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물/한국의 여성인물.

박순천(朴順天)/독립운동가. 여성운동가. 정치가

야촌(1) 2016. 12. 23. 19:12

박순천(朴順天)/전 국회의원

    [생졸년] 1898년 10월 24일(음력 9월 10일) ~ 1983년 1월 9일.

 

 

 

일제강점기 때의 독립 운동가이며 교육자로 대한민국의 여성운동가, 정치인이다.

초명(初名)은 명련(命蓮).호(號)는 해암(海岩),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한학자인 아버지 박재형(朴在衡)과 기독교신자였던 어머니 김춘열(金春烈)의 무남독녀로 오늘날의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대변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릴 때부터 어머니와 함께 마을에서 3㎞쯤 떨어져 있는 월전교회에 다니면서 기독교신자의 소양을 키웠다.

1917년 부산진 일신여학교를 졸업하고, 마산에 있는 의신여자중학교 교사로 부임하였다.

 

의신여자중학교에 재직 중이던 1919년 3·1 운동 때 민족대표의 한 사람인 이갑성(李甲成)이 보낸 독립운동가와 연결되어 마산에서 시위를 벌이다가 일경에 붙잡혀 교인들의 신원보증으로 1주일 만에 보석으로 출소 후 경상남도 서부지역으로 도피하였다.

 

그때 도피를 도와준 집주인이 이웃에게, 순천에 시집갔다가 소박 맞고 친정에 돌아왔다고 한 거짓말 때문에 순천댁(順天宅) 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는데. 1960년 4·19혁명으로 집권한 민주당정권 때 비로소 40년을 사용한 순천이라는 이름을 호적에 정식으로 개명하였다.

 

1920년 기생(妓生)으로 가장하여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요시오카 여자의학전문학교[吉岡女子醫學專門學校]에 들어갔으나, 3·1 운동 때의 보안법 위반혐의로 수배된 것이 드러나 마산으로 압송되었다.

 

이후 1년 6개월간 마산감옥소에서 복역출감 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니혼여자대학[日本女子大學] 사회 학부를 졸업하고, 28세 때인 1926년 경상북도 고령군 쌍림면 안림리 출신으로 일본에 유학 중인 변희용(卞熙瑢/독립운동가)과 혼인하였다.

 

혼인 후 귀국하여 시가인 고령에서 농촌계몽 운동을 하다가, 1936년 서울에 올라가 조선공예주식회사 금강전구공장 여공감(女工監)으로 일하였다. 1937년 황신덕(黃信德)과 함께 경성가정여숙(京城家庭女塾/현 중앙여자고등학교)를 세워 부교장으로 일하였다.

 

경성가정여숙에서 재직하던 1943년 3월경 경성가정여숙 일부학생들이 정신대에 보내졌다는 내용이 정신대 입소했다는 김금진 할머니께서 1992년 6월 5일자 뉴스메이커 지와의 인터뷰에서 2학년 재학당시 18세의 나이로 교장, 부교장 말만 믿고 정신대에 나가게 된 동기를 술회하면서 친일행적논란이 되고 있다.



1945년 8·15 광복 후 건국부녀동맹을 조직하고, 모스크바 삼상 회의의 결정에 불복하는 신탁 통치 반대 운동에 앞장섰다. 1947년부터는 독립촉성애국부인회 부회장으로 활동하는 한편 학교법인 추계학원(學校法人秋溪學院) 이사를 역임하였다. 1948년 정부 수립 후 감찰 위원이 되었고, 1949년 국민회 중앙본부 부위원장과 대한여자청년단 단장을 지냈으며, 6년 동안 대한부인회 총본부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1950년에는 대한부인회 소속으로 국회 의원에 출마하여 제2대 국회 의원이 되었다.

자유당 정권과 투쟁하면서 1955년 민주당 창당에 참여하였고, 1956년 민주당 최고 위원으로 선출된 이래 네 차례나 연임하였다. 한편 4·5·6대 국회 의원으로 거듭 당선되어 여권 신장과 민권 수호에 앞장섰다.

 

제3공화국 때는 민주당 총재를 지냈고, 1965년에는 통합 야당인 민중당의 당수가 되었으나 한일 회담 비준 반대를 위한 의원직 총사퇴의 극한투쟁 결정에서 강경파인 윤보선(尹潽善)이 탈당하자, 제5대 대통령 선거에 대비하여 유진오(兪鎭午)에게 당수직을 물려주었다.

