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정치인 박순천(朴順天)
[생졸년] 1898~1983 / 壽86세
한국 정치사 최고의 '여걸'
5선 국회의원… 농촌계몽·여성인권운동 활발히 펼쳐
제1 야당 최고위원, 5선의 국회의원, 통합야당 당수' 한 정치인이 걸어온 길이다.
웬만한 인물의 경력이 아닌 거물급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일반인이 생각하듯 남성정치인이 아닌 여성정치인이다.
그가 바로 부산이 낳은 여걸 박순천(朴順天·1898∼1983년)이다. 한국적인 풍토와 정서에 비한다면 현재에도 그만한 인물을 찾기가 쉽지 않은 것이 안타깝게도 우리의 엄연한 현실이다.
그가 바로 부산이 낳은 여걸 박순천(朴順天·1898∼1983년)이다. 한국적인 풍토와 정서에 비한다면 현재에도 그만한 인물을 찾기가 쉽지 않은 것이 안타깝게도 우리의 엄연한 현실이다.
야당 당수, 5선 국회의원
박순천은 1898년 9월 19일, 지금의 기장군 대변리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명련. 아버지 박재형과 어머니 김춘열의 무남 독녀로 어린시절은 그 누구보다도 다복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열 살에 기독교에 입교했으며, 1917년 부산진 일신여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마산에 있던 의신여학교의 교사로 재직하기도 했다. 학생시절의 박순천은 민족정신이 충만하면서도 장난끼 많은 소녀였다.
학교 벽에 걸린 일본 천황의 초상화를 긁어서 우는 모양을 만들어 한바탕 소동을 일으켰으며, 일본어 시간에는 여선생을 골려, 선생이 울면서 나가게 하는 일이 여러 번이었다고 한다.
그러다 1919년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한사람인 이갑성과 연대하여 마산 시위를 벌이다가 붙잡혀 일주일 만에 보석으로 풀려나기도 했다. 이때부터 박순천은 일본경찰을 피해 도피생활을 하게 되었고, 도피생활 중에는 자신의 신분을 감추기 위해서 "순천으로 시집갔다 소박맞고 왔다" 하여 순천댁이 되었다. 이것이 박순천으로 세인들의 입에 굳어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
농촌계몽운동 앞장
1926년 도쿄로 건너가 니혼(日本)여자대학 사회학부에 편입했으며, 3학년 재학 중 유학생이던 경북 고령군 쌍림면 안림리 출신의 변희용(卞熙瑢, 1894 ~1966/제4대 성균관대학 총장)과 결혼했다. 대학을 마치고 시댁이 있는 경북 고령군으로 돌아와서는 남편과 함께 13년 간 농사를 지으면서 생활했다.
이때 농번기에는 탁아소를, 농한기에는 야학을 열어 아이들과 부인들에게 한글과 수학을 가르치는 등 농촌 계몽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그 사이 슬하에 7남매를 두었다. 일제의 황민화 운동이 노골화되면서 창씨개명을 강요하고 전국 방방곡곡에 신사를 짓기 시작할 때에 박순천 일가는 정든 고향을 떠나 서울로 올라왔다. 그 때가 1936년이었다.
그 후 해방이 되자 박순천은 여성도 건국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독립촉성애국부인회'를 만들었으며, 이 단체는 정부가 수립되던 1948년 대한부인회로 바뀌었다. 박순천은 초대 회장으로 선출되어 6년 간 재임했다.
또 여성운동을 효과적으로 이끌어가기 위해서는 여성들의 의견을 발표할 수 있는 신문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부인신문'을 창간하여 신문사의 사장을 겸임했다.
부산·서울에서 연거푸 국회의원 당선
박순천이 정계에 입문한 것은 1950년 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 종로에 출마하여 당선되면서부터이다.
이후 제3대 선거는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낙선했으나, 4·5대 선거에서는 민주당적으로 부산의 동구에서 당선되었다.
다시 제6대 선거에서는 민주당적으로 서울 마포에서 당선됐다.1950∼60년대는 여성의 힘이 그다지 크지 않던 시기이다.
이런 가운데 서울과 부산에서 4선의 국회의원이 되었다는 것은 우리나라 정치사에서 하나의 기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는 동안 박순천이 힘을 쏟은 것은, 독재권력에 맞서 싸운 민주화투쟁과 여성의 인권신장을 위한 입법활동이었다.
여성노동자에게 생리일 유급휴가와 산전 산후 60일 유급휴가를 허용하는 모성보호법을 통과시켰고, 간통쌍벌죄를 주장하여 이를 법제화하는 데 성공했다. 남녀평등을 규정한 헌법 제11조의 정신에 한 발짝 다가서게 만들었던 주인공이 박순천이었다. 이와 함께 제 4, 5, 6대 국회의원 기간인 제3공화국 시기에는 민주당 총재를 역임했으며 1965년에는 통합 야당인 민중당의 당수가 되었다.
1967년 다시 통합야당인 신민당의 전국구의원으로 국회에 진출했고, 1971년 정계를 은퇴함으로써 20여년의 정치인생을 마감했다.
교육자로도 높은 명망
그러나 정계은퇴 이후에도 박순천에게는 여러 직함이 따라 다녔다. 1972년 근명학원(槿明學園) 이사장과 중앙여고 이사 등에 취임했으며 1976년에는 육영수 여사 추모사업회 이사장, 1980년에는 국정자문위원에 임명되었으며, 1982년 독립기념관 건립추진위원장이 되었다. 그러다 1983년 86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다사다난했던 시기에 여성의 몸으로 가정과 정치활동을 병행했던 박순천. 그녀는 농촌계몽운동가, 교육자, 여성운동가, 언론인, 민주투사로 손색없었다. 그러나 박순천의 일생이 빛만 존재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일제 식민지 시대, 무명 시절 박순천의 활동은 민족적이었고 높이 평가할만 했지만 여성 교육자로 유명해지고 나서부터의 활동은 점차 친일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의견 역시 제기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더욱 그에 대한 세인의 평가는 칭찬과 비난이 엇갈리는 갈림길에 자리할 수밖에 없다. 역사는 결단코 호락호락 넘어가는 일이 없다. 그 속에서 진실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지만 다만 실천이 어려울 따름이다.
박순천 약력
1898년 동래군 기장면 대변리 출생
1917년 부산 일신여학교 졸업
1919년 마산 의신여학교 교사, 3·1운동으로 투옥
1926년 변희용과 결혼, 일본여대 사회학부 졸업
1926년 경북 고령에서 농촌 계몽운동 ~38년 전개
1948년 부인신문사 사장, 대한부인회 회장 역임
1950년 종로구에서 2대 국회의원 당선
1964년 민중당 총재
1967년 여성 최초 5선 국회의원
1971년 정계 은퇴
1976년 육영수 여사 추모사업회 이사장
1980년 국정자문위원
1983년 작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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