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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천 화양동 병사기(陜川華陽洞丙舍記)

야촌(1) 2020. 12. 27. 11:15

합천 화양동 병사기(陜川華陽洞丙舍記)

 

지은이 : 설송재 박필성(雪松齋 朴弼成)/효종의 사위(숙녕 옹주의 남편)



선조 야천(冶川) 선생 증(贈) 영의정(領議政) 문강공(文康公)의 묘소가 합천의 화양동(지금의 묘산면(妙山面) 화양리(華陽里)에 있으니 관청 소재지와 남쪽으로 40리 거리이다. 제전(祭田)은 사라져 상민들의 토지가 되어 버렸고 묘지기도 가난하고 단출하여 애초부터 이른바 병사(丙舍)라는 것이 없었다.

 

본 고을 사또 이의일(李義逸)이 성묘차 산소에 와서 여기저기 둘러보고 탄식하기를,

“선생의 높은 도의는 아직도 후학들이 우러러 사모하고 있는데 하물며 내가 외후손으로 이곳의 수령이 되었으니 어찌 감히 묘에 관한 일에 힘을 다하지 않겠는가.”하고, 바로 선생의 8대손인 안의 현감(安義縣監) 지원에게 찾아와 제전을 되돌려 받을 방책을 의논했다.

 

이에 지원이 감사를 표하며,

“그렇고 말고요! 무릇 선생의 후예라면 내외손(內外孫)을 막론하고 이미 대대로 더욱 번창하여 세상에서 화주현벌(華冑顯閥)을 일컬을 때는 반드시 우리 반남 박씨(潘南朴氏)를 먼저 들게 되니, 이 어찌 선생이 선행을 쌓으신 여복(餘福)이 아니며, 또 이 묘에서 음덕(陰德)을 받은 덕분이 아니겠소.

 

다만 그 묘지가 서울에서 800리나 멀리 떨어져 있고 시대가 200여 년이나 지났으므로, 그동안 성묘를 때맞춰 하지도 못하고 산소의 관리도 제대로 하지 못하였으며, 묘제(墓祭)도 지내지 못한 지가 오래되었고 목동들이 훼손하는 것도 막지 못하였소!.

 

이는 실로 후손들로서 크게 송구스러운 바인데 지금 사또는 외후손으로 홀로 노고를 아끼지 않고 있으니 이 어찌 우리 본손(本孫)들의 부끄러움이 아니겠소!. 지금 선생의 후손들로 이 도내에서 수령된 자가 다섯 사람이니 마땅히 우리부터 먼저 해야 할 것이오.”

 

하고는 마침내 종제(從弟) 선산부사(善山府使) 수원(綏源), 족제(族弟) 문경현감(聞慶縣監) 이원(彛源), 족질(族姪) 진주목사(晉州牧使) 종후(宗厚)와 영덕현령(盈德縣令) 종경(宗敬)에게 서한을 띄워, 사또의 의리를 칭송함으로써 그들에게 부끄러운 마음이 들게 하니, 이에 다투어 봉급을 떼어 도왔다.

 

대구판관(大邱判官) 이단형(李端亨)이 이 소문을 듣고,

“나도 또한 외후손인데 어찌 합천군수만 아름다운 이름을 독차지하도록 하겠는가.”

하였고, 당시 감영(監營)에 있던 7대손 사회(師誨)와 족제 임천군수(林川郡守) 지원(知源)도 역시 각각 돈꾸러미를 내놓으니, 전후로 모인 돈이 모두 합쳐 330냥이었다.

 

그 돈으로 팔려간 제전을 사서 되돌려 놓고 도기로 되어 깨어지기 쉬운 제기는 나무 그릇으로 바꾸어 옻칠을 했으며, 한편으로는 남은 돈으로 병사(丙舍)를 새로 지으려 하니, 고을에서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이 있어 말하기를,  “화암서원(華巖書院)은 선생을 단독으로 제향하는 곳으로 선왕께서 사액(賜額)한 사당이다.

 

묘제(墓祭)는 연중 한번에 불과하지만 서원이란 영구히 제사 지내는 곳이며 게다가 한골짜기 안에 있으니 어찌 이 제전을 서원에 부속시키지 않겠는가.”하였다.

 

그러자 사또가 그에게 타이르기를,

“물건에는 제각기 임자가 있고 예절 또한 정(情)에 따라 다른 법이다.

 

무릇 묘송(墓松)을 쳐다보며 슬픈 마음을 달래는 것은 후손이 조상을 추모하는 효(孝)요,

제기를 벌여 놓고 존앙(尊仰)하는 정성을 바치는 것은 여러 선비들이 어진 이를 흠모하는 예(禮)이다.

