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적]화랑세기 필사본본의 미스터리 ①
역사속에만 남아있던 한권의 책.
삼국통일직후 신라학자 김대문이 쓴 화랑세기.
그 책이 1300여년만에 홀연히 나타났다.
화랑세기를 그대로 베꼈다는 화랑세기 필사본!.
이 책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
화랑세기라... 어떻습니까? 좀 귀에 익으신지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같은 역사서보다는 낯설지만 아마 한번쯤은 들어보셨을 겁니다.
화랑세기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직후인 700년쯤에 신라시대 학자 김대문이 쓴 것입니다.
제목만 봐도 알 수 있듯이 화랑의 역사를 기록한 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책이 전하지 않아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화랑세기를 필사했다는 책이 1300여년 만에 세상에 나타났습니다.
참 놀라운 일이지 않습니까?
신라시대 화랑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인 관창!.
우리나라 최고의 사서인 삼국사기에 따르면 화랑이었던 관창은 어린나이에 삼국통일전쟁에 참가해 백제군과 싸우다 붙잡혔습니다. 그러나 계백장군이 그 기개를 가상히 여겨 그를 놓아주었죠.
그런데 관창은 또다시 적진에 들어가 장열히 전사했고, 이로 인해 사기가 높아진 신라군은 마침내 백제군을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삼국통일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화랑 관창은 그래서 지금까지도 화랑의 상징으로 칭송받고 있습니다.
관창뿐만 아니라 화랑들의 이런 활약상은 그동안 여러 역사책에 나왔습니다.
하지만 화랑의 조직이나 계보등의 구체적인 사실들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화랑세기 필사본엔 이런 것들이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화랑들의 사랑, 알력, 음모 등의 개인적인 사생활도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일부에선 이 책이 김대문의 화랑세기를 그대로 베낀 책이라면 이것을 바탕으로 신라사는 물론 고대사까지 다시 써야한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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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세기 필사본은 부산의 한 가정집에 보관돼 있었다.
취재팀은 필사본의 소장자를 어렵게 만날 수 있었다.
필사본의 소장자인 김경자씨. 책은 김씨의 남편이 남긴 유품이라고 했다.
필사본의 표지는 유실된 상태였다. 성수학명이라 쓰여진 지금 표지는 소장자의 남편이 만든 것이다.
한지에 쓰여 진 필사본은 모두 16장. 화랑의 우두머리인 풍월주, 즉 대표화랑들의 이야기이다. 화랑의 기원은 물론 화랑의 계보. 그리고 그들의 출생과 활동등 사생활까지 구체적으로 담겨 있다. 첫 번째 대표화랑을 역임했던 위화랑에서 15번째 김유신까지, 총 15명의 화랑의 역사를 기록한 화랑의 족보인 것이다.
화랑세기 필사본을 만든 사람은 충북 청원 출신의 박창화. 박창화는 김씨의 남편 김종진에게 한학을 가르쳤는데 책은 죽기전에 물려준 것이라고 한다.
김씨(화랑세기 필사본 소장자)
화랑세기가 어떤 책인지 알아보니 없어진 걸로 돼 있더라 신라 때 김대문이 쓴 것인데 없어진 걸로. 더 소중하게 생각을 하고 만약 진본으로 밝혀진다면 신라사 연구에 많은 도움이 안 되겠나 그런 생각에 공개하게 되었다...
화랑세기 필사본은 1989년 2월, 마침내 세상에 공개됐다. 책 제목만 전하던 김대문의 화랑세기가 1300년만에 필사본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역사학계를 뒤흔드는 하나의 사건이었다.
필사본을 가장 먼저 검토한 사람은 부산의 한문학자인 이태길 선생이었다.
이태길(번역자, 광복회 부산지부장)
김씨가 소장하고 있던 것을 문화재 위원한테 보였다. 부산시 문화재 위원이 보니까 어마어마한 일이거든. 역사가 뒤집히는 일인데, 그래서 내한테 연락해서 갔는데... 그때는 이미 복사를 다 해놨다. 이게 32면 밖에 안되거든. 있는 그대로 신문에 번역을 해서 신문 공간이 허락하는데로 빨리 세상에 알리자 해서...
그런데 그로부터 7년뒤인 지난 95년. 또하나의 화랑세기 필사본이 나타났다.
