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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항서원 묘정비(莘巷書院廟庭碑)

야촌(1) 2020. 3. 2. 19:56

송자대전(宋子大全) 제171권 : 우암 송시열

 

■ 신항서원 묘정비(莘巷書院廟庭碑)

 

원임대광보국숭록대부 영중추부사 치사 봉조하(原任大匡輔國崇祿大夫 領中樞府事 致仕 奉朝賀) 송시열(宋時烈)이 비문(碑文)을 짓고,

 

통훈대부 행 서원현감(通訓大夫 行西原縣監) 조형기(趙亨期)가 비문의 글씨를 씀.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領議政 兼 領經筵 弘文館 藝文館 春秋館 觀象監事) 김수항(金壽恒)이 전액의 글씨를 씀.

 

회암(晦菴) 주 부자(朱夫子)가 일찍이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남강(南康)에 세우고 매우 넓고도 조밀한 규약(規約)을 게시(揭示)하였는데, 마침내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신지(莘摯)ㆍ항안(巷顔)’이라 할 뿐이니, 그 말이 비록 간략하나 도(道)의 체용(體用)의 전부와 학문의 본말의 차서가 이미 눈앞에 뚜렷함은 어째서인가!.

 

성현의 도는 수기치인(修己治人)에서 벗어나지 않는데, 수기의 공부는 안자(顔子)의 극기복례(克己復禮)보다 더 종요로운 것이 없고, 치인의 용(用)은 이윤(伊尹)의 사군애민(事君愛民)보다 더 큰 것이 없다. 그러나 세대가 서로 1천여 년이나 떨어졌으므로 그 출처의 법도도 동일하지 않았으니, 도(道)의 큰 근원을 환히 꿰뚫어 본 주자(朱子)가 아니었다면 그 누가 이를 하나로 합하여 일맥(一脈)으로 관통(貫通)시킬 수 있었겠는가.

 

대개 이윤은 농사를 지으면서 요순(堯舜)의 도를 즐겼으니 이것은 바로 안자가 즐거움을 고치지 않은 것이요, 안자는 나라 다스리는 방법을 공자에게 물었으니 이것은 바로 이윤이 친히 임금을 뵌 뜻이다. 그렇다면 이 두 현인은 참으로 이른바, 처지를 바꾸면 다 그렇게 할 이이다.
 

청주목(淸州牧) 소재지 동쪽에 동리(洞里)가 있고 그곳에 계곡(溪谷)과 임천(林泉)의 승지(勝地)가 있는데, 융경(隆慶 명 목종(明穆宗)의 연호) 경오년(1570, 선조3)에 처음으로 서원을 세우고 호(號)를 ‘유정(有定)’이라 하여 선비들의 학문하는 곳으로 삼고, 또 그 뒤편에 사우(祠宇)를 세워 아홉 분 선생의 사판(祀板)을 배향해 모시되, 이 문순공[李文純公=문순은 이황(李滉)의 시호]이 정한 영봉서원(迎鳳書院)의 의식에 의거하였다.

 

그리고 동편(東偏)을 막아서 이 문성공[李文成公 문성은 이이(李珥)의 시호]을 봉안하고 일곱 분 선생을 차례로 배열하여 배향하였으며, 서계선생(西溪先生)을 서쪽에 자리하고 동으로 향하게 하였다. 이에 모두들 말하기를, “아, 아름답다. 서원 향사(享祀)의 성대함은 예전에 없었던 일이다.”하였다.

 

아홉 분 선생이, 학문은 비록 길을 달리했으나 도(道)의 귀착점은 서로 같았으니, 대개 인의(仁義)를 성(性)으로 삼고 충효(忠孝)를 행(行)으로 삼으며, 성현을 법으로 삼고 사벽(辭闢 말로 설명하여 사설(邪說)을 물리치는 것)을 공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저 이 문정(李文靖)의 문헌(文獻)은 중국에까지 크게 드날렸고, 경 선생(慶先生)의 독실한 효는 신명(神明)까지 감동되었으니, 다 고금에 탁월한 인물이었고, 충암(冲菴 김정(金淨))ㆍ강수(江叟)ㆍ송재(松齋)ㆍ규암(圭菴)은 혹은 기묘(己卯)의 연원이 되기도 하고 을사(乙巳)의 영수(領袖)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천곡(泉谷)은 성인(成仁)ㆍ취의(就義)의 의범(懿範)이 있고, 서계(西溪)는 결정(潔淨)ㆍ정미(靜微)의 교학(敎學)을 천명하였다. 율곡선생에 이르러서는, 옛 성인을 계승하고 오는 후학들을 열어 주어서 크게 사도(斯道)에 공이 있는데, 향약(鄕約)의 글은 지금까지도 고을 사람들의 귀와 눈에 남아 있으니, 참으로 이윤과 안자의 도를 얻은 이라 할만하다.