 

이것이 묘소와 서원이 다른 까닭이니 어찌하여 이 제전을 옮겨다 서원에 붙인단 말인가?” 하였다.

얼마 후 선산부사, 문경현감, 진주목사가 전후로 벼슬을 그만두고 떠나니 사또가 탄식하기를,

“관(官)의 일이란 알 수 없는 것이니 이 병사를 내 뜻대로 마치지 못한단 말인가.”하고는 드디어 목수를 불러 모아 재목을 내려주고 산 아래에다 집터를 닦아서 신속하게 다섯칸 집을 지었다.

 

좌우에 방을 두고 중간에 대청을 만들고는, 도면을 그려 지원에게 보이며 말하기를,

“나는 다만 이 지역의 수령으로서 그 역사(役事)를 도왔을 뿐이니, 방법을 마련하여 지켜 나가는 것은 오직 그대에게 달려 있소. 그대는 기억하기 바라오.”하였다.

 

이에 지원은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예전에 합사(合祀)하던 선생의 신주를 합천으로 돌려보낼 때 나의 할아버지 「大考 박필균(朴弼均)」께서 당시 경기감사(京畿監司)였으므로 종족들이 감영안에다 모였는데, 금평위(錦平尉)는 나이 90의 고령으로 궤장을 이끌고 나왔고 문경공(文敬公) 역시도 한강을 건너 찾아왔다.

 

이때에 서로 나누는 말씀이 모두 선생에 대한 일이었다. 빙 둘러 앉아 듣는 이는 모두 노인들이었는데, 그중에 눈물을 흘리면서 젊은이들을 돌아보며, “뒷날엔 너희들의 일이니라.”라고 말씀하신 분도 계셨다.

 

나는 그 무렵 나이는 비록 어렸으나 거마를 잇달아 동작나루까지 보내던 광경을 지금도 기억하는데 그때 후손으로서 하직 절을 올린 자가 400명도 넘었으니 얼마나 성대한 일이었던가!

 

아, 선생은 큰 덕과 깊은 학문으로 이른 나이에 영기(英氣)를 드날렸으며 인품이 빛나고 문장이 뛰어났다.

임금께 간쟁(諫爭)하고 정색으로 토론함으로써 장차 임금을 보필하고 큰 정책을 펼치려 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소인배의 배척을 받아 자취를 감추고 떠돌다 외가인 윤씨(尹氏) 집안에 의지하게 되었다.

윤씨는 본관이 파평(坡平)인 대성(大姓)으로 대대로 합천에 살았다.

 

선생이 돌아가시고 여러 아드님들이 모두 어려 고향으로 운구(運柩)할 가망이 없었으므로, 윤씨 가문에서 불쌍히 여겨 땅을 빌려 주어 우거하던 집 뒤에 장사하였으니 지금의 해좌(亥坐)의 언덕이 바로 이곳이다.

 

부인 홍씨(洪氏)가 어린 자식들을 이끌고 곧바로 서울로 돌아왔는데, 다섯 아들이 모두 현달하고 손녀는 의인왕후(懿仁王后)로 목릉(穆陵 선조(宣祖) )의 원비(元妃)가 되었다.

 

홍 부인이 돌아가시자 나라에서 양주(楊州)에 장지를 내려 마침내 선생의 묘소와 천리나 떨어진 곳에 따로 장사 지내게 되었으니, 거리가 멀고 힘이 분산되어 세월이 자꾸 흘러감에 따라 차츰 게을러져 방치됨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지원이 가까운 고을의 원이 되어 일찍이 한두 번 성묘한 적이 있었는데, 그 김에 가서 그 형국을 살펴보니 산세가 중후하고 물이 깊었다.

 

그것은 마치 존귀한 인물이 의젓이 당(堂)에 앉아 있어 단정한 그 기상으로 인해 저도 모르게 멀리서 바라보고 두려움을 느끼다가 막상 얼굴을 뵙고 말을 나누어 보니 온화한 모습을 띠고 있는지라 자연히 친애감이 들어 오래도록 차마 떠나지 못하는 것과 같았다.

 

아! 슬프다.

선생이 이곳에 묻히시게 되었을 때 당시의 군자들은 깊이 슬퍼하였다.

 

그러나 이미 크고 이름난 산악이 신령한 기운을 감추고 기다리고 있어서 끊이지 않는 복을 발하여 후손들이 세신(世臣)과 귀척(貴戚)이 되어 국가와 더불어 영원히 복택을 누리게 되었으니, 옛날의 득의하여 뽐내던 소인배들은 도리어 몰락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 이 어찌 이른바 ‘부르지 않아도 절로 이르는 것’이 아니겠는가.

