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묘갈명,묘비,묘표

황보인 묘갈문/묘표(皇甫仁 墓碣文/墓表)。

야촌(1) 2018. 5. 6. 17:40

[개요]

 

황보인『皇甫仁, 1392년(태조 1) ~ 1453년(단종 1)』

 

황보인 묘갈(皇甫仁墓碣) 비는 1765년(영조 41) 경기도 파주에 건립된 황보인묘갈(皇甫仁墓碣)로 김종후(金鍾后)가 비문을 짓고, 김상숙(金相肅)이 글씨를 썼다. 황보인(皇甫仁, 1387년 우왕 13~ 1453년 단종 1)의 본관은 영천으로 자는 사겸(四兼), 호는 지봉(芝峯)이다.

 

1414년(태종 14) 문과에 급제해서 세종 조에 강원도관찰사, 병조판서를 거쳐 10년 동안 김종서와 함께 육진을 개척하였다. 1452년(문종 2) 영의정이 되어 문종의 명을 받아 단종을 보좌하다가 계유정난 때 김종서와 함께 수양대군(후의 세조)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1676년(숙종 2)에 복관되었으며 시호는 충정(忠定)이다. 비문에 따르면 복관된 이후 황보인의 절의를 칭송하여 지은 묘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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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역]

 

■ 황보인묘갈문(皇甫仁墓碣文)

 

공의 휘는 보인(甫仁)이고 자는 사겸(四兼)인데 혹 춘경이라 이르기도 한다.

호는 지봉(芝峯)이며 그 선계는 영천인(永川人)이다. 아버지는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를 지낸 임(琳)이다.

 

공은 태종 갑오년(태종 14/1414년)에 감찰(監察-사헌부의 정6품)로서 친시(親試)에 응시하여 장원하였다. 세종을 두루 섬겨 북도체찰사가 되었는데 이때 김종서(金宗瑞)와 같이 북쪽 땅을 개척하여 6진(六鎭)을 설치하였다.

 

북쪽 사람들이 사당을 세워 공을 기린 것은 이러한 연유가 있기 때문이다.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을 거쳐 재상(宰相)의 반열에 올랐다.

 

정사에 힘쓰고 몸가짐은 국가의 백년대계를 생각하면서 은인자중하여 국가의 중신이 되었다.

문종 임신년(문종 2, 1452년)에 영의정(領議政)이 되어 좌의정 김종서, 우의정 정분(鄭苯)과 같이 어린 왕을 보필해 줄 것을 부탁하는 고명을 받았다.

 

다음해인 계유년(단종 1, 1453년) 겨울 10월에 이들 세 재상은 모두 세조(世祖)에게 화를 당하였다. 이 일은 모두 국사에 기록되어 있다. 지금 임금 정묘년(영조 23, 1747년)에 이들 세 재상의 관직을 복직하라는 교지가 있었다.

 

지금 임금의 이 교지는 계유(癸酉)의 정변(政變)이 있은 지 295년만이다. 후에 다시 명하여 모두 시호를 내리고 왕께서 친히 글을 지어 조문하고 관리들을 보내어 제사하게 했다. 이로써 공은 마침내 충정(忠定)이란 시호(諡號)를 받았다.

 

이 시호를 살펴 보건대 국가가 위태로울 때 몸을 바쳐 신명을 다했으니, 왕은 이를 포상하여 충이란 글자를 취하라 하셨고 또 사심 없이 행하여 모든 일을 사리에 맞게 행하였으니 정이란 글자를 취하게 하여 시호를 충정이라 하게 하신 것이다.

 

오호라! 공의 언행과 성취한 바의 일에 대하여는 세대가 멀어 모두 알기가 어렵도다. 그러나 그 큰 절의는 크게 빛나 만세토록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니 여기에 다 또 무엇을 적어 공의 행적을 기술하겠는가? 부인(夫人)은 양성이씨(陽城李氏)로서 지택(之澤)의 따님이다.

 

아들 셋을 두었는데 장자 석(錫)은 벼슬이 참판(參判-從二品)에 올랐고 차자 흠(欽)은 벼슬이 직장((直長-正七品)에 이르렀는데, 이들 두 아들은 모두 공과 같이 죽었다. 셋째는 은(銀)인데 어리기 때문에 죽음을 면하였다.

