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영수 여사 피격 사망(1974년 8월 15일)
1974년 8월 15일 국립극장에서 거행된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조총련계 재일교포 문세광이 청중석 뒤쪽에서 뛰어나와 박정희 대통령을 향해 권총을 발사했으나 총탄이 빗나가 박대통령 대신 육영수여사의 머리에 명중 절명했고 무대 왼편에서 급히 장막을 걷고 들어온 경호원 조모씨의 지향사격 실패로 객석에 앉아있던 여고생 장봉화가 목에 맞고 사망했다.
문세광은 이날 오전 8시쯤 조선호텔을 나와 국립극장으로 향했다. 검문을 수월히 피하기 위해 미리 포드 20M 검은색 승용차를 빌려놓았다. 극장입구를 무사히 통과한 문세광은 식장입구에서 한차례 검문을 받았지만 일본어를 사용하며 귀빈 행세를 해 식장에 들어서는 데 성공했다.
기념식이 시작되고 얼마 뒤 왼쪽열 맨뒷 좌석에 앉아 있던 문세광은 준비해간 38구경 스미스 앤드 웨슨 리볼버 권총을 꺼내들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하지만 방아쇠를 잘못 건드려 첫 번째 총탄은 자신의 허벅지를 관통했다.
직후문세광은 다리를 끌며 통로를 따라 곧장 연단으로 접근했다. "탕" 두 번째 총알이 박대통령이 서있던 연단 왼쪽에 박혔다.
박 대통령은 즉각 자세를 낮춰 연설 대 뒤로 몸을 숨겼다. 세 번째는 불발 탄. 그리고 네 번째 총알이 귀빈석에 앉아 있던 육여사의 머리 오른쪽에 명중 했다. 참석자가 문세광의 발을 걸어 넘어뜨렸지만 문세광은 비틀거리며 또 한발을 발사했다.
이 총탄은 연단 뒤 태극기에 박혔다. 불과 5~6초 만에 벌어진 일이다. 그때야 좌석 앞쪽에 앉아 있던 경찰관들이 문세광의 머리를 권총 손잡이로 내려친 뒤 이중삼중으로 덮쳤다.
2011년 오상운 작가가 출간한 《퍼스트레이디 피격사건》에 의하면 육영수는 박종규의 총에 맞아 사망했다고 한다.
당시 박종규 경호실장이 문세광 쪽으로 달려가며 리볼버 권총 해머를 코킹하면서 권총을 뽑았고 연단 앞에서 지향사격 자세를 취할 때 권총이 손에서 미끄러진다. 미끄러진 권총이 박 실장 손위에서 놀다가 떨어 졌고 권총이 박 실장의 왼쪽 무릎을 지날 때 총구는 뒤쪽45도 방향으로 해머가 풀리며 격발된다.
꺼낼 때부터 손에서 총이 헛돌았고 박 실장이 권총을 다시 잡으려 할 때 손가락에 해머가 풀려 발사된 총알이 총구 방향 쪽에 있던 육영수의 우측 이마를 맞고 두개골 내부 정수리에서 한번 튀기고 좌측 뒤통수 쪽으로 나오는 게 화면에 잡혀있다. 박 실장은 정말 재수 좋게 무릎에 맞을 수 있었던 총알을 피했고 그걸 육영수 여사가 맞았던 것이다.
↑차마 보내지 못하고 눈물을 훔치는 박정희 대통령
당시 수사 당국 주변에서는 한동안 '제3의 저격수'가 있었다는 확인되지 않은 소문이 나돌기도 했고, 조총련 등에서는 음모 설을 유포하기도 했다. 문세광이 대통령이 참석하는 행사장에 비표도 없이 검문을 무사통과한 점, 김포공항으로 입국할 때 트랜지스터라디오에 권총을 숨겨 왔다 면서도 전혀 적발되지 않은 점, 일본인 명의의 위조 여권으로 재일동포 비자를 받아 입국했다는 점 등에 대해서도 의문이 제기됐었다.
국민장 영결식은 1974년 8월 19일 오전 10시 중앙청(현재 경복궁) 광장에서 조문사절과 내외인사 3,0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엄숙하게 거행되고 당일 오후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육영수(陸英修, 1925년 11월 29일~1974년 8월 15일) 여사는 충청북도 옥천에서 대지주였던 육종관(陸鍾寬,1893년 음력 5월 10일 ~ 1965년 12월 26일)과 이경령(李慶齡,1896년 12월 10일~1976년 8월 25일)의 1남 3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1950년 소개로 당시 육군 소령이던 박정희를 만났으며 6·25전쟁 중인 1950년 12월 박정희와 결혼했다. 당시 박정희는 첫부인 김호남과 이혼하고 육영수와 재혼하였다. 아버지 육종관은 이 결혼을 반대하였으나, 육영수는 가출하여 박정희의 임지였던 대구에서 하숙을 했다.