 

대저 성인의 도는, 시대에 있어서는 밝은 시대와 어두운 시대가 있으나 사람에게 있어서는 존망(存亡)이 없다. 그러나 사람이 음양(陰陽)ㆍ오행(五行)의 기운을 품부 받았기 때문에 그 바르고 통달함을 얻은 자는 항상 적고 편벽되고 박잡됨을 얻은 자는 항상 많다. 그러므로 그 도를 하는 데 있어 그 중화(中和)의 표준을 세우고 체용의 온전함을 갖춘 자가 대개 적다.
 

오직 우리나라는 대국(大國)의 은사(殷師)가 팔조(八條)의 가르침을 펼쳤고 공자가 사시고자 한 뜻을 두었으며, 본조(本朝)에 이르러서는 정 포은(鄭圃隱) 선생의 공을 높이 보답함으로써 주자(朱子)의 글이 비로소 밝혀져 융성한 문치(文治)를 이루었다.

 

그러나 참으로 도체(道體)를 간파하여 편벽되고 교폐됨이 없이 바로 수사(洙泗 공자를 가리킴)ㆍ낙건(洛建 정자와 주자를 가리킴)의 진원(眞源)과 정맥(正脈)에 도달한 이를 논한다면 또 율곡선생 같은 분이 없으며 만약 여덟 분 선생의 범위의 크고 작음과 조예의 깊고 얕음을 논한다면, 진실로 후생말학(後生末學)이 감히 헤아릴 바 아니나, 그의 시를 외고 그의 글을 읽어 보면 상론(尙論 고인의 인격과 언행을 논함)하는 선비는 의당 스스로 터득되는 바가 있을 것이다.

 

대저 백록동서원의 규제는 넓고 크고, 또 회암 부자(晦菴夫子)는 공자를 배운 분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다만 이윤과 안자의 도를 들어 배우는 이에게 보인 것은 무엇 때문인가.

 

대저 공자의 도는 광대하여 자취가 없기 때문에 우선 규모를 준칙(準則)으로 삼는 것을 말하였으니, 안빈(安貧)ㆍ수도(守道)는 처음 배우는 자로서의 존심(存心)을 마땅히 이와 같이 해야 할 것을 말하고, 출처(出處)ㆍ행장(行藏)은 성덕(成德)한 뒤에 정의(精義)를 마땅히 이와 같이 해야 할 것을 말한다.

 

주 부자가 어찌 사람마다 공자를 배우게 하고 싶지 않았겠는가. 배움에는 다만 스스로 차제(次第)가 있는 것이니, 이 또한 몰라서는 안 된다. 율곡선생의 휘는 이(珥), 자는 숙헌(叔獻), 시호는 문성(文成)이고, 목은 선생(牧隱先生)의 휘는 색(穡), 자는 영숙(穎叔),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징군(徵君) 경 선생(慶先生)의 휘는 연(延), 자는 대유(大有)이고, 충암(冲菴) 김 선생(金先生)의 휘는 정(淨), 자는 원충(元冲), 시호는 문간(文簡)이며, 강수(江叟) 박 선생(朴先生)의 휘는 훈(薰), 자는 형지(馨之)이다.

 

규암(圭菴) 송 선생(宋先生)의 휘는 인수(麟壽), 자는 미수(眉叟), 시호는 문충(文忠)이고, 송재(松齋) 한 선생(韓先生)의 휘는 충(忠), 자는 서경(恕卿)이며, 천곡(泉谷) 송 선생(宋先生)의 휘는 상현(象賢), 자는 응구(應求), 시호는 충렬(忠烈)이고, 휘 득윤(得胤), 자 극흠(克欽)은 바로 서계(西溪) 이 선생(李先生)이다.

 

우리 현종(顯宗) 초기에 서원의 유생(儒生)들이 서로 말하기를, “우리 서원이 창건된 지가 이미 옛날이고 규모 또한 크다. 그러나 조가(朝家)에서 내린 의식이 있지 않으면 사람들의 이목(耳目)을 새롭게 하여 오래도록 전할 수 없다.”하고, 곧 서로 앞을 다투어 위로 보고하므로 현종이 신항(莘巷) 두 글자를 내려 주셨으니, 참으로 우리 성상의 굉무(宏橅 큰 계책)에 관계된 일이다.

 

우리 성고(聖考)께서 성학(聖學)이 고명하시어 전체 대용(全體大用)에서 하나도 빼놓을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에 이것으로써 나라 사람들을 면진(勉進)시키는 요점으로 삼은 것이다.

