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고궁,정려,서원 140

안동 도산서원(安東 陶山書院)

작성일 : 2008. 10. 19(일) ■ 안동 도산서원(安東 陶山書院) 안동의 도산서원(陶山書院)은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연산군 7)~1570년(선조 3)』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 여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도산서원길 154(토계리 680)에 세운 서원을 말한다. 도산서원은 1574년(선조 7)에 지방유림의 발의로 도산서당(陶山書堂)의 뒤편에 창건하여 이황의 위패를 모셨고. 1575년 선조로부터 한석봉(韓石峰)이 쓴 '도산'(陶山)의 사액을 받았다. 영남유림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으며,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 당시에도 훼철(毁撤)되지 않고 존속한 47개 서원 중의 하나였다. 1969년~1970년 정부의 고적보존정책에 따라 성역화 대상으로 지정되어 대대적인 보수를 하고, 경내의 건물로..

청도 유호연지와 군자정

●이육(李育) [진사시] 중종(中宗) 2년(1507) 정묘(丁卯) 증광시(增廣試) [진사] 3등(三等) 7위(37/100) ------------------------------------------------------------------------------------------------------------------------------------------- 자는 원숙(元叔), 호는 모헌(慕軒), 본관은 고성(固城)이다, 좌의정 이원(李原)의 증손이고, 조부는 현감 이증(李增)이며, 아버지는 함창, 보은, 평택 등지의 현감을 지낸 이평(李評)이다, 어머니는 군사(郡事) 허추(許樞)의 딸 숙부인 양천허씨(陽川許氏)이고. 부인은 숙인(淑人) 흥해 최씨이다, 사림으로 이름 높았던 쌍매당(雙梅堂) ..

경복궁 비뚤게 짓고 현판은 엉뚱..엉터리 복원 어쩌나

[SBS취재파일] 임상범 기자 입력 2021. 04. 04. 09:09 수정 2021. 04. 04. 09:48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는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기로 결정하고, 1395년 경복궁을 창건합니다. 경복궁의 명칭은 『시경』 주아(周雅)에 나오는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부르니 군자만년 그대의 큰 복을 도우리라(旣醉以酒 旣飽以德 君子萬年 介爾景福)"에서 따왔습니다. 조선 국왕들의 유교 정치 이념을 구현하기 위한 상징과도 같았던 경복궁은 엄격한 대칭과 비례에 따라 지어졌습니다. 경복궁의 원래 모습을 담은 조선시대 북궐도나 조선총독부가 만든 조선고적도보 등을 보면 그 균형미를 한눈에 볼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 북궐도 ↑조선총독부 제작 경복궁 배치도 국왕의 즉위식이나 대례가 거행됐던 근정전을 ..

합천 화양동 병사기(陜川華陽洞丙舍記)

합천 화양동 병사기(陜川華陽洞丙舍記) 지은이 : 설송재 박필성(雪松齋 朴弼成)/효종의 사위(숙녕 옹주의 남편) 선조 야천(冶川) 선생 증(贈) 영의정(領議政) 문강공(文康公)의 묘소가 합천의 화양동(지금의 묘산면(妙山面) 화양리(華陽里)에 있으니 관청 소재지와 남쪽으로 40리 거리이다. 제전(祭田)은 사라져 상민들의 토지가 되어 버렸고 묘지기도 가난하고 단출하여 애초부터 이른바 병사(丙舍)라는 것이 없었다. 본 고을 사또 이의일(李義逸)이 성묘차 산소에 와서 여기저기 둘러보고 탄식하기를, “선생의 높은 도의는 아직도 후학들이 우러러 사모하고 있는데 하물며 내가 외후손으로 이곳의 수령이 되었으니 어찌 감히 묘에 관한 일에 힘을 다하지 않겠는가.”하고, 바로 선생의 8대손인 안의 현감(安義縣監) 지원에게 찾..

농월정(弄月亭)

옛 농월정 모습 도색하기전 농월정 모습 소재지 : 경남 함양군 안의면 월림리 산759번지 농월정(弄月亭)은 조선 중기의 학자인 지족당 박명부(知足堂 朴明榑)가 세운 정자로 광해군때, 영창대군의 죽음과 인목대비 유배의 부당함을 간언하다 파직되자 낙향하여 은거하다 인조 반정 후 예조참판과 강릉도호부사 등을 지내고 1637년 이곳에 농월정을 짓고 후학을 가르쳣다고 한다. 여러번의 중수를 거쳐 지금의 건물은 1899년 고종 36)에 중수 후 2003년 10월 5월 오후 7시 45분에 방화로 추정되는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2013년부터 복원을 시작하여 2015년에 준공되었다. ------------------------------------------------------------------------------..