 

딸은 다섯 명을 두었는데 사위는 도사인 유목노(俞牧老-파평인), 좌랑인 홍윤숙(洪允淑), 선략장군인 최열(崔洌), 사인인 장계숙(張季淑), 주부인 윤당(尹塘)이다. 장자 석(錫)의 후예는 지금 울산에 살고 있으며 차자 흠(欽)의 후예는 장기 영천에 살고 있으며, 막내인 은(銀)의 후예는 황주에서 살고 있다.

 

숙종 때 이미 녹겸(錄慊)은 벼슬이 참봉이었고, 공이 복관됨에 따라 녹도(錄鍍)도 벼슬하여 현령에 이르렀다.

이번에 왕께 글을 올려 공의 신원을 풀어준 데 대하여 공경한 감사를 올렸다. 공은 파주 향양리 천재의 언덕에 장례를 지냈는데 부인을 먼저 이곳에 장례를 지냈고 공의 묘소는 그 위에 있다.

 

옛날에 조그마한 비가 있었으나 다만 공의 성씨만 기록하였을 뿐인데 이번에 9대손 종( 淙)등이 서로 의논하여 새로이 비를 고쳐 세웠다.

 

적순부위전 세손익위부사솔 김 종후(金鍾厚)는 글을 짓고,

통훈대부 공조정랑 김상숙(金相肅)은 글을 쓰다.

숭정기원후 세 번째 을유년(영조 41, 1765년) 8월 일 세움

 

융희 후 40년 경인년(1950년) 전란에 비석이 깨지고 훼손되었기 때문에 16대손 곤(坤)이 사비(私費)를 들여 갑진년(1964년) 정월에 고쳐 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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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領議政皇甫公墓表 - 金鍾厚

 

公諱仁字四兼或曰字春卿。其先永川人。考曰知中樞院事琳。公太宗甲午由監察擢親策試。歷事世宗。爲北道體察使。則同金公宗瑞拓地置六鎭。北人祠焉。由議政府左贊成入相。務持大體。隱然爲國家重。文宗壬申爲領議政。與左議政金宗瑞,右議政鄭苯。同受顧命。輔幼主。明年癸酉冬十月。三相俱及於禍。事俱在國史。今上丁卯有旨復三相官。上距癸酉二百有九十五年也。後又命皆賜謚而上親爲文。遣官祭之。公遂得謚忠定。按法。危身奉公曰忠。純行不爽曰定。嗟乎。公言行事業世遠難悉。然其大節卓然。萬世不可磨滅。他又何述焉。夫人陽城李氏。少尹之澤女。有男三人。長錫參判。次欽皆同公死。次銀獨以幼免。女五人。其婿都事兪牧老,佐郞洪允淑,宣略將軍崔洌,士人張季淑,主簿尹塘也。銀之後今居黃州。肅宗時已錄慊爲參奉。及公之復官也。又錄鍍仕至縣令。是上書訟公寃得請者也。公葬于坡州向陽里泉岾之原。夫人先葬在上。舊有小碑。止記公姓氏。至是後孫淙等。相與易新之云。 <끝>

 

迪順副尉前 世孫翊衛副司率 金鍾厚撰

通訓大夫工曹正郎 金相肅書

崇禎紀元後三乙酉八月 日立

 

隆熙後四十年庚寅戰亂破損故十六代孫坤以私資甲辰正月改立

 

본암집 > 本庵集卷八 / 墓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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皇甫公墓表 - 權橃

 

永川皇甫公之墓。公諱仁。魯山朝首相。景泰癸酉靖難時。幷二子一孫被禍。正德己卯二月。立石。

魯陵相皇甫公。墓在坡州泉站西勃興官道上。考其年代。魯陵二年。公被禍。立標其葬。在我恭僖十四年。爲六十七年。當禍子孫皆死。今皇甫氏已絶世。其收葬而又標其葬者。皆沒其名。後世莫知也。識之以附坡平古事。上 疑顯廟 之七年四月壬戌。許穆。識。按先生立表時。沒其名字。故眉叟小識云云。後先生玄孫斗寅。拜眉叟語及此事顚末。眉叟喟曰。誠然誠然。 <끝>

 

중재집 > 冲齋先生文集卷之一 / 墓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