영부인이 된 후 육영수 여사의 주된 관심은 민원 처리였다. 6년 동안 영부인실 비서관으로 근무한 정재훈씨는
“되도록 많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어 거리의 여론을 수집하고, 하루 수십통의 민원은 일일이 처리지침을 남
겼으며, 특히 억울한 민원현장에는 비서들이 늘 발로 달려가도록 했다 고 전한다
육영수(陸英修, 1925년 11월 29일∼1974년 8월 15일) 여사는 대한민국의 대통령 박정희의 두 번째 부인이다. 본관은 옥천으로 충청북도 옥천공립여자전수학교에서 교사로 1년여 간 재직한 바 있다. 1974년 8월 15일 서울장충동의 국립극장에서 개최한 광복절기념행사장에서 일본 조총련계의 문세광이 쏜 총의 저격을 받고 사망했다.
설 하에 대한민국 제18대 대통령 박근혜와 차녀인 박근영 과, 아들인 사업가 박지만을 두었다.
조선 말기의 개화사상가 겸 소설가 육용정(陸用鼎, 1842년~1917년)은 그의 작은할아버지이고, 큰아버지는 조선 말기의 문신 육종윤(陸鍾允, 1863년 ~ ?)이다. 일제 강점기의 기독교운동가 육정수(陸定洙)는 그의 사촌 오빠였다.
□ 생애 초기
육영수는 충청북도 옥천에서 대 지주였던 육종관과 이경령의 1남 3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 육종관은 대지주이자 지역 유지로서 본처 이외에도 3명의 첩을 더 거느리고 있었다.
육영수는 본처인 이경령의 차녀로서 여러 친남매 및 이복 남매들을 포함하여 총 22명(12남 10녀)의 형제자매들과 함께 생활했다. 할아버지 육용필(陸用弼, 戊戌 1838년~미상)의 동생은 육용정으로 육용정은 조선 말기의 저명한 소설가이자 개화파 사상가였다. 1938년 죽향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해 배화고등여학교에 입학하였다. 배화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1945년 21세 때 옥천공립여자전수학교에 부임, 가사 과목 교사로 1년 3개월간 재직했다.
□ 결혼 생활
1950년 당시 육군 소령이던 박정희를 소개로 만났으며 6·25전쟁 중인 1950년 12월 박정희와 결혼했다. 당시 박정희는 첫 부인 김호남과 이혼하고 육영수와 재혼하였다. 아버지 육종관은 이 결혼을 반대하였으나, 육영수는 가출하여 박정희의 임지였던 대구에서 하숙하였다.
당시 육영수의 어머니 이경령 역시 남편 육종관의 축첩에 반발하던 중 딸 육영수의 결혼을 계기로 충북 옥천 집을 나와 딸과 함께 살았다. 남편 박정희와의 사이에 근혜, 근령, 지만 등 1남 2녀를 두었다.
1963년 부군 박정희가 제5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영부인으로 청와대로 이주하였다.
박정희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으로 공관에 있을 시절 육영수의 주된 관심은 민원 처리였다.
제자이며 6년 동안 영부인실 비서관으로 근무한 정재훈씨는 “되도록 많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어 거리의 여론을 수집하고, 하루 수십 통의 민원은 일일이 처리지침을 남겼으며, 특히 억울한 민원현장에는 비서들이 늘 발로 달려가도록 했다”고 전한다.
이러한 관심은 자연히 남편 박정희의 대통령 직무수행에 대한 적극적인 의견 개진으로 이어졌으며, 이는 '청와대 안의 제1야당'이라는 별명으로 일컬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에 대해 박정희는 육영수와 함께 참모들을 모아놓은 자리에서 "내 옆에 지독한 야당 총재께서 앉아 계시니 알아서 조심들 합시다."라는 식의 농담을 하기도 했다.
실제로 육영수는 남편 박정희대통령이 1963년에 군정 5년 연장을 미국 대사에게 선언하자 이동원 대사를 불러 남편이 군정 연장을 취소할 것을 설득하도록 도움을 청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육영수는 박정희가 자신과 만나기 전에 이미 결혼 후 이혼한 적이 있음을 알면서도 박정희와 결혼했으며 한때 박정희가 자신을 만나기 이전에 얻은 딸인 박재옥을 키워주기도 했다.
□ 사회 활동
◇교양수업
육영수는 정치외교사, 국사, 영어 등 다방면에 걸친 강의를 저명한 대학교 교수들로부터 매주 들음으로써 정치와 사회문제에 새로운 안목을 넓혀나갔다.
◇사회봉사
육영수는 항상 한복 차림에 단아한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소박한 인상을 주었고, 가정에서도 남편에게 성실한 아내였다. 또한 어린이와 보건에 관심이 있어서, 몇 차례 고아원과 보육원에 가서 어린이들의 보건에 대한 정책을 펴보기도 하였다.
