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군읍지(규 10830)
규장각 소장 『고령군읍지』(1899년, 奎 10830)에 수록된 경상도 고령군의 지도이다. 서쪽을 위로 그렸으며, 남북이 길게 표현되어 있는 지도이다. 지도의 하단에는 현의 동서를 흐르는 낙동강(洛東江)이 표현되어 있으며, 그 상단으로 읍의 주요한 시설들 및 읍재의 면들이 표현되어 있다.
읍치가 따로 회화적으로 표현되어 있지는 않으며, 건물들이 다수 있음을 보여주는 그림들 가운데 글자로 읍치가 표기되어 있다. 읍치의 남쪽으로 항교, 사직단, 성황당이 모여 있으며 서쪽에 여단이 자리 잡고 있어 전반적으로 주요한 건물들이 읍치 주변에 모여 있었음을 보여주어 전반적인 고령의 읍 사정을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양선비)
경상도읍지(규666)-고령
규장각 소장 『慶尙道邑誌』(1832년 경, 奎 666)에 수록된 경상도 고령현 지도. 고령현은 경상북도 고령군 고령읍·쌍림면 전체, 부리·성리·옥산리·인안리를 제외한 개진면, 객기리·답곡리·봉산리·포리를 제외한 우곡면, 덕곡면의 후암리, 운수면의 운산리에 걸쳐 있었다.
읍치는 고령읍 지산리·쾌빈리 일대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합천 야로면과의 경계선에 있는 서쪽의 미숭산(733.4m)에서 시작된 산줄기가 읍치 바로 서쪽의 주산(311.3m)까지 이어져 읍치의 전반적인 지형이 西高東低 형태를 이루고 있다. 이와 같은 읍치의 지형적 특징을 반영하여 서쪽을 위로 향해 그렸다.
또한 실제로는 합천군의 야로면 방향에서 흘러오는 읍치 왼쪽의 안림천, 성주 땅에서 흘러오는 읍치 오른쪽의 회천이 마치 고령 땅 안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것처럼 표현하였다. 이는 읍치가 산줄기와 물줄기로 겹겹이 둘러싸인 것처럼 표현하여 풍수적 명당성을 강조하기 위한 의도 때문에 나타난 결과이다.
지도의 아래쪽에는 낙동강 본류가 오른쪽(북)에서 왼쪽(남)으로 흘러간다. 낙동강가에 있는 江倉은 고령현의 전세와 대동미를 모았다가 낙동강-남해-서해의 수운을 거쳐 서울로 나르던 창고였다.
조선전기에는 여러 고을의 부세를 모아 한 곳에 모은 후 서울로 운송하던 조운제도(漕倉制度)가 전국적으로 시행되었지만 조선후기에는 배의 운송이 가능한 고을의 경우 개별적으로 운송하여 서울로 옮기도록 하였다.
이 때의 창고를 바닷가에서는 海倉, 강가에서는 江倉이라고 한다. 강창 옆의 金山은 순우리말 이름인 짐미에 대해, 지도 왼쪽의 九旀峴은 순우리말 이름인 금월재에 대해 한자의 비슷한 소리와 뜻을 조합하여 표기한 것이다. (이기봉)
해동지도(고대4709-41)-고령현
고령현은 신라 진흥왕에 의해 멸망당할 때까지 대가야국의 중심지이었다. 고령의 명칭은 신라 경덕왕 때부터 시작되었다. 고령현은 지금의 고령군 고령읍, 인안리 등 3개리를 제외한 개진면 전지역, 우곡면 서부, 쌍림면, 운수면 운산리를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지금의 고령군 고령읍 지산동 일대에 있었다. 읍치 서쪽 美崇山에서 산줄기가 동쪽으로 향해 가다가 鎭山인 耳山에서 멈추고 명당인 읍치를 감싸안고 있다. 또한 명당수인 가야천과 용담천이 읍치 앞에서 합쳐져 合川(지금의 會川)이 되어 東流하여 낙동강 본류로 들어 간다.
피향정(披香亭)은 읍내에 있는 누각이다. 읍치 좌측에 보이는 碧松亭은 B.C.57(신라 박혁거세 1)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는데, 신라 말에 중수할 때 최치원이 上梁文과 시를 지었다 하며, 조선 성종 때 김굉필, 정여창이 시를 지어 찬송하였다 한다.
1920년 장마 때 떠내려가는 것을 일부 건져서 현재의 위치(고령군 쌍림면 신촌)에 세웠다고 한다.
미숭산에 있는 반룡사(盤龍寺)는 용이 서리고 앉은 것 같은 지형에 위치하여 그러한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반룡사는 802년(신라 애장왕 3) 해인사보다 먼저 지었다 하며, 신라 말에 보조국사가 중수하였는데, 임진왜란 때 불에 타서 사명대사가 중건하였다. 그 후 화재로 1764년(영조 40)에 현감 윤심협이 옮겨 세웠다.
