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현 선생 유상(遺像).
《익재난고》 앞부분에 판각되어 있다. 초상화가 오래 보존되지 못할까 걱정되어 문집을 만들 때 새로 새겨 넣었다
는 기록이 부기되어 있다.
익재 진자찬(益齋眞自贊)
홀로 공부하여 고루하였으니 도를 들은 것이 자연 늦었도다. 불행은 모두 자신이 만든 것, 어찌 스스로 반성하지 않으랴.백성에게 무슨 덕을 베풀었다고, 네 번이나 재상이 되었단 말인가. 요행으로 그렇게 된 일이기에 온갖 비난을 불러들였구나.
못나고 보잘것없는 내 모습그려서 또 무엇에 쓰겠는가만 나의 후손에게 고하여 주노니 한 번 쳐다보고 세 번 생각하여 그런 불행 있을까 경계하며 아침 저녁으로 꾸준히 노력하라. 만일 그런 요행 바라지 않는다면 불행을 면하게 될 것을 알리라. 《익재난고(益齋亂藁)》 제9권-
선생이 자신의 초상화에 대해 쓴 글이다. 80세가 넘게 살며 여섯 왕을 섬기고 네 차례나 재상을 지내는 등 영화를 누렸으면서도 자신의 삶을 불행하다고 하였다. 실은 이것이 진심일지도 모른다.
15세에 과거에 장원급제하자 선생은 ‘과거는 작은 재주이니, 이것으로 나의 덕(德)을 크게 기르기에는 부족하다.’ 하였다. 학문 성취가 목표였던 선생에게는 평생의 영화가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이다.
대 제국 원(元)나라의 지배를 받던 고려의 신하로, 두 나라를 수없이 오가며 줄타기하 듯 외교술을 펼친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문화의 힘으로
선생은 원나라를 통해 성리학을 받아들였고 원나라의 명사들과 교유하면서 학문적 성취를 이루었다.
충선왕(忠宣王)이 원나라 수도 연경에 만권당(萬卷堂)을 지어 놓고 선생을 불러들여 조맹부(趙孟頫) 등 천하의 명사들과 어울리게 하였는데, 이 자리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
충선왕이 “닭 울음소리가 마치 문 앞의 버들가지 같도다.” 하고 읊었다.
자리에 모인 중국의 문사들이 그 말의 출처를 물었다.
충선왕이 대답을 못하고 난처해하자 익재 선생이
“우리나라 시에 ‘해가 뜨자 지붕위의 닭이 우니, 늘어진 수양버들처럼 길구나.’
라는 구절이 있으며 한퇴지(韓退之)의 시에도 이와 비슷한 시구가 있소.” 하니 좌중이 다 칭찬하였다.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제32권 <청비록(淸脾錄) 계성사류(鷄聲似柳)>
해박한 지식으로 위기에 빠진 충선왕의 체면을 살리면서 동시에 종주국에 맞서 우리문화의 위상을 드높인 유명한 일화이다. 한시를 읊으며 상대국 대표를 은근히 위압하던 어느 강대국 지도자의 모습이 겹쳐진다.
●할 말은 하자
충숙왕 때 고려의 간신들이 고려를 폐하고 원나라에 편입시키려고 한 일이 있었다. 원나라 황제도 이를 받아들여 고려에 정동성(征東省)을 설치하려 하였다. 이때 선생이 원나라에 있으면서 도당(都堂)에 글을 올렸다.
《중용(中庸)》에 이르기를 ‘무릇 천하와 국가를 다스리는 데, 아홉 가지 떳떳한 법이 있으니, 이를 시행해가는 방법은 한 가지이다. 끊어진 세대를 이어주고 망하는 나라를 일으켜 주며, 혼란을 다스려 주고, 위기를 돌보아 주며, 주는 것을 후하게 하고 받는 것을 박하게 함은 제후(諸侯)들을 감싸주는 일이다.’ 하였습니다. ....(중략)…
패자(覇者)도 오히려 이것에 힘쓸 줄을 알았는데, 더구나 큰 중국을 차지하여 사해(四海)를 한 집안으로 삼는 자이겠습니까?
-《익재난고》 제6권 <원나라 서울에서 중서 도당(中書都堂)에 올린 글>
원나라는 천하의 대국이니 경전의 말씀대로 남의 나라를 일으켜 주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어서 선생은 과거 원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고려가 도왔던 일들을 열거한 뒤, 원나라가 고려왕을 부마(駙馬)로 삼은 은혜와 의리를 부각시킨다.
또 고려에는 쓸모없는 땅이 많으니 재정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데, 왜인(倭人)들이 이 소식을 듣는다면 크게 경계할 것이니 경제적, 외교적으로 조금도 실리가 없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마무리한다.
삼가 바라건대, 집사 각하께서는 역대 황제들께서 고려의 공로를 생각하시던 의리를 본받으시고, 세상을 가르친 《중용》의 말씀을 명심하시어, 그 나라는 그 나라에 맡기시고 그 나라의 백성은 그곳 백성끼리 살게 하십시오.