 

1967년 통합야당이 된 신민당(新民黨)의 전국구로 국회에 진출하여 5선의원이 되었다.

고령으로 정계를 은퇴한 뒤 경기도 안양시에 있는 근명학교(槿明學校)의 이사장[1972년], 중앙여자고등학교 이사[1972년], 육영수여사추모기념사업회 이사장[1976], 국정자문위원[1980], 독립기념관건립추진위원회 위원장[1982] 등을 지냈으며 1983년 85세로 세상을 떠났다.

 

묘는 서울특별시 강북구 수유리 4·19 혁명유공자 묘역에 부군 변희용과 합장되었다.

 

● 저작

   내가 걸어온 길 내가 걸어갈 길(나의 정치백서) /신태양사, 1957)

 

● 뒤늦게 친일행적문제로 논란이 있었다.

   박순천은 1940년 친일단체 ‘황도학회’에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1941년부터 ‘조선 임전 보국단’ 주최의 강연에 연사로 참여 대동아 전쟁[태평양 전쟁]을 지원하는 연설 및 1941년 일제의 태평양 전쟁발발 이후 전선의 동남아 확대와 함께 그해 8월 23일 후생성령으로 여성정신근로 령을 공포한 뒤 12~40세의 배우자가 없는 여성들을 근로정신대 및 종군위안부로 징집 군수 공장이나 전선에 투입하기 시작했다.

 

1943년~1944년 전쟁말기에 이른 일본의 발악은 학원에도 파고 들어 당시 학교마다 두 명의 학생들을 정신대로 보내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만일 정신대원을 보내지 않으면 학교를 폐쇄시키겠다는 것이었다.

 

경성가정의숙((京城家庭女塾)도 예외일수 없었다. 1943년 3월경 황신덕(黃信德,1898~1983) 교장이 전교생을 모아놓은 조회에서 우리 학교가 문 닫을 위기에 처해 있다 여러분들 중 한 명이라도 정신대에 지원하면 학교가 살 수 있을 것이다, 라고 간곡히 호소했다. 박순천 부교장도 비슷한 말로 호소했지만 지원학생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거듭되는 교장의 호소에 따라 내 한 몸 희생해서 학교를 구하자 라는 생각으로 교장실의 문을 두드린 학생이 있었으니 이분이 바로 김금진 할머니였다. 김 할머니는 1992년 6월 5일자 뉴스메이커 지와의 인터뷰에서 2학년 재학 당시 18세의 나이로 교장, 부 교장 말만 믿고 정신대에 나가게 된 동기를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술회를 하고 있다.

 

해방이 되고 내가 돌아 왔다는 소식을 듣고 국어를 가르쳤던 김일순 선생님이 나를 부르시더군요.

그때 김 선생님은 경성의숙의 후신이 된 중앙여고를 그만 두고 동아일보기자로 있었는데 내게 그때 네가 정신대 간다 해도 학교에서 못 가게 했어야 했는데 괜한 아이 병신 만들고...... 황신덕과 박순천이 참 몹쓸 짓을 했다.

 

나라도 몰래 말해 줬어야 했는데 내 책임도 크다. 라며 눈물을 글썽거리시더군요.

그 말을 듣고는 나도 여러모로 알아 봤어요. 김 할머니의 이렇게 한 맺힌 사연은 50여년이 지난 지금에야 일제하 정신대 진상규명에 대한 국민적관심이 높아지면서 겨우 알려지게 되었다.

 

이 사실은 즉 경성의숙에서 정신대에 학생을 보내게 된 경위는 지난 1970년 발행된 중앙여고 30년사에서도 발견 되고 있다. 그러나 이미 고인이 된 저명한 우리나라 여성운동의 지도자요 여성교육자이며 탁월한 정치지도자였던 박순천은 말이 없다

 

생전에 그가 저 숱한 여성 론을 쓰면서 여성운동에 뜻을 두고 살았으며 정치마저도 여성운동의 일환으로 시작했다는 박순천이었지만 그 어느 곳에서도 일제의 의해 유린된 한국여성의 역사적 상처를 밝히고 여기에 가담했던 자신의 과거를 참회 했다는 기록을 찾아낼 수 없다.