읍치 서쪽 낙동강에 위치한 개산진은 고령에서 현풍으로 가는 주요 나루터로서도 중요하였을 뿐만 아니라 고령현에서 거둔 세곡이 개산진 부근의 강창에 수납되어 조운선의 발선지로서도 중요하였다.
또한 고령의 중요한 관문포구로서 이 곳에서 어염과 곡물의 물물교환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金在完)
1872년지방지도(규10512)-고령현지도
고령현지도 高靈縣地圖, 고령현은 지금의 경북 고령군 일대로 읍치는 고령읍 헌문리, 쾌빈리에 있었다.
낙동강과 會川이 남쪽으로 흘러가고 북쪽으로 산지가 형성되어 있는 고을이다. 지도는 북쪽 대신에 서쪽을 위로하여 그려졌다. 이는 아마도 읍치의 坐向을 고려한 결과로 해석된다.
산천은 청색을 사용하여 표현하였는데 산줄기는 연맥을 강조하여 다소 거칠게 그렸고 하천은 굵기를 달리하여 대소를 구분하였다. 특히 美崇山에서 고을의 진산인 耳山으로 뻗어 내린 맥세를 매우 강조하였다.
邑治에는 三壇一廟를 비롯한 여러 관청 건물을 상세히 그렸다. 특히 獄은 울타리를 그려 격리된 공간임을 표현하였다. 주변 지역에는 각 面과 소속 마을을 비교적 상세히 표시하였다. 당시 설치된 사창도 다른 군현과 마찬가지로 표시되어 있다.
홍선으로 그려진 도로변에는 역과 점막도 볼 수 있고 사람의 왕래가 잦은 읍내에는 邑市가 형성되어 있다.
이외에 읍치 동쪽의 望山烽臺, 상동면의 碧松亭, 숭의산 밑의 盤龍寺 정도가 부가적으로 그려져 있다.
대동여지도-17첩 3면
지도 위의 지역은 현재의 경상북도 성주군, 고령군, 김천시, 경상남도 합천군, 거창군, 함양군, 전라북도 무주군에 걸쳐 있다. 무주에 속했던 왼쪽 위의 茂豊古縣과 智禮 사이를 빠져나와 왼쪽 아래로 뻗은 산줄기가 현재 소백산맥으로 부르는 백두대간이다.
백두대간의 서북쪽 무주 지역은 금강 상류에 해당되며, 지례, 성주, 고령은 모두 낙동강 본류 유역에 속한다.
합천은 현재 낙동강의 지류인 황강 유역이고, 거창과 초계 지역은 역시 낙동강의 지류인 남강의 상류에 해당된다.
백두대간 상에 위치한 六十峙는 현재 육십령으로 부르고 있으며, 이 지역에서 경상도와 전라도를 연결하는 가장 중요한 고개 중의 하나였다. 성주목의 읍치 서쪽에 있는 禿用山城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축조된 대형산성 중의 하나이다.
원래부터 존재하던 산성을 1675년(숙종 원년)에 개축하여 별장을 두고, 성주와 고령의 군기고와 군향창을 설치하였다. 안의와 거창, 합천 등에 표시된 古山城은 삼국시대의 것이 대부분이다. 백제와 신라 사이에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을 때의 주요 요충지였으나 조선에서는 이런 성격을 상실하고 대부분 폐허가 되어 있었다.
지도에는 검은색 원의 古縣들이 여러 개 표시되어 있다. 이런 고현 지역은 읍치 지역과 유역을 달리하는 경우가 많은데, 고려시대까지 이런 고현들이 독자적인 고을로서 존재하다가 조선 초기에 와서 읍치 지역의 고을에 통폐합되었기 때문이다. (이기봉)
영남읍지(규12173)-고령
규장각 소장『嶺南邑誌』(1871년, 奎 12173)에 수록된 경상도 고령현 지도. 고령현은 경상북도 고령군 고령읍·쌍림면 전체, 부리·성리·옥산리·인안리를 제외한 개진면, 객기리·답곡리·봉산리·포리를 제외한 우곡면, 덕곡면의 후암리, 운수면의 운산리에 걸쳐 있었다.
읍치는 고령읍 지산리·쾌빈리 일대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합천 야로면과의 경계선에 있는 서쪽의 美崇山(733.4m)에서 시작된 산줄기가 읍치까지 이어져 읍치의 전반적인 지형이 西高東低 형태를 이루고 있다. 이와 같은 읍치의 지형적 특징을 반영하여 서쪽을 위로 향해 그렸다.