《좋은생각》 기사에 따르면 육영수 여사는 간식을 준비했다가 청와대를 지키는 경찰들에게 선물할 만큼 따뜻했으며, 자녀들에게 청와대에서 쓰는 물건들은 국민의 세금으로 산 것이니 종이 한 장도 개인용도로 쓰면 안 된다고 가르쳤다고 전해진다.
◇자립 중심의 사회봉사
육영수는 전국 한센 병 환자(나환자)촌을 직접 방문하여 자활사업을 지원하였으며, 1964년 9월부터 베트남에 파병된 파월장병 가족들을 찾아 위문하였다. 또한 풍수해 현장에 비를 맞으며 달려가 재난당한 사람들을 위문하였다.
1968년 서울대학교에 기숙사 정영사의 설치를 주관했고 1969년 4월 어린이 복지재단인 육영재단을 설립하였으며 어린이날에 맞춰 어린이대공원, 어린이회관의 건립을 주도하였다. 1972년에는 부산 어린이회관을 기공하였다.
육영수는 직접 소년소녀 잡지 ‘어깨동무’를 발간하여 농어촌 어린이에게까지 배포하고, 1973년 불우 청소년과 빈자들을 대상으로 한 직업훈련기관 정수 직업훈련원을 설치하였다. 육영수여사가 이렇듯 활발한 사회봉사를 한 이유는 직업을 갖도록 하는 직업훈련 위주의 사회복지가 빈곤퇴치의 길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육영수 여사는 빈곤과 싸워야 했던 한센 병 환자들이 자기 힘으로 살도록 돼지와 소를 키우도록 장려하였으며, “진정한 정신을 갖는 인간회복을 내 안에 정립시켜 생활의 자리를 여러분 스스로가 쟁취하는 것이… 여러분들이 숙명처럼 살아온 빈곤과 수모와 질병의 역사를 청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잘못 없이 주위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거나 억울한 일이 생겼을 때는 직접 청와대로 연락해 달라."고 격려하였다.
1974년 청와대에 초대된 어린이를 따라온 어머니가 입이 많이 돌아가 안면마비 증세임을 본 육영수는 제일 좋은 침술원을 찾아서 그를 입원시켰는데, 3개월 치료 후 아이의 어머니가 귀향할 때는 집에서 고생한 시어머니께 드리라고 옷감 한 벌을 손수 챙겨 8월 14일에 보냈다고 한다.
◇암살
1974년 8월 15일 오전 10시 서울장충동 국립극장 대극장에서 열린 광복절기념식장에서 육영수는 박정희 저격 미수사건으로 인해 문세광에게 암살당했다. 범인 문세광이 쏜 처음 총탄이 빗나가자 범인을 저격하기 위해 경호실장 박종규가 연단에서 뛰쳐나왔고, 박종규를 노린 범인의 총탄에 맞은 것이다.
범인과 경호원들 간의 총격전으로 당시 성동여자실업고등학교 학생이었던 장봉화가 사망하였다. 영부인의 향년 50세였다. 2005년 동아일보는 당시 경호원들이 육영수여사를 저격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는 보도를 하였다 SBS의 다큐멘터리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도 직접 사격을 해보는 실험을 해가면서 육영수의 암살사건에 얽힌 의혹들을 풀고자 하였다.
대한민국 측은 육영수 피살사건을 조총련의 조종에 의한 범죄로 규정했기 때문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대한 적개심과 반공분위기가 훨씬 높아졌다. 반면 일본 측은 이 사건을 문세광 단독 범행으로 규정해서 당시 한일관계가 악화되었다. 2011년 오상운 작가가 출간한 《퍼스트레이디 피격사건》에 의하면 육영수는 박종규의 총에 맞아 사망했다고 한다.
◇이력
1925년 11월 29일 충청북도 옥천에서 육종관과 이경령의 1남 3녀 중 둘째딸로 출생
1938년 죽향 초등학교 졸업, 같은 해 배화고등여학교 입학
1945년 졸업 후 옥천여자중학교 교사로 근무
1950년 6·25 전쟁 중 가족과 함께 부산으로 피난 중 박정희(당시 소령) 만남
1950년 12월 12일 천주교 대구대교구 계산동 성당에서 박정희 중령과 결혼
1963년 10월 15일 박정희 제5대 대통령 당선, 12월 17일 박정희의 제5대 대통령 취임 후 청와대 생활
1969년 4월 14일 어린이 복지사업을 목적으로 한 육영재단 설립
1970년 7월 25일 서울 남산에 어린이회관 건립
1973년 서울 용산구에 정수 직업훈련원 개교
1974년 7월 15일 소록도 국립 나병원에 양지회 회관 설립
1974년 8월 15일 서울국립극장에서 광복절 기념식 도중 문세광의 저격에 의해 암살됨(당일 오후 7시에 사망) 그러
나 범인 조총련계 제일동포 문세광의 실탄에 의한 것인지 경호원의 오발에 의한 것인지는 아직도 미스터리
로 남아있다. 향년 50세.
1974년 8월 19일 국민장 영결식 거행 후 동작동 국립 서울 현충원 묘지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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