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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석봉 묘갈명 병서(韓石峯 墓碣銘 幷序)

야촌(1) 2018. 5. 5. 00:29

◇석봉 한호(石峯 韓濩) 생졸년 : 1543년(중종 38)∼1605년(선조 38).

◇월사 이정구(月沙 李廷龜) 생졸년 : 1564년(명종 19)∼1635년(인조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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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석봉 묘갈명 병서(韓石峯 墓碣銘 幷序)

 

월사 이정구 찬(月沙 李廷龜 撰)

 

내가 폐축(廢逐)되어 택반(澤畔)에 살고부터 늘 칭병(稱病)하여 손님을 사절하였다.

그런데 한 손님이 문 앞에서 몸을 굽힌 채 만나기를 청하기에 보니 한석봉(韓石峯)의 아들 민정(敏政)이었다.

 

내가 석봉의 묘도문자(墓道文字)를 부탁받은 지가 3년이 되었다. 그럭저럭 사무에 정신을 빼앗겼고 게다가 또 병으로 필연(筆硯)을 멀리한 탓에 유명(幽明) 사이에 정의(情誼)를 저버린 채 오늘에 이르렀다. 그래서 민정(敏政)을 보고 먼저 나의 불민(不敏)을 사죄하니, 민정이 서글픈 기색으로 말하기를 “가난한 형편에 애써 비석을 마련해 놓았으니, 조석이 급합니다. 감히 예전의 부탁을 다시 부탁드립니다.” 하였다.

 

아, 내가 처음 글자를 배울 때부터 이미 한석봉을 알고 있었다. 석봉은 글씨로 천하에 이름을 떨쳤고 나는 문사(文辭)로 허명(虛名)을 훔치고 있던 터라 드디어 석봉과 지기(知己)가 되었다. 내가 조사(詔使)를 영접하러 갈 때 조정에 아뢰어 석봉과 함께 가게 되었다.

 

그래서 용만(龍灣)에 머물러 해를 넘기며 서로 매우 즐겁게 지냈으니, 당시 함께 종유(從遊)하던 그 즐거운 때가 어제 일만 같다. 그러니 석봉의 묘도에 어찌 나의 글이 없을 수 있겠는가. 행장을 살펴보건대, 석봉은 이름이 호(濩)이고 자는 경홍(景洪)이며, 석봉은 그 호(號)이다.

 

5대조(代祖) 대기(大基)는 곡산군수(谷山郡守)이고, 조부 세관(世寬) 때 비로소 송도(松都)에서 집안을 이루었다. 부친은 학생(學生) 언공(彦恭)이며, 송도에서 석봉을 낳았다. 석봉이 막 태어났을 때 일자(日者)가 점을 쳐 보고 말하기를, “옥토(玉兔)가 동방에 태어났으니, 낙양(洛陽)의 지가(紙價)가 높아지겠다. 이 아이는 반드시 글씨를 잘 쓰는 것으로 이름날 것이다.” 하였다.

 

조금 성장해서는 스스로 글씨쓰기에 힘썼다. 그리고 왕 우군(王右軍 동진(東晉)의 명필 왕희지(王羲之))이 자기가 쓴 글씨를 주는 꿈을 꾼 것이 두 차례였다. 이로부터 마음속으로 기쁘고 자부심이 생겼으며 글씨를 쓸 때면 마치 신조(神助)가 있는 듯하였다.

 

이미 천재인 데다 또 오래 공력을 쌓은 터라 해액진초(楷額眞草), 모든 서체에 두루 오묘한 경지에 이르렀으며, 향시(鄕試)를 볼 때면 늘 시험장을 깜짝 놀라게 했다. 25세에 진사시(進士試)에 입격하였고, 계미년(1583, 선조16)에 와서 별제(瓦署別提)에 임명되었다.

