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신증동국여지승람은 55권 25책으로 구성되어 있는 목활자본이다. 원래의 《동국여지승람》은 1481년 50권으로 완성했다. 이 책은 1485년 김종직 등에 의해, 1499년 임사홍·성현 등에 의해 2차에 걸쳐 교정과 보충이 이루어졌고 중종 대에 새로 증보하였다.
권별 수록 내용은 권1·2는 경도 상·하, 권3은 한성부, 권4·5는 개성부 상·하, 권6~13은 경기도, 권14~20은 충청도, 권21~32는 경상도, 권33~40은 전라도, 권41~43은 황해도, 권44~47은 강원도, 권48~50은 함경도, 권51~55는 평안도이다. 경도 앞에는 <팔도총도>, 각 도의 첫머리에는 도별 지도가 수록되어 있다.
이 책은 조선 전기의 사회와 지역 사정을 종합적으로 정리한 조선 전기 지리지의 집성편이다. 규장각 등에 소장되어 있다. 55권 25책. 목 활자본. 현전하는 것은 대부분 임진왜란 후 1611년(광해군 3)에 다시 간행한 목판본이다.
원래의《동국여지승람》은 세종대에 편찬된 지리지 이후에 변경된 사항을 바로잡기 위하여 세조대부터 시작하여 1477년에 양성지 등이 완성한 《팔도지리지》에 우리나라 문사들의 시문을 첨가하여 1481년(성종 12)에 50권으로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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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증동국여지승람 제5권 - 개성[하]
◇사묘 송악산사(松岳山祠) : 산 위에 사당이 다섯이 있으니,
첫째는 성황(城隍)이요,
둘째는 대왕(大王)이요,
셋째는 국사(國師)요,
넷째는 고녀(姑女)요,
다섯째는 부녀(府女)인데, 모두 어떤 신(神)인지 알 수 없다.
◇팔선궁(八仙宮)
송악산 절정에 있다.
◇용수산사(龍首山祠)
의종(毅宗) 때 함유일(咸有一)이 귀신을 믿지 않아 여러 산의 산신(山神)에서 이적(異跡)이 없는 것을 다 불태
워 버리고, 용수산 신사(神祠)에 이르러 시험하니, 영험이 없자 불태웠다. 이날 밤 왕이 꿈을 꾸니, 신이 구해 달
라고 하므로 다음 날유사(攸司)에 명하여 그 신사를 다시 지어주도록 하였다.
◇능침 고려 세조 릉(世祖陵)
능호는 창릉(昌陵)이니, 예성강(禮成江) 위 영안성(永安城)에 있다.
◇태조 릉(太祖陵)
능호는 현릉(顯陵)이니, 송악산 서쪽에 있는 파지동(巴只洞) 남쪽에 있다.
◇혜종 릉(惠宗陵) : 능호는 순릉(順陵)이니, 탄현문(炭峴門) 밖 경덕사(景德寺) 북쪽에 있는데, 속칭 추왕릉(皺
王陵) 이라 한다.
◇정종 릉(定宗陵)
능호는 안릉(安陵)이니, 남소문(南小門) 밖에 있다.
◇광종 릉(光宗陵) : 능호는 헌릉(憲陵)이니, 송악산 북쪽 기슭 적유현(狄踰峴)에 있다.
◇경종 릉(景宗陵) : 능호는 영릉(榮陵)이니, 진봉산(進鳳山) 밑에 있다.
◇성종 릉(成宗陵) : 능호는 강릉(康陵)이니, 남교(南郊)에 있다.
◇목종 릉(穆宗陵) : 능호는 의릉(義陵)이니, 도성(都城) 동쪽에 있다.
◇현종 릉(顯宗陵) : 능호는 선릉(宣陵)이니, 송악산 서쪽 기슭에 있다.
◇덕종 릉(德宗陵) : 능호는 숙릉(肅陵)이니, 북교(北郊)에 있다.
◇정종 릉(靖宗陵) : 능호는 주릉(周陵)이니, 북교에 있다.
◇문종 릉(文宗陵) : 능호는 성릉(成陵)이니, 불목사(佛目寺) 남쪽 기슭에 있다.
◇순종 릉(順宗陵) : 능호는 성릉(成陵)이니, 진봉산(進鳳山) 남쪽 양양현(壤陽峴)에 있다.
