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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 도통사(道統祠) 복원(復元) 관련 이야기

야촌(1) 2020. 3. 19. 16:41

음성 도통사(道統祠) 복원(復元) 관련 이야기

도통사는 원래 조선시대 영조 10년(1734년)에 충주지방 유림들이 충주시 신니면 화안리에 건립하였던 것으로 일제 때인 1928년 풍덕군수(豊德郡守)를 지낸 안경렬(安璟烈) 등 지역 유림들이 사우(祠宇)를 중수하고 3성6현(三聖六賢)을 봉향하던 종래의 규모에 더해 3성 9현(三聖九賢)을 제향 하는 한편 시대상황에 따라 이곳이 민족정기를 되찾는 유림의 집회장소가 됨과 아울러 항일(抗日) 독립정신을 함양하는 집합장소의 역할까지 하게 되었다.

따라서 조선인(朝鮮人)의 민족정기를 억누르려던 일제 당국으로부터 사찰(査察) 대상이 되어 오다가 1938년 사우를 강제로 철거하여 그 목재로 신니면(新尼面) 사무소를 짓는데 썼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충주 유림에서는 신니면에 책임을 추궁하여 1년치의 제수비용을 받아내 향사를 받들었으며 이듬해 1946년부터는 8개 후손문중에서 매년 백미 1가마씩을 부담하여 제향을 받들다가 6.25동란을 만났고 동란이 끝난 후 1954년에 지역유림이 도통사의 중수(重修)를 발의하여 충청북도의 도비(道費) 65만환을 보조받아 사우가 복원되어 3성 9현[공자(孔子)를 주벽(主壁)으로 주자(朱子)와 안향(安珦)선생 및 문하 9현인 국재 권보(菊齋 權溥), 역동 우탁(易東 禹卓), 동암 이진(東庵 李瑱), 이재 백이정(彛齋 白頤正), 매운당 이조년(梅雲堂 李兆年), 덕재 신천(德齋 辛蕆), 노당 추적(露堂 秋適), 근재 안축(謹齋 安軸), 경재 안보(敬齋 安輔)]를 봉안하고 매년 음력 2월8일에 향사하고 있었다.

그러나 도통사의 수난은 계속되어 그곳이 군용지로 책정되면서 사우(祠宇)가 철거당하게 된 것으로 그 책정은 박정희(朴正熙) 정부시대에 시작되어 철거가 시행된 것은 1981년 신군부(新軍部) 정권하에서였다. 당국은 당시 철거보상금으로 10,412,500원을 책정하여 터무니없는 금액을 은행에 공탁하고 수령하라 하였다. 

이에 따라 안경렬의 후손 안찬(安贊)의 명의로 보관하게 되었으며 사우에 봉안됐던 3성9현의 위패(位牌)는 음성향교에 옮겨 봉안하였다. 그러나 음성향교를 중수하게 되어 더 이상 봉안할 수 없게 됨에 따라 충주유림회로 옮겼으나 거기에서도 감당하기가 어려워 청주(淸州)에서 거주하는 안찬의 집에서 그냥 보관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동안 음성 및 충주유림에서 복원하고자 몇 번 시도하였으나 무산되다가 문민시대(文民時代)가 열리면서 복원추진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음성군 생극면 방축리 안동권씨(安東權氏) 문중의 양촌 권씨 3대 묘소(陽村權家三代墓所) 내 성역화사업의 일환으로 도통사를 유치하여 복원하자는 필요성이 대두함에 따라 비롯되었으며 안동권씨 문중에서 필요한 대지 907.5㎡(300평)을 제공하기로 하였다.

1994년 3월 도통사복원추진위원회가 결성되면서 일광아버지께서 순흥안씨 문중대표 겸 도통사복원추진위원회(道統祠復元推進委員會) 위원장이 되셨다. 아버지께서는 음성. 충주 지역 및 충북도 유림을 방문하여 협조요청을 하였으며 서명날인을 받은 청원서와 함께 복원사업계획서를 충청북도청과 도의회, 음성군, 음성군의회, 성균관, 문화체육부 등 관계요로에 방문하여 제출하였고 충북출신 국회의원을 심방하여 설명하고 특히 절친한 김종호(金宗鎬) 국회의원의 주선으로 김덕영(金德永) 충북도지사와 회동하여 연차적인 사업으로 복원. 중건을 시행할 것을 협의하였다.