 

무릇 조상의 묘를 위하여 장구한 계획을 세우는 것으로는 제전을 마련하는 일보다 앞서는 것이 없으니 제전이 있어야 묘지기를 존속하게 할 수 있고, 묘지기를 존속하게 하는 데는 병사(丙舍)를 두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다.

 

지금 이 몇 뙈기의 토지와 조그마한 집은 묘를 지키는 자가 받는 것이자 후손들이 멀리서 조상에 대한 그리움을 위탁한 것이다. 백 년을 두고 못 하던 일을 하루아침에 이 사또〔李侯〕를 만나 끝을 맺게 되었으나, 나나 이 사또는 모두 관직에 매여 있고 관직에 매인 자는 때가 오면 돌아가고 말 것이니,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없이 돌보아 주는 의리를 이 화양동에 사는 윤씨들에게 더욱 바랄 수밖에 없다.

 


나 또한 외후손이다.

지금 이 기(記)를 읽으매 산소 주변 산들의 형세를 상상할 수 있으니, 이로써 후손들에게 끼친 무궁한 복택을 부연하였다. 문장 또한 일창삼탄(一唱三歎)의 뜻이 들어 있다.

 

[주-01] 야천(冶川) …… 문강공(文康公) : 중종(中宗) 때의 문신인 박소(朴紹 : 1493~1534)를 가리킨다.

박소는 자가 언주(彦冑), 호는 야천(冶川), 본관은 반남(潘南)으로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이다.

 

중종 때 등과하여 여러 청현직(淸顯職)을 역임하였으며 조광조를 비롯한 신진사류(新進士類)들과 왕도정치의 구현을 위해 노력했다. 김안로(金安老) 등 훈구파(勳舊派)의 탄핵을 받아 관직에서 물러난 후 합천으로 내려가 학문에 전념하였다. 1696년(숙종 22) 문강(文康)이란 시호가 하사되었다.

 

[주-02] 병사(丙舍) : 산소 곁에 지어 놓은 재실(齋室)을 말한다.

 

[주-03] 화주현벌(華冑顯閥) : 훌륭한 후손과 뛰어난 집안을 뜻한다.

 

[주-04] 화암서원(華巖書院)은 …… 사당이다.

화암서원은 경상도 합천 화양동(華陽洞)에 있던 서원으로 1653년(효종 4) 박소(朴紹)를 기리기 위해 그 지역 유림의 발의로 창건되었으며 1727년(영조 3) ‘화암’이란 액호가 내렸다.

 

[주-05] 금평위(錦平尉) : 박필성(朴弼成 : 1652~1747)의 봉호이다.

박필성은 자가 사홍(士弘), 호는 설송재(雪松齋)이다.

 

효종의 딸 숙녕옹주(淑寧翁主)와 결혼하여 금평위에 봉해지고, 숙종 때 사은사(謝恩使)와 주청사(奏請使)로 여러 차례 청 나라를 다녀왔다. 1741년에는 90세의 나이로 영조로부터 궤장(几杖)을 하사받았다.

 

[주-06] 문경공(文敬公) : 박필주(朴弼周 : 1680~1748)의 시호이다.

박필주는 자가 상보(尙甫), 호는 여호(黎湖)이며, 학문에 뛰어났다.

 

[주-07] 임금께 …… 토론함으로써 : 원문은 ‘執策雷肆 正色討論’인데, 박소가 사간(司諫)으로서 김안로(金安老)의 복직 서용을 극력 저지한 사실을 가리키는 듯하다. 그 결과 도리어 배척되어 사성(司成)으로 좌천되었다가 파면되었다. 《國朝人物志 1 中宗朝》

 

[주-08] 해좌(亥坐) : 묏자리를 잡을 때 해방(亥方) 즉 북북서(北北西)를 등지고 사방(巳方) 즉 남남동(南南東)을 바라보는 것을 말한다.

 

[주-09] 부르지 …… 것 : 《맹자》 만장 상(萬章上)에 “하지 않아도 절로 되는 것이 하늘이요, 부르지 않아도 절로 이르는 것이 운명이니라.〔莫之爲而爲者 天也 莫之致而至者 命也〕”라고 하였다.

 

[주-10] 일창삼탄(一唱三歎) : 한 사람이 노래를 선창하면 세 사람이 화답한다는 뜻으로, 《예기(禮記)》 악기(樂記)에 나오는 말이다. 사람들이 감탄을 금치 못할 만큼 시문이 매우 뛰어날 때 주로 쓰는 표현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합천 군수가 앞장서 이루어 놓은 일에 후손들이 적극적으로 호응해 나서기를 바란다는 뜻으로 쓴 듯하다.