◇대종 릉(戴宗陵) : 능호는 태릉(泰陵)이니, 해안사(海安寺) 밑에 있다.
◇선종 릉(宣宗陵) : 능호는 인릉(仁陵)이니, 도성 동쪽에 있다.
◇헌종 릉(獻宗陵) : 능호는 은릉(隱陵)이니, 도성 동쪽에 있다.
◇예종 릉(睿宗陵) : 능호는 유릉(裕陵)이니, 도성 남쪽에 있다.
◇인종 릉(仁宗陵) : 능호는 장릉(長陵)이니, 도성 서쪽 벽곶동(碧串洞)에 있다.
◇의종 릉(毅宗陵) : 의종이 경주(慶州)에서 시해되어 그곳에 임시로 장사지냈는데, 명종(明宗) 4년(1174)에 조위
총 (趙位寵)이 군사를 일으키면서, 이의방(李義方)이 임금을 시해하고 장사하지 아니한 죄를 말하여 밝혔기 때
문에 명종 5년에 발상(發喪)하고 도성 동쪽에 옮겨서 장사지냈으니, 능호는 희릉(禧陵)이다.
◇신종 릉(神宗陵) : 능호는 양릉(陽陵)이니, 도성 남쪽에 있다.◇강종 릉(康宗陵) : 능호는 후릉(厚陵)이다.
◇원종 릉(元宗陵) : 능호는 흠릉(歆陵)이니, 개성부 북쪽 15리에 있다.
◇충렬왕 릉(忠烈王陵) : 능호는 경릉(慶陵)이니, 개성부 서쪽 12리에 있다.
◇충선왕 릉(忠宣王陵) : 능호는 덕릉(德陵)이니, 개성부 서쪽 12리에 있다.
◇충숙왕 릉(忠肅王陵) : 능호는 의릉(毅陵)이다.
◇충혜왕 릉(忠惠王陵)
4년에 원(元) 나라에서 대경(大卿) 타적(朶赤) 등을 보내 왕을 잡아 가서 게양(揭陽)에 귀양 보냈는데, 도착하기
도 전인 다음 해에 악양현(岳陽縣)에서 돌아가니, 그해 6월에 상구가 원 나라로부터 이르러 마 침내 이곳에 장사
지냈다. 능호는 영릉(永陵)이다.
◇충목왕 릉(忠穆王陵) : 능호는 명릉(明陵)이니, 개성부 서쪽 12리에 있다.
◇충정왕 릉(忠定王陵) : 능호는 총릉(聰陵)이니, 도성 남쪽에 있다.
◇공민왕 릉(恭愍王陵) : 능호는 현릉(玄陵)이다.
◇노국대장공주 릉(魯國大長公主陵)
바로 공민왕의 비(妃)이니, 능호는 정릉(正陵)이다. 공민왕 능과 함께 도성 서 쪽 봉명산(鳳鳴山) 속에 있다.
◇영안성(永安城) : 개성현(開城縣) 서강(西江) 위에 토성(土城)이 있으니, 이름이 영안성이다.
◇발어참성(勃禦槧城)
고려 세조가 송악군 사찬(沙粲)으로서 궁예(弓裔)에게 귀의하니, 궁예가 크게 기뻐하여 금 성 태수(金城太守)를
제수하였다. 세조가 궁예에게 유세하기를, "대왕께서 만일 조선 숙신(肅愼) 변한(卞韓) 땅에 왕이 되고자 하면 먼
저 송악 지방에서 일어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하니, 궁예가 곧 태조를 시켜서 발어참성을 쌓게 하고, 이어 세
조를 성주(城主)로 삼으니, 바로 지금의 귀인문(歸仁門)으로, 세속에서는 보리참문(菩提槧門) 이라고 일컫는다.
◇온혜릉(溫鞋陵) : 광명사(廣明寺) 북쪽에 있다.
◇정승원(政丞院)
신라 왕 김부(金傅)가 와서 항복하자, 태조가 정승으로 봉하고 장녀 낙랑공주(樂浪公主)로 처를 삼아주고, 궁전
동쪽 한 구역을 하사하여 집을 짓게 하니, 후에 정승원이라고 칭하였다.
◇마암영전(馬巖影殿)
성균관(成均館) 앞에 있으니, 공민왕(恭愍王)이 노국공주(魯國公主)를 위하여 여기에 영전(影殿)을 크게 경영
하여 지극히 화려하고 사치스럽게 꾸몄다. 지금도 그 터가 남아 있다.