 

그렇다면 이 서원을 어찌 한 고을만이 높이 숭상할 뿐이겠는가. 무릇 이 서원에 들어가 이 당(堂)에 오르는 자가 진실로 능히 상상(想像)하여, 여덟 분 선생의 유풍(遺風)ㆍ여운(餘韻)을 본받고 이 문성(李文成)의 전체 대용에 회극(會極)한다면 거의 우러러 의지하고 높이 받드는 실상을 얻을 수 있고, 성조(聖朝)가 서원을 일으킨 뜻에 대양(對揚 임금의 명령에 답하여 그 뜻을 널리 백성에게 알림)할 수 있을 것이니, 어찌 여러 군자가 힘쓰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숭정 을축년(1685, 숙종11) 5월 일에 송시열은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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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莘巷書院廟庭碑(篆題)

 

原任大匡輔国崇祿大夫領中樞府事致仕奉朝賀 宋時烈 撰

通訓大夫行西原縣監 趙亨期 書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 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 金壽恒 篆

 

晦菴朱夫子甞建白鹿洞書院於南康其揭示規約甚廣且密而卒以一言該括則曰莘摯巷顔而已其言雖約而道之體用之全學之本末之序已躍如於前矣何也聖賢之道不出乎修己治人而修己之功莫要於顔子之克復治人之用莫大乎伊尹之君民矣然世之相後也千有餘年而其出處之轍亦不同矣微夫子於道洞見大原孰能合而一之使之同條而共貫哉盖伊尹處畝而樂堯舜則是顔子不改之樂也顔子問爲邦於聖師則是伊尹親見之志也然則斯二賢眞所謂易地則皆然者也淸州治東有洞焉有澗谷林泉之勝自隆慶庚午創立書院號曰有定以爲士子藏修之所而又建祠宇於其後妥侑九先生祀板而依李文純公所定迎鳳之儀隔截東偏以奉李文成公而七先生以次而序醊焉西溪則位西而面東於是咸曰嗚呼休哉院享之盛古未甞有也九先生學雖殊轍道則同歸盖皆以仁義爲性而忠孝爲行聖賢爲法而辭闢爲功夫李文靖之文獻大鳴於中州慶先生之篤孝冥感於神明皆卓冠今古而冲庵江叟松齋圭庵或爲己卯之淵源或爲乙巳之領袖泉谷有成仁就義之懿而西溪闡潔凈精微之敎至於栗谷先生則繼往開來大有功於斯道而其鄕約之文至今在州人耳目眞可謂得伊顔之道者歟夫所謂聖人之道者其於世有明晦而在人者無存亡然人禀陰陽五行之氣故得其正且通者常少而得其偏而駁者常多是以其所以爲道者其能建中和之極而具體用之全者盖鮮矣惟我東方表爲大國殷師明攸叙之敎孔聖有欲居之意逮至本 朝崇報圃隱先生而朱子之書始得闡明聿致文治之盛然若論其眞見道體無所偏蔽直造乎洙泗洛建之眞源正脉則又無如栗谷先生也若其八先生之範圍之大小造詣之深淺則固非後生末學所可窺測然誦其詩讀其書則尙論之士當有以自得之矣夫白鹿洞規制廣矣大矣而又晦菴夫子學孔子者也然於是而獨擧伊顔之道以示學者何也盖孔子之道大而無迹故姑以有規模易準則者爲說夫安貧守道始學者存心當如此也出處行藏成德後精義當如是也夫子豈不欲人人學孔子哉其學之顧自有次第也此亦不可不知也栗谷先生諱珥字叔獻諡文成牧隱先生諱 穡字頴叔諡文靖徵君慶先生諱延字大有冲庵金先生諱凈字元冲諡文簡江叟朴先生諱薰字馨之圭菴宋先生諱麟壽字眉叟諡文忠松齋韓先生諱忠字恕卿泉谷宋先生諱象賢字應求諡忠烈而諱得胤字克欽卽西溪李先生也我 顯廟初服院之章甫相與言曰吾院之剏始旣舊而規模亦大然不有 朝家之咸秩則不可以新耳目而垂久遠矣乃相率以上聞焉則 顯廟宣賜以莘巷二字其所謂實關我 聖之宏撫者歟」我 聖考聖學高明知全體大用之不可一故要以是勉進乎國人然則斯院也豈但一州之所尊尙而已乎凡入斯院而登斯堂者苟能想像模範乎八先生之遺風餘韻而會極乎李文成之全體大用則庶可以有得於瞻依尊奉之實而對揚乎 聖朝作興之意矣凡百君子可不勉哉

崇禎乙丑五月 日立 應求之應 一作德 <끝>

 

 

청주 신항서원 묘정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