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지리지(地理志)

남포현(藍浦縣)

야촌(1) 2018. 12. 9. 01:55

남포현(藍浦縣)

 

[정의]

충청남도 보령시 남포면에 설치된 조선시대 지방 관청이자 행정구역의 명칭.

 

[개설]

남포현(藍浦縣)은 충청도 공주 목에 속한 현(縣)이다. 통일신라시대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15세기에는 호수가 180호, 인구가 949명이었다. 군정은 시위군(侍衛軍) 2명, 진군(鎭軍) 17명, 선군(船軍) 61명이었다. 1895년(고종 32)에 군으로 승격되었다. 1914년에 충청남도 보령군 남포면으로 편성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삼국시대에 남포현은 백제의 사포현(寺浦縣) 이었다. 통일신라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지금의 충청남도 서천군 지역인 서림군(西林郡)의 속현으로 삼았다.

 

고려시대에는 1018년(고려 현종 9)에 지금의 충청남도 부여군 임천면에 해당하는 가림현(嘉林縣)의 임내로 이속(移屬)되었다가 감무(監務)를 두었다. 1380년(고려 우왕 6)에는 왜구(倭寇)의 잦은 침입으로 인하여 주민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1390년(고려 공양왕 2)에 진성(鎭城)을 설치하고, 흩어진 백성들을 불러 안집(安集)시켰다.

 

조선시대에는 1406년(태조 6)에 병마사를 두고 판현사((判縣使)를 겸하게 하였다. 1466년(세조 12)에 진을 폐지하고 현감을 두었다. 이런 연혁에서 알 수 있듯이 남포현은 충청도의 군사 요충지였다. 이 지역은 왜구가 특히 많이 침입하고 이동하는 경로이기도 하였다.

 

[조직 및 역할]

수령은 종6품 현감이다. 해안 지역이어서 왜구의 침입에 대비해야 했기 때문에 문관과 무관을 교대로 파견하였다. 『여지도서(輿地圖書)』를 통한 18세기 통계로 보면 관아에 좌수 1명, 감관 2명, 별감 2명, 군관 10명, 아전 16명, 지인(知印) 6명, 사령 7명, 관노 13명, 관비 5명이 있었다.

 

관방시설로 1655년(효종 6)에 설치된 마량진(馬梁鎭)이 현 서쪽 33리에 있었다. 우도수군첨절제사(右道水軍僉節制使)의 영문(營門)이 있었는데, 그의 소관(所管)은 서천포(舒川浦)였다. 첨절제사 1명이 있었다.

 

[변천]

조선후기에도 내내 현을 유지했다. 조선후기에는 8개면으로 구성되었다. 1759년(영조 35)의 기묘장적(己卯帳籍)에 의하면 편호 4,104호, 남자 6,836명, 여자 9,105명이었다. 토지는 밭 1,000결 62부 2속, 논 1,161결 93부 1속이었다.

 

1895년에 지방제도 개정으로 전국을 23부(府)의 행정 구역으로 나누었는데 이때 홍주부 남포군으로 승격되었다.

『고종실록』 32년 5월 26일]. 1896년(고종 33)에 충청남도 남포군이 되었다. 1914년의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에 의해 충청남도 보령군 남포면으로 편성되었다.

 

[참고문헌]

『남포읍지(藍浦邑誌)』

『대동지지(大東地志)』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여지도서(輿地圖書)』

『고종실록』 32년 5월 26일

 

자료정리 : 한국학 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