◇구재학당(九齋學堂) : 옛터가 자하동(紫霞洞)에 있다.
○ 고려 현종(顯宗) 이후에 병란이 겨우 끝나 아직 문교(文敎)를 펼 겨를이 없었다. 이때에 문헌공(文憲公) 최충
(崔冲)이 후진(後進)들을 불러 모아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않아 학도들이 많이 모이자, 마침내 구재(九齋)로
나누었으니, 낙성재(樂聖齋)ㆍ대중재(大中齋)ㆍ성명재(誠明齋)ㆍ경업재(敬業齋)ㆍ조도재(造道齋)ㆍ솔성
재(率性齋)ㆍ진덕재(進德齋)ㆍ대화재(大和齋)ㆍ대빙재(待聘齋)이다.
이들을 시중(侍中) 최공도(崔公徒)라고 하였는데, 무릇 과거를 보려는 자는 반드시 최공도에 들어가서 배웠
다. 최충이 죽은 뒤에도 과거를 보려는 자는 또한 모두 구재의 학적(學籍)에 이름이 올라 있어야 했으니, 이들
을 문헌공도(文憲公徒)라고 불렀다. 또 유신(儒臣)으로 학도(學徒)를 세운 자가 11명이 있었으니, 홍문공도
(弘文公徒)는 시중 정배걸(鄭倍傑)의 학도로 웅천도(熊川徒)라고도 칭하였다.
광헌공도(匡憲公徒)는 참정(參政) 노조(盧朝)주03의 학도이고, 남산도(南山徒)는 좨주(祭酒) 김상빈(金尙
賓)의 학도이고, 서원도(西園徒)는 복야(僕射) 김무체(金無滯)의 학도이며, 문충공도(文忠公徒)는 시랑(侍
郞) 은정(殷鼎)의 학도이고, 양신공도(良愼公徒)는 평장(平章) 김의진(金義珍)의 학도인데, 또는 낭중(郞中)
박명보(朴明保)의 학도라고도 하며, 정경공도(貞敬公徒)는 평장(平章) 황영(黃瑩)의 학도이고, 충평공도(忠
平公徒)는 유감(柳監)의 학도이고, 정헌공도(貞憲公徒)는 시중 문정(文正)의 학도이고, 서시랑도(徐侍郞徒)
는 서석(徐碩)의 학도이고, 귀산도(歸山徒)는 어떤 사람의 학도인지 알지 못한다.
세상에서 이상을 12도(十二徒)라고 하였는데, 그 중에서 최충도(崔冲徒)가 가장 성했다. 우리나라에서 학교
가 세워진 것은 대개 최충으로부터 시작되었으며 당시에 최충을 해동공자(海東孔子)라고 일컬었다.
◇연경궁(延慶宮)
송악산 밑에 있으니, 술가(術家)들이 이곳을 명당(明堂) 자리라고 하였다. 정전(正殿)은 건덕궁(乾德宮)이니,
혹 대관(大觀)이라고도 칭한다. 남문은 광화문(廣化門)이요, 동문은 동화문(東 華門)이요. 서문은 서화문(西
華門)이요,
북문은 현무문(玄武門)이다. 인종 때에 이자겸(李資謙)이 불태웠고, 공민왕 때에 또 홍건적(紅巾賊)의 난을 겪
어서 다시 새로 세우지 못하였다. 지금은 본대궐(本大厥)이라고 하고, 그 대궐 뜰은 구정(毬庭)이라 한다.
◇정양궁(正陽宮) : 현종이 상양궁(上陽宮)을 정양궁으로 고쳤다.
◇명복궁(明福宮) : 경종(景宗)이 황주원(黃州院)을 명복궁으로 고쳤다.
◇여정궁(麗正宮)
문종(文宗)이 태일(太一 도가(道家)에서 존숭하는 신의 하나)을 이 궁에서 제사지내 화재를 막도록 빌었다.
◇안수궁(安壽宮) : 예종이 연평궁(延平宮)을 안수궁으로 고쳤다.
◇숭덕궁(崇德宮) : 예종이 장경궁(長慶宮)을 숭덕궁으로 고쳤다.
◇복원궁(福源宮) : 예종과 의종이 이 궁에서 초제(醮祭)주D-04를 지낸 적이 있다.
