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릉진안설(羅陵眞贋說/경주의 왕릉은 진짜일까?)
신라(新羅)는 천년의 왕국이었으며, 공식적인 임금의 숫자만 하더라도 56명에 달한다.
기이한 것은 그 수많은 임금의 사후에 존재하여야 할 무덤들은 이 땅에서 거의 확인된 바 없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금의 경주에 이들의 무덤들이 존재한다고 믿지만, 그 하나하나를 살펴보면 대부분의 고분들
이 추정된 왕릉들일 뿐이다.
No | 왕 | 위치 | 근거 | 판단 |
1 | 혁거세 | 오릉 | 담암사 | 담암사(曇巖寺)의 위치가 추정된 것이니 이를 기준으로 왕릉을 특정 지을 수 없으며, 또한 매장자에 대한 정리도 되어있지 않음. |
2 | 남해 | 오릉 | 담암사 | 상동 |
3 | 유리 | 오릉 | 담암사 | 상동 |
4 | 탈해 | 동천동 | 양정 | [양정]의 위치가 확인되지 않았으니, 이를 기준으로 왕릉을 특정 지을 수 없으며, 현재의 능은 20세기 초에 석씨 일족이 비정한 것이라 함. |
5 | 파사 | 오릉 | 담암사 | 혁거세의 경우와 같음 |
6 | 지마 | 배동 | X | 17세기 말부터 경주박씨의 족보 간행사업을 거쳐 이곳으로 비정된 것이라고 함. |
7 | 일성 | 탑동 | X | 1370(영조 6)에 박씨 일족이 비정한 것이라 함. |
8 | 아달라 | 배리삼릉 | X | 17세기 말부터 경주박씨의 족보 간행사업을 거쳐 이곳으로 비정된 것이라고 함. 신덕왕릉 발굴결과에 따라 신덕왕릉과 아달라왕릉이 잘못된 비정이라는 주장이 등장하기도 하였다. |
9 | 벌휴 | 소재불명 | ||
10 | 내해 | 소재불명 | ||
11 | 조분 | 소재불명 | ||
12 | 첨해 | 소재불명 | ||
13 | 미추 | 대릉 | 흥륜사 | 흥륜사의 터는 추정된 것임 |
14 | 유례 | 소재불명 | ||
15 | 기림 | 소재불명 | ||
16 | 흘해 | 소재불명 | ||
17 | 내물 | 교동 | 내물왕릉은 추정된 왕릉이며, [삼국유사]에서 점성대(占星臺) 서남쪽이라 하였으나, [삼국사기]에는 그 위치에 대한 언급이 없다. 밑지름 2.2m, 높이 5.3m의 규모는 왕릉에 걸맞지 않고, 황남대총(98호분)을 내물왕릉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 |
18 | 실성 | 소재불명 | ||
19 | 눌지 | 소재불명 | ||
20 | 자비 | 소재불명 | ||
21 | 소지 | 소재불명 | ||
22 | 지증 | 소재불명 | ||
23 | 법흥왕 | 충효동 | 애공사 | 영조 6년(1730)에 김씨 일족이 지정한 것이며, 기준이 되는 애공사(哀公寺)도추정된 절터이다. |
24 | 진흥왕 | 서악동 | 애공사 | 상동 |
25 | 진지왕 | 서악동 | 영경사 | 영경사(永敬寺)는 추정된 절터임 |
26 | 진평왕 | 보문동 | 한지 | 한지(漢只)는 추정된 장소임 |
27 | 선덕여왕 | 보문동 | 낭산 | 낭산(狼山)은 [삼국사기]에서도 알 수없는 장소(三國有名未詳地分)라 하였으니, 지금의 경주 낭산으로 볼 수 없음. |
28 | 진덕여왕 | 현곡면 | 사량부 | 사량부(沙梁部) 위치도 확실치 않으며, 현재의 능은 조선 영조 6년(1730) 김씨 일족에 의해 비정된 것이라 한다. |
29 | 태종 | 서악동 | 능비 | “태종무열왕지비(太宗武烈王之碑)”라는 비문이 무덤 주인을 가리킨다고 하지만, 발굴을 통한 유물로서 증명되는 것은 없으며, 또한 [삼국사기]에서 영경사 북쪽에 묻었다고 하는데, 영경사(永敬寺)는 추정된 절터일 뿐이니 무열왕릉으로 단정 지을 수는 없다. |
30 | 문무왕 | 양북면 | 대왕석 | 2001년 KBS 조사결과, 대왕암 내부 또는 아래에서 유골이나 부장품을 찾지 못하였다. 또한 “葬東海中大石上”의 [동해]는 바다가 아니라 [동해]라는 지명을 가리키는 것이다. |
31 | 신문왕 | 배반동 | 낭산 | 낭산(狼山)은 [삼국사기]에서도 알 수없는 장소(三國有名未詳地分)라 하였으니, 지금의 경주 낭산으로 볼 수 없으며, 현재의 기준으로도 낭산의 남쪽에 능이 위치하는 바, 이는 낭산의 동쪽에 묻혔다는 [삼국사기]의 기록과도 맞지 않는다. |