아울러서 충북에서 발행되는 각 일간지에도 도통사 복원. 중건 필요성의 기사를 게제토록 하여 이를 홍보하였으며 복원사업의 예산서를 충청북도와 음성군 및 의회에 제출하였다. 이러한 천신만고 끝에 복원. 중건이 이루어진 도통사는는1995년 현재의 위치에 복원하였으나 개인이 가지고 있는 철거 보상금의 환수와 위패의 반환이 안 되고, 단양 우씨의 위차(位次) 순위에 대한 이의제기로 제향봉행이 이뤄지지 않았는데 항소(抗訴)까지 가는 수년간의 소송(訴訟)을 거쳐 안찬으로부터 보상금의 환수 및 위패를 인수받고 위차 순위는 많은 협의와 옛 문헌의 고증결과 우리 순흥안씨 문중에서 제시한 회헌실기(晦軒實記)에 따라 시행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단양 우씨는 이에 불복하여 우탁의 위패를 단양 우씨가 환수(還收)해간 뒤인 2000년 11월 16일에 봉안고유제를 봉행하기에 이르렀으며 이날 아버지께서 도통사 복원봉안 고유문(道統祠 復元奉安 告由文)을 3성9현께 고(告) 하셨다.

도통사는 정면3칸, 측면 2칸의 목조와가(木造瓦家)이며 평삼문의 정문이 있고 가운데 담을 쌓고 솟을삼문을 설치한 총 41평의 규모로서 150m의 담장이 둘러져 있다. 음성 도통사는 공자(孔子), 주자(朱子)의 사상과 도학을 계승 발전시킨 안 문성공(安文成公)의 정신과 유학을 충실히 실천 수범한 수제자 권국재(權菊薺) 선생으로 이어져 고려 3은(3은)인 목은(牧隱) 이색, 포은(圃隱) 정몽주, 야은(冶隱) 길재에 이어 퇴계(退溪) 율곡과 같은 대유학자(大儒學者)를 배출하였고 우리나라 유학을 발전시킨 큰 줄기를 만들었다. 그리하여 공자, 주자, 안자등 성현을 주벽으로 안 문성공의 문인인 6군자를 배향하게 된 것이다.

도통사는 그 말뜻이 도학(道學)의 법통(法統) 즉 정통(正統)을 받들어 모신 사당(祠堂)으로 매년 음력 9월10일 오전 11시에 추향(秋享) 봉행한다. 충주에서 도통사가 세워진 동기는 우선 충주지역에 우리 순흥 안 씨들이 많이 살고 안문성공(安 文成公)의 문인(門人) 후손들이 주변지역에 많이 살았기 때문인 것으로 역동 우탁이 단양이고, 안동 권씨들도 많이 살았기 때문에 안문성공을 주축으로 하는 유학의 법통을 지키려는 뜻이 충주에서 발의가 자연스럽게 이뤄진 것이라 볼 수 있다.

현재 삼성(三聖) 팔현(八賢)을 모시고 있는 도통사는 순흥 안씨의 훌륭하신 선조가 3인으로 배향 받고 계시며 아버지께서는 1994년 3월부터 2003년 3월까지 순흥안씨 문중대표로 도통사복원추진위원장 및 보존관리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9년간을 많은 어려움을 견디면서 복원. 중건 하는데 앞장 서셨다.

위원장으로 계시던 동안 위패를 보관하고 있던 이로부터 온갖 욕설과 협박도 굴하지 않으셨고 위차순위에 대한 조정과 관계기관의 협조 및 기금마련에서도 앞장서 순흥안씨가 제일 많이 모금될 수 있게 하시는 등 도통사의 복원에 많은 노력을 다하셨다.

이렇듯 순흥 문중과 종가(宗家)에 관련된 많은 일들을 하신 아버지께서는 2007년 3월 21일 89세의 수(壽)를 다하시고 돌아가셨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버지께서는 우리 순흥 안문이 무궁무진하게 번성하리라는 것을 염원하고 계실 것이다.

[참고문헌] 도통사복원관리위원회 발간 道統祠復元重建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