◇흥성궁(興盛宮) : 선종(宣宗)의 옛집이다.
◇원희궁(元禧宮) : 선종이 흥경원(興慶院)을 원희궁으로 고쳤다.
◇보령궁(保寧宮) : 선종이 숭경궁(崇慶宮)을 보령궁으로 고쳤다.
◇수덕궁(壽德宮) : 의종이 세운 것이니, 천령전(天寧殿)이 있다.
◇관북궁(館北宮) : 의종이 백성의 집을 빼앗아 수리와 장식을 더하고 굴실(窟室)과 대(臺)를 쌓고 금옥으로 화려
함과 사치함이 더할 수없게 꾸몄다. 환관 백선연(白善淵)과 왕광취(王光就)와 더불어 술자리를 베풀어 이공승
(李公升)을 불러 다가 실컷 마시면서 글을 지어 화답하였다.
◇성북동 별궁(星北洞別宮) : 시중 김돈시(金敦時)의 사제(私第)인데, 의종이 궁으로 삼았다.
◇안창궁(安昌宮) : 시중 왕충(王忠)의 집인데 의종이 궁으로 삼았다.
◇정화궁(靜和宮) : 본래 참정(參政) 김정순(金正純)의 집이었는데, 의종이 궁으로 삼았다.
◇연창궁(連昌宮) : 본래 평장(平章) 유검필(庾黔弼)의 집이었는데, 의종이 궁으로 삼았다.
◇경명궁(慶明宮)
의종이 정함(鄭諴)의 집을 궁으로 삼은 것인데, 음양가(陰陽家)가 말하기를, "개가 머리를 들고 주인에게 짖어
대는 형세이니, 임금이 거처하기에 마땅치 않다." 하였으나, 왕이 따르지 않았다.
◇제상궁(提上宮)
황해북도 개성시 송악산 죽선대(竹仙臺) 입구에 있었던 고려전기 제1대 태조가 창건한 사찰 왕륜사(王輪寺)로
몽고의 병란으로 불타버린 뒤 충렬왕 원년(1275)에 제상궁(提上宮)을 폐하였다.
◇대명궁(大明宮)
인종(仁宗)이 순천관(順天館)을 고쳐서 대명궁으로 하였는데, 일찍이 금(金)나라 사신을 여기에서 전별하였
다.
◇창락궁(昌樂宮) : 명종(明宗)이 최충헌(崔忠獻)에게 핍박당해 이 궁에 유폐되었다.
◇화평궁(和平宮) : 명종이 거처하였다.
◇경희궁(景禧宮)ㆍ수창궁(壽昌宮)
서소문(西小門) 안에 있으니, 연경궁이 불탄 이후로는 임금이 모두 이 궁에서 거처하였고, 우리 태조도 이 궁에
서 왕위에 올랐다. 지금은 허물어져 개성부 창고로 쓰고 있다.
◇의창궁(義昌宮)ㆍ덕자궁(德慈宮)
충선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전문(箋文)을 받들고 태상왕에게 존호를 올리는데, 임금은 자포(紫袍)를 입었고 상왕
은 황포(黃袍)를 입고서 하례를 받으니, 그때에 이것이 삼한에서 가장 성대한 일 이라 하였다.
◇현덕궁(玄德宮)ㆍ연덕궁(延德宮) : 이자겸(李資謙)이 대궐을 침범하니 인종이 연덕궁으로 나와 있었다.
◇경영전(景靈殿) : 고려에서 조종(祖宗)의 영정(影幀)을 모셨던 곳이다.
◇함경전(含慶殿) : 향복전(向福殿)으로 고쳤다.
◇관악전(觀樂殿) : 팔관회(八關會)와 연등회(燃燈會)를 할 때에 임금이 거둥하던 곳이다.
◇장생전(長生殿) : 광종(光宗)이 여러 신하와 이 전에서 잔치하였다.
◇상정전(詳政殿) : 성종이 거처하던 곳인데, 목종(穆宗) 때에 불탔다.
◇원화전(元和殿)ㆍ사현전(思賢殿) : 성종이 동지(冬至)에 이 전에서 신하들의 조회를 받았다.
◇천성전(天成殿) : 목종 때에 이 전의 치문(鴟吻)주D-08에 벼락이 쳤다.
