鮮(조선)의 獨立國(독립국)임과 朝鮮人(조선인)의 自主民(자주민)임을 宣言(선언)하노라. 此(차)로써 世界萬邦(세계만방)에 告(고)하야 人類平等(인류평등)의 大義(대의)를 克明(극명)하며, 此(차)로써 子孫萬代(자손만대)에 誥(고)하야 民族自存(민족자존)의 正權(정권)을 永有(영유)케 하노라.

半萬年(반만년) 歷史(역사)의 權威(권위)를 仗(장)하야 此(차)를 宣言(선언)함이며, 二千萬(이천만) 民衆(민중)의 誠忠(성충)을 合(합)하야 此(차)를 佈明(포명)함이며, 民族(민족)의 恒久如一(항구여일)한 自由發展(자유발전)을 爲(위)하야 此(차)를 主張(주장)함이며, 人類的(인류적) 良心(양심)의 發露(발로)에 基因(기인)한 世界改造(세계개조)의 大機運(대 기운)에 順應幷進(순응병진)하기 爲(위)하야 此(차)를 提起(제기)함이니, 是(시)ㅣ 天(천)의 明命(명명)이며, 時代(시대)의 大勢(대세)ㅣ며, 全人類(전 인류) 共存同生權(공존동생권)의 正當(정당)한 發動(발동)이라, 天下何物(천하하물)이던지 此(차)를 沮止抑制(저지억제)치 못할지니라.

舊時代(구시대)의 遺物(유물)인 侵略主義(침략주의), 强權主義(강권주의)의 犧牲(희생)을 作(작)하야 有史以來(유사이래) 累千年(누천년)에 처음으로 異民族(이민족) 箝制(겸제)의 痛苦(통고)를 嘗(상)한지 今(금)에 十年(십년)을 過(과)한지라. 我(아) 生存權(생존권)의 剝喪(박상)됨이 무릇 幾何(기하)ㅣ며, 心靈上(심령 상) 發展(발전)의 障碍(장애)됨이 무릇 幾何(기하)ㅣ며, 民族的(민족적) 尊榮(존영)의 毁損(훼손)됨이 무릇 幾何(기하)ㅣ 며, 新銳(신예)와 獨創(독창)으로써 世界文化(세계문화)의 大潮流(대 조류)에 寄與補裨(기여보비)할 機緣(기연) 을 遺失(유실)함이 무릇 幾何(기하)ㅣ뇨.

噫(희)라, 舊來(구래)의 抑鬱(억울)을 宣暢(선창)하려 하면, 時下(시하)의 苦痛(고통)을 擺脫(파탈)하려 하면, 將來(장래)의 脅威(협위)를 芟除(삼제)하려 하면, 民族的(민족적) 良心(양심)과 國家的(국가적) 廉義(염의)의 壓縮銷殘(압축 소잔)을 興奮伸張(흥분 신장)하려 하면, 各個(각개) 人格(인격)의 正當(정당)한 發達(발달)을 遂(수) 하려 하면, 可憐(가련)한 子弟(자제)에게 苦恥的(고치적) 財産(재산)을 遺與(유여)치 안이 하려 하면, 子子孫孫(자자손손)의 永久完全(영구 완전)한 慶福(경복)을 導迎(도영)하려 하면, 最大急務(최대 급무)가 民族的(민족적) 獨立(독립)을 確實(확실)케 함이니, 二千萬(이천만) 各個(각개)가 人(인)마다 方寸(방촌)의 刃(인)을 懷(회)하고, 人類通性(인류통성)과 時代良心(시대양심)이 正義(정의)의 軍(군)과 人道(인도)의 干戈(간과)로써 護援(호원)하는 今日(금일), 吾人(오인)은 進(진)하야 取(취)하매 何强(하강)을 挫(좌)치 못하랴. 退(퇴)하야 作(작) 하매 何志(하지)를 展(전)치 못하랴.

丙子修好條規(병자수호조규) 以來(이래) 時時種種(시시종종)의 金石盟約(금석맹약)을 食(식)하 얏 다 하야 日本(일본)의 無信(무신)을 罪(죄)하려 안이 하노라. 學者(학자)는 講壇(강단)에서, 政治家(정치가)는 實際(실제)에 서,我(아) 世宗世業(세종세업)을 植民地視(식민지시)하고, 我(아) 文化民族(문화민족)을 土昧人遇(토매인우)하 야, 한갓 征服者(정복자)의 快(쾌)를 貪(탐)할 뿐이오,

 

我(아)의 久遠(구원)한 社會基礎(사회기초)와 卓犖(탁락)한 民族心理(민족심리)를 無視(무시)한다 하야 日本(일본)의 少義(소의)함을 責(책)하려 안이 하노라.