 

문무해(文無害)로 누차 천관(遷官)하여 인의(引儀), 사포(司圃), 북부사도(北部司䆃), 사재주부(司宰主簿), 감찰(監察), 한성판관(漢城判官), 호조(戶曹)ㆍ형조(刑曹)ㆍ공조(工曹)의 정랑(正郞), 전부(典簿), 찬의(贊儀), 사어(司禦), 가평군수(加平郡守), 흡곡 현령(歙谷縣令)을 역임했으며, 이 중에는 두 차례 제수된 것도 있다.

 

그리고 누차 원종공(原從功)에 참여했다 하여 사후에 호조 참의(戶曹參議)에 추증되었으며, 생전에 부친은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추증되고 모친 백씨(白氏)는 정부인(貞夫人)에 추증되었다. 석봉은 이미 명필로 당대에 명성을 독차지했다. 조정이 조사(詔使)를 영접하거나 중국에 주청사(奏請使)를 보낼 때면 반드시 시문과 글씨에 능한 사람을 특별히 뽑았다.

 

그래서 임신년(1572, 선조 5) 원접사(遠接使) 임당(林塘) 정상(鄭相-정유길(鄭惟吉)의 사행(使行), 임오년(1582) 율곡(栗谷) 선생의 사행, 신축년(1601) 나의 사행 및 신사년(1581)ㆍ계사년(1593) 주청사의 사행에 석봉이 모두 참여하였고 가는 곳마다 반드시 중외(中外)를 놀라게 했다.

 

중국의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 마귀(麻貴) 및 북해(北海) 등계달(鄧季達), 유구(琉球)의 사신 양찬(梁燦) 등이 모두 석봉의 필적을 받아 가지고 갔다. 이런 까닭에 석봉의 글씨가 천하에 두루 퍼졌고 천하 사람들이 조선에 한석봉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엄주(弇州) 왕세정(王世貞)은 필담(筆談)에서 석봉의 글씨를 칭찬하여 “마치 노한 고래가 바위를 가르고 목마른 천리마가 샘으로 달려가는 것과 같다.” 하였으며, 한림(翰林) 주지번(朱之蕃)은 우리나라에 와서 말하기를 “석봉의 글씨는 왕 우군(王右軍)ㆍ안진경(安眞卿)과 우열을 겨룰 만하다.” 하였다.

 

이에 석봉의 글씨가 더욱 귀중해져서 사람들이 작은 종이에 쓴 글씨 한 점을 얻어도 마치 수주(隋珠)나 곤옥(崑玉)을 얻은 것처럼 기뻐하였다. 선왕(先王)과 금상(今上)이 동궁(東宮)에 있을 때 쓰게 한 글씨가 이루 기억할 수 없이 많은데 모두 병풍과 궤안(几案)에 늘어놓고 조석으로 완상하였으며, 양궁(兩宮)이 내린 하사품도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고 어선(御膳)과 어주(御酒)를 보내는 것이 길에 이어졌다.

 

선왕이 일찍이 석봉이 쓴 대자(大字)를 보고 감탄하며 “기장(奇壯)하기가 이루 측량할 수 없다.” 하고 중사(中使)를 보내 집안에 주연(酒宴)을 열어 주었다. 그리고 한가한 군(郡)에 수령으로 보내면서 유시(諭示)하기를, “반드시 너의 글씨를 받고자 하는 것은 필법을 후세에 전할 수 있게 하고자 해서이다.

 

피곤할 때 억지로 쓰지 말 것이며 게으르지도 서두르지도 말라.” 하고 어필로 ‘취리건곤 필탈조화(醉裏乾坤筆奪造化)’ 여덟 자를 써서 하사하였다. 석봉이 병들자 약품과 의원이 번갈아 이어졌으며, 부음이 들리자 부의(賻儀)를 매우 넉넉히 하사하고 부관(府官)을 시켜 상장(喪葬)을 보살펴 주게 하였으니, 그 성총(聖寵)의 우악(優渥)함이 이와 같았다.