◇장춘전(長春殿)ㆍ건화건(乾化殿) : 목종이 병환이 있을 때 기도하는 도장(道場)을 이 전에 차렸다.
◇상화전(祥和殿) : 처음 이름은 옹화전(雍和殿)이다.
◇천복전(天福殿) : 혹 도장을 차렸고, 혹 여러 신하들과 잔치도 하며, 금(金)ㆍ송(宋)의 사신도 맞이하였다.
◇선덕전(宣德殿)ㆍ순복전(純福殿)ㆍ만보전(萬寶殿) : 인종이 현덕전(玄德殿)을 만보전으로 고쳤다.
◇숙화전(肅和殿) : 인종이 정양전(正陽殿)을 숙화전으로 고쳤다.
◇천령전(天寧殿) : 의종이 근신(近臣)을 여기서 잔치하였다.◇연강전(延康殿) : 처음 이름은 중화전(中和殿)이
었다.
◇숭문전(崇文殿) : 대명당(大明堂)에 있다.
◇화평전(和平殿) : 수창궁(壽昌宮) 안에 있다.
◇명인전(明仁殿)ㆍ관인전(寬仁殿)ㆍ중화전(中華殿)ㆍ팔각전(八角殿) : 화원(花園) 속에 있으니, 공민왕이 2층
팔각전을 세우고 주위에 화초를 심어서 잔치하고 놀이하는 장소로 삼았다.
◇만월대(滿月臺) : 연경궁(延慶宮)에 있으니, 곧 정전(正殿) 앞 계단이다.
◇청연각(淸讌閣) : 예종이 홍관(洪瓘)ㆍ정극공(鄭克恭) 등으로 청연각 학사(學士)를 삼아 경사(經史)를 강론하
였는데, 은총과 대우가 견줄 데가 없었다.
◇위봉루(威鳳樓) : 고려 태조가 백제로부터 돌아와서 이 누에서 문무 백관의 조하(朝賀)를 받았다.
◇의봉루(儀鳳樓)
처음 이름은 신봉루(神鳳樓)였는데 뒤에 이 이름으로 고쳤으니, 즉 연경궁(延慶宮)의 대루(大樓)이다. 무릇 태묘
(太廟)에 제사지내거나, 연등대회(燃燈大會)와 팔관회(八關會) 때에는 무두 임금이 이 누에 나와서 계간(鷄竿)
을 높이 세우고 주D-27 대사면(大赦免)을 하며, 혹 중 수만 명에게 밥을 먹이고, 혹 중앙과 지방에 대포연(大酺
宴)을 하사하기도 하였다.
◇사루(紗樓)
숙종(肅宗)이 이 누에 나와서 중광전(重光殿) 옥매괴화(玉玫瑰花 낙엽 관목의 일종. 흰 꽃이 핌) 시를 짓고 사신
(詞臣)들을 불러서 화답하여 올리게 하였다.
◇의춘루(宜春樓) : 뒤에 소휘루(韶輝樓)로 고쳤다.
◇양루(涼樓) : 충렬왕이 매양 이 누에 나와서 격구(擊毬)를 관람하였다.
◇관상루(觀祥樓) : 처음 이름은 망운루(望雲樓)였다.
◇양화루(陽和樓) : 장원정(長源亭) 곁에 있다.
◇연복정(延福亭) : 옛터는 지금 동대문 밖 산대암(山臺巖) 밑에 있다.
◇상춘정(賞春亭)
연경궁(延慶宮) 뒤뜰에 있으니, 문종(文宗)ㆍ선종(宣宗)ㆍ예종(睿宗)이 모두 여기서 꽃구경한 시가 있다.
옥촉정(玉燭亭)ㆍ산호정(山呼亭) : 모두 연경궁 후원(後苑)에 있다.
◇만수정(萬壽亭)
수창궁(壽昌宮) 북원에 있으니, 환자(宦者) 윤언문(尹彦文)이 괴석(怪石)을 모아서 가산(假山)을 쌓고 작은 정
자를짓고서 누런 비단으로 벽을 덮어 더할 수 없이 사치스러웠는데, 이름을 만수정이라 하였다.
◇태평정(太平亭)
의종이 대궐 동쪽에 민가 50여 구(區)를 헐고서 이 정자를 짓고 나서 태자에게 명하여 편액(扁額)을 쓰게 하였다.