 

自己(자기)를 策勵(책려)하기에 急(급)한 吾人(오인)은 他(타)의 怨尤(원우)를 暇(가)치 못하노라. 現在(현재)를 綢繆(주무) 하기에 急(급)한 吾人(오인)은 宿昔(숙석)의 懲辨(징변)을 暇(가)치 못하노라. 今日(금일) 吾人(오인)의 所任 (소임)은 다만 自己(자기)의 建設(건설)이 有(유)할 뿐이오,

 

決(결)코 他(타)의 破壞(파괴)에 在(재)치 안이 하도다. 嚴肅(엄숙)한 良心(양심)의 命令(명령)으로써 自家(자가)의 新運命(신운명)을 開拓(개척)함이오, 決(결)코 舊怨(구원)과 一時的(일시적) 感情(감정)으로써 他(타)를 嫉逐排斥(질축 배척)함이 안이로다.

 

舊思想(구사상), 舊勢力(구세력)에 羈 (기미)된 日本(일본) 爲政家( 위정가)의 功名的(공명적) 犧牲(희생)이 된 不自然(부자 연), 又(우) 不合理(불합리)한 錯誤狀態(착오상태)를 改善匡正(개선 광정)하야, 自然(자연), 又(우) 合理(합리) 한 正經大原(정경대원)으로 歸還(귀환)케 함이로다.

 

當初(당초)에 民族的(민족적) 要求(요구)로서 出(출)치 안이 한 兩國倂合(양국 병합)의 結果(결과)가, 畢竟(필경) 姑息的(고식적) 威壓(위압)과 差別的(차별적) 不平(불평) 과 統計數字上(통계 숫자상) 虛飾(허식)의 下(하)에서 利害相反(이해상반)한 兩(양) 民族間(민족간)에 永遠(영 원)히 和同(화동)할 수 업는 怨溝(원구)를 去益深造(거익 심조)하는 今來實績(금래 실적)을 觀(관)하라.

 

勇明果敢(용명과감)으로써 舊誤(구오)를 廓正(확정)하고, 眞正(진정)한 理解(이해)와 同情(동정)에 基本(기본)한 友好的(우호적) 新局面(신국면)을 打開(타개)함이 彼此間(피차간) 遠禍召福(원화 소복)하는 捷徑(첩경)임을 明知(명 지)할 것 안인가.

 

또, 二千萬(이천만) 含憤蓄怨(함분 축원)의 民(민)을 威力(위력)으로써 拘束(구속)함은 다만 東洋(동양)의 永久(영구)한 平和(평화)를 保障(보장) 所以(소이)가 안일 뿐 안이라, 此(차)로 因(인)하야 東洋安危 (동양 안위)의 主軸(주축)인 四億萬(사억만) 支那人(지나인)의 日本(일본)에 對(대)한 危懼(위구)와 猜疑(시의) 를 갈스록 濃厚(농후)케 하야, 그 結果(결과)로 東洋(동양) 全局(전국)이 共倒同亡(공도 동망)의 悲運(비운)을 招致(초치)할 것이 明(명)하니,

 

今日(금일) 吾人(오인)의 朝鮮獨立(조선 독립)은 朝鮮人(조선인)으로 하여금 正當 (정당)한 生榮(생영)을 遂(수)케 하는 同時(동시)에, 日本(일본)으로 하여금 邪路(사로)로서 出(출)하야 東洋(동 양) 支持者(지지자)인 重責(중책)을 全(전)케 하는 것이며, 支那(지나)로 하야금 夢寐(몽매)에도 免(면)하지 못 하는 不安(불안), 恐怖(공포)로서 脫出(탈출)케 하는 것이며, 또 東洋平和(동양 평화)로 重要(중요)한 一部(일부) 를 삼는 世界平和(세계 평화), 人類幸福(인류 행복)에 必要(필요)한 階段(계단)이 되게 하는 것이라. 이 엇지 區區(구구)한 感情上(감정상) 問題(문제)ㅣ리오.



아아, 新天地(신천지)가 眼前(안전)에 展開(전개)되도다. 威力(위력)의 時代(시대)가 去(거)하고 道義(도의)의 時代(시대)가 來(내)하도다. 過去(과거) 全世紀(전세기)에 鍊磨長養(연마 장양)된 人道的(인도적) 精神(정신)이 바야흐로 新文明(신문명)의 曙光(서광)을 人類(인류)의 歷史(역사)에 投射(투사)하기 始(시)하도다.