두 번째 필사본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청주에 사는 박인규씨. 첫 번째 필사본을 만든 박창화의 손자였다.
필사본은 한지에 싸여 소중하게 보관돼 있었다. 하지만 책은 많이 헐어 있었고 군데군데 떨어져 나간 곳이 많았다.
두 번째 필사본은 총 162장. 4번째 대표화랑부터 32번째까지, 총 28명의 대표화랑들의 이야기다.
전체적인 구성은 앞서 발견된 것과 큰 차이가 없다. 다만 기록된 대표화랑들의 숫자가 많고 그 내용이 훨씬 풍부하고 상세하다.
이렇게 두 번째 화랑세기 필사본을 만든 사람은 박창화. 그는 1889년 충북 청원에서 태어나 1962년 사망했다.
그는 이 책은 1930,40년대 썼다고 한다.
박인규(박창화 손자, 前 초등학교 교장)
할아버지는 보통사람하고 좀 틀리신 분이다. 어려서부터 글 공부만 열중하고 사교성이나 명예, 돈이라든지 심지어는 가족들까지도 신경을 안쓰고, 오로지 학문 연구만 했다. 그렇다면 박창화가 만든 두권의 필사본은 어떤 관계일까?
첫번째 발견된 필사본은 두 번째 것을 발췌한 요약본으로 추정된다. 그러므로 필사한 시기도 늦다.
서문부터 15번째 대표화랑에 관한 기록이 남아있고, 뒷부분이 훼손된 상태다.
필사한 시기도 빠르고 내용이 자세해 모본으로 추정되는 두번째 필사본은 서문과 앞부분이 없다.
대신 4번째 대표화랑부터 32번째 대표화랑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다. 따라서 앞부분이 있는 첫번째 필사본과 뒷부분이 있는 두번째 필사본이 합쳐져야 한권의 완전한 화랑세기 필사본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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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어떤 내용인지 담겨 있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신라의 삼국통일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두사람, 김유신과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영정입니다.
이들은 형제지간처럼 절친한 사이였습니다. 그중 김유신은 특히 화랑출신으로 그의 용맹성에 대한 많은 일화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화랑세기 필사본에 우리가 알지 못하던 새로운 사실이 나오고 있습니다. 김유신은 물론 김춘추도 화랑이었다는 것입니다.
화랑세기 필사본에는 김유신이 15세 풍월주, 즉 15번째 대표화랑을 역임했고...김춘추는 18세 풍월주, 18번째 대표화랑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이 책을 통해 김춘추도 화랑이었다는 것이 처음으로 밝혀진 것입니다.
새로운 사실은 이뿐 아닙니다. 이 책은 김춘추의 결혼에 관한 얘기도 구체적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알려진 기록에 따르면 김춘추와 김유신은 처남 매제 사이였습니다.
김유신의 누이동생 문희와 김춘추가 결혼을 했던 것입니다. 이 두 사람을 결혼시키기 위해 가장 애를 쓴 사람은 바로 김유신이었습니다.
김유신과 김춘추의 친분관계를 생각하면 당연한 일일 겁니다. 하지만 왼 일인지 김춘추는 한동안 김유신의 누이동생 문 희와의 결혼을 꺼렸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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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세기 필사본에 따르면 김춘추는 '얼굴이 백옥 같고 온화한 말씨로 말을 잘하고 뜻이 있었고, 행동에 법도가 있었다.' 이 같은 풍모를 알아본 사람은 김유신이었다. 그는 동생 문희와 김춘추를 결혼시키려는 계획을 세운다.
우선 김춘추를 집으로 초대해 동생과 관계를 맺도록 유도한다. 그리고 임신을 하자 처녀가 아기를 가졌다며 동생을 불에 태워 죽이려는 연극을 벌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춘추는 결혼을 망설였는데... 왜, 그랬을까?
화랑세기 필사본에는 그 이유가 명백하게 나와 있다. 이 책에 따르면 당시 김춘추에게는
보랑(보라)이라는 아름다운 아내가 있었다. 그리고 이들은 고타 소라는 딸까지 낳았다.