 

석봉은 계묘년(1543, 중종38)에 태어났고 을사년(1605, 선조38)에 졸(卒)하였으니, 향년은 63세이다. 학생(學生) 최담(崔湛)의 따님을 아내로 맞아 아들 하나를 두었으니, 바로 민정(敏政)이다.

 

그도 진사시에 입격하였고 글씨를 잘 써서 그 가업을 이었으며 괴원(槐院)의 보직(補職)을 맡고 있다.
석봉은 사람됨이 돈중(敦重)하고 과묵하며 술을 잘 마셨다. 술을 마셨다 하면 도도한 주흥(酒興)에 겨워 자적하며 시를 읊고 글씨를 쓰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이미 높은 명성을 한 몸에 받아 공경(公卿)들 사이에 성예(聲譽)가 자자했다. 성품이 너그럽고 남을 시기하는 마음이 적어 비록 남의 선악(善惡)을 입에 올리지는 않았으나 내면은 기실 확고하여 조수(操守)가 있었다.

 

그래서 자기 뜻에 맞지 않으면 부드러운 말로 상대방의 기분에 영합한 적이 없었다.
시를 지음에는 유독 이백(李白)을 좋아하여 그 작품은 왕왕 자못 아취(雅趣)가 있었다.

 

대저 선비가 재예(才藝)를 품고서 출세를 도모하는 이가 어찌 한량이 있으리오. 그러나 혹자는 남에게 배척을 당하고 혹자는 흠결(欠缺)을 드러내고 마니, 끝까지 신명(身名)을 잘 지키고 군은(君恩)을 보전하는 이는 드물다.

 

한때 기세를 떨치는 공명(功名)은 한갓 귓가를 지나가는 모기처럼 하찮은 것일 뿐이다.

죽은 뒤에 누가 알아주겠는가. 석봉과 같은 이는 초야에서 일어나 세 치 길이 붓을 잡고 인주(人主)로부터 세상에 드문 지우(知遇)를 입어 권세를 다투는 자도 이간하지 못하고 비방을 잘하는 자도 감히 헐뜯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명랑하게 살다 일생을 마쳤고 그 명성은 후세에 길이 남을 것이니, 참으로 훌륭하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살아서는 성총(聖寵)의 영광 입었으니 / 生而寵榮
존귀한 게 어찌 공경(公卿)의 높은 작위이랴 / 貴豈其卿
죽어서는 길이 불후하리니 / 死而不朽
뉘라서 장수하지 못했다 하랴 / 孰云不壽
아아 석봉이여 / 噫嘻石峯
그대를 불후하게 하는 것은 이름이요 / 不朽汝者名
그대의 이름을 이름 짓는 것은 나의 명이로다 / 名汝名者吾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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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韓石峯 墓碣銘 幷序

 