 

新春(신춘) 이 世界(세계)에 來(내)하야 萬物(만물)의 回蘇(회소)를 催促(최촉)하는도다. 凍氷寒雪(동빙한설)에 呼吸(호흡) 을 閉蟄(폐칩)한 것이 彼一時(피 일시)의 勢(세)ㅣ라 하면 和風暖陽(화풍 난양)에 氣脈(기맥)을 振舒(진서)함은 此一時(차 일시)의 勢(세)ㅣ니, 天地(천지)의 復運(복운)에 際(제)하고 世界(세계)의 變潮(변조)를 乘(승)한 吾人 (오인)은 아모 躊躇(주저)할 것 업스며, 아모 忌憚(기탄)할 것 업도다.我(아)의 固有(고유)한 自由權(자유권)을 護全(호전)하야 生旺(생왕)의 樂(낙)을 飽享(포향)할 것이며, 我(아)의 自足(자족)한 獨創力(독창력)을 發揮(발 휘)하야 春滿(춘만)한 大界(대계)에 民族的(민족적) 精華(정화)를 結紐(결뉴)할지로다.



吾等(오등)이 玆(자)에 奮起(분기)하도다. 良心(양심)이 我(아)와 同存(동존)하며 眞理(진리)가 我(아)와 幷進 (병진)하는도다. 男女老少(남녀노소) 업시 陰鬱(음울)한 古巢(고소)로서 活潑(활발)히 起來(기래)하야 萬彙군象 (만휘 군상)으로 더부러 欣快(흔쾌)한 復活(부활)을 成遂(성수)하게 되도다. 千百世(천 백세) 祖靈(조령)이 吾等 (오등)을 陰佑(음우)하며 全世界(전세계) 氣運(기운)이 吾等(오등)을 外護(외호)하나니,着手(착수)가 곳 成功(성 공)이라. 다만, 前頭(전두)의 光明(광명)으로 驀進(맥진)할 따름인뎌.

 

公約三章(공약삼장)

 

ㅡ. 今日(금일) 吾人(오인)의 此擧(차거)는 正義(정의), 人道(인도),生存(생존),尊榮(존영)을 爲(위)하는 民族的

      (민족적) 要求(요구)이니, 오즉 自由的(자유적) 精神(정신)을 發揮(발휘)할 것이오, 決(결)코 排他的(배타적)

      感情(감정)으로 逸走(일주)하지 말라.

ㅡ. 最後(최후)의 一人(일인)까지, 最後(최후)의 一刻(일각)까지 民族(민족)의 正當(정당)한 意思(의사)를 快(쾌)

      히 發表(발표)하라.

ㅡ. 一切(일체)의 行動(행동)은 가장 秩序(질서)를 尊重(존중)하야, 吾人(오인)의 主張(주장)과 態度(태도)로 하

      야금 어대까지던지 光明正大(광명정대)하게 하라.

 



      朝鮮建國 4252년 3월 1일

      朝鮮民族代表

 