32 | 효소왕 | 조양동 | 망덕사 | 1730년(영조 6), 김씨 일족이 성덕왕릉의 형제 능이라 하여 효소왕릉을 이곳으로 비정하였다 하며, [삼국사기]는 망덕사의 동쪽에 효소왕이 묻혔다고 하나, 현재 망덕사지는 동쪽이 아니라 동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망덕사(望德寺)의 위치 또한 확실치 않다. |
33 | 성덕왕 | 조양동 | 이거사 | 이거사(移車寺)는 추정된 절터 |
34 | 효성왕 | 소재불명 | ||
35 | 경덕왕 | 내남면 | 모지사 | 1730년(영조 6), 김씨 일족이 경덕왕릉을 이곳으로 비정한 것이라 하며, 또한 모지사(毛祇寺)의 위치도 확인되지 않은 장소임. |
36 | 혜공왕 | 소재불명 | ||
37 | 선덕왕 | 소재불명 | ||
38 | 원성왕 | 외동읍 | 봉덕사 | 봉덕사의 위치확인 불가 |
39 | 소성왕 | 소재불명 | ||
40 | 애장왕 | 소재불명 | ||
41 | 헌덕왕 | 동천동 | 천림사 | 천림사(泉林寺)의 위치확인 불가 |
42 | 흥덕왕 | 안강읍 | 비석 | 비석파편 만으로는 판단 불가 |
43 | 희강왕 | 내남면 | 소산 | 소산의 위치는 확인불가 |
44 | 민애왕 | 내남면 | 골호 | 주변에서 발견된 뼈단지(骨壺) 뚜껑의 “元和十年”은 815년을 가리키는 것이니, 839년에 죽은 민애왕릉이 될 수 없다. |
45 | 신무왕 | 동방동 | 제형산 | 1730년(영조 6), 김씨 일족이 신무왕릉을 이곳으로 비정한 것이라 한다. |
46 | 문성왕 | 서악동 | 공작지 | 공작지(孔雀趾)의 위치확인은 불가하며, 1730년경에 이곳으로 비정된 것이라고 함. |
47 | 헌안왕 | 서악동 | 공작지 | 상동 |
48 | 경문왕 | 소재불명 | ||
49 | 헌강왕 | 남산동 | 보리사 | 1993년 조사결과 석실구조와 출토된 토기는 8세기 이후로는 내려오지 않는 형식이기에 헌강왕의 재위기간 9세기와는 차이가 있다. 조선 영조 6년(1730), 경주김씨 일족이 헌강왕릉으로 비정한 것이라고 함. |
50 | 정강왕 | 남산동 | 보리사 | 조선 영조 6년(1730), 경주김씨 일족이 정강왕릉으로 비정한 것이라고 함. |
51 | 진성왕 | 소재불명 | ||
52 | 효공왕 | 배반동 | 사자사 | 사자사(獅子寺)의 터가 추정된 것이고, 그 추정된 사자사를 기준으로 효공왕릉을 비정한 것으로 비논리적인 방법으로 정해진 것임. 조선 영조 6년(1730), 김씨 일족이 효공왕릉으로 비정한 것이라고 함. |
53 | 신덕왕 | 배리삼릉 | 죽성 | 죽성(竹城)의 위치는 확인되지 않으며, 1730년 박씨 일족이 비정한 능묘로서 능표석은 1871년에 세워진 것이다. |
54 | 경명왕 | 배리삼릉 | 황복사 | 황복사(黃福寺)의 위치는추정된 것이며, 1730년 박씨 일족이 비정한 능묘라고 함. |
55 | 경애왕 | 배동 | 해목령 | 해목령(蟹目嶺)과 경애왕릉은 떨어져있으므로 판단불가하며, 1730년 박씨 일족이 비정한 능묘라고 함. |
56 | 경순왕 | 연천군 | 묘비 | “新羅敬順王之陵”라는 묘비가 존재하지만, 이는 조선후기 양식이라 하며, 경순왕릉임을 증명할 흔적은 없다. |
위에서 확인되는 바와 같이 현존하는 대부분의 신라 왕릉은 추정된 것에 불과 합니다.
그나마 “태종 무열왕 지 비(太宗武烈王之碑)”라는 명문이 존재하는 무열왕릉이 실재하는 신라 왕릉일 수도 있으
나, 그 위치의 기준이 되는 영경사(永敬寺)는 추정된 장소일 뿐이고, 비문 역시 그 제작연도의 확인이 필요 합니다.
정리하자면, 현재까지 한반도에서 확신할 수 있는 신라 왕릉은 없다는 것이고, 신라는 중국대륙의 동쪽에서 시작되
어 그 어느 시점에 그 후손들이 대거 한반도로 이동하였다는 것입니다.
출처 : 역사퍼즐 l 여산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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