또한 실제로는 합천군의 야로면 방향에서 흘러오는 읍치 왼쪽의 안림천, 성주 땅에서 흘러오는 읍치 오른쪽의 회천이 마치 고령 땅 안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것처럼 표현하였다. 이는 읍치가 산줄기와 물줄기로 겹겹이 둘러싸인 것처럼 표현하여 풍수적 명당성을 강조하기 위한 의도 때문에 나타난 결과이다.
邑治에는 조선의 모든 고을 읍치에서 갖추어야 하는 4개의 제사처가 표기되어 있다. 城隍壇은 고을을 지켜주는 신에게, 鄕校의 文廟에서는 유교의 성현들에게, 社稷壇은 토지와 곡식의 신에게, 려단(厲壇)은 제사를 지내주지 않는 원혼들에게 제사지내는 곳이며, 원칙적으로는 사또가 제사를 주관하였다.
지도의 아래쪽에는 낙동강 본류가 오른쪽(북)에서 왼쪽(남)으로 흘러간다. 낙동강가에 있는 江倉은 고령현의 전세와 대동미를 모았다가 낙동강-남해-서해의 수운을 거쳐 서울로 나르던 창고였다.
조선전기에는 여러 고을의 부세를 모아 한 곳에 모은 후 서울로 운송하던 漕倉制度가 전국적으로 시행되었지만 조선후기에는 배의 운송이 가능한 고을의 경우 개별적으로 운송하여 서울로 옮기도록 하였다.
이 때의 창고를 바닷가에서는 海倉, 강가에서는 江倉이라고 한다.
강창 옆의 金山은 순우리말 이름인 짐미에 대해 한자의 소리+뜻 형식으로 표기한 것이다. (이기봉)
영남읍지(규12174) - 고령
규장각 소장『嶺南邑誌』(1895년, 奎 12174)에 수록된 경상도 고령현 지도. 고령현은 경상북도 고령군 고령읍·쌍림면 전체, 부리·성리·옥산리·인안리를 제외한 개진면, 객기리·답곡리·봉산리·포리를 제외한 우곡면, 덕곡면의 후암리, 운수면의 운산리에 걸쳐 있었다.
읍치는 고령읍 지산리·쾌빈리 일대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합천 야로면과의 경계선에 있는 서쪽의 미숭산(733.4m)에서 시작된 산줄기가 현재 주산(311.3m)이라 불리는 玉女峯까지 이어져 읍치의 전반적인 지형이 西高東低 형태를 이루고 있다.
이와 같은 읍치의 지형적 특징을 반영하여 서쪽을 위로 향해 그리면서 주산인 옥녀봉을 중심으로 좌청룡-우백호-안산 등의 풍수적 형국이 거의 완벽하게 갖추어진 것처럼 표현하였다. 하지만 지도에서도 표현되어 있듯이 가장 중요한 관아 건물인 東軒은 남향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최초의 도시 계획 때는 풍수적 명당 형국이 별로 고려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고령현의 읍치가 고령읍 지산리ㆍ쾌빈리 일대에 자리 잡은 가장 큰 이유는 삼국시대부터 고려 중반기까지 주변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주산(옥녀봉)의 산성에 고을의 중심지가 있었던 역사성 때문이다. 다만 조선전기 이후 풍수가 읍치의 권위 표현에서 중요한 논리로 정착하면서 읍치와 고을 전체의 산천에 풍수적 의미를 부여해야만 했고, 이 지도는 당시의 그런 상황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다.
이를 위해 하천의 흐름을 실제와 상당히 다르게 그렸다. 읍치 왼쪽의 會川은 순우리말 이름인 모듬내에 대해 한자의 뜻+뜻 형식으로 표기한 것인데, 현재는 표기된 한자의 소리를 따서 회천이라 부르고 있다.
이 지도에서는 읍치와 고을 전체의 풍수적 명당성을 강조하기 위해 會川(모듬내)의 본류와 지류인 현재의 안림천이 각각 성주와 합천에서 흘러들어온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게 그렸다.
이 밖의 정보로 자세한 것은 面인데, 대부분 대표적인 순우리말 마을 이름에 대해 한자의 소리와 뜻을 따서 표기한 것에서 유래되었다. 내곡면(乃谷面)은 순우리말 이름인 낫골(乃谷)에서, 館洞面은 관골(館洞)에서, 九音面은 구르미 또는 구름(九音)에서, 九谷面은 구실(九谷)에서, 牛村面은 속골 또는 솝골(牛村)에서, 하미면(下旀面)은 하미(下旀)에서, 一良面은 이랑(一良)에서, 鍮泉面은 놋정이(鍮泉)에서, 高谷面은 고실(高谷)에서 따온 것이다.(이기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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