이도학 박사(한양대 강사)
종전에는 초혼이라는 생각도 있었지만, 학계에선 김춘추가 결혼을 해서 아이가 있었고 그런 상황에서 불가피하게 문희와 결혼을 하지 않았겠나 추정해 왔다. 그런데 필사본은 김춘추에게 보라공주가 있었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바로 이러한 기록과 맞춰보면 김춘추가 성큼 결혼하지 못하고 망설였던 이유가 규명이 되지 않겠는가...
삼국유사에 의하면 김유신의 동생 문희를 구한 것은 선덕여왕이었다. 때마침 김유신의 집근처를 지나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선덕여왕은 김춘추를 책망한다. 그런데, 화랑세기엔 선덕여왕이 선덕공주로 나온다. 이것이 더 정확한 기록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이 사건은 선덕여왕이 즉위하기 전에 벌어진 일이기 때문이다. 여기엔 문희의 언니인 보희도 김춘추와 결혼한 것으로 돼 있다. 왕비가 되는 길몽을 동생에게 판 보희가 후회하며 처녀로 남자 김춘추가 첩으로 삼은 것이었다.
이로서 김춘추와 김유신의 관계는 더욱 돈독해 진다. 이것은 두 신흥세력 간에 결합을 의미한다. 필사본은 화랑의 기원에 대해서도 명확히 밝히고 있다.
화랑이 신궁을 받드는 제사집단에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이런 내용은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것이다.
이도학
화랑이 신궁을 받드는 제사 집단에서 기원했다. 라는 기록이 보이고 있고 처음 여성 수령이 남성수령으로 바뀐 것으로 돼 있다. 성적인 변화를 보여주는 것 화랑의 기능이나 성격의 변화를 암시하는 것이다.
종전에는 화랑 하면 전사 단으로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라 종교적인 집단, 제사집단으로서의 가능성을 모색해 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김유신이 화랑이었을 때 도인을 만나 무예를 익혔다는 단석산!.
원래 제사집단에서 기원했다는 화랑세기 필사본의 내용을 받아들인다면 화랑김유신이 이곳에서 신의 계시를 받고 신비스런 체험을 한 의미가 명백해 진다.
그러므로 화랑이 용감한 무사집단으로 변한 것은 신라가 본격적으로 삼국통일전쟁을 치르면서였다. 새로운 사실은 이뿐이 아니다.
이 책의 서문에는 화랑이라는 명칭이 첫 번째 대표화랑인 위화랑에서 비롯됐다고 쓰고 있다.
화랑의 명칭에 대한 기원이 처음으로 밝혀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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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우리는 화랑이란 명칭은 많이 들어왔지만, 왜 화랑이라 불렀는지 그 이름이 어디서 유래했는지는 정확히 몰랐습니다.
그런데 화랑세기 필사본은 이렇게 화랑이 첫번째 대표화랑인 위화랑의 이름에서 비롯됐다는 것을 명확히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화랑의 구성과 조직체계까지 자세히 전하고 있습니다. 화랑이 삼국통일에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도 다 이렇게 튼튼하고 체계적인 조직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하지만 화랑세기 필사본이 위작이라는 주장도 강력합니다.
김대문의 화랑세기가 전해져 오던 것을 그대로 베낀 것이 아니라 김대문이 쓴 것처럼 만든 가짜 책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필사본의 진위를 둘러싼 논쟁이 계속되고 있는데요. 도대체 어떤 내용 때문에 한권의 사서에 대한 논란이 10년째 벌어지고 있는 걸까요?
화랑세기 필사본의 마지막 부분.
김대문이 이 책을 쓴 이유를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향음, 즉 신라어로 화랑의 세보를 저술했으나 완성하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불초자식이 공무의 여가에 화랑집단에서 벌어진 크고 작은 일과, 각 계파들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등을 기록해 아버지의 뜻을 이었다."
대표화랑이었던 김대문의 아버지가 화랑의 족보를 썼는데 아버지가 죽자 자신이 그것을 이어서 썼다는 내용으로 이책의 저자가 김대문이라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바로 이 부분은 필사본이 김대문의 화랑세기를 그대로 베낀 진본이라는 주장의 근거가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오히려 위작의 근거가 된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필사 자가 가짜 책을 만들어놓고 김대문이 쓴 것을 베낀 진본인 것처럼 보이게 하 기위해 일부러 이런 내용을 넣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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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세기 필사본 진위논쟁은 올해로 10년째 계속되고 있다. 그중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바로 향가다. 6세 대표화랑인 세종조에 나오는 송출정가. 562년 신라가 가야를 정벌할 당시 전쟁에 나가는 사다함을 위해 그의 애인 미실이 지은 것이다. 이 향가는 화랑세기보다 후대의 사서인 삼국유사를 참조한 증거로 의심 받는다.