◇원구(圓丘) : 회빈문(會賓門) 밖에 있는데, 고려에서 교사(郊祀 나라에서 천지(天地)에 제사하는 것)하던 곳이다.
◇태묘(太廟) : 고려의 태묘의 옛터이니, 화원 동쪽에 있다.
◇구요당(九曜堂) : 고려에서 성신(星辰)에 초제(醮祭)를 지내던 곳이다.
◇소격전(昭格殿) : 궁성 북쪽 기슭에 옛터가 있다.
◇사직단(社稷壇) : 불은사(佛恩寺) 서편에 옛터가 있다.
◇개성 폐현(開城廢縣) : 도성 서쪽 25리에 있다.
◇강감찬(姜邯贊)의 집ㆍ이색(李穡)의 집ㆍ한수(韓修)의 집ㆍ안유(安裕)의 집 : 모두 양온동(良醞洞)에 있다.
◇이제현(李齊賢)의 집 : 수철동(水鐵洞)에 있다.
◇최영(崔瑩)의 집 : 이현(梨峴)에 있다.
◇정몽주(鄭夢周)의 집 : 화원(花園) 북쪽에 있다.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 : 지금은 합좌사(合坐司)라고 하는데, 화원 동쪽에 있다.
◇법왕사(法王寺) : 옛터는 연경궁 동쪽에 있다.
◇현성사(賢聖寺) : 옛터는 탄현문(炭峴門) 안에 있다.
◇숭교사(崇敎寺) : 남부 환희방(歡喜坊)에 있으니, 지금도 장간(長竿)과 부석(趺石)이 있다.
◇귀법사(歸法寺) : 옛터는 탄현문(炭峴門) 밖에 있다.
◇용흥사(龍興寺) : 옛터는 귀법사 곁에 있다.
◇묘련사(妙蓮寺) : 옛터는 삼현리(三峴里)에 있다.
◇운암사(雲巖寺)
옛 이름은 광암사(光巖寺)이다. 무선봉(舞仙峯) 밑에 있었으니, 공민왕 현릉(玄陵)의 재궁(齋宮) 인데, 지금은
없어졌다. 이색(李穡)의 비명(碑銘)이 있다.
◇진관사(眞觀寺) : 옛터는 용수산(龍首山) 기슭에 있다.
◇개국사(開國寺) : 개성부 동쪽 5리에 있다.
◇보국사(補國寺) : 사찰이 두 개인데, 고려 정궁(正宮) 동서편에 있다.
◇청운사(靑雲寺) : 보국사(補國寺) 곁에 있다.
◇해안사(海安寺)
봉명산(鳳鳴山)에 있다. 고려 때 조종(祖宗)의 영정(影幀)을 여기에 봉안하였다. 명종 때에 무신 들이 의논하기
를, "의종이 무인을 원수로 여겼으니 영정을 무방(武方) 서방(西方)에 두는 것은 마땅치 않다." 하고, 마침내 성
동쪽에 있는 오미원(吳彌院)을 선효사(宣孝寺)로 이름을 고치고서 옮겨 모시고, 해안사를 중방(重房)의 원당
(願堂)주D-72으로 삼았다.
◇일월사(日月寺) : 송악산 기슭에 있다. 고려 태조 5년(922)에 궁성 서북편에 절을 세웠다.
◇동산재(東山齋) : 개성 동편에 있다.
◇난산고성(卵山古城)
개성부 서편 23리에 있는데, 흙으로 쌓았다. 둘레가 4천 4백 10척이고, 높이가 30척인데, 지금은 반이나 퇴락하
였다.
[비고]
◇진보 여현진(礪峴鎭)
서북쪽으로 25리, 용현(龍峴)의 남쪽이다. 영종(英宗) 6년(1730)에 성을 쌓고 진(鎭)을 두 었다.
○ 창(倉) 2.
○ 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 1명.
◇백치진(白峙鎭) : 동북쪽으로 70리, 금천(金川) 동쪽 50리, 수룡산(首龍山) 남쪽이다. 옛날 우봉현(牛峯縣)의
백계현(白界峴)으로, 고성(古城)이 있다. 금천에서부터 성거산(聖居山) 뒤를 돌아 이 고개를 넘어 남으로 임진
강(臨津江)과 통하니, 이는 개성부의 요해지(要害地)이다.
신라와고구려가 용병(用兵)할 때에는 모두 이 길을 지나갔다. 숙종 2년(1676)에 진을 두었다.