ⓒ 한국고전번역원 | 신호열 김명호 (공역) |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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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卷之一 潘南朴趾源美齋著 / 煙湘閣選本○記

 

陜川華陽洞丙舍記

 

先祖冶川先生贈領議政文康公墓。在陜川華陽洞南距郡治四十里。祭田淪爲民耕。而守戶貧單。初無所謂丙舍者。本倅李侯義逸來拜墓下。周瞻咨嗟曰。先生道義之尊尙。爲後學之所向慕。矧我以外裔來守玆土。其敢不致力于墓事哉。亟就先生八代孫安義縣監趾源。謀所以贖還祭田。趾源謝曰。有是哉。夫以先生之後嗣子孫。罔有內外。旣世益昌。世所稱華胄顯閥。必先推我潘南之朴。而莫非先生之餘慶。亦莫不受廕於是兆也。惟其遠京國八百里。而世之相後也二百餘年。則省掃莫能以時。守護未得其方。香火久冷。蒭牧不禁。此實後孫之所大懼。而今侯以外裔獨賢。豈非我輩之恥耶。今先生雲仍之爲同路守宰者五人。當自我先之。遂乃發書於從弟善山府使綏源,族弟聞慶縣監彛源,族姪晉州牧使宗厚,盈德縣令宗敬。頌侯之義以愧之。於是爭捐俸以助之。大邱判官李侯端亨聞之曰。我亦外裔也。安可使陜守專美哉。七代孫師誨。時在營幕。而族弟林川郡守知源。亦各出鏹。前後合三百三十兩。祭田之轉賣者。贖而還之。祭器之陶而易缺者。木而髹之。又將以餘財。新營丙舍。有議於鄕者曰。華巖書院。乃先生獨享之地。而先朝賜額之祠也。祧墓之祭。不過歲一。書院者。百世俎豆之所。而且在一洞之中。盍以是田屬之乎。矦諭之曰。物各有主。禮亦殊情。夫瞻松栢而伸其怵惕之思者。後人追遠之孝也。陳俎豆而寓其宗仰之誠者。諸生慕賢之禮也。此墓與院之所以異也。如之何其移斯田而屬之院乎。旣而善山聞慶晉州後先罷官去。矦喟曰。官事未可知。惟此丙舍。未竟吾志耶。遂鳩工授材。靠山拓地。亟建屋五楹。左右有房。而中爲廳事。爲圖示趾源曰。吾惟地主而相其役已矣。若其規畫保守之方。顧惟君在焉。子其識之。趾源曰。諾。先生祧主之歸陜川也。吾大考時爲畿伯。宗族悉會營中。錦平尉年九十。導几杖來。文敬公亦至自江外。相道語皆先生事。環坐而聽者。皆老人。有涕出而顧謂少年曰。他日汝曺事也。吾時雖幼。尙記其連車騎送至銅雀津上。于時後孫拜辭者四百餘人。何其盛也。噫。先生以碩德邃學。早歲蜚英。珪璧含輝。黼黻彪章。執策雷肆。正色討論。將以輔聖明弘大猷。卒爲憸人者所擯擠。遯跡流離。惟玆外氏尹是依。尹坡平之大姓。而世居陜川。及先生歿而諸孤並幼。望絶歸櫬。尹氏諸宗。憐而借地。葬于所寓舍後。今亥坐之原是也。夫人洪氏挈穉弱。遄還京師。五子皆顯。而女孫懿仁王后。爲穆陵元妃。及洪夫人卒。賜葬地楊州。遂與先生之墓千里各葬。則地遙力分。曆紀滋久。侵尋怠荒。勢所然也。趾源忝職近縣。亦甞一再瞻掃。因得行審其形局。崗麓蟠厚。水泉泓渟。如鉅公貴人儼然臨堂。而氣宇凝重。不覺其望而畏之。及其承顔色接語言。溫粹和雅。自然親愛。久而不能去也。嗚呼。先生之葬于此也。當時君子之所深悲。然已有名山巨嶽。函靈秘秀而待之。發其不匱之福。而爲世臣貴戚。與國家同休於無疆。則向之小人所以沛然爲得計者。未甞不反爲之地焉。豈非所謂莫之致而至者歟。凡爲先墓久長之圖。莫先於置祭田。有田然後可以存守戶。存守戶。莫如置丙舍。今此數頃之田。一畝之屋。乃守墓者之所受。而後孫所以遙寄其霜露之感也。百年未遑之事。一朝得李矦而畢擧。然而吾與李矦俱有官守。官守者。有時而歸。則終始之義。尤有望乎尹氏之居此洞者。

吾亦外裔也。今觀此記。岡巒體勢。可以想像。而用敷遺後。休于無窮。文亦有一唱三歎之意。<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