손병희(孫秉熙) 3,1운동의 주역. 동학의 주도자. 동학을 천도교로 개편하고 수장이 됨. 독립선언을 하고 감옥에 갇힘. 종교지도자에서 애국지도자로 활약. 1921년 사망. 딸 다섯 중 셋째 딸 손용화는 소파 방정환의 아내.
이승훈(李昇薰) 1864년(고종 1) 평북 정주에서 출생, 본관은 여주(驪州). 초명은 승일(昇日). 본명은 인환(寅煥). 자는 승훈(昇薰), 호는 남강(南岡). 기독교 대표로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1920년대에는 물산장려운동·민립대학설립운동 등에 참여하는 한편 이상촌(理想村) 건설운동을 벌였다.
한용운(韓龍雲) 불교 대표. 공약 삼장 작성. 말년에는 가난과 중풍에 시달리며 몇 푼 안 되는 원고료로 연명하다 광복을 불과 1년 앞둔 1944년 사망.
권동진(權東鎭) 1882년 일본 망명 후 1905년경(?) 천도교 입문. 3.1 운동 후 신간회 부회장으로 광주학생운동 참여. 증손 권혁방 씨는 33인 유족회 회장 재임.
권병덕(權秉悳) 1894년 손병희와 함께 동학농민운동에 참가, 천도교 입문. 3.1 운동 후 천도교 감사원장, 선도사 등을 역임. 1947년 타계.
길선주(吉善宙) 한국 최초의 목사. 3.1 운동 때 서울에 늦게 도착. 총감부에 자수하였으나 무죄로 풀려남. 독립유공자에서 제외됐었으나 2009년 건국훈장 수여.
김병조(金秉祚) 33인 중 유일하게 체포되지 않았음. 상해에서 임시정부 상임이사, 사료편찬위원 등을 역임. 독립혈사 간행. 북에 머물렀다는 이유로 유공자 포상이 안 되다가 1990년 3.1절이 되어서야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김완규(金完圭) 독립선언서 초안 검토, 서명. 천도교 도사로 종교활동과 민족운동을 계속하였고 광복 후 국민회 서울시위원장, 국민회 재정부장(財政部長) 등을 역임했으며 33인유족회 회장을 지냈다.
광복 후 이승만(李承晩)과 김구(金九) 계열이 연합한 우익반탁운동단체 대한독립촉성국민회(大韓獨立促成國民會)에 참여했으나 1949년 병사했다.
김창준(金昌俊) 개신교 측 대표. 함경북도 만세 운동 주도. 해방 후 사회주의 개신교 운동 전개. 남북연석회의가 열린 1948년경 월북. 독립유공자에서 제외.
나용환(羅龍煥) 23세 때 동학 입문. 3.1 운동 후 천도교 포교 사업. 1936년 병사.
나인협(羅仁協) 19세 때 동학 입문. 3.1 운동 후 천도교 교사 활동. 1951년 병사.
박동완(朴東煥) 개신교 측으로 3.1 운동 경기 지방의 시위 주도. 신간회 상임이사. 1923년 하와이로 망명. 1941년 병사.
백용성(白龍城) 불교 대표. 법명은 용성진종대사. 16세 때 출가하여 해인사 스님들의 봉기 주도. 불교 정화 및 대중화에 힘써 서울 시내에 최초로 포교당 세움. 대각사 창건 후 60여종의 불경어록과 저술을 남겼다.
 
일제의 감시를 피해 틈틈이 상해 임시정부를 물심양면 지원했으며, 윤봉길을 불자에 귀의시킨 뒤 그를 임시정부로 보내 김구 밑에서 일하게 하기도 했다.
 