낙성대(落星垈)

작성일 : 2013. 07. 25(목) ↑안국문(安國門) ↑안국사(安國祠) ↑안국사(安國祠) 귀주대첩의 영웅 강감찬 장군 영정(姜邯贊將軍影幀), 생졸년 : 948년(정종 3)∼1031년(현종 22). ↑낙성대 삼층석탑(落星垈 三層石塔) ↑낙성대 전경(落星垈 全景) 종 목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4호(낙성대3층석탑) 명 칭 낙성대(落星垈) 분 류 사묘재실 수 량 1기 지정일 1972. 05. 25 건립시기 고려시대 소재지 서울특별시 관악구 봉천동 산48번지 소유자 국유 관리자 관악구 ■ 낙성대 낙성대(落星垈)는 고려(高麗)의 명장(名將) 인헌공(仁憲公) 강감찬(姜邯贊) 장군(將軍)이 태어난 곳이다. 장군(984∼1031)은 거란(契丹)의 침략을 막아낸 것을 비롯하여 구국제민(救國濟民)을 위해 일생을 바쳤다..

안동 영호루(安東 映湖樓)

작성일 : 2019. 10.11 ■ 안동 영호루(安東 映湖樓) 안동의 영호루는 경남 밀양의 영남루, 진주의 촉석루, 남원의 광한루와 함께 한강 이남의 대표적인 누각으로 불리어져 왔다. 창건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질 않아 언제 누구에 의하여 건립되었는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천여 년 동안 그 이름이 전통의 웅부안동(雄府安東)과 함께 하고 있는바 현재의 영호루는 1970년에 철근 콘크리트로 세워진 한식 누각이다.북쪽 면에는 공민왕의 친필현판을, 남쪽 면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인 ‘영호루’를 걸었다. 내부에는 갑술년(1934) 대홍수 때, 유실되었다가 회수한 현액들과 새로 복원한 현액들을 게판(揭板) 하였다. 현재 게판 되어 있는 시판(詩販), 제영(題詠), 중수기(重修記) 등 46점과 현판 2점이 있다...

제주성 남문 옛 모습

작성일 : 2007. 08. 14 ↑제주성(城) 남문(南門)의 옛 모습 1914년 동문·서문 사라지고 간성 2문도 없애 제주성 원형 회복 위한 학술규명·관심 절실 제주시 남문로터리 근처 한짓골 진입부. 지금은 쇠락한 도심의 뒷골목이지만 이곳은 제주성의 중심 도로로 관덕정을 향하는 길목이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젊은이들이 즐겨찾던 해방구였다. 옛 영화는 사라졌지만 이곳 관덕로 8길 일대에 남문루 자리였음을 알리는 표석이 있다. 표석을 제외하고 남문이 위치했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제주성 동문과 서문 역시 자취는 사라졌다. 1910년대까지 제주성 남문·동문·서문 등 3문은 존재했으나 일제에 의해 철거되는 운명을 맞게 된다. 올해가 제주성 동문과 서문이 철거된 지 꼭 100년이 된다. 그 100년 동안..

음성 도통사(道統祠) 복원(復元) 관련 이야기

음성 도통사(道統祠) 복원(復元) 관련 이야기 도통사는 원래 조선시대 영조 10년(1734년)에 충주지방 유림들이 충주시 신니면 화안리에 건립하였던 것으로 일제 때인 1928년 풍덕군수(豊德郡守)를 지낸 안경렬(安璟烈) 등 지역 유림들이 사우(祠宇)를 중수하고 3성6현(三聖六賢)을 봉향하던 종래의 규모에 더해 3성 9현(三聖九賢)을 제향 하는 한편 시대상황에 따라 이곳이 민족정기를 되찾는 유림의 집회장소가 됨과 아울러 항일(抗日) 독립정신을 함양하는 집합장소의 역할까지 하게 되었다. 따라서 조선인(朝鮮人)의 민족정기를 억누르려던 일제 당국으로부터 사찰(査察) 대상이 되어 오다가 1938년 사우를 강제로 철거하여 그 목재로 신니면(新尼面) 사무소를 짓는데 썼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충주 유림에서는 신니..

신항서원 묘정비(莘巷書院廟庭碑)

송자대전(宋子大全) 제171권 : 우암 송시열 ■ 신항서원 묘정비(莘巷書院廟庭碑) 원임대광보국숭록대부 영중추부사 치사 봉조하(原任大匡輔國崇祿大夫 領中樞府事 致仕 奉朝賀) 송시열(宋時烈)이 비문(碑文)을 짓고, 통훈대부 행 서원현감(通訓大夫 行西原縣監) 조형기(趙亨期)가 비문의 글씨를 씀.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領議政 兼 領經筵 弘文館 藝文館 春秋館 觀象監事) 김수항(金壽恒)이 전액의 글씨를 씀. 회암(晦菴) 주 부자(朱夫子)가 일찍이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남강(南康)에 세우고 매우 넓고도 조밀한 규약(規約)을 게시(揭示)하였는데, 마침내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신지(莘摯)ㆍ항안(巷顔)’이라 할 뿐이니, 그 말이 비록 간략하나 도(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