 

한 개인에게 평생에 맺힐 한이 될 정신대에 제자를 보낸 덕분에 경성의숙은 폐쇄 당하지도 않았으며 1945년 1월에는 사립학교 규정에 따라 정식으로 중앙여자 상과학교로 인가까지 받게 된다. 박순천은 이렇게 살아남은 학교의부교장으로 해방을 맞았다.

 

 

●프로필

1898년 : 9월 10일 출생

1917년 : 부산진일신여학교(현 부산 동래여고) 졸업

1919년 : 3·1 운동 참여

1920년 : 요시오카여자의학전문학교 입학

1920년 : 일본에 건너감

1920년 : 마산형무소에서 1년 6개월 복역 출감

1921년 : 8월 마산형무소에서 출감

1926년 : 도쿄로 건너가 니혼(日本) 여자대학 사회학부에 편입하여, 3학년 재학 중 유학생이던 변희용(卞熙瑢/

균관대학교 제4대총장과 혼인했다.

1926년 : 니혼여자대학 졸업, 그해 12월 시가인 경북 고령 쌍림면 안림리로 귀국 농촌 개몽운동을 활동했다.

1936년 : 조선공예주식회사 금강 전구공장 여공감으로 재직

1937년 : 황신덕(黃信德)과 함께 고종의 손자 이우(李禑)공의 소유인 벽돌건축물을 매수하여 경성 가정의숙(현

중앙여고)을 설립하고 부교장으로 취임.

1945년 : 건국부녀동맹조직

1947년 : 독립촉성애국부인회 부회장으로 선출

1947년 : 학교인 추계학원 이사로 선출

1948년 : 초대 국회의원출마낙선
1949년 : 대한부인회회장(여성단체),
1949년 : 여성 사회운동활동
1950년 : 제2대민의원당선(정치활동시작) 52세
1954년 : 제3대국회의원 총선출마낙선
1958년 : 제4대민의원 당선 60세
1960년 : 제5대민의원당선 62세
1960년 : 민의원대통령후보출마낙선 62세
1961년 : 민주당중앙위원의장 63세
1963년 : 민주당총재(여성최초) 65세
1963년 : 제6대국회의원당선 65세
1964년 : 민중당대표최고위원 66세

1965년 : 민주당 총재로 선출

1965년 : 민중당 당수로 선출
1967년 : 제7대 신민당전국구국회의원당선 69세

1972년 : 근명학교 이사장으로 선출

1976년 : 육영수여사 추모기념사업회이사장으로 선출

1980년 : 국정 자문위원으로선출

1982년 : 독립기념관건립추진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

1983년 : 1월 9일 졸

 

 

●역대 선거출마이력[편집]

선거명 직책명 대수 정당 득표율 득표수 결과 당락
제1대 총선 국회의원/
서울종로구 갑
1대 독립촉성
애국부인동지회
15.10% 5,518표 2위 낙선
제2대 총선 국회의원/
서울종로구 갑
2대 대한부인회 54.98% 11,251표 1위 당선
제3대 총선 국회의원/
서울종로구 갑
3대 무소속 14.68% 4,306표 3위 낙선
제4대 총선 국회의원/
부산시동구 갑
4대 민주당 59.95% 22,907표 1위 당선
제5대 총선 국회의원/
부산시동구 갑
5대 민주당 57.53% 22,668표 1위 당선
제6대 총선 국회의원/
서울 마포구
6대 민주당 67.67% 50,250표 1위 당선
제7대 총선 국회의원
(전국구)
7대 신민당 32.7% 3,554,224표 전국구 1번 당선

 

 

[참고문헌]

◇자료>*다음백과 *위기백과 *부산역사문화백과 *디지털고령문화대전 *디지털창원문화대전

◇이형기,「박순천론」,『인물계』,1959.2. *임종국,<실록 친일파>,돌베개,1991.

◇박순천,「정치운동과 여성운동」,『신세계』,1956.2. *특별취재,「내가 걸어온 야당 사반세기」,다리』,1971.09~12

◇청산하지 못한 역사 중에서.../민족문제연구소/청년사] *블로그>정연이네집.

 

집필 : 이재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