自余廢逐居澤畔。恒稱病謝客。客有跼門求見者視之。韓石峯之子敏政也。余受石峯墓道之托三載矣。忽忽爲事奪。病且怠筆硯。負幽明以至今。見敏政先謝不敏。敏政慼然而曰。力貧治石。惟朝暮是急。敢申前請。噫。自余始學字。已識韓石峯。石峯以書名於天下。余以文辭竊虛聲。遂與石峯爲知己。及余候詔使行。白于朝與之偕。留龍灣經歲。相得益歡。幕中從遊之樂如昨日。石峯之墓。烏可無余言。按狀。石峯名濩。字景洪。石峯其號。五代祖大基。谷山郡守。祖世寛。始家松都。考學生彥恭。生石峯於松都。始生。日者占之曰。玉兔生東。高洛陽之紙價。是兒必以善書名。少長。能自課書。夢王右軍授以所書者再。由是心獨喜自負。臨帖若有神助。旣天才又積用功。楷額眞草。無不各臻其妙。擧於鄕。輒驚試闈。二十五。中進士。癸未。拜瓦署別提。以文無害累遷官。歷引儀,司圃,北部司導司宰主簿,監察,漢城判官,戶,刑,工正郞,典簿贊儀司禦,加平郡守,歙谷縣令。或有再除者。以屢參原從功。沒後贈戶曹參議。生贈考戶曹參判。妣白氏貞夫人。石峯旣以名筆擅一時。朝廷於迎儐詔使若奏請天朝。必盛選詞翰。壬申遠接使林塘鄭相之行。壬午栗谷先生之行。辛丑不佞之行及辛巳癸巳奏請使之行。石峯皆與焉。所至必驚動中外。天朝提督李如松,麻貴,北海鄧季達,琉球使梁燦。皆要筆迹以去。以故石峯之書。遍於天下。天下皆知朝鮮有韓石峯。弇州王世貞筆談。稱石峯書。如怒鯢決石。渴驥奔泉。翰林朱之蕃來我國曰。石峯書。當與王右軍,顏眞卿相優劣。於是其書益貴重。人得一赫。不啻隋珠崑玉。先王及今上在東宮所命寫不可殫記皆列之屛障几案朝夕賞玩兩宮。前後錫賚。又不可殫記。御膳法酒。絡繹於道。先王嘗見其大字。歎曰。奇壯不可測也。遣中使錫宴于家。又命除閑郡諭之曰。必要爾書者。欲使筆法傳於後世。倦時無強作。勿怠勿迫。又御書醉裏乾坤筆奪造化八字賜之。及病。藥醫交路。訃聞。賻賜甚厚。命府官庀喪葬。其寵渥如此。石峯生於癸卯。卒於乙巳。得年六十三。娶學生崔湛女。有子一人。卽敏政。中進士。亦能書。世其家。隷槐院補職。石峯爲人敦重寡言。善食酒。遇輒陶然自適。吟灑不倦。旣負高名。延譽公卿間。寛中小忮。雖不口人臧否。而內實堅確有守。非其意。未嘗軟語苟合。爲詩獨慕李白。往往頗有趣夫士之抱才藝圖顯寵者何限。或爲人傾奪。或未免疪累。其卒能完身名保主恩者鮮矣。一時功名薰灼。特蚊蝱之過耳。死後誰知之者。若石峯起草萊。操三寸管。與人主結不世之知遇。爭權者不能間。工毀者莫敢議。昭朗令終。聲施於後世。亦韙矣。銘曰。


生而寵榮。貴豈其卿。死而不朽。孰云不壽。噫嘻石峯。不朽汝者名。名汝名者吾銘。

 

월사진 > 月沙先生集卷之四十七 / 墓碣銘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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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주01]낙양(洛陽)의 지가(紙價)가 높아지겠다. : 사람들이 석봉의 글씨를 받느라 종이값이 폭등할까 걱정이라는 뜻으로, 상대방의 시를 칭찬한 것이다. 한(漢)나라 좌사(左思)가 구상한 지 십 년 만에 〈삼도부(三都賦)〉를 완성하니 당시 사람들이 이 작품을 베껴 적느라 낙양의 종이값이 비싸졌다는 고사를 차용하였다.

 

[주02]문무해(文無害) : 문서를 잘 작성하여 문서에 하자가 없다는 뜻이다. 《사기(史記)》 〈소상국세가(蕭相國世家)〉에서 한 고조(漢高祖)의 신하 소하(蕭何)에 대해 “소 상국 하(蕭相國何)는 풍패(豐沛) 사람인데 문무해로 패(沛)의 연리(掾吏)가 되었다.” 하였다.

 

[주03]수주(隋珠)나 곤옥(崑玉) : 수주는 수후(隋侯)가 뱀을 살려 준 보답으로 뱀에게서 얻었다는 명월주(明月珠)이고, 곤옥은 곤륜산에 나는 좋은 옥이다. 모두 더없이 귀한 보배를 뜻한다.