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지리지(地理志)

송도(개성) 지도

야촌(1) 2018. 8. 5. 16:40

송도지(규4983) - 송도폭원도

 

 

1782년 간행 『송도지』 〈奎 4983〉에 수록된 송도폭원도(松都幅員圖). 개성부(開城府) 일대를 그린 것으로 북쪽을 위쪽으로 한 지도이다. 지도 가운데 부분에 개성부의 진산(鎭山) 송악(松岳)과 남쪽 용수산(龍峀山)을 연결하는 외성(外城, 羅城)을 선으로 그리고 오정문(午正門) 등 6문의 이름을 적었다. 다시 그 안에 내성(內城)을 그리고 남대문을 표기하였다.

 

외성 외곽 동남쪽으로 장단계(長湍界)와 풍덕계(豊德界), 서쪽에 금천계(金川界)라고 하였고, 지도 왼쪽의 예성강(禮成江)에는 벽란도(碧瀾渡)와 이포(梨浦)·전포(錢浦) 등이 표기되어 있다. 윗부분에 제석산(帝釋山)과 성거산(聖居山) 등 여러 산과 봉(峯)·현(峴)들이 그려져 있는데, 동북쪽에 중영(中營)이 표기되어 있다. (김남윤)

 

송도지(규4983)-송도성내도

 

송도속지(고4790-15)-송도폭원도

 

 

1802년 간행 『송도속지』 〈古 4790-15〉에 수록된 송도폭원도(松都幅員圖). 북쪽을 위쪽으로 개성부(開城府) 일대를 그린 지도이다. 1796년(정조20)에 금천(金川)과 장단(長湍)의 일부가 개성부로 이속된 사실을 반영하여 그린 것으로, 지도 동북쪽 끝부분에 표기된 금천계(金川界)와 장단계(長湍界)에서 개성부 영역의 확대를 살필 수 있다.

 

가운데 부분에는 개성부의 진산(鎭山) 송악(松岳)과 남쪽의 용수산(龍峀山)을 잇는 외성(外城)에 오정문(午正門) 등 6문의 이름이 적혀 있고, 그 안에 내성(內城)과 남대문(南大門)이 그려져 있다. 이 지도에 새로 추가된 것으로는 외성 동북쪽 탄현문(炭峴門)과 숭인문(崇仁門) 바깥에 교장(敎場)이 있고, 동쪽 장단계 가까이에 도산서원(道山書院)이 있다. 또 오관산(五冠山) 북쪽에 있는 중영(中營)은 성곽으로 둘러싸여 있다. (김남윤)

 

송경광고(고 4790-14)-송경폭원도

 

 

1832년경 편찬된 『송경광고(松京廣攷)』 〈古 4790-14〉에 수록된 송경폭원도(中京幅員圖). 이 지도에는 ‘계미 이후(癸未以後)’라고 적혀 있는데, 1823년(순조23, 계미) 개성부에 풍덕(豊德)이 합속된 사실을 반영하여 그린 것이다.

 

북쪽을 위로 하여 개성부(開城府) 일대를 그린 지도로, 가운데 부분에 진산인 송악(松岳)과 남쪽의 용수산(龍峀山)을 연결하는 외성(外城)과 내성(內城)이 그려져 있다. 지도 남쪽에 ‘풍덕읍’이 표기되어 있고, 조강(祖江, 임진강과 한강이 합류하는 곳)이 그려져 있다.

 

조강과 서쪽의 예성강이 합쳐지는 지점에 교동계(喬桐界)와 바다[海]라고 표기되어 있고, 강화계(江華界)와 통진계(通津界)는 조강에 표기되어 있다. (김남윤)

 

1872년지방지도-개성전도

 

 

개성전도 開城全圖,고려의 서울이었던 松都 開京은 태조 한양으로 수도가 옮겨 간 뒤에도 개성부를 두었다.

분단전의 개성시와 개풍군, 장단군의 대남면, 소남면에 해당하였다. 滿月臺는 송악산 남쪽 기슭에 위치해 있으며 본래 후삼국시대의 태봉국의 왕궁으로 이용되었다가 고려가 건국하면서 왕궁으로 사용하였던 곳이다.

 

善竹橋는 정몽주가 이방원에 살해된 곳이다. 다리에 핏자국이 남고 여기에 충절을 뜻하는 대나무가 솟아나 善竹橋라 불렸다. 옆에 보이는 碑閣은 정몽주의 충절을 기려 세워졌으며, 一大忠義萬古綱常이라 쓰여 있다.

 

成均館은 본디 992년에 창설된 國子監이었다. 최초의 대학으로서 국자학, 대학, 시문학, 륜학, 서학, 상학 등 6개의 학과가 있었다. 지금 북한이 고려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子男山에는 지금 김일성의 동상이 세워지고 있다. 산 중턱의 觀德亭은 1789년에 開城관량들이 세우고, 활궁연습장으로 한 곳이다. 정면 3칸, 측면2칸으로, 내부에 금단청이 그려져 있다. 고을 동북쪽에는 고려가 방어상 지은 大興山城이 보이고, 북문 밖에는 朴淵(폭포)도 표기되어 있다.

 

대흥산성 외에도 관문이나 鎭이 많은 것을 보면 고려가 얼마나 수도방비에 신경을 썼는지 알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