17년에 금천(金川)에 속했다가, 정종(正宗) 병진년(1796)에 개성부에 속하게 되었다. 창(倉) 2.
○ 병마동첨절제사(兵馬同僉節制使) 1명.
◇청석진(靑石鎭)
청석동(靑石洞)에 있다. 순조(純祖) 3년(1803)에 길이 7백 56보(步)의 토성(土城)을 쌓고 관문(關門)을 설치하
여 첨사진(僉使鎭)을 두었다가 21년에 폐했다.
○ 비록 천연적으로 험한 곳이라고 하나 청석동에서부터 북쪽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동쪽으로 돌아 도산(菟山)
지경으로 들어가는 크고작은 길을 지킬 수 없다.
◇영아 관리영(管理營) : 본조 숙종 37년(1711년)에 설치하였다.
◇관원 사(使) : 유수가 겸한다. 중군(中軍) : 대흥산성(大興山城)의 수성장(守成將)을 겸한다.
◇종사관 : 경력(經歷)이 겸한다.◇좌열(左列)ㆍ우열(右列)ㆍ별장(別將) : 각각 한 사람씩이다.
◇좌부(左部)ㆍ우부(右部)ㆍ중부(中部)ㆍ천총(千摠) : 각각 한 사람씩.
◇궁실 수창궁(壽昌宮)
서소문(西小門) 안에 있다. 우리 태조(太祖)가 이 궁의 영화전(永和殿)에서 선위(禪位)를 받았고, 정종(定宗)과
태종(太宗)도 이곳에 임어(臨御)하였는데, 지금은 폐하여 창고가 되었다.
◇인덕궁(仁德宮) : 후릉(厚陵)의 경내에 있는데, 정종이 이곳에서 돌아가셨다.
◇사원 계성사(啓聖祠) : 영종 16년에 성균관에 거둥하였다가 건립하기로 발의하였다.
묘정비(廟庭碑)가 있는데 경도(京都) 편에 상세하다.
○ 숭양서원(崧陽書院)
재남산(在男山) 동쪽에 있는데, 포은(圃隱)의 옛터이다. 선조(宣祖) 계유년(1573)에 건립하였고 을해년에
사액(賜額)하였다. 문충공(文忠公)의 초상화와 묘정비가 있다.
○ 화곡서원(花谷書院) : 화담(花潭)의 옛터에 있는데, 광해주 기유년(1609)에 세웠고, 인조(仁祖) 을해년
(1635)에 사액하였다.
○ 오관서원(五冠書院)
송악산(松岳山) 밑인데, 전조(前朝) 때의 오관방(五冠防)에 있다. 숙종 임술년(1682)에 세웠고 을축년에
사액하였다.
○ 귀암서원(龜巖書院) : 남쪽으로 30리에 있다. 숙종 신유년(1681)에 옮겨 세웠고 임술년에 증액(贈額)하
였다.
○ 숭절사(崇節祠) : 남산(男山) 남쪽에 있다. 현종(顯宗) 병오년(1666)에 세웠고 숙종 갑오년(1714)에 사
액하였다.
○ 표절사(表節祠) : 성균관 서쪽에 있다. 정종 계묘년(1783)에 세우고 그해에 사액하였다.
○ 한천사(寒泉祠) : 용수산 북쪽에 있다. 순조 정묘년(1807)에 세웠는데, 협실(夾室)에 주자(朱子)와 우암
(尤庵)의 초상화를 봉안(奉安)하였다.
[주 03] 노조(盧朝) : 본 이름이 단(旦)인데 이 태조의 어휘(御諱)를 피하기 위하여 조(朝) 자를 썼다 한다.
[주 04] 초제(醮祭) : 도교(道敎)에서 존봉하는 천신(天神)에게 제사드리고 기도하는 것을 초제라 한다.
[주 08] 치문(鴟吻) : 귀와(鬼瓦)로 궁전 지붕 귀퉁이에 장식으로 올려 놓은 것이다.
[주 27] 계간(鷄竿)을 높이 세우고 : 《당서(唐書)》에 "금으로 닭 모양을 만들어 장대[長竿]에 붙여서 대사
면을 할때에 전정(殿庭)에 높이 세운다." 하였다.
[주 72] 원당(願堂) : 죽은 사람의 화상이나 위패를 모시고, 그 원주(願主)의 명복을 비는 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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