자기들의 정사(政事)는 자기들 스스로 닦도록 직책을 부여하여 번방(藩邦)으로 삼으시며, 우리의 끝없는 아름다움을 누리게 하신다면 어찌 삼한(三韓)의 백성들만 집집마다 서로 경하(慶賀)하여 천자의 성덕(聖德)을 노래할 뿐이겠습니까.
종묘사직의 영령들도 모두 감격하여 지하에서 눈물을 흘릴 것입니다.
우선 상대방의 자존심을 세워 주고, 이어서 과거의 은혜와 의리를 거론한 뒤, 실리적인 측면에서 아무 도움도 되지 않음을 강조한다. 강대국에게 부탁하는 글이지만, 이 정도라면 오히려 당당한 요구에 가깝다. 선생의 글 덕택인지 원나라의 이 시도는 곧 중지되었다.
↑<원(元)나라 서울에서 중서 도당(中書都堂)에 올린 글> 문집의 판본은
1698년 해주에서 간행된 오간 본으로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장본이다.
●문인 이제현
선생은 수많은 역사서를 저술하는 한편 문학 부문에서도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조선 말기 학자 김택영(金澤榮, 1850~1927)은 선생의 문학을 두고 “조선 3천년에 제일의 대가(大家)”라고 극찬한 바 있다.
우리에게 많이 알려진 시 한 편을 소개한다.
종이 이불 썰렁하고 등불 침침한데 어린 중은 밤새도록 종을 치지 않는구나.
자던 길손 일찍 문 연다 꾸짖겠지만 암자 앞의 눈 쌓인 소나무 보려 한다네.
-《익재난고》 제3권 <산중설야(山中雪夜)>
겨울밤 눈 내린 산사의 풍경과 나그네의 심경이 선명하다. 눈 온 새벽의 한기가 피부로 느껴지는 듯하다.
이 외에도 선생은 역사와 문학을 결합시킨 영사시(詠史詩)도 많이 지었고, 패관문학(稗官文學)의 대표작인 《역옹패설(櫟翁稗說)》을 남기기도 하였다. 《역옹패설》은 일종의 수필 문학으로, 딱딱하고 골치 아픈 관직 생활과 정통 성리학에서 벗어나 잠시 여유를 찾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책에 대한 선생 자신의 설명이다.
“무료하고 답답함을 달래기 위하여 붓 가는 대로 기록한 것이니 실없는 이야기가 있은들 뭐 괴이할 것이 있겠는가. 공자(孔子)도 ‘박혁(博奕 : 쌍륙과 바둑) 놀음이 아무것에도 마음을 쓰지 않는 것보다는 낫다.’ 하였으니, 장구(章句)를 다듬어 꾸미는 것이 박혁놀음보다는 오히려 낫지 않겠는가.”
또 《익재난고》 제4권의 〈소악부(小樂府)〉에는 고려가요를 배경 설화와 함께 한역한 작품들이 수록되어 오늘날 고려가요 연구에 더없이 귀중한 자료가 된다. 옛날 신라의 처용 늙은이바다 속에서 왔노라 말을 하더니자개 이빨 붉은 입술로 달밤에 노래하고솔개 어깨 자줏빛 소매로 봄바람에 춤추었네.-<처용가(處容歌)>
바윗돌에 구슬이 떨어져 깨지긴 해도구슬 꿴 실만은 끊어지지 않으리라낭군과 천추의 이별을 하였지만한 점 붉은 마음이야 어찌 변하리.-<서경별곡(西京別曲)>
뛰어난 문장가이자 정치가로서 원나라로부터의 독립을 위해 노력했던 선생의 삶은 오늘날 강대국 사이에 처한 우리에게 많은 깨우침을 준다. 수백 년 전의 지혜가 지금 소중한 이유이다.
■ 익재난고(益齋亂藁)
《익재난고(益齋亂藁)》는 1363년(공민왕 12)에 처음 간행된 이래 조선조에 들어서도 세종, 선조, 순조 때 등 여러 차례 중간(重刊)되었다. 모두 10권 3책으로 되어 있으며, 권1~4에는 시, 권5에는 서(序), 권6에는 서(書)ㆍ기(記)ㆍ비문(碑文)이 실려 있다.
권7에는 비명(碑銘), 권8에는 표(表)ㆍ전(牋)이 실려 있다. 권9는 상ㆍ하 2편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상권은 고종(高宗)의 세가(世家)이다. 하권에는 사찬(史贊)ㆍ사전서(史傳序)ㆍ책문(策問)ㆍ논(論)ㆍ송(訟)ㆍ명(銘)ㆍ찬(讚)ㆍ잠(箴)이 실려 있다.
권10에는 장단구(長短句)가 실려 있으며, 이어 이색(李穡)이 지은 선생의 묘지명과 중간(重刊)할 때, 추록한 습유(拾遺)가 실려 있다. 한국고전번역원에서는 《익재난고》와 《역옹패설(櫟翁稗說)》전ㆍ후집을 합하여 《익재집(益齋集)》이라는 이름으로 번역서를 출간하였다.
한국고전종합DB에는 원문과 번역문이 모두 구축되어 있으며 누구나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글쓴이 : 조경구한국고전번역원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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