윤봉길 의거 후에는 직접 중국으로 가 장제스와 마오쩌둥에게 독립운동 지원을 요청하는 등 무장투쟁을 준비하였으나 밀정에게 걸려 실패했으며, 실의 속에 1940년 입적.
박준승(朴準承) 29세 때 천도교 입문. 3.1 운동 때 임실군, 남원시, 장성군 등 호남 지방 민중 봉기 주도. 3월 1일 오후 2시경 태화관에 모여 독립을 선언한 뒤 일경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으로 복역하던 중 1921년 옥사했다.
신석구(申錫九) 개신교 대표. 3.1 운동 후 1938년 신사 참배 거부. 1945년 전승 기원 예배 거부로 옥중에서 해방을 맞았다. 1949년 감리회 북한 지역 총책임자로 개신교 민주당 결성. 같은 해 진남포 4.19 사건으로 북한 당국에 검거되어 1950년에 처형.
신홍식(申洪植) 개신교 대표. 평양 남산현 교회 목사로 있다 3.1 운동 참가. 신사 참배 거부. 1937년 사망.
양전백(梁甸伯) 평양 신학교 졸업. 목사로 있다 3.1 운동 참여. 목회 사업에 전념. 105인 사건에 연루.
양한묵(梁漢默) 1898년 일본에서 손병희를 만나 동학에 입문. 1905년 헌정동지회를 만들고 구국운동. 1919년 10월 서대문형무소에서 고문으로 순국.
오세창(吳世昌) 개화론자 오경석의 아들이자 천도교 신자. 한성순보 기자. 만세보, 대한민보 등의 사장. 해방후 매일신보, 서울신문 사장. 1953년 사망.
오하영(吳夏英) 감리회 목사. 6.25 전쟁 때 서울에서 납북되어 1962년 병사. 북한의 평양 애국 열사릉에 안치. 1989년 3.1절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1996년 11월 위패만 국립묘지에 안치.
유여대(劉如大) 모사로 3.1 운동 당시 의주에서 독립선언서를 뿌리다 오후 늦게 서울 도착. 일경에 붙들렸다. 1937년 사망.
이갑성(李甲成) 본관은 경주(慶州). 조선전기 이지회(李之會) 후손, 호(號)는 연당(硏堂). 경상북도 대구 출신, 개신교 신자. 1915년 세브란스 병원에 근무. 3.1 운동, 민립대학 설립운동, 신간회 운동, 흥업구락부 사건 주도 등에 일제와 타협하지 않은 인물 중 한 사람이었지만, 1980년대에 변절했다는 주장뿐 아니라 일제의 밀정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2005년 삼일절 특집 SBS 뉴스추적에서 심층 취재한 결과 오히려 요 시찰인 인물인 것으로 밝혀졌다. 한편, 매일신문에서 2010년에 이 떡밥에 낚여 친일파 언급했다가 정정 기사를 냈다.# 매일신문은 역사 속의 인물에서 독립운동에 헌신하고도 친일파로 매도된 억울한 '희생자'였다고 평했다.# 민족대표 33인 중 마지막 생존자였다.
이명룡(李明龍) 본관은 전주, 평북 철산 출생,개신교 대표. 105인 사건 연루. 3.1 운동 후 미국으로 망명. 1956년 병사.
이종일(李鍾一) 본관은 성주(星州), 대한제국 시기에 <경성신문>, <제국신문>, <조선독립신문>을 창간했고, 천도교 대표. 보성사 인쇄소 사장으로 선언서 인쇄. 1925년 작고.
이종훈(李鍾勳) 천도교 대표. 1931년 만주에서 병사.
이필주(李弼柱) 경기 고양 출신, YMCA 초대 체육 교사로 일하다 목사가 되어 정동교회 주임 목사 역임. 1942년 작고.
임예환(林禮煥) 1865년(고종 2)∼1949년졸, 평남 중화 출신, 동학혁명에 동참, 3.1 운동에 가담. 건국훈장 대통령장
최성모(崔聖模) 1874년(고종 11)∼1937년 졸, 감리회 목사. 이필주를 만나 3.1 운동에 가담. 황해도 시위 주도.
홍기조(洪基兆) 1865년 12월 6일 ~ 1938년 7월 6일 병사. 22세 때 천도교 입문, 손병희와 평안도 천도교 독립운동 주도. 3.1 운동 후 평안도 용강에서 독립운동함.
홍병기(洪秉箕) 1869년(고종 6)∼1949년 졸. 호는 인암(仁菴). 서울 출신. 천도교 대표. 고려혁명위원회 조직. 만주로 망명하였다가 신의주에서 체포.
박희도(朴熙道)
(변절자)
1889년~1952년 사망. 황해도 해주 출신. 33인 중 최연소. 3.1 운동 후 잡지 『생활사』 창간. 이후 여제자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어 당시 신문 가십란의 단골 스타가 되었으며[1] 결국 친일 성향의 월간 잡지 『동(양지)광』의 창립인, 주간으로 있으면서 친일로 완전히 변절했다. 1948년 반민특위에 회부되었다가 51년 사망.
최린
(변절자)
1878(고종 15), 함남 함흥 출생~6,25전쟁 중 납북 1958년 사망. 천도교. 선언문 초안 작성. 1934년 중추원 참의, 37년 총독부 조선어판 기관지 매일신보 사장, 39년 임전 보국단장을 역임하는 등 친일에 앞장섰다.
 
1949년 반민특위에 체포되었을 때 다른 이들과 달리 그나마 눈물로 참회하는 진술을 하였다. 이때 옆에서 계속 변명해대는 이광수에게 닥치라고 했다. 6.25 때 납북되었다.
정춘수
(변절자)
1873(고종 10)∼1953사망. 3.1 운동 당시 감리회 목사로 함경남도 원산에서 만세 운동을 지도했다. 1934년 흥업 구락부 사건으로 고문당했다. 신사 참배 및 창씨개명 행위로 변절자로 간주되나 위의 사람들에 비해 적극적인 친일 행적은 없다.
 
아마 자발적으로 한 이들과 다르게 못 버텨서 굴복한 듯. 독립 유공자에서 제외, 51년 사망. 청주시의 우암산에 조성된 삼일 공원에도 이 사람을 포함한 충청북도 출신의 민족 대표 6인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으나 1996년에 시민들이 철거해서 지금은 5개다.

 

3·1운동(三一運動) 또는 3·1만세운동(三一萬歲運動)은 일제 강점기에 있던 한국인들이 일제의 지배에 항거하여 1919년 3월 1일 한일병합조약의 무효와 한국의 독립을 선언하고 비폭력 만세운동을 시작한 사건이다.

 

기미독립운동이라고도 부른다. 대한제국 고종이 독살되었다는 고종 독살설이 소문으로 퍼진 것이 직접적 계기가 되었으며, 고종의 인산일(고종의 장례식)인 1919년 3월 1일에 맞추어 한반도 전역에서 봉기한 독립운동이다.

 

 

↑1919년 3.1일 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서울 종로구 보신각 앞에서 만세를 외치고 있는 민중들...

 

출처 : 인터넷 자료들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