노태돈 교수 (서울대 국사학과)
필사본 화랑세기에 향가를 수록하고 있는데 향가는 13세기 쓰여진 삼국유사에 마지막으로 수록돼 있다. 그 이후는 향가가 지어지지도 않고 해독되지도 못했다. 이것이 다시 해독된 것은 1929년이다.
이점과 필사본 화랑세기가 삼국유사를 참고했다는 것을 연결시키면 필사본 화랑세기는 1929년이후 시기에 창작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다면, 필사본에 수록된 향가는 위작을 만들 당시 창작된 것일까? 전문가를 찾아 향가의 내용을 풀이해 봤다.
그런데 1929년 이후에 이런 향가를 만든다는 불가능하다고 한다.
김학성 교수(성균관대 국문학과)
제 생각으로는 도저히 그 당시 향가 해독 수준으로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필사를 할 당시 일제 말기인데... 당시 우리나라 향가 수준은 향가를 억지로 읽어나가는 해독의 수준이었다.
그래서 양주동 같은 분은 겨우 전체 작품을 번역, 나머지 전문 국어학자들은 2,3수 정도를 겨우 읽는 정도, 그래서 읽어내기 바땄 던 그 시절에 하물며 작품을 쓴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작품은 당시에 이미 향찰로 쓰인 것을 후대에 필사한 것으로 생각된다.
필사본에 나오는 화랑들의 자유분방한 성생활에 관한 기록도 진위논쟁의 핵심이 되고 있다. 그중 가장 논란이 되는 것이 마복자라는 용어다. 마복자는 화랑이 부하의 임신한 아내와 관계를 맺는 것을 제도화 한 것이다. 이렇게 태어난 아이를 마복자라고 한다. 실제로 이런 관계가 존재했던 것일까?
이종욱 교수(서강대 사학과)
마복자는 신라사회의 성적인 문란으로 이야기하는 분도 있지만, 실제 마복자는 그 이상 중요한 정치적인 사회적인 의미가 있다. 비처왕의 경우 마복 7성이 있었다. 그중엔 법흥왕도 들어가 있었다. 그런데 바로 마복자와 마복자를 거느린 사람과의 관계는 후견자와 추종자의 관계에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필사본은 마복자 풍속에 대해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낭도의 아내가 임신을 하면 자신이 모시는 우두머리인 화랑에게 총애를 얻는데 이때 남편이 사함(재물)을 바친다. 그리고 아들을 낳으면 다시 들어가 또다시 총애를 얻고 재물을 바친다는 것이다.
노태돈
화랑세기에서 주목된 것이 마복자 풍속이다. 이것은 사회적인 약자의 성을 강자가 유린하는 것을 공인하는 것이다. 그런데 장기간에 그것이 유지된다면 과연 사회질서의 기본단위인 가족이 유지될 수 있는지 의문이다.
심지어는 조종 대신들의 처까지 마복자 풍속에 노출돼 있다면 당시 사회질서의 기본단위인 가족이 유지되긴 어렵다고 본다.
신라시대 토우나 각종 기록들은 신라인들의 성에 대한 의식이 자유로왔음을 짐작케 한다. 하지만 필사본에 기록된 남녀관계는 그 정도가 심하다.
여성들도 자유분방하기도 마찬가지였다. 사다함에게 향가를 지어준 미실의 경우 남편외에 6명이나 되는 정부가 있었다.
이종학 소장 (서라벌 군사연구소)
유교적인 관점에서 보면 너무 성생활이 문란하다. 하지만 기마유목민족의 관점에서 보면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남녀관계뿐 아니라 형수,처제... 죽으면 부인으로 맞는다는 것은 자신의 종족이 단절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생활 풍습이다
[출처][펌] 추적,화랑세기 필사본의 미스터리 첫번째이야기|작성자맥마당발
'■ 역사 > 